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8시, 극단 입구.“끝나면 전화해, 데리러 올 테니까.”도준의 말에 하윤은 고개를 끄덕였다.이윽고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린 순간, 운전석 쪽 문도 따라 열리더니 도준이 하윤을 잡아 끌며 그녀의 얼굴을 문질렀다.“이젠 나랑 얘기도 안 할 거야?”하윤은 고개를 돌렸다.“무슨 얘기요?”도준은 그런 하윤에게 바싹 다가가 그녀를 차와 제 사이에 가두더니 엄지손가락으로 하윤의 허리를 문질렀다.“자기가 하는 말은 뭐든 좋아.”하윤이 노골적인 애정행각에 어찌할 바를 몰라 할 때, 등 뒤에서 깊은 숨소리가 들렸다.확인해보니 손에 커피를 들고 있던 수아가 놀란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하윤은 곧바로 도준을 밀쳐 버리고 옷 매무새를 정리하고는 아무 일 없는 듯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인사했다.“수아야, 같이 가.”그 말에 수아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도준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이 남자 너무 잘생긴 거 아니야?’‘선배 진짜 대단하네. 어떻게 이런 사람을 꿰찼지? 게다가 아까 모습을 보니 남자 쪽이 더 적극적이잖아. 진짜 너무 대박이야!’원래 자리에 굳어버린 채 침을 흘리고 있는 수아를 보자 하윤은 마지못해 손을 내 밀어 그녀를 안으로 끌어당겼다.“더 늦으면 지각이야. 얼른 들어가.”도준이 떠나고 나서야 넋이 나가 있던 수아는 하윤 쪽으로 몸을 홱 돌렸다.“선배, 잘못했어요. 제가 눈이 삐었나 봐요. 선배랑 민 사장이 한 쌍인 줄도 모르고.”하윤은 이제 이런 것에 별로 신경 쓰지 않기에 대충 괜찮다는 말로 얼버무렸다.솔직히 더 이상 민도준에 관한 얘기는 입에 담고 심지 않았는데, 너무 흥분한 수아가 자꾸만 어떻게 만났는지 꼬치꼬치 캐묻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대화를 이어갔다.하지만 제수씨였을 때 바람을 피우면서 시작했다는 걸 말할 수 없었기에 대충 피아노 연주를 들으면서 만났다고 둘러댔다.수아는 순진하게도 그걸 곧이곧대로 믿었다.“대체 무슨 곡을 쳤길래 저렇게 잘생긴 남자를 낚았어요? 저도 칠래요.”대화를 하
테스트가 끝나자 윤영미는 제자들에게 연습 주제를 남겨주고 두 선생과 홀연히 떠나 버렸다.오후에 휴식한다는 얘기에 여자애들 얼굴에 순간 웃음꽃이 피었다. 그때 수아가 하윤의 팔을 잡으며 말을 걸어왔다.“선배, 우리 오후에 쇼핑하러 가요.”마침 집에 일찍 돌아가고 도준을 마주하고 싶지 않은 데다, 내일이면 식구가 돌아와 생필품을 구매해야 했기에 하윤은 곧바로 동의했다.활력넘치는 수아는 하윤을 끌고 쇼핑몰 세 곳을 돌더니 양손에 물건을 바리바리 사 들었다.하윤도 가족이 지내는데 불편함이 있을까 봐 그들의 취향과 습관에 따라 옷가지와 생필품을 골랐다. 두 사람이 쇼핑몰에서 나왔을 때는 마침 퇴근 시간이라 한참을 걸어도 택시를 잡지 못했다. 결국 수아는 지켜 돌멩이 위에 털썩 주저 안았다.“안 되겠어요. 저 더 이상 못 가겠어요.”시간을 확인하는 저녁 6시가 조금 넘어 마침 길이 막힐 때였다.결국 지하철을 타려고 결심한 하윤은 곧장 지도 어플을 켰다. 그리고 마침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발신자는 다름아닌 민도준이었다.한편, 도준은 굳게 닫힌 극단 문을 바라보며 전화 건너편에 대고 느긋하게 물었다.“어디를 싸돌아 다니는 거야?”그로부터 반시간 뒤, 하윤은 맞은편에 멈춰 선 도준의 차를 발견했다.지프차 문이 열리자 일반 차보다 조금 높은 차체 내부가 보였지만 도준에게는 오히려 딱 들어맞아 보였다.도준은 하윤이 들고 있던 크고 작은 쇼핑백을 손쉽게 차에 넣고 트렁크 문을 닫았다.“가자.”“잠깐만요.”하윤은 수아를 흘금거리더니 입을 열었다“여기 택시 잡기 어려워서 수아 좀 데려다 줘요.”그 말에 도준도 이내 수아를 힐끗 쳐다봤다. 사람을 압박하는 눈빛에 수아는 이내 고분고분해져서는 손사래를 쳤다.“아니에요, 형부랑 둘이 가요. 조금 있으면 차가 올 거예요.”하윤은 그 말을 무시한 채 차 문까지 열어주었다.“여기 상권이라 어두워질수록 더 붐빌 거야. 얼른 타.”수아는 결국 하윤의 고집에 못 이겨 차에 올라탔다. 그러자 하윤은 자연스럽게
하윤은 고개를 돌린 채 창밖만 주시할 뿐, 도준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지하 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문을 열고 내리는 하윤을 덥석 잡은 도준은 몇 초간 그녀를 바라보더니 싱긋 웃었다.“휴식시간은 후배한테 할애하고, 물건은 가족 것만 사고, 가까이 앉으라고 했다고 나한테 짜증내기까지 해?”이윽고 손가락으로 하윤의 이마를 콕콕 찔러댔다.“이거 나 학대하는 거야.”도준의 태도는 모처럼 상냥했지만 여전히 고고했다. 게다가 마치 하윤에게 냉대라도 받았다는 듯 억울함을 표하기까지 했다.하윤은 그게 답답하여 뭘 더 원하냐고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나더러 아빠를 죽게 만든 범인한테 다정하게 대하라고? 그러면 난 사람도 아니지.’하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하면 또 싸움을 불러오고 아무런 결말도 나지 않을 걸 알았기에 하윤은 몇 초간 침묵하다 차 트렁크를 바라봤다.“저것들 집에 가져가야 해요.”도준은 하윤이 말을 돌리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모르는 척 대답했다.“응, 내일 공항에 데리러 갈 때 챙겨.”“내일이요? 내일 비행기예요? 몇 시에 출발해서 몇 시에 도착하는데요?”이제 곧 가족을 만난다는 생각에 하윤의 목소리는 약간 흥분해 있었다.“내일 아침 출발해서 아마 저녁에 도착할 거야. 내일은 연습 끝나고 어디 도망치지 마, 데리러 갔다가 함께 공항으로 갈 테니까.”이건 오늘처럼 말도 없이 사라지지 말라는 뜻이었다.가족을 볼 생각에 하윤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저녁식사는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배달했는데, 하윤은 내일 가족을 볼 생각에 밥 먹을 생각도 사라졌는지 고작 젓가락질 몇 번만 하고는 이내 내려놓았다.“배 불러요.”말을 마친 하윤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도준은 긴 대리로 하윤의 의자를 다시 돌려놓더니 갈비 하나를 짚어 먹여주었다.“이거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잖아, 한 입만 더 먹어.”이런 상황에서 도준과 다정하게 지낼 수 없는 하윤은 도준이 건네는 음식을 생각도 없이 피해버렸다.“제가 알아서 먹을게요.”“내가 먹여
남자의 몸이 너무 단단한 탓에, 말로는 그저 기대 있는다고 했지만 아예 하윤을 속박해 버렸다.심지어 꼭 붙어있어 팽팽한 근육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고 귓불에 닿던 숨결이 점차 목덜미로 내려간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그때, 도준이 하윤의 긴 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더니 훤히 드러난 하얀 목덜미를 장난이라도 치듯 천천히 짓씹기 시작했다.“정말 말랑말랑해.”나지막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하윤은 등골이 오싹했다. 그때, 몸을 눌러오던 무게가 점점 무거워지더니 대뇌는 허리를 쓰다듬는 손 때문에 점점 흐리멍덩해졌다.그러다가 몸이 소파 위로 점점 기울 때쯤, 하윤은 정신을 차린 듯 도준을 밀쳤다.“다른 채널로 바꿔 볼래요.”하윤은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리며 욕망 가득한 도준의 눈을 일부러 피했다.그렇게 무의식적으로 채널을 몇 개 돌리고 나니 하윤의 호흡은 점차 정상으로 돌아왔다.그리고 채널이 마침 뉴스에서 멈춰 다른 채널로 돌리려고 할 때, 스크린에 익숙한 사람의 얼굴이 나타났다.흠칫 놀란 하윤은 멍해 있다가 중얼거렸다.“저거... 민혁 씨 아닌가?”“인기 배우 진가을 씨가 남자친구와 밤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길에서 토하는 모습이 포착되었습니다. 그 후 두 사람은 함께 집으로 들어가 밤을 보낸 것으로 알려 지는데...”...그 시각, 뉴스의 여주인공은 마침 집 앞에 도착했다.하지만 도어락을 보는 순간 어제의 대화가 귓가에 맴돌았다.‘그런데 우리집 비밀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요?’‘그쪽 매니저가 알려 주던데요?’‘그런 거였어?’한편, 민혁은 집 안에서 가을의 짐을 원래 자리에 옮겨주고 옷을 트렁크에 넣어주고 심지어 어제 제가 밟았던 박스를 한데 정리했다. 그덕에 집안은 순식간에 환해졌다.심지어 가을이 집에 들어설 때는 거이 말라죽는 화분에 물을 주며 무심코 인사마저 건넸다. 곧 닥칠 위험도 모른 채.“왔어요? 화분에 물 너무 안 줘서 흙이 다 갈라졌잖아요. 더 안 줬다가 선인장 되겠어요.”한참 동안 떠들던 민혁은 여전히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억울하게 누명을 쓴 민혁은 그제야 그 약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아 차렸다.사실 따지고 보면 민혁이 경계심 없다고 탓할 일이 아니다. 일반 사람이라면 매니저가 그런 물건을 갖고 다닐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테니까.심지어 제 아래에 있는 연예인에게 그런 약물을 쓴다면 누가 믿을까?또다시 오해를 받자 민혁은 당장이라도 억울하을 호소하고 싶었다.결국 소파 주위를 돌며 가을의 공격을 피하는 와중에 상황을 설명해야 했다.“난 정말 그게 뭔지 몰랐다니까요. 그쪽 매니저가 다음 날 무대에 올라야 한다면서 목 관리해줘야 한다고 꼭 먹여야 한다고 해서 좋은 마음에 먹여줬다고요. 난 정말 좋은 마음에 도우려고 한 것뿐이에요.”“웃기고 있네! 그래서 나랑 잔 것도 좋은 마음이었어요? 그게 목 관리해주는 약이면 그걸 먹이고 왜 남아 있었는데요? 내가 노래해주기라도 기다렸어요?”그 말에 민혁의 표정은 울상이 되었다.“왜 사람 말을 믿지 못해요? 그쪽이 물 마시고 싶다고 해서 그걸 반나절이나 찾다가 지체된 거예요. 집에 있는 정수기 버튼이 컴퓨터보다 더 많은데 내가 어떻게 알아요? 결국 한참 동안 연구하다가 냄비로 물 끓어 주었는데.”“하, 어디 계속 지어내요! 왜 장작 구해다가 물 끓어줬다고 하지 않아요? 쓰레기 같은 놈! 내가 오늘 그쪽 남자구실 못하게 만들어 줄게요!”가을이 주방에 칼 가지러 가자 민혁은 이내 겁을 먹고 미친 듯이 도망쳤다.“그러지 마요. 갈게요, 가면 될 거 아니에요!”“아!”칼이 그대로 문에 날아오자 민혁은 헐레벌떡 문을 닫았다. 다음 순간 안에서 쨍그랑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무슨 여자가 저렇게 세?’식은땀을 닦던 민혁은 제 명성에 흠집 낸 가을의 매니저를 떠올리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개 같은 자식, 감히 날 모함해? 딱 기다려!”민혁이 마침 하늘을 칼로 다져버릴 계획을 세우고 있을 때,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다.“누구세요?”“아, 하윤 씨였군요. 무슨 일이에요?”하윤은 약 2초간 망설였다.“오늘 뉴스를 봐서 전화했는데,
하윤은 소파 곁으로 다가갔다.“혹시 무슨 방법 있어요?”도준은 피식 웃으며 소파에 기댄 채 눈을 들어 하윤을 바라봤다.“전에는 부탁하기 전 듣기 좋은 얘기도 하더니, 이제는 명령하는 거야?”몇 초간 침묵하던 하윤은 억울한 듯 입을 열었다.“민혁 씨랑 오랜 세월 알고 지냈으면서 좀 도와줘요.”그 말에 도준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한민혁 지금 무사하잖아. 그런데 나더러 어떻게 도우라고?”하윤은 말문이 막혔다.하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민혁은 무사하다. 무사하지 못한 건 가을이었으니.잠깐 생각하던 하윤은 결국 고개를 숙였다.“지금 저더러 빌기라도 하라는 뜻이에요?”하윤이 뚱한 모습으로 꾹 참고 있는 걸 보자 도준은 낮게 웃더니 긴 팔을 휘둘러 하윤의 손을 잡아당겼다.하윤은 그 힘을 못 이겨 도준의 무릎 위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도준은 하윤의 머리카락 코에 대며 느긋하게 말했다.“마음 아파서 그런 것까지 어떻게 시켜.”하윤은 무릎 위에 놓인 손을 꽉 그러쥐며 눈을 내리 깔았다.“가을 씨가 저 도와준 적 있어서 저도 돕고 싶어요.”도준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하윤을 더 이상 난처하게 몰아붙이지 않고 손을 꼭 잡았다.“이 일의 관건은 어디까지나 한민혁과 그 연예인한테 있어. 두 사람 관계를 정하지 않고 다른 걸 해봐야 소용없어.”하윤은 눈살을 찌푸렸다.‘누가 그걸 몰라서 그러나?’하윤은 눈살을 찌푸렸다.”그런데 문제는 민혁 씨가 오해를 풀기 어렵다잖아요. 설마 이대로 계속 시간 끌어야 해요? 벌써부터 일부 브랜드 매장에서 가을 씨 사진 내리고 있는데, 더 지체하면 가을 씨의 연예인 생명은 끝이에요.”도준은 잔뜩 찌푸린 하윤의 표정을 보며 그녀의 볼을 톡 튕겼다.“어떻게 된 게 바깥사람을 남편인 나보다 더 챙겨? 나는?”너무 가까이 붙어 있은 탓에, 살짝 말아 올린 도준의 입술이 하윤의 귀에 꼭 붙어 있었고, 그 따스한 온기가 가까이에서 느껴졌다.이윽고 자잘한 키스가 하윤의 목덜미를 타고 내렸다. 그 순간 하윤은 자세가 너무
멈칫한 하윤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뜩 도준이 보지 못할 거라는 것을 인지하자 다시 입을 열었다.“잠이 안 와요. 혹시 나 때문에 깼어요? 방해되니 전 객실에서 잘게요.”말을 마친 하윤이 막 일어서려고 할 때, 도준이 갑자기 팔을 뻗어 하윤을 제 품에 끌어안더니 그녀의 어깨에 턱을 기댔다.“이미 깼는데, 늦었어.”하윤은 움직이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입을 다물었다그러자 곧장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왜? 내일 어머니 만날 생각에 너무 설레어 잠이 안 와?”조롱 섞인 한마디가 하윤은 왠지 불편했다.“지금 제가 유치하다는 거예요?”도준은 하윤의 고개를 제 쪽으로 돌려 장난치듯 말했다.“그럴 리가. 나도 내일 장모님 만날 생각에 흥분돼. 만약 나 마음에 안 들어 곤란하게 하면 어떡해?”도준과 가까이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던 게 무색하게도 이 말에 하윤은 끝내 웃음이 터졌다.하지만 그 웃음도 곧장 거두고는 나지막하게 말했다.“감히 그러지는 못할 거예요.”그 말을 듣는 순간 도준의 눈에 짜증이 드리우더니 목소리마저 가라앉았다.“꼭 그렇게 말해야겠어?”“사실을 말한 거잖아요. 우리 같은 일반인한테 도준 씨는 높은 곳에... 아!”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도준은 하윤의 겨드랑이 밑에 손을 넣어 번쩍 들어 올렸다.마치 어린아이가 된 듯한 동작에 하윤은 순간 부끄러워졌다.“당장 내려줘요.”한참 동안 눈을 뜨고 있어 이미 어둠에 익숙해진 터라, 도준의 입고리가 미세하게 말려 올라간 것이 보였다.“이제 자기가 나보다 더 높은 곳에 있지? 앞으로 내 머리 꼭대기에 있어.”하윤은 그대로 멈춰 도준을 위에서부터 쭉 훑어봤다.사실 도준이 요즘 저에게 맞춰주고 참아주고 있다는 걸 느끼지 못한 건 아니다. 솔직히 순종적이라도 해도 과언이 아니다.만약 다른 모순이었다면 진작 도준에게 넘어갔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죽은 건 아버지다. 어릴 때부터 가르침을 주고 아껴주고 사랑하며 딸 행사라면 꼭 참석하던 아버지.기억을 떠올리자 또다시 중력감이 가슴을 내
공항 게이트에 도착한 하윤은 가족을 놓칠세라 발끝을 쳐들고 목 빠져라 안쪽을 쳐다봤다.그러던 그때, 겨우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시선 속 여인은 열대여섯 살 돼 보이는 여자애의 손을 잡고 있었고, 동행한 젊은 남자는 카키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환한 미소를 띤 채 걸어오고 있었다. 기댈 수 있는 목발조차 없이.그 순간 하윤의 눈시울은 붉어졌다.“언니!”시영이 하윤을 보자마자 양현숙의 손을 뿌리치고 반갑게 달려왔다.제 품에 달려드는 동생을 안으며 하윤은 뒤로 두 발짝 밀려났지만 여전히 붉은 눈을 하고 미소를 지었다.“너 그러다 언니 날려버리겠다?”“헤헤, 보고 싶어서 그러지.”“윤아.”그 뒤로 이승우와 양현숙이 곧장 따라왔다.방금 전 오빠가 정상적으로 걷는 걸 봤지만, 하윤은 여전히 걱정이 됐는지 승우를 잡은 채 이리저리 살폈다.승우는 그런 하윤에게 맞춰주기라도 하듯 빙글 돌면서 농담조로 말했다.“어때? 막 뛰기라도 해줄까?”하윤은 입을 삐죽거리며 눈물을 글성거리며 웅얼댔다.“응, 뛰어봐. 지금 당장.”승우는 피식 웃으며 하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오빠 체면 좀 지켜주라. 뛰는 건 돌아가서 보여줄게.”그때 그의 시선 속에 무시할 수 없는 아우라를 가진 남자가 들어왔다. 남자는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외모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분위기마저 사람을 압도했다.승우는 먼저 남자에게 걸어갔다.“해외에 있을 때 도움 많이 받았습니다. 고마워요.”도준을 꺼리고 심지어 저와 도준이 만나는 것도 반대하던 오빠가 이토록 친근하게 굴자 하윤은 어리둥절했다.그때 도준이 나른한 눈빛으로 승우를 훑어봤다. 분명 아무 감정 없는 눈빛이었지만 사람을 긴장하게 했다.승우도 작은 키는 아니지만 도준의 옆에 있으니 확연히 차이 났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이 도준을 볼 때 느끼는 압박감은 느끼진 않은 듯 부드럽지만 굳건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도준은 싱긋 웃었다.“아, 형님이시죠? 고마워할 필요 없습니다.”이윽고 하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