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 게이트에 도착한 하윤은 가족을 놓칠세라 발끝을 쳐들고 목 빠져라 안쪽을 쳐다봤다.그러던 그때, 겨우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시선 속 여인은 열대여섯 살 돼 보이는 여자애의 손을 잡고 있었고, 동행한 젊은 남자는 카키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환한 미소를 띤 채 걸어오고 있었다. 기댈 수 있는 목발조차 없이.그 순간 하윤의 눈시울은 붉어졌다.“언니!”시영이 하윤을 보자마자 양현숙의 손을 뿌리치고 반갑게 달려왔다.제 품에 달려드는 동생을 안으며 하윤은 뒤로 두 발짝 밀려났지만 여전히 붉은 눈을 하고 미소를 지었다.“너 그러다 언니 날려버리겠다?”“헤헤, 보고 싶어서 그러지.”“윤아.”그 뒤로 이승우와 양현숙이 곧장 따라왔다.방금 전 오빠가 정상적으로 걷는 걸 봤지만, 하윤은 여전히 걱정이 됐는지 승우를 잡은 채 이리저리 살폈다.승우는 그런 하윤에게 맞춰주기라도 하듯 빙글 돌면서 농담조로 말했다.“어때? 막 뛰기라도 해줄까?”하윤은 입을 삐죽거리며 눈물을 글성거리며 웅얼댔다.“응, 뛰어봐. 지금 당장.”승우는 피식 웃으며 하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오빠 체면 좀 지켜주라. 뛰는 건 돌아가서 보여줄게.”그때 그의 시선 속에 무시할 수 없는 아우라를 가진 남자가 들어왔다. 남자는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외모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분위기마저 사람을 압도했다.승우는 먼저 남자에게 걸어갔다.“해외에 있을 때 도움 많이 받았습니다. 고마워요.”도준을 꺼리고 심지어 저와 도준이 만나는 것도 반대하던 오빠가 이토록 친근하게 굴자 하윤은 어리둥절했다.그때 도준이 나른한 눈빛으로 승우를 훑어봤다. 분명 아무 감정 없는 눈빛이었지만 사람을 긴장하게 했다.승우도 작은 키는 아니지만 도준의 옆에 있으니 확연히 차이 났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이 도준을 볼 때 느끼는 압박감은 느끼진 않은 듯 부드럽지만 굳건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도준은 싱긋 웃었다.“아, 형님이시죠? 고마워할 필요 없습니다.”이윽고 하윤을
차 안.시영은 인형을 안고 하윤과 함께 뒤에 앉고 싶다고 고집을 피워대고, 양현숙은 지난번 ‘도망’ 사건을 경험한 뒤 여전히 도준을 대하기 조심스러워하는 탓에 세 사람 모두 뒷좌석에 나란히 앉게 되었다.그 덕에 조수석에 앉게 된 승우는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분위기를 풀었다.“윤이한테서 들었는데 우리 집 민 사장님이 준비해 주셨다고 하던데. 어머니가 엄청 감사해하셨어요.”그 말에 잔뜩 긴장한 채 뒤에 앉아 있던 양현숙이 억지 미소를 지었다.“맞아요. 우리 집은 가족의 추억이 배어 있어 다시 되찾을 수 있어 윤이 아비도 하늘에서 기뻐할 거예요.”이성호의 얘기에 분위기는 순간 무거워졌다.시영의 옆에서 인형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하윤은의 손은 순간 멈칫했다. 애써 슬픔을 숨기는 어머니의 표정을 보니 왠지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어머니가 안쓰러웠고,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사람이 도준이라는 걸 알게 되면 어머니가 어떻게 생각할지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분위기가 약간 얼어붙었을 때, 도준은 백미러를 통해 뒷좌석을 보며 갑자기 싱긋 웃었다.“별말씀을요, 어머님.”말이 떨어지자 분위기는 더 무겁게 가라앉았다.그리고 곧이어 폐부가 찢기는 듯한 하윤의 기침 소리가 이어졌다.“콜록, 콜록...”양현숙도 상태가 좋은 건 아니었다. 얼굴이 새빨개져 대답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듯했다.그렇게 한참이 지나자 그제야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어, 네, 어...”조수석에 앉은 승우도 굳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윤도 한참이 지나서야 당황함을 가라앉히고 백미러로 유일하게 여유로운 도준을 흘끗 봤다. 할 말이 너무나 많았지만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이어진 여정에서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차에서 내릴 때, 하윤은 짐을 나르는 틈에 도준에게 말을 걸었다.“왜 우리 엄마한테 어머님이라고 해요?”하윤을 도와 짐을 나르던 도준이 알 수 없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내 마누라 어머니인데
양현숙은 오랜만에 보는 딸과 집에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그도 그럴 게, 딸과 결혼한 상대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 민도준이기 때문이다. 공씨 가문에 당한 경험이 없으면 모를까, 이미 호되게 당한 터라 양현숙은 재벌가라면 본능적으로 두려움이 생겨났다. 더군다나 도준은 공씨 가문보다도 더 대단한 사람이니.만약 억지로 하윤을 남으라고 한다면 오히려 하윤에게 피해가 갈까 봐 겁부터 덜컥 났다.하지만 도준과 돌아갈 마음이 없던 하윤은 도준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양현숙의 팔짱을 꼈다.“엄마, 우리 오랜만에 만났는데 나 오늘 집에 묵을래요.”그러자 양현숙은 도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그럼 오늘 저녁만 여기서 자고 내일 다시 갈래?”도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검은 눈동자로 하윤을 빤히 바라봤다.전에 가족이 돌아오지 않았을 때도 집을 나가겠다고 하던 사람인데, 이제 가족까지 돌아왔으니 평생 이곳에 붙어 있으려 할 게 뻔했다.불안할 정도로 오랜 침묵이 흐르던 그때, 도준은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그래, 그럼 오늘은 여기서 지내.”양현숙의 얼굴에 이내 웃음꽃이 폈다.“그럼 민 사장님도 돌아가서 일찍 쉬어요.”하윤도 오늘은 겨우 끝났다고 속으로 안도했다. 하지만 그때, 도준이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여보, 나 바래다줘.”사전에 아무런 말도 없이 이곳에 머물겠다고 한 탓에 마침 하윤은 솔직히 도준과 단둘이 있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한참 동안 핑계거리를 생각하고 있을 때 양현숙이 하윤을 앞으로 밀었다.“얼른 가봐. 오늘 민 사장님 도움 많이 받았으니 네가 가서 바래다줘.”양현숙은 나이가 든 만큼 사상도 비교적 틀에 박혀 있어, 하윤이 이미 결혼했으니 당연히 부부 관계를 잘 맺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물론 전에 도준에 관한 무서운 소문을 많이 듣기는 했지만 오늘 만나보고 나니 조금은 달랐다. 심지어 집도 찾아주고 오늘 돌아오는데 도움도 줬으니 고맙기까지 했다.미처 마음의 준비도
한참 동안 갈등한 끝에 하윤은 끝내 조수석 문손잡이를 잡았다. 하지만 이제 막 문을 열려고 할 때, 도준이 뒷좌석으로 끌어가는 바람에 하윤은 순간 경계했다.“뭐 하려고 그래요?”그때 도준이 곧바로 뒷좌석에 앉더니 상냥하게 웃었다.“내가 앞에 앉았다가 그대로 엑셀을 밟고 자기 보쌈해 갈면 어떡하려고?”‘그런 것 같기도 하고...’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기도 잠시, 아무런 가림막도 없이 나란히 앉아 있는 지금의 상황도 안전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밤 10시가 넘은 시각, 하늘은 이미 어두컴컴했고, 고작 주택가 창문을 뚫고 나오는 따스한 조명만이 주위를 비춰주고 있었다.하지만 마침 차안을 비친 빛줄기마저 구석진 뒷좌석은 비추지 못했다.어둠 속, 남자가 점점 저를 덮쳐오는 바람에 하윤은 두 팔로 시트를 지탱한 채 점점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좁은 차 안인지라 곧바로 문에 막혀버렸다.“너... 너무 늦었어요...”“응.”그때 도준은 조금만 더 가면 입술이 닿을 거리에 멈춰선 채 제 코끝으로 하윤의 코끝을 콕 눌렀다. 서로의 숨결이 뒤섞여 긴장감이 배로 되었을 때, 도준의 낮게 깔린 음성이 귀를 간지럽혔다.“그러니까 잘 생각해 봐. 어떻게 해야 나 빨리 쫓을 수 있을지.”눈을 든 순간, 저를 집어삼킬 것만 같은 도준의 뜨거운 시선과 맞닿자 하윤의 심장은 저도 모르게 떨리기 시작했다.이대로 시간을 끌면 나중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하윤은 잘 알고 있었다.결국 마지못해 깊은숨을 한번 들이마시고는 눈을 꼭 감고 도준의 입술 위에 제 입술을 포갰다.말캉하고도 살짝 차가운 입술은 마치 푸딩처럼 도준의 입술을 간지럽혔다가 이내 떨어졌다. 하지만 하윤이 멀어지려고 할 때, 도준은 하윤의 뒷목을 꽉 잡더니 제 쪽으로 더 끌어당겼다. 도준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굳어버린 하윤을 보며 피식 웃었다.“지금 나랑 장난해?”말하는 와중에 꼭 붙은 입술이 자꾸만 스치는 바람에 간질거렸다.심지어 당장이라도 도준과 맞닿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간지러움을
어느덧 어두운 밤에 녹아든 도준은 빛이 새어 나오는 집과 집 문 앞에 서서 한참 동안 들어가지 않는 여인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그렇게 도망치고 싶어 하더니 기회가 주어졌는데 또 뭘 망설이는 거지?’그러던 그때, 문이 움직이더니 바닥을 비추고 있던 긴 불빛이 점점 좁아지더니 이내 어둠이 드리웠다...그러다가 문이 완전히 닫히려는 찰나, 다시 활짝 열리더니 집안의 불빛이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이윽고 하윤이 눈 깜짝할 새에 도준의 앞에 다가와 그에게 외투를 건네주었다.“외투 도준 씨 거잖아요. 입어요.”그 말을 끝으로 하윤은 다시 쪼르르 집안으로 달려가 문을 닫았다.도준은 하윤의 온기가 남아 있는 외투를 손에 쥔 채 눈썹을 치켜올렸다.그 시각.하윤은 쿵쾅거리는 가슴을 달래며 문에 기댄 채 마음 약해진 자신을 탓했다.‘비바람도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사람한테 내 동정 따위가 뭐 필요하다고.’그때 마침 핸드폰이 울렸다.[자기 냄새 다 뱄어. 더 보고 싶어지라고 일부러 나 엿먹이는 거야?]문자를 본 순간 하윤은 더 짜증이 치밀었다.마음을 끊어내지 못하는 저 자신이 미웠지만 혼자 밖에 서있던 도준의 모습이 자꾸만 잊히지 않았다....늦은 밤.어떻게 잘지가 문제가 되고 말았다. 하윤은 어머니와 함께 자고 싶었지만 시영은 언니와 함께 자겠다고 하는 바람에 결국은 왼쪽으로부터 양현숙, 하윤, 시영 이런 순서로 한 침대에 눕게 되었다.비록 좁았지만 마침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달랠 수 있어 하윤은 오히려 든든했다.너무 오랫동안 떨어져 지내 할말도 많아 세 모녀가 함께 누운 방에는 대화가 끊이질 않았다.그때 마침 물 마시러 밖을 나왔던 승우가 방 안 모습을 보며 싱긋 웃었다.“셋이서 지금 나 혼자 왕따 시키는 거야?”혼자 외로워하는 오빠를 보자 하윤은 으쓱한 듯 웃어 보였다.“그러니까 누가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으래? 아까 어필했으면 다 같이 잤을 텐데.”옆에 있던 시영이 끼어들었다.“맞아. 침대는 자리가 없으니까 정 우리와 같이
하윤의 울음은 한참 동안 지속됐다. 마치 그동안 받은 서러움을 한꺼번에 털어내기라도 하이.승우는 말없이 옆에서 티슈를 건네주었다가 하윤이 눈물을 닦은 티슈를 조용히 가져갔다.그러다 어느새 쓰레기통을 꽉 메운 티슈를 보자, 승우는 끝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이제 늦었는데 우리 내일 다시 울까?”흐느끼고 있던 하윤은 그 말에 순간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우는 것도 끊었다가 다시 울 수 있어? 오빠, 분위기 너무 깨는 거 아니야?”양현숙도 승우가 못마땅하다는 듯 끼어들었다.“저리가. 어쩜 애 달랠 줄도 몰라? 위로해 주면 되지 내일 울라는 건 또 뭔데?”집안 서열에서 항상 밀려나던 게 습관 됐는지 승우는 곧바로 사과했다.“네네, 다 제 잘못입니다.”하지만 승우의 말 덕분에 하윤의 울음도 쏙 들어갔다.승우는 붉게 물든 하윤의 눈시울을 보며 입을 열었다.“얼음찜질이라도 하지 않을래? 안 그러면 내일 퉁퉁 부을 걸.”내일 또 연습이 있다는 생각에 하윤은 양현숙더러 먼저 자라고 일러두고는 곧장 승우와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아쉽게도 냉장고에는 얼음이 없었지만 그나마 차가운 음료수가 있었다. 그마저도 승우는 하윤의 손이 시리기라도 할까 봐 대신 손에 쥐고 도와주었다.하윤은 소파에 벌러덩 드러누워 눈을 꼭 감고 승우의 보살핌을 마음껏 누렸다.스탠드 등의 따뜻한 조명 아래, 승우는 눈을 내리깐 채 부드러운 눈빛으로 하윤을 바라봤다.“내일 연습하지? 오빠가 데려다줄게.”하윤은 어느새 졸음이 쏟아졌는지 웅얼거리며 답했다.“아니야, 도준 씨가 데리러 온다고 했어.”도준의 얘기가 나오자 승우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민도준이 너 많이 신경 쓰는 것 같던데.”“응.”만약 도준이 하윤을 신경 쓰지 않는다면 하윤은 벌써 몇백 번도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하윤의 망설임을 눈치챈 승우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왜 풀이 죽었는데? 전에는 민도준이 너한테 얼마나 잘해주는지 자랑하지 못해 안달이더니.”확실히 그랬을 때도 있었다. 물론 하윤이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차분하게 가라앉은 승우의 목소리에 하윤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알았냐니? 오빠도 알고 있었어?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에 도준 씨 만난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거야? 아니면 도준 씨가 아빠 협박해서 죽게 만든 걸 알고 있었던 거야? 말 좀 해봐!”승우는 흥분한 하윤을 곧장 달랬다.“윤아, 우선 진정해. 나는...”이윽고 뭔가 망설이다가 끝내 다시 입을 열었다.“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민도준 만났다는 거 짐작은 했어...”방금까지 흥분해 있던 하윤은 순간 멍해졌다. 도저히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알고 있었어? 그런데 왜 나한테 말 안 했어?”승우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네가 민도준에 관한 얘기를 꺼냈을 때 이미 만나고 있었잖아. 내가 말하면 네가 충동적으로 바보 같은 짓을 저지를까 봐 말 안 했어.”하긴, 하윤이 처음 승우에게 도준에 대해 물었을 때 두 사람은 이미 단단히 얽혀 있었다.그 기억을 떠올리자 하윤은 순간 목이 메었다.“그래서 공은채와 도준 씨의 일을 나한테 말한 거야?”“응.”승우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위험한 사람이니 피하라고 귀띔이라도 해주고 싶었어. 그런데 두 사람이 결혼까지 했을 줄 누가 알았겠어.”저와 도준이 결혼할 거라고 통보하듯 말했던 장면이 떠오르자 하윤은 하려던 말을 도로 삼켰다. 이제야 그날 뭔가 말하려는 듯 계속 망설이던 오빠의 모습이 조금 이해가 됐다.도준이 은채의 일을 알게 되면 두 사람 사이가 곤란해질 거라던 오빠의 말이 곧이어 뇌리를 스쳤다.그 곤란할 거라는 상대는 하윤뿐만 아니라 도준도 해당하였던 거였다.‘그때부터 우리 결말은 이미 정해졌던 거였어.’흥분해서 잡았던 승우의 손을 놓으며 하윤은 잔뜩 상처받은 듯 중얼거렸다.“왜? 왜 진작 말해주지 않았어?”“민도준이 너랑 결혼까지 했으니 당연히 쉽게 놓아주지 않을 거고, 네가 억지로 떠나려 하면 다쳤을 거야. 윤아, 오빠는 네가 항상 무탈했으면 좋겠어.”그날과 거의 똑같은 말이었지만 지금 들으니 심경은 사
하윤의 말을 들은 승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위로했다.“다 지난 일이야. 너도 민도준과 결혼했으니 지난 일은 잊어.”하지만 하윤은 이 일을 끝까지 파고들기라도 하려는 듯 끊임없이 질문했다.“오빠는 도준 씨가 아빠 만났다는 거 어떻게 알았어? 혹시 아빠가 말했어? 아빠가 다른 말은 안 남겼어?”고요한 자정, 하윤의 거친 숨결은 유난히 또렷햇다.그때 몇 초간 침묵하던 승우가 고개를 저었다.“없어. 그냥 공은채한테 미안하고 우리한테 미안하다고만 하고 뛰어내렸어.”‘공은채한테 미안하다고...’‘하긴, 도준 씨한테서 공은채가 임신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모든 게 본인 때문이라고 생각하셨겠지. 모든 게 그날 술 마시고 실수한 것 때문이라고 생각하셨겠지. 본인은 그저 희생양이었다는 것도 모르고.’역시나 아무런 반전 없는 사실에 하윤은 어떤 기분인지 말할 수 없었다.하지만... 도준이 어떤 사람인 줄 안 이상, 다른 사람한테서 그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걸 들어도 믿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민시영도, 민상철도 모두 도준은 마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었다.하윤은 지금껏 본인이 특별한 경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윤의 존재는 도준에게 그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도준은 정말 사람들이 말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 맞았다.몸도 마음도 지친 하윤은 더 이상 얘기할 마음도 사라졌는지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나 그만 방에 돌아갈게. 오빠도 일찍 자.”말을 마친 하윤은 이내 뒤돌아 위층으로 올라갔다. 스탠드의 불빛 아래에서 승우는 하윤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묵묵히 지켜봤다.새벽이 되었을 때 승우는 안방대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이윽고 방 문을 잠그고 굳게 닫혀 있던 제 옷장 문을 열었다.오랫동안 열지 않은 탓에 문을 여는 순간 곰팡내가 얼굴을 덮쳐왔다. 승우는 쌓여 있던 옷을 헤집어 내고 느슨한 판자를 열어 안에 놓여 있던 상자 하나를 꺼냈다.상자를 열자 아가자기한 물건들이 안에 놓여 있었다. 잘 포장되어 있는 물건들은 한눈에 봐도 정성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