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혁은 제 눈곱을 떼고 나서 핸드폰에 뜬 기사 사진을 확인했다. 사진 속에서 가을은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고 민혁은 가을의 머리를 파 뽑듯 잡아당기고 있었다.“아, 이때요? 그쪽이 토해서 머리에 묻을까 봐 들어주고 있었던 거예요. 마침 넘어지는 것도 방지하고.”일리가 있는 민혁의 말에 가을은 더 화가 났다.“내 말은 이 사진 왜 찍였냐고요?”민혁도 어리둥절해서 머리를 긁적였다.“그러게요? 난 그때 가을 씨 머리 잡아주느라 찍을 수 없었는데. 어? 잠깐만, 그쪽 연예인이었죠? 그럼 이거 혹시 스캔들에 속해요?”가을이 이제 막 욕지거리를 퍼부으려 할 때, 매니저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가을은 지금 한창 뜨고 있는 데다 찍어야 할 드라마와 광고도 있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토론해 봐야 했다.이에 전호를 받는 와중에 준비를 마친 가을은 화장실을 나서면서 모자와 마스크로 저를 꽁꽁 무장했다.그러고는 손가락을 들어 민혁에게 경고했다.“여기 꼼짝 말고 있어요! 그쪽이 우리 집에서 나가는 사진 찍히면 내 손에 죽을 줄 알아요.”떠나기 전, 가을은 민혁이 밖에 나가 제 이름에 먹칠하기라도 할까 봐 문을 잠그는 것도 잊지 않았다....가을은 회사에 도착하고 나서야 일이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걸 알아차렸다.파파라치는 민혁이 가을의 머리를 잡고 있는 사진만 찍은 게 아니라, 가을을 업고 그녀 집으로 가는 사진까지 찍어버렸다. 심지어 두 사람은 밤새도록 안에서 나오지 않았으니 당연히 상상을 자극했다.너무 눈에 띄는 기사 제목이었다.아무런 근거도 없이 여배우에게 스폰 받는 다는 꼬리표를 붙이고 빛난는 연에인의 이면을 깎아 내리는 게 지금의 네티즌들인데, 이토록 상상을 자극하는 사진까지 찍였으니, 파장은 더 할 나위 없었다.불과 1시간 내에 온갖 사이트에 비슷한 기사들이 수없이 떴다.가을이 몸을 팔아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는 둥, 평소 함부로 몸을 굴리고 다닌다는 둥, 스폰서
아침 8시, 극단 입구.“끝나면 전화해, 데리러 올 테니까.”도준의 말에 하윤은 고개를 끄덕였다.이윽고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린 순간, 운전석 쪽 문도 따라 열리더니 도준이 하윤을 잡아 끌며 그녀의 얼굴을 문질렀다.“이젠 나랑 얘기도 안 할 거야?”하윤은 고개를 돌렸다.“무슨 얘기요?”도준은 그런 하윤에게 바싹 다가가 그녀를 차와 제 사이에 가두더니 엄지손가락으로 하윤의 허리를 문질렀다.“자기가 하는 말은 뭐든 좋아.”하윤이 노골적인 애정행각에 어찌할 바를 몰라 할 때, 등 뒤에서 깊은 숨소리가 들렸다.확인해보니 손에 커피를 들고 있던 수아가 놀란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하윤은 곧바로 도준을 밀쳐 버리고 옷 매무새를 정리하고는 아무 일 없는 듯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인사했다.“수아야, 같이 가.”그 말에 수아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도준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이 남자 너무 잘생긴 거 아니야?’‘선배 진짜 대단하네. 어떻게 이런 사람을 꿰찼지? 게다가 아까 모습을 보니 남자 쪽이 더 적극적이잖아. 진짜 너무 대박이야!’원래 자리에 굳어버린 채 침을 흘리고 있는 수아를 보자 하윤은 마지못해 손을 내 밀어 그녀를 안으로 끌어당겼다.“더 늦으면 지각이야. 얼른 들어가.”도준이 떠나고 나서야 넋이 나가 있던 수아는 하윤 쪽으로 몸을 홱 돌렸다.“선배, 잘못했어요. 제가 눈이 삐었나 봐요. 선배랑 민 사장이 한 쌍인 줄도 모르고.”하윤은 이제 이런 것에 별로 신경 쓰지 않기에 대충 괜찮다는 말로 얼버무렸다.솔직히 더 이상 민도준에 관한 얘기는 입에 담고 심지 않았는데, 너무 흥분한 수아가 자꾸만 어떻게 만났는지 꼬치꼬치 캐묻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대화를 이어갔다.하지만 제수씨였을 때 바람을 피우면서 시작했다는 걸 말할 수 없었기에 대충 피아노 연주를 들으면서 만났다고 둘러댔다.수아는 순진하게도 그걸 곧이곧대로 믿었다.“대체 무슨 곡을 쳤길래 저렇게 잘생긴 남자를 낚았어요? 저도 칠래요.”대화를 하
테스트가 끝나자 윤영미는 제자들에게 연습 주제를 남겨주고 두 선생과 홀연히 떠나 버렸다.오후에 휴식한다는 얘기에 여자애들 얼굴에 순간 웃음꽃이 피었다. 그때 수아가 하윤의 팔을 잡으며 말을 걸어왔다.“선배, 우리 오후에 쇼핑하러 가요.”마침 집에 일찍 돌아가고 도준을 마주하고 싶지 않은 데다, 내일이면 식구가 돌아와 생필품을 구매해야 했기에 하윤은 곧바로 동의했다.활력넘치는 수아는 하윤을 끌고 쇼핑몰 세 곳을 돌더니 양손에 물건을 바리바리 사 들었다.하윤도 가족이 지내는데 불편함이 있을까 봐 그들의 취향과 습관에 따라 옷가지와 생필품을 골랐다. 두 사람이 쇼핑몰에서 나왔을 때는 마침 퇴근 시간이라 한참을 걸어도 택시를 잡지 못했다. 결국 수아는 지켜 돌멩이 위에 털썩 주저 안았다.“안 되겠어요. 저 더 이상 못 가겠어요.”시간을 확인하는 저녁 6시가 조금 넘어 마침 길이 막힐 때였다.결국 지하철을 타려고 결심한 하윤은 곧장 지도 어플을 켰다. 그리고 마침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발신자는 다름아닌 민도준이었다.한편, 도준은 굳게 닫힌 극단 문을 바라보며 전화 건너편에 대고 느긋하게 물었다.“어디를 싸돌아 다니는 거야?”그로부터 반시간 뒤, 하윤은 맞은편에 멈춰 선 도준의 차를 발견했다.지프차 문이 열리자 일반 차보다 조금 높은 차체 내부가 보였지만 도준에게는 오히려 딱 들어맞아 보였다.도준은 하윤이 들고 있던 크고 작은 쇼핑백을 손쉽게 차에 넣고 트렁크 문을 닫았다.“가자.”“잠깐만요.”하윤은 수아를 흘금거리더니 입을 열었다“여기 택시 잡기 어려워서 수아 좀 데려다 줘요.”그 말에 도준도 이내 수아를 힐끗 쳐다봤다. 사람을 압박하는 눈빛에 수아는 이내 고분고분해져서는 손사래를 쳤다.“아니에요, 형부랑 둘이 가요. 조금 있으면 차가 올 거예요.”하윤은 그 말을 무시한 채 차 문까지 열어주었다.“여기 상권이라 어두워질수록 더 붐빌 거야. 얼른 타.”수아는 결국 하윤의 고집에 못 이겨 차에 올라탔다. 그러자 하윤은 자연스럽게
하윤은 고개를 돌린 채 창밖만 주시할 뿐, 도준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지하 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문을 열고 내리는 하윤을 덥석 잡은 도준은 몇 초간 그녀를 바라보더니 싱긋 웃었다.“휴식시간은 후배한테 할애하고, 물건은 가족 것만 사고, 가까이 앉으라고 했다고 나한테 짜증내기까지 해?”이윽고 손가락으로 하윤의 이마를 콕콕 찔러댔다.“이거 나 학대하는 거야.”도준의 태도는 모처럼 상냥했지만 여전히 고고했다. 게다가 마치 하윤에게 냉대라도 받았다는 듯 억울함을 표하기까지 했다.하윤은 그게 답답하여 뭘 더 원하냐고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나더러 아빠를 죽게 만든 범인한테 다정하게 대하라고? 그러면 난 사람도 아니지.’하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하면 또 싸움을 불러오고 아무런 결말도 나지 않을 걸 알았기에 하윤은 몇 초간 침묵하다 차 트렁크를 바라봤다.“저것들 집에 가져가야 해요.”도준은 하윤이 말을 돌리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모르는 척 대답했다.“응, 내일 공항에 데리러 갈 때 챙겨.”“내일이요? 내일 비행기예요? 몇 시에 출발해서 몇 시에 도착하는데요?”이제 곧 가족을 만난다는 생각에 하윤의 목소리는 약간 흥분해 있었다.“내일 아침 출발해서 아마 저녁에 도착할 거야. 내일은 연습 끝나고 어디 도망치지 마, 데리러 갔다가 함께 공항으로 갈 테니까.”이건 오늘처럼 말도 없이 사라지지 말라는 뜻이었다.가족을 볼 생각에 하윤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저녁식사는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배달했는데, 하윤은 내일 가족을 볼 생각에 밥 먹을 생각도 사라졌는지 고작 젓가락질 몇 번만 하고는 이내 내려놓았다.“배 불러요.”말을 마친 하윤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도준은 긴 대리로 하윤의 의자를 다시 돌려놓더니 갈비 하나를 짚어 먹여주었다.“이거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잖아, 한 입만 더 먹어.”이런 상황에서 도준과 다정하게 지낼 수 없는 하윤은 도준이 건네는 음식을 생각도 없이 피해버렸다.“제가 알아서 먹을게요.”“내가 먹여
남자의 몸이 너무 단단한 탓에, 말로는 그저 기대 있는다고 했지만 아예 하윤을 속박해 버렸다.심지어 꼭 붙어있어 팽팽한 근육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고 귓불에 닿던 숨결이 점차 목덜미로 내려간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그때, 도준이 하윤의 긴 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더니 훤히 드러난 하얀 목덜미를 장난이라도 치듯 천천히 짓씹기 시작했다.“정말 말랑말랑해.”나지막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하윤은 등골이 오싹했다. 그때, 몸을 눌러오던 무게가 점점 무거워지더니 대뇌는 허리를 쓰다듬는 손 때문에 점점 흐리멍덩해졌다.그러다가 몸이 소파 위로 점점 기울 때쯤, 하윤은 정신을 차린 듯 도준을 밀쳤다.“다른 채널로 바꿔 볼래요.”하윤은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리며 욕망 가득한 도준의 눈을 일부러 피했다.그렇게 무의식적으로 채널을 몇 개 돌리고 나니 하윤의 호흡은 점차 정상으로 돌아왔다.그리고 채널이 마침 뉴스에서 멈춰 다른 채널로 돌리려고 할 때, 스크린에 익숙한 사람의 얼굴이 나타났다.흠칫 놀란 하윤은 멍해 있다가 중얼거렸다.“저거... 민혁 씨 아닌가?”“인기 배우 진가을 씨가 남자친구와 밤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길에서 토하는 모습이 포착되었습니다. 그 후 두 사람은 함께 집으로 들어가 밤을 보낸 것으로 알려 지는데...”...그 시각, 뉴스의 여주인공은 마침 집 앞에 도착했다.하지만 도어락을 보는 순간 어제의 대화가 귓가에 맴돌았다.‘그런데 우리집 비밀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요?’‘그쪽 매니저가 알려 주던데요?’‘그런 거였어?’한편, 민혁은 집 안에서 가을의 짐을 원래 자리에 옮겨주고 옷을 트렁크에 넣어주고 심지어 어제 제가 밟았던 박스를 한데 정리했다. 그덕에 집안은 순식간에 환해졌다.심지어 가을이 집에 들어설 때는 거이 말라죽는 화분에 물을 주며 무심코 인사마저 건넸다. 곧 닥칠 위험도 모른 채.“왔어요? 화분에 물 너무 안 줘서 흙이 다 갈라졌잖아요. 더 안 줬다가 선인장 되겠어요.”한참 동안 떠들던 민혁은 여전히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억울하게 누명을 쓴 민혁은 그제야 그 약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아 차렸다.사실 따지고 보면 민혁이 경계심 없다고 탓할 일이 아니다. 일반 사람이라면 매니저가 그런 물건을 갖고 다닐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테니까.심지어 제 아래에 있는 연예인에게 그런 약물을 쓴다면 누가 믿을까?또다시 오해를 받자 민혁은 당장이라도 억울하을 호소하고 싶었다.결국 소파 주위를 돌며 가을의 공격을 피하는 와중에 상황을 설명해야 했다.“난 정말 그게 뭔지 몰랐다니까요. 그쪽 매니저가 다음 날 무대에 올라야 한다면서 목 관리해줘야 한다고 꼭 먹여야 한다고 해서 좋은 마음에 먹여줬다고요. 난 정말 좋은 마음에 도우려고 한 것뿐이에요.”“웃기고 있네! 그래서 나랑 잔 것도 좋은 마음이었어요? 그게 목 관리해주는 약이면 그걸 먹이고 왜 남아 있었는데요? 내가 노래해주기라도 기다렸어요?”그 말에 민혁의 표정은 울상이 되었다.“왜 사람 말을 믿지 못해요? 그쪽이 물 마시고 싶다고 해서 그걸 반나절이나 찾다가 지체된 거예요. 집에 있는 정수기 버튼이 컴퓨터보다 더 많은데 내가 어떻게 알아요? 결국 한참 동안 연구하다가 냄비로 물 끓어 주었는데.”“하, 어디 계속 지어내요! 왜 장작 구해다가 물 끓어줬다고 하지 않아요? 쓰레기 같은 놈! 내가 오늘 그쪽 남자구실 못하게 만들어 줄게요!”가을이 주방에 칼 가지러 가자 민혁은 이내 겁을 먹고 미친 듯이 도망쳤다.“그러지 마요. 갈게요, 가면 될 거 아니에요!”“아!”칼이 그대로 문에 날아오자 민혁은 헐레벌떡 문을 닫았다. 다음 순간 안에서 쨍그랑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무슨 여자가 저렇게 세?’식은땀을 닦던 민혁은 제 명성에 흠집 낸 가을의 매니저를 떠올리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개 같은 자식, 감히 날 모함해? 딱 기다려!”민혁이 마침 하늘을 칼로 다져버릴 계획을 세우고 있을 때,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다.“누구세요?”“아, 하윤 씨였군요. 무슨 일이에요?”하윤은 약 2초간 망설였다.“오늘 뉴스를 봐서 전화했는데,
하윤은 소파 곁으로 다가갔다.“혹시 무슨 방법 있어요?”도준은 피식 웃으며 소파에 기댄 채 눈을 들어 하윤을 바라봤다.“전에는 부탁하기 전 듣기 좋은 얘기도 하더니, 이제는 명령하는 거야?”몇 초간 침묵하던 하윤은 억울한 듯 입을 열었다.“민혁 씨랑 오랜 세월 알고 지냈으면서 좀 도와줘요.”그 말에 도준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한민혁 지금 무사하잖아. 그런데 나더러 어떻게 도우라고?”하윤은 말문이 막혔다.하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민혁은 무사하다. 무사하지 못한 건 가을이었으니.잠깐 생각하던 하윤은 결국 고개를 숙였다.“지금 저더러 빌기라도 하라는 뜻이에요?”하윤이 뚱한 모습으로 꾹 참고 있는 걸 보자 도준은 낮게 웃더니 긴 팔을 휘둘러 하윤의 손을 잡아당겼다.하윤은 그 힘을 못 이겨 도준의 무릎 위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도준은 하윤의 머리카락 코에 대며 느긋하게 말했다.“마음 아파서 그런 것까지 어떻게 시켜.”하윤은 무릎 위에 놓인 손을 꽉 그러쥐며 눈을 내리 깔았다.“가을 씨가 저 도와준 적 있어서 저도 돕고 싶어요.”도준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하윤을 더 이상 난처하게 몰아붙이지 않고 손을 꼭 잡았다.“이 일의 관건은 어디까지나 한민혁과 그 연예인한테 있어. 두 사람 관계를 정하지 않고 다른 걸 해봐야 소용없어.”하윤은 눈살을 찌푸렸다.‘누가 그걸 몰라서 그러나?’하윤은 눈살을 찌푸렸다.”그런데 문제는 민혁 씨가 오해를 풀기 어렵다잖아요. 설마 이대로 계속 시간 끌어야 해요? 벌써부터 일부 브랜드 매장에서 가을 씨 사진 내리고 있는데, 더 지체하면 가을 씨의 연예인 생명은 끝이에요.”도준은 잔뜩 찌푸린 하윤의 표정을 보며 그녀의 볼을 톡 튕겼다.“어떻게 된 게 바깥사람을 남편인 나보다 더 챙겨? 나는?”너무 가까이 붙어 있은 탓에, 살짝 말아 올린 도준의 입술이 하윤의 귀에 꼭 붙어 있었고, 그 따스한 온기가 가까이에서 느껴졌다.이윽고 자잘한 키스가 하윤의 목덜미를 타고 내렸다. 그 순간 하윤은 자세가 너무
멈칫한 하윤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뜩 도준이 보지 못할 거라는 것을 인지하자 다시 입을 열었다.“잠이 안 와요. 혹시 나 때문에 깼어요? 방해되니 전 객실에서 잘게요.”말을 마친 하윤이 막 일어서려고 할 때, 도준이 갑자기 팔을 뻗어 하윤을 제 품에 끌어안더니 그녀의 어깨에 턱을 기댔다.“이미 깼는데, 늦었어.”하윤은 움직이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입을 다물었다그러자 곧장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왜? 내일 어머니 만날 생각에 너무 설레어 잠이 안 와?”조롱 섞인 한마디가 하윤은 왠지 불편했다.“지금 제가 유치하다는 거예요?”도준은 하윤의 고개를 제 쪽으로 돌려 장난치듯 말했다.“그럴 리가. 나도 내일 장모님 만날 생각에 흥분돼. 만약 나 마음에 안 들어 곤란하게 하면 어떡해?”도준과 가까이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던 게 무색하게도 이 말에 하윤은 끝내 웃음이 터졌다.하지만 그 웃음도 곧장 거두고는 나지막하게 말했다.“감히 그러지는 못할 거예요.”그 말을 듣는 순간 도준의 눈에 짜증이 드리우더니 목소리마저 가라앉았다.“꼭 그렇게 말해야겠어?”“사실을 말한 거잖아요. 우리 같은 일반인한테 도준 씨는 높은 곳에... 아!”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도준은 하윤의 겨드랑이 밑에 손을 넣어 번쩍 들어 올렸다.마치 어린아이가 된 듯한 동작에 하윤은 순간 부끄러워졌다.“당장 내려줘요.”한참 동안 눈을 뜨고 있어 이미 어둠에 익숙해진 터라, 도준의 입고리가 미세하게 말려 올라간 것이 보였다.“이제 자기가 나보다 더 높은 곳에 있지? 앞으로 내 머리 꼭대기에 있어.”하윤은 그대로 멈춰 도준을 위에서부터 쭉 훑어봤다.사실 도준이 요즘 저에게 맞춰주고 참아주고 있다는 걸 느끼지 못한 건 아니다. 솔직히 순종적이라도 해도 과언이 아니다.만약 다른 모순이었다면 진작 도준에게 넘어갔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죽은 건 아버지다. 어릴 때부터 가르침을 주고 아껴주고 사랑하며 딸 행사라면 꼭 참석하던 아버지.기억을 떠올리자 또다시 중력감이 가슴을 내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