가슴을 파고드는 불안감에 의사의 진찰이 시작되기 전 권하윤은 로건을 먼저 다른 곳으로 보냈다.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관절부분의 연골이 손상되고 은밀한 부분이 찢겼다는 의사의 소견을 듣는 순간 권하윤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정오가 다 되었을 때 깨어난 권희연에 옆에서 지키고 있던 권하윤은 목소리를 한껏 낮춘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희연 언니, 정신 들어? 어디 불편한 곳 있어?”근심 어린 권하윤의 표정을 보는 순간 권희연은 가슴 속에 따뜻한 물결이 흘러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윽고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병원에 데려다줘서 고마워.”“의사 선생님이 언니더러 휴식을 취해야 한다고 했어. 스틱스에서 혹시…….”“걱정할 거 없어. 그저 집안에 도움 되고 싶었을 뿐이니까.”말을 이어 나가지 못하는 권하윤에 반해 권희연은 오히려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그녀의 말에 권하윤은 끝내 참지 못하고 하려던 말을 내뱉었다.“그래도 언니 몸을 함부로 다루면 안 되지!”“하윤아, 어머니가 혼자 우리 가문 지탱하는 거 쉬운 일 아니야. 그러니까 우리는 제멋대로 굴면 안 되지.”권희연의 부드러운 말에 권하윤은 숨이 턱 막혀왔다.이런 방면에서 그녀도 사실은 권희연과 비슷했다.그녀는 가족을 위해 권미란에게 묶인 채로 민씨 집안 예비 며느리로 살아가고 있고 권희연은 집안 교육을 받으며 가문을 위해 희생하고 있으니 말이다.권씨 가문이 존재하는 한 두 사람은 권씨 집안사람들에게 이용당하고 스스로 도구가 되는 걸 자초해야 했다.그러던 그때 갑자기 대담한 생각이 권하윤의 뇌리를 파고들었다.하지만 병실 문이 닫힌 걸 확인하고 난 뒤에야 그녀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희연 언니, 언니가 가문을 생각하는 마음은 알겠어. 그런데 가문의 미래를 집안 여자들로 맞바꿔서는 안 되지. 언니는 변하고 싶다는 생각 한 적 없어?”그녀의 말에 권희연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하윤아,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가 어머니를 어떻게 거역해? 내가
로건의 고집에 권하윤은 순간 말을 잃었다.하지만 그녀는 병실을 힐끗 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그러면 저 어디 잠깐 다녀올 테니까 여기서 희연 언니 돌봐줄래요?”그녀의 말에 로건은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민 사장님이 나더러 여기 남아서 하윤 씨 도와주라고 했는데. 그런데 희연 씨는 하윤 씨 언니니까 희연 씨 돌봐주는 건 하윤 씨 도와주는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잠깐 새에 생각을 정리한 로건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네.”털 뭉치를 손에 들고 병실로 들어가는 로건의 뒷모습을 보자 권하윤은 문틈 사이로 언뜻 보이는 권희연을 향해 두 손을 모은 채로 중얼거렸다.‘언니, 미안해!’권하윤은 이 기회에 로건을 따돌리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병실에 있는 두 사람 모두 식사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이내 몸을 돌려 병원 부근의 먹거리 골목으로 향했다.병원 주위를 한참 맴돌던 그녀는 깔끔해 보이는 음식점에 들어가 음식을 주문하고 배달 주소를 불렀다. 그러고는 로건이 따라오기라도 할까 봐 이내 자리를 떴다.권하윤이 집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2시쯤이었다. 하지만 택시에서 내린 순간 그녀는 주위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역시나 택시가 후미등을 깜빡이며 멀리 사라진 순간 등 뒤에서 손 하나가 나와 그녀의 입을 막았다.“읍-”권하윤은 몇 번 발버둥 쳤지만 이내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그 시각, 길 건너편에서 그녀가 검은 차에 실려 가는 걸 본 케빈은 이내 어디론가 전화했다.“아가씨, 권하윤 씨가 방금 끌려갔습니다.”“…….”권하윤이 깨어났을 때 손발은 의자 뒤에 묶여있었고 주위는 캄캄했다.환경 때문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던 그녀는 어둠에 적응하고 나서야 앞에 웬 사람이 서 있다는 걸 느꼈다.게다가 그 사람은 그녀를 빤히 보고 있었다.권하윤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당신 누구야?”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방안은 이내 밝아졌다.하지만 켜진 건 천장에 있는 등이 아니라 플로어 램프였다. 심지어 전등
손뼉 소리에 경호원 몇 명이 다가오자 공아름은 이내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권씨 집안 여자들은 명성을 가장 중요시한다던데 내가 영상 제대로 찍어 인터넷에 뿌려줄게. 앞으로 권씨 가문이 어떻게 머리를 들고 다니는지 두고 보자고!”그녀가 말하는 사이 카메라 세팅은 어느새 끝났다.그들의 동작을 보니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점점 닥쳐오는 위기감에 민시영이 아직 소식을 전하지 않았을까 봐 걱정하던 찰나 갑자기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시영 아가씨!”“무슨 일이야?”“민 사장님이 오셨습니다!”민도준의 이름을 듣자 걱정하고 있던 권하윤은 겨우 안심했다.하지만 그에 반해 공아름은 몇 초간 멍해 있더니 이내 날카로운 눈빛으로 권하윤을 바라봤다. 그리고 권하윤의 얼굴에 드리운 안도감을 보는 순간 바로 폭발했다.“도준 씨가 왔다고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꿈 깨!”그때 젊은 경호원 하나가 참지 못하고 그녀를 설득했다.“민 사장님은 분명 소식을 듣고 왔을 겁니다. 만약 이 모습을 보게 되면…… 아가씨한테 불리합니다…….”경호원은 얼굴을 가린 채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그러자 공아름은 사악한 눈빛으로 권하윤을 바라보더니 익숙한 이름 하나를 내뱉었다.“문태훈!”그제야 권하윤은 어둠 속에 숨어 있던 문태훈을 발견했다. 그는 그녀를 아예 모르는 척 지나치더니 공아름을 바라보며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아가씨.”“저년 치워버려.”명령을 한 공아름은 권하윤에게 더 이상의 눈길도 주지 않은 채 하이힐을 도각거리며 자리를 떠났다.왜냐하면 그녀는 이 말을 하는 순간 권하윤의 이름을 본인의 사전에서 지워버렸기 때문이다.경호원들도 자연스레 공아름을 따라 떠나는 바람에 텅 빈 공간에는 문태훈과 권하윤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낯익은 “지인”과 마주했지만 권하윤은 여전히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에 문태훈은 핍박에 못 이겨 마지못해 그녀와 손을 잡았던 것이기에 그녀를 제거할 수 있는 이 기회를
공아름이 거실에 도착했을 때 민도준은 그 안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다리를 꼰 채 유유자적한 모습을 한 그에게서 절박함이라고는 찾을 수조차 없었다.심지어 공아름조차 그가 권하윤을 찾아온 게 맞는지 알 수 없어 아예 그의 앞에 앉더니 여상스럽게 입을 열었다.“민도준 씨가 여긴 웬일이죠? 진작 온다고 말했으면 도준 씨가 즐겨 먹는 음식이라도 차리는 건데.”민도준은 그녀의 반응에 컵을 움켜쥐며 애매모호한 표정을 지었다.“이미 준비했잖아요. 제가 요즘 우리 제수씨 즐겨 먹는 줄 알고 직접 준비까지 해주고.”지나치게 직설적인 말에 공아름은 한 맺힌 듯한 표정조차 숨기지 못했다.“농담이 지나치네요. 영광스러운 일도 아닌데 다른 사람이 알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공아름은 민도준 본인보다 그의 명성에 더 신경 썼다. 그도 그럴 것이 앞으로 그와 결혼했을 때 다른 사람들의 입에 이상한 말로 오르내리고 싶지 않았으니까.하지만 민도준은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지 오히려 더욱 황당한 말을 늘어놓았다.“농담? 내가 농담하는 거로 보여요? 뭐, 어찌 됐든 나 배고플 때 인내심이 없는 편이라서 지금 당장 우리 제수씨 내 앞으로 데려왔으면 좋겠는데.”“민도준 씨!”화가 난 공아름은 펄쩍 뛰며 일어났다.“당신 정말 미쳤어!”“내가 미쳤다고?”민도준은 순간 손에 쥔 찻잔을 테이블에 내리치더니 유리조각을 잡아 공아름의 얼굴에 눌렀다.이윽고 그녀의 머리를 움켜쥔 손에 힘을 주면서 당장이라도 그녀의 머리카락을 두피째 뽑아버릴 듯 잡아당겼다.그 모습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경호원들이 다가왔지만 민도준의 서늘한 눈빛에 모두 그 자리에 얼어붙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설득하기 시작했다.“민 사장님은 우리 가주님과 친분 있는 사이 아니십니까? 아름 아가씨를…… 다치게 하면 안 됩니다.”경호원의 목소리는 땅으로 꺼지기라도 할 듯 점점 기어들어 갔다.“그래? 이건 다치게 하는 게 아니라 대화하는 거 아닌가?”이에 민도준은 공아름을 다시 보더니 그녀의 머리채를 더 세게 잡
경호원들은 문태훈이 민도준이 버젓이 보는 앞에서 그와 그렇고 그런 사이인 제수씨를 죽이려 하는 모습을 보자 얼굴이 잿빛이 되었다.“민 사장님 오셨습니다! 당장 멈추세요!”급한 나머지 뱉어낸 한마디가 문태훈의 정신을 다시 현실로 끌어 내왔다. 이윽고 그는 벼락 맞은 듯 뻣뻣하게 고개를 돌렸다.아니나 다를까 민도준은 그의 뒤에서 서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미소는 염라대왕보다도 더 섬뜩했다.“참 공교롭네. 여기서 또 보다니.”문태훈은 손에 쥐고 있던 칼을 바닥에 떨어트리더니 결국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민…… 민 사장님, 저 안 했어요. 아니에요…….”그는 피와 식은땀이 한데 섞여 주르륵 내려와 당장이라도 혼절할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하지만 두 눈은 여전히 겁에 질린 채 뚜벅뚜벅 다가오는 민도준을 바라봤다.그때 그의 앞에 다다른 민도준이 바닥에 떨어진 칼을 집어 들더니 섬뜩한 곡선으로 입꼬리를 비틀었다.“눈은 또 왜 다쳤어요? 이대로 놔두면 영영 앞을 못 보게 되면 어쩌려고.”“걱, 걱정해 주셔서 감사하지만…… 전, 전 괜찮습니다…….”“괜찮은 척하지 않아도 돼요. 제가 고쳐드릴 테니까.”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태훈의 눈앞은 핏빛으로 물들었다.“아!”심지어 눈을 파고드는 소리마저 귓가에 전해졌다.이윽고 민도준이 칼을 뽑는 순간 그는 경련을 일으키며 쓰러졌다.눈앞에서 벌어지는 잔인한 모습에 주위는 순간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일부 겁많은 경호원들은 자기가 다음 타깃이라도 될까 봐 슬금슬금 뒷걸음쳐 댔다.벽에 기대어 있던 권하윤마저 그 모습에 연기로 쥐어짜 낸 공포가 아닌 진짜 공포를 느꼈다.그녀는 손에 칼을 든 채 자기에게로 가까워져 오는 민도준을 멍하니 바라보더니 뒤로 몸을 움츠러뜨렸다.진짜 위험한 순간은 지금부터였다.‘안 돼. 겁먹으면 안 돼.”“민 사장님…….”권하윤은 마음을 가다듬고 숨을 들이쉬더니 가련한 목소리로 민도준을 불렀다.헝클어진 머리에 새하얗게 질린 얼굴은 어두운 불빛 아래에서 더욱 불쌍하게 비쳤다
주위에 있던 경호원들의 눈에 고개를 숙인 채 속삭이는 민도준의 모습은 마치 권하윤을 달래는 것처럼 비쳤다. 연이은 충격에 어안이 벙벙해진 그들은 순간 공포에 몸을 떨었다.이윽고 그들은 몸을 뒤로 움츠리며 자신의 존재감을 떨어뜨리려고 애를 썼다.하지만 일은 역시나 그들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민도준은 품에 권하윤을 안은 채 눈꺼풀을 들더니 아리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구경 다 했으면 성의 표시라도 해야 하지 않겠어?”그의 말 한마디에 경호원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더니 이를 악물고는 몸에 지니고 있던 칼로 자기 다리를 찔렀다.그제야 민도준은 만족한 듯 표정을 풀었다.“너희 아가씨를 모시고 해원으로 돌아가.”‘어…… 아마 아가씨께서 동의하지 않을 텐데.’민도준은 그들의 난처함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한마디를 더 보충했다.“아니면 내가 직접 보내줄까?”보낸다는 목적지가 해원인지 아니면 지옥인지 알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그제야 경호원들은 일제히 몸을 떨며 확고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아닙니다!”그 순간 민도준의 품을 파고들던 머리가 미세하게 움직였다.그들의 대화를 엿들으려는 권하윤의 가상한 노력에 민도준은 눈을 가늘게 접었다.‘하, 곧 죽을 거면서 아직도 남의 일에 관심을 가지다니.’이윽고 그는 권하윤을 둘러맨 채 밖으로 나갔다.“아-”두 발이 바닥에서 떨어지는 순간 권하윤은 괴로워서 짤막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의 어깨 위에서 편안한 지세로 몸을 틀었다.이윽고 두 사람은 곧장 지하실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그녀가 민도준에게 고마움을 표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문 앞에 서 있던 공아름과 마주쳤다.치료도 하지 않은 그녀의 얼굴에는 섬뜩할 정도로 무서운 상처가 나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오롯이 민도준 어깨에 매댈려 있는 권하윤에게로 향했다.만약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만 있다면 권하윤은 아마 백번은 더 죽었을 거다.불편함에 권하윤은 민도준한테서 떨어지려고 몸을 버둥댔다. 하지만 그녀를 잡고 있던 팔에
조용한 공간에 울려 퍼진 남자의 목소리는 아무 감정 없는 듯 무덤덤했다.“아름이가 오늘 민 사장님한테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던데 제 체면을 봐서 오늘 한 번만 용서해 주는 게 어떻습니까? 그 애를 돌려보내면 제가 따끔하게 혼내도록 하죠.”분명 남에게 부탁하고 있었지만 남자의 목소리에는 비굴함도 분노도 섞이지 않은 채 위엄만 담겨 있었다.익숙한 목소리에 강제로 소환된 기억 때문에 권하윤은 양옆에 드리운 손을 꽉 그러쥐었다. 하지만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고통이 전해지고 나서야 떨림을 억누를 수 있었다.그녀는 감정을 내비치지 않기 위해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그러던 그때 민도준이 입을 열었다.“그럴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가주님도 바쁘신 몸인데 이런 작은 일은 제가 대신 하면 되죠.”그는 사람을 놓아주려는 생각은 조금도 없는 듯 장난기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그 말은 공씨 가문과의 정도 고려하지 않겠다는 말씀인가요?”“그럴 리가요. 두 가문의 정을 생각해서 공씨 가문을 대신 청소해 주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고마워할 필요 없어요.”민도준의 껄렁한 말투에 전화기 너머에서 몇 초간의 침묵이 지속됐다.“동림 부지로 아름의 목숨을 바꿉시다.”“하, 콜.”민도준은 가볍게 웃었다.하지만 두 사람의 대화에 권하윤은 순간 당황을 금치 못했다.그녀는 두 사람의 대화를 이해랄 수가 없었다.그러던 그때 민도준이 손아귀의 힘을 풀었고 “쿵”하는 소리와 함께 공아름이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다.“콜록콜록-”그녀는 폐부가 찢기는 듯 기침 몇 번을 하고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권하윤에게로 다가가는 민도준을 바라봤다.그리고 겨우 자기의 목소리를 찾은 듯 이를 악문 채 소리쳤다.“나 안가! 죽어도 안 가!”그 목소리에 민도준이 동작을 멈추더니 고개를 돌려 재밌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오?”“아름아.”그때, 전화기 너머에서 잔뜩 가라앉은 경고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이젠 집에 돌아와야지.”공아름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오빠의 목소리에 곧바로 수그러들었
민도준의 말에 권하윤은 순간 머리가 지끈했다.“안 죽으면 안 돼요?”민도준이 장난치는 건지 진심인지 확실하지 않아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녀의 깜찍한 물음에 민도준은 고개를 돌리며 또다시 웃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 웃음은 왠지 모르게 서늘하고 섬뜩했다.“안돼. 아주 연기판 제대로 짰던데 그에 걸맞은 결말이 없으면 아쉽지 않겠어?”그 말을 듣는 순간 권하윤의 심장은 철렁 내려앉았다.그녀는 솔직히 민도준을 오랫동안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벌써 이렇게 나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연기라니요? 저 도준 씨한테 진심이에요. 이건 하늘과 땅, 해와 달이 증명할 수 있다고요.”“하.”조롱 섞인 짤막한 웃음이 민도준의 입가에서 새어 나왔다.“고르기 싫으면 내가 대신 선택해 줄게. 기계톱이 괜찮을 거 같은데.”‘기계톱?’그 세 글자를 듣는 순간 권하윤은 고속으로 회전하는 톱니바퀴가 눈앞에 그려지는 것만 같아 몸을 부르르 떨었다.“너무 아플 거 같은데.”목을 한껏 움츠린 권하윤의 모습에 민도준은 피식 웃었다.‘이런 상황에도 흥정한다 이거지?’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자 그는 이내 핸들을 꺾으며 입을 열었다.“그러면 내가 직접 머리부터 잘라줄게. 아픈 거 못 느끼게.”물론 농담처럼 가벼운 말투였지만 권하윤은 그의 말에 농담이 섞여 있지 않다는 걸 알아차렸다.“저 겁주지 마요. 저 겁 많단 말이에요.”“걱정하지 마. 머리가 없으면 무서운 것도 못 느껴.”이윽고 눈앞의 상황을 모면하려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애교도 부려봤지만 민도준에게는 먹히지 않는 듯했다.“…….”하지만 그녀가 머리를 쥐어짜 내며 자기의 목숨을 부지할 궁리를 하고 있을 때 차체가 갑자기 오른쪽으로 기울었다.“아!”짤막한 비명이 목구멍 사이로 새어 나오기 바쁘게 검은색 차 한 대가 가드레일을 스치며 차를 향해 돌진했다.백미러로 확인해 보니 차 네다섯 때가 나란히 뒤에서 그들 차를 둘러쌌다.‘이거 설마…… 공아름 씨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