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하윤은 점점 멀어져 가는 민도준이 떠나는 뒷모습에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그녀는 사실 민도준에게 잘 보여 그가 오늘 하루만 자기를 건드리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에 그런 행동을 한 거였는데 그게 오히려 역효과가 날 줄이야.하지만 그녀가 한참을 생각하고 있을 때 뒤에서 갑자기 누군가 그녀를 미는 바람에 몸이 휘청거렸다.눈살을 찌푸린 채 고개를 돌리자 민승현이 눈을 보릅뜬 채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거기 서서 뭐 해? 쪽팔리지도 않아?”권하윤은 치맛자락을 털며 허리를 세웠다.“약혼녀가 여기에서 아주 대자로 넘어지는 게 네 체면이 선다면 더 힘껏 밀지 그래?”“너!”목소리를 조절하지 못해 주위의 이목을 끌게 되자 그는 할 수 없이 입을 다물었고 의심의 눈초리를 받자 권하윤은 이내 그의 팔짱을 끼면서 밖으로 나갔다.안에서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든 밖에서는 잘 지내는 척 연기해야 했다.하지만 팔짱을 낀 권하윤 때문에 민승현은 오히려 불편했다. 그의 각도에서 고개를 숙여 보자 마침 권하윤의 목덜미가 보였고 희고 가는 목덜미 위에 부드러운 머리카락 몇 가닥이 붙어 있어 그녀의 여성미를 더해주었다.하지만 권하윤이 다른 놈과 붙어먹었다는 생각을 하자 순간 가슴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이에 그는 둘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낮게 경고했다.“너 요즘 또 그 자식과 붙어먹었지? 내가 말해두는데, 너 만약 또다시 그 자식과 붙어먹으면 나 너랑 바로 파혼이야!”“걱정 마, 나 절대 한민혁 씨랑 붙어먹는 일 없을 테니까.”‘네 둘째 형하고 붙어먹으면 모를까.’너무 진정성 있는 태도와 말투에 민승현은 그녀가 이미 충분히 반성했다고 생각했는지 몇 마디 더 경고한 뒤에 입을 다물었다.본채 거실.제사를 지르는 동안 생일상은 이미 준비되었으며 요리들은 저마다 먹음직스러운 빛깔을 띠고 있었다.식구들 대부분이 모두 자리에 앉고 나서야 민상철이 천천히 등장했고 그 뒤는 민도준이 건들거리며 뒤따랐다.방금 제사가 끝난 뒤 민상철은 민도준을 서재에 불러들여 대화를 했었는데
민도준은 그의 말에 활짝 웃으며 의자에 기댔다.“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럼 전 오늘은 이만 가볼게요.”그의 말에 민상철은 분노가 치밀어 버럭 소리쳤다.“저 고얀 놈! 저!”“할아버지.”분위기가 또다시 경직되자 이번에도 민시영이 분위기를 풀었다.“오늘 할아버지 생신인데 화내지 마세요.”“그래요, 할아버지.”민재혁이 활짝 웃으며 끼어들었다.“저한테 좋은 소식 있어요.”민상철도 민도준을 진짜로 쫓아낼 생각이 없었기에 이내 화를 가라앉히며 되물었다.“무슨 소식이냐?”“둘째 숙부와 숙모의 시신에 관한 소식이에요.”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민도준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민도준의 부모님은 해외에서 일어난 폭동으로 돌아가셔 지금껏 시신도 찾지 못했었다.민씨 가문에서도 여러 번 소식을 알아봤지만 지금껏 시신을 찾지 못해 그저 빈 묘비만 세워두고 있다.“제가 오래전부터 사람을 시켜 조사해 보게 했거든요. 들리는데 의하면 전에는 다른 사람들이 식구로 착각해서 묘지에 묻었다고 하더라고요. 아마 얼마 지나지 않으면 유골이 국내로 운송될 거예요.”민재혁은 민도준을 향해 온화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마치 독사처럼 차갑기 그지없었다.“운송 과정에 별일 없었으면 좋겠네요.”지금껏 아들과 며느리를 여의고 시신도 찾지 못한 민상철은 줄곧 마음의 병을 앓고 있었는데 그들이 겨우 조국의 땅에서 편히 잠들 수 있다는 소식에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었다.“도준아, 얼른 형님한테 고맙다고 해야지.”“하.”하지만 민도준의 잇새에서는 그저 조롱 섞인 나지막한 웃음만 튀어나왔다.“참 고생했네. 죽은 사람들한테 에너지를 쏟아붓느라.”그의 말에 민상철은 눈살을 찌푸렸다.“너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네 부모님이잖느냐!”“그렇죠. 제 부모님이죠. 그런데 할아버지의 아들과 며느리이기도 하잖아요.”민도준은 눈 밑에 드리운 비아냥거림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았다.“그 일이 아니면, 두 분 그렇게 빨리 돌아가시지도 않았을 거예요.”“…….”그 말을 들은
권하윤은 당연히 민승현에게 문자 내용을 들킬 수 없었기에 손을 등 뒤에 숨긴 채 끝까지 핸드폰을 지켰다.“이건 내 사생활이야. 내가 왜 너한테 보여줘야 하는데?”“씨발, 너 딴 놈이랑 붙어먹기까지 했으면서 무슨 사생활 타령이야? 당장 가져와!”민승현은 문자를 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권하윤의 팔을 잡아당겼다.“놔! 나 아프다고!”그 시각 마침 매원에 도착한 민도준은 마침 그 대화를 듣고는 강수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승현이 이놈 아주 좋은 시간 보내고 있나 보네요.”그 말에 강수연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 채신 없이 구는 권하윤을 욕했다.“하하하, 내가 객실 청소하라고 일러둘 테니 앉아있어.”강수연은 얼굴에 미소를 띠었지만 속으로는 당황하기 그지없었다.그는 민도준이 갑자기 오늘은 매원에서 자겠다고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하지만 거절할 수 없는지라 메이드를 불러 방을 치우게 하고 과일을 준비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급할 거 없어요.”민도준은 거실에 다리를 꼰 채 앉아 마치 주인인 것처럼 편하게 행동했다.그리고 손가락으로 무릎을 톡톡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그러고 보니 오랫동안 승현이랑 대화를 못 나눈 것 같은데…….”강수연은 그의 암시가 섞인 말을 듣자 억지미소를 지었다.“내가 승현이 바로 불러올게.”이내 2층으로 올라간 그녀는 활짝 열린 방문 사이로 보이는 장면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시각 민승현은 권하윤을 창가에 누른 채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다.“너희 둘 뭐 하는 거야?”민승현이 고개를 돌리는 틈에 권하윤은 재빠르게 그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아 온 뒤 옆으로 도망쳤고 순간 그녀를 놓친 민승현은 그녀를 다시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당장 이리 오지 못해? 너…….”“그만하지 못해?”강수연은 권하윤을 매섭게 노려보고는 민승현을 호통쳤다.“소리는 왜 지르고 난리야? 네 둘째 형이 아래에서 너 기다리니 내려가 봐.”민도준이 왔다는 소리에 방 안에 있던 두 사람은 모
어둠 속에서 권하윤은 조심스럽게 문손잡이를 움켜쥐고는 자꾸만 뒤쪽을 확인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게 바로 그녀의 이런 모습을 말하는 것인듯 싶다.그녀는 숨을 죽인 채 민승현의 상태를 확인했고 가벼운 코 고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조금 안심했다.그리고 숨을 깊게 들이마시더니 천천히 문손잡이를 돌렸다.어느 때보다도 조심해야 했기에 그녀는 평소처럼 대범하게 문을 열지 못하고 소리라도 날까 봐 문손잡이를 조금씩 천천히 내리눌렀다.하지만 고요한 밤이라 그런지 낮은 “찰칵”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그 소리와 함께 멈춘 코 고는 소리에 권하윤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녀는 몸이 뻣뻣하게 굳어 움직이지 못했다.하지만 깨어난 줄 알았던 민승현은 그저 몸을 뒤척이며 잠꼬대하더니 곧이어 안정된 호흡소리가 들려왔다.그리고 낮은 코골이 소리가 다시 울리자 권하윤은 그제야 안심하고 문을 열었다.복도의 빛이 문틈 사이로 방에 흘러들자 그녀는 이내 몸을 빼내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는 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가슴이 북을 치듯 쿵쾅거렸다.민도준의 방은 그들이 묵은 방의 사선 쪽에 위치해 있었다. 그 말인즉 권하윤이 중간 복도를 에둘러 가야 한다는 뜻이었다.그녀는 허리를 숙인 채 주위를 살피더니 아무 사람도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맨발로 잽싸게 민도준 방문 앞으로 걸어갔다.그리고 소리가 날까 봐 노크도 하지 못한 채 민도준에게 전화하려는 생각으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그녀는 문을 등지고 선 채 핸드폰을 귀에 대고 누구라도 나올까 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누가 나오기라도 하면 나 진짜 끝장인데. 입이 열 개라도 결백을 증명할 수 없게 된다고. 아니지, 나 원래도 결백하지는 않잖아.’권하윤이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을 그때, 누군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때마침 긴장하고 있을 때 기습을 당한 거라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소리 질렀다.“아…… 읍…….”그와 동시에 등 뒤의 남자가 그녀의 입을 막으며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소리는 왜 질러?
권하윤은 순간 입을 다문 채 공포에 질린 눈빛으로 민도준을 바라봤다.‘설마 민승현이 발견하고 찾아왔나?’하지만 그녀가 창문으로 뛰어내릴까 주저하고 있던 그때 밖에서 애교 섞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민 사장님, 혹시 주무세요?”‘이 목소리는…… 강민정이잖아? 강민정이 이 시간에 왜 왔자?’권하윤은 너무 놀란 나머지 입을 반쯤 벌이고 멍하니 있었다.그때 민도준이 입꼬리를 올리며 허리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오늘 참 시끌벅적하네. 강민정이 만약 하윤 씨가 내 방에 있는 걸 보면 어떤 반응일까?”권하윤은 그의 말에 놀라 두 손으로 그의 팔을 꽉 붙잡았다.“안 돼요. 가라고 해요.”“음흠?”민도준은 눈썹을 치켜뜨며 권하윤에게 물려 핏자국이 생긴 손가락을 흔들었다.“강민정이 하윤 씨보다 말 더 잘 들을 것 같은데.”그의 말에 권하윤은 말문이 막혔고 방금 전 벌인 일을 후회했다.‘어쩌면 민도준이 절대로 손해 보는 장사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거 그새 잊었지?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더라면 절대 물지 않았을 텐데.’하지만 그녀가 속으로 후회하고 있을 때 또다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민 사장님? 저 승현 오빠와 새언니 일로 드릴 말씀이 있는데 혹시 지금 시간 돼요?”문밖에 있는 강민정은 애교가 철철 흘러넘치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사실 속은 타들어 갔다.만약 이 기회를 놓치면 언제 도 기회가 올지 모르기에 그녀는 어렵사리 얻은 기회를 이대로 날릴 수 없었다. 하지만 민도준이 거절하기라도 할까 봐 그녀는 민승현을 핑계로 삼았다. 어찌 됐든 동생의 일이라면 관심을 가질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아니나 다를까 새언니라는 단어를 들은 순간 민도준의 눈빛은 흥미로 가득 찼다. 그는 강민정이 노크한 순간부터 고분고분해진 권하윤을 바라보며 웃음기 가득한 말투로 물었다.“하윤 씨랑 승현이 일이라는데? 어쩌지? 나 너무 궁금한데.”권하윤은 본인을 곤경에 빠트린 강민정을 향해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지만 민도준을 먼저 진정하게 하는 게 더 급했다.그녀는 이
욕실에서 강민정의 말을 엿들은 권하윤은 말문이 막혔다.하지만 밖에 있는 민도준은 약 2초간 멈칫하더니 입꼬리를 씩 올리며 장난스러운 웃음을 자아냈다.“오호? 제수씨가 바람을 피운다고?”강민정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네. 저도 우연히 발견한 건데 승현 오빠한테 말해야 할지 고민이에요.”말하는 도중에 그녀는 민도준의 곁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어찌 됐든 여자에게는 명성이 가장 중요하잖아요.”그녀의 몸에서 나는 짙은 향수 냄새에 민도준은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누가 여기 앉으라고 허락했지?”“네?”강민정은 순간 멍해졌다. ‘이미 반나절이나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돌변한다고?’그녀는 민도준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감히 묻지 못하고 서러운 듯 몸을 일으켜 세웠다.“죄송해요. 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그리고 옷자락을 움켜쥔 채 침대 옆에 물러서더니 주눅이 들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하지만 민도준은 불쌍한 척 구는 그녀의 수단에 놀아나지 않고 손을 휘휘 저으며 독한 향수 냄새를 흩어 보낸 뒤에야 입을 열었다.“할 말 있으면 빨리하지.”강민정은 그의 대도에 놀라 말까지 더듬었다.“어, 그, 그게 새언니가 바람을 피웠는데, 그러니까 승현 오빠도 아직 모르는 게 안 좋은 것 같아서…….”민도준은 그녀의 말에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긴 손가락으로 담뱃재를 툭툭 털었다.“누구랑 바람피웠는지는 알고?”강민정은 민도준이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 전혀 놀라지 않는 태도를 보이자 오히려 멈칫했다.“알고 있었어요?”‘설마 한민혁이 이미 말했나? 양아치 놈한테 그런 배짱이 있다고? 그럼 내가 말하면 오히려 민 사장님 체면 구기는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하지만 그 시각 두려움과 불안에 떨고 있는 사람은 또 있었다. 그건 바로 권하윤이었다. 그녀는 강민정이 뭐라도 말할까 봐 두려운 게 아니라 민도준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가 그 “상간남”이란 걸 인정할까 봐 두려웠다.때문에 콩닥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욕실 문 앞에 쪼그리고
몇 번의 조련 끝에 풋풋하기만 하던 권하윤은 마치 농익은 과일처럼 한 입만 깨어 물어도 달콤한 맛을 느낄 수 있었다.그런 농염함은 민도준의 손을 거쳐 직접 배양해 낸 것이기에 유난히 달콤했다.권하윤이 반쯤 넋이 나가 있을 때 민도준은 짓궂은 손길로 그녀의 감각을 다시 일깨웠다. 곧이어 그의 낮은 웃음소리가 권하윤의 귓가에 맴돌았다.“승현은 하윤 씨가 지금 내 침대에 있는 걸 아나 몰라?”갑자기 엄습해 오는 수치심에 권하윤은 고개를 돌린 채 입술을 깨물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민도준은 그녀를 쉽게 놓아주기는커녕 일부러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살거렸다.“아마 조금 뒤면 내 침대에서 내려 또다시 승현 침대로 올라가겠지?”“그, 그만 해요.”권하윤은 온몸이 벌겋게 달아올라 몸 둘 바를 몰랐다.“듣기 싫어? 듣기 싫다면서 반응은 왜 이렇게 크지? 응?”권하윤은 민도준의 짓궂은 말에 미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왠지 모르게 이 상황을 즐기는 듯 짜릿했다.그녀는 마치 민도준과 함께 미쳐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어두컴컴한 밤마저 야릇한 분위기를 띠고 있었고 저녁 바람이 매원의 꽃과 나무를 스치며 꽃향기를 방 안으로 들여보냈다.“일어나.”권하윤은 흐리멍덩한 눈을 가늘게 떴다.그녀는 민도준을 본 순간 지금 자기가 민도준의 개인 별장에 있다고 착각했는지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왜 깨워요?”민도준은 침대 옆으로 다가와 허리를 숙이며 아직도 붉은 그녀의 뺨을 문질렀다.“자고 나더니 머리가 어떻게 됐어? 이게 몇으로 보여?”민도준은 일부러 손가락으로 숫자를 그리며 물었다.그제야 방 안 배치를 똑똑히 본 권하윤은 이성이 순식간에 되돌아 펄쩍 뛰며 일어나더니 허둥지둥 옷을 입었다.“저 왜 잠들었어요? 지금 몇 시죠?”“거의 7시가 돼가.”민도준은 손목시계를 힐끗 보더니 대답했다.“잠든 건 아마 너무 기분 좋아서 정신을 잃었나 보지 뭐.”하지만 권하윤은 그의 희롱에 대꾸할 새도 없이 옷만 걸치고 밖으
권하윤은 자는 척 조용하게 누워있다가 민승현이 다시 침대에 눕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긴 한숨을 내쉬었다.이로써 그녀는 무사히 한고비를 넘겼다.하지만 긴장이 풀린 탓인지 갑자기 피곤함이 몰려왔고 그녀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잠들어 버렸다.“다섯째 작은 사모님, 얼른 일어나세요.”마지못해 눈을 뜬 권하윤은 눈앞에 나타난 메이드에 어리둥절했다.일반적으로 메이드가 말을 전하러 올 때면 문밖에서 부르곤 하는데 방까지 들어왔으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한참 동안 눈여겨보고 난 뒤에야 권하윤은 그녀가 지난번에 자기와 민도준이 저질러 놓은 사태를 수습해 준 민도준 측 사람이라는 게 떠올랐다.권하윤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물었다.“왜요?”“본채 거실로 오라고 하십니다.”“본채 거실이요?”뜬금없는 요구에 권하윤은 눈살을 찌푸렸다.“왜요? 누가 저 부르던가요?”메이드는 뒤를 힐끗 살피더니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말을 전하러 온 메이드 말로는 어르신께서 작은 사모님께 할 말이 있다며 불렀다고 합니다. 따져 물을 게 있다고. 그림에 관련된 거라고 했던 것 같아요.”‘그림…….’권하윤은 그제야 무슨 이유인지 알아차리고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알았어요, 준비 마치고 바로 갈게요.”권하윤이 아무렇지 않은 모습을 보이자 메이드는 하려던 말을 도로 삼키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분위기가 엄청 살벌하대요. 아주 심각한 일인 것 같은데 민 사장님께 알릴까요?”“그럴 필요 없어요.”권하윤은 단호하게 거절했다.“이 일은 얘기할 필요 없어요. 알려줘서 고마워요.”이 일은 그녀가 이미 예상했던 일이다. 하지만 설령 진짜로 무슨 일이 있다고 해도 그녀는 민도준에게 도움을 청할 리는 없다.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위기를 해결했다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관계를 의심해 더 큰 위기가 닥칠 수 있으니.권하윤이 이미 마음을 굳힌 걸 보자 메이드는 허리 숙여 인사하고는 조용히 방을 나갔다.그 시각 문밖으로 나온 메이드는 한참 동안 깊은 고민에 빠졌다. 권하윤이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