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안은 놀라서 턱이 빠질 뻔했다. 그리고 작은 소리로 물었다.“저게 그렇게 좋아요?”“...”“다 큰 남자가 보석이 뭐가 좋다고.”손남영이 옆에서 웃으면서 얘기했다.“지안 씨, 이건 연신 형이 선물하려는 겁니다.”그 말을 들은 심지안은 바로 손을 내저었다.“안 돼요. 싫어요. 너무 비싸요!”이미 400억의 빚을 졌는데 또 200억이라니. 모든 여자들이 핑크 다이아몬드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심연아도 예외는 아니었다.특히 성연신이 심지안을 위해 경매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녀는 승부욕이 불타올라 한마디 보탰다.“220억!”남진영은 그녀에게 회사를 줬을 뿐만 아니라 용돈도 쥐여주었다.아마 이 반지를 사고 나면 얼마 남지 않겠지만 투자라고 할 수 있었다. 핑크 다이아몬드는 대체품이 없는 보석이어서 원래도 다른 보석보다 비쌌다. 고청민은 200억이 가장 큰 금액일 줄 알았고 그 이상의 가격은 나오지 않을 줄 알았다.“누구야? 처음 보는데.”“홍월 엔터테인먼트 총괄 매니저래. 낙하산이라던데, 뒷배가 어마어마하대.”“200억을 막 쓰는 걸 보면 돈이 적은 건 아닌 것 같은데. 핑크 다이아몬드는 저 여자 손에 들어갈 확률이 높겠어.”“그건 아니지. 성 대표도 마음에 들어 하잖아.”그 모습에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지켜보았다.심지안은 성연신의 손을 꾹 누르며 급하게 말했다.“사지 마요! 너무 비싸서 가성비가 안 좋아요!”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거지만, 200억이라고 하니 별로 좋지도 않았다.200억짜리 반지를 손에 끼고 다니다가 강도를 만나면 어떡하려고. 뒤에 앉은 손남영이 성연신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에게 맡기라는 제스처를 보냈다.말을 한 것은 아니어서 심지안은 두 사람 사이의 암묵적인 거래를 보지 못했다. 그저 성연신의 손을 꾹 내리누르며 그가 경매를 계속할까 봐 걱정했다.성연신은 오히려 심지안의 손을 자기 손안으로 꼭 잡고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그래요, 알겠어요.”그 모습을 본 고청민의 곧게 뻗은 눈썹이 움찔거렸다.
손남영이 미간을 찌푸렸다.“그럴 리가요. 이건 심지안 씨한테 드릴 겁니다.”“하, 심지안이요?”“네.” 손남영은 바로 몸을 돌려 핑크 다이아몬드는 심지안에게 주었다.두 사람이 연애를 하기로 결심했다고 하는데, 친한 동생으로서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었다.심지안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손남영이 왜 이렇게 비싼 선물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난감한 표정으로 옆의 남자를 바라보았다.성연신은 덤덤한 말투로 얘기했다.“선물을 주면 그냥 받아요.”손남영이 낮은 목소리로 장난을 쳤다.“축의금이라고 생각해요.”심지안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그리고 손남영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비싼 선물보다 성연신의 친구가 그녀를 인정해 준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다.옆에 있던 심연아는 무시당한 채 서 있었다. 그제야 손남영이 일부러 그녀를 갖고 논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낯빛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심지안을 너무 얕보았다.그녀에게는 성연신 뿐만이 아니라 다른 남자도 있었다.상류 사회가 더러운 줄은 알았지만 심지안 같은 사람이 그곳을 파고들어 쉬운 길로 올라가다니. 심연아는 무서운 눈빛으로 심지안을 노려보고는 문을 쾅 밀치며 밖으로 나갔다.화가 치밀어 오른 심연아는 길도 제대로 보지 않고 걷다가 직원에게서 차 열쇠를 받자마자 성여광과 부딪혔다.“누구야, 길 똑바로 안 봐?!”성여광은 고개를 숙여 자기 외투에 묻은 파운데이션을 보며 불쾌해했다.“제가 봤을 땐 그쪽이야 말로 길을 똑바로 보고 다녀야 할 것 같은데요. 이렇게 넓은 길에서 굳이 저랑 부딪혀야겠어요?”심연아는 욕을 퍼붓고 싶었지만 옆의 비서가 그녀를 말렸다.“참아요. 저분은 제경의 제일인 집안의 성여광 도련님입니다.”비서는 남진영이 제경에서 데려온 사람이다. 전에 주얼리 디자이너였는데 이번에 심연아를 가르쳐줄 겸 온 것이었다.심연아는 그가 성씨 가문 사람이라는 것을 듣고 눈이 반짝였다.성씨 가문은 고귀한 신분이라서 마치 닿을 수 없는 귀족 같은 사람들이다. 게다가 제경에서 가장 부유한
성연신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심지안을 안고 침실로 들어갔다.심지안은 잠시 멍때리다 그가 뭘 하려는 것인지 알아채자마자 몸이 굳어버렸다.“잠깐만요, 오늘은 우리 둘 다 너무 힘드니까...”성연신은 발걸음을 멈추고 장난스레 웃어 보였다. “안심해요.”눈을 동그랗게 뜨고 성연신을 쳐다보는 심지안은 머리속이 새하얘지고 온몸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그녀는 말로는 겁 없는 사람이었지만 하지만 현실에서는 겁쟁이였다.특히 이런 면에서는 보통 남자가 주도권을 가지고 있으니.심지안은 온몸에 힘이 풀려서 성연신의 행동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심지안은 그를 받아들이고 싶었지만 하필 이때 강우석과 심연아가 침대 위에서 뒹굴던 모습이 떠올라 금세 정신이 번쩍 들었다.“안돼… 연신 씨, 나 아직은 안 될 것같아요..”심지안은 미간을 찌푸리고 성연신을 밀어내며 거절했다.성연신은 그녀의 감정 변화를 알아채고는 그녀를 품에 안고 그 어느 때보다 다정하게 말했다. “왜요?”심지안은 몇 초간 생각하다가 곧이곧대로 얘기했다.“아무래도 이쪽에는 트라우마가 있어서...”그 말에 성연신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던 그의 얼굴에 금이 가는 듯했다. ‘이런 쪽에 트라우마가 있다니. 그렇단 말은 다른 남자와 경험이 있었다는 건가?'심지안은 갑자기 바뀐 그의 표정을 보고 작게 몸을 떨며 낮은 소리로 반항했다. “연신 씨도 전여친 있었으면서 왜 날 그렇게 봐요.”“난 임시연과 관계를 가진적 없어요.”심지안은 믿기지 않았다. “정말로요?”“네.”“다행이네요, 순결을 지키고 있어서.”“그쪽은 아니죠.”“제가 왜 아니에요!”“?”심지안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전남친이 바람을 피운 얘기를 해주었다.성연신은 얘기를 듣고 나서 낯빛이 더 어두워진 채로 어금니를 깨물며 물었다. “다른 남자도 봤나요?”“크흠. 제가 보려고 해서 본건 아니잖아요. 그냥 우연히 봤을 뿐이에요.”성연신이 경멸하는 듯 말했다. “남자 보는 눈이 참 나빴었군요.
심지안은 성연신의 얼굴에 작게 키스를 했다. 그리고 잠옷을 바꿔입고 얘기했다.“저는 강아지 산책시키러 갈 테니까 먼저 자요.”생리 기간에는 성연신이 강아지를 산책시켰다. 이제는 생리가 끝났으니 그녀가 산책시킬 차례였다.“오늘 밤에 비 온대요. 내일 다시 해요.”심지안은 시계를 쳐다보았다. 어느새 저녁 열한 시였다. 밖에는 먹구름이 가득 몰려와 달빛을 가렸다. 깜깜한 어둠은 마치 위험한 맹수처럼 음산했다. 그녀는 이유 모를 불안감을 느끼고 고개를 끄덕이며 얘기했다. “그래요.”두 강아지는 다 뒷마당에 있어서 볼일을 보고 싶을 때 참지 않고 볼일을 볼 수 있었다. 자기 전에 심지안은 임시연의 문자를 받았다. 내일 아침 오레오를 보러 오겠다는 내용이었다....중정원 밖. 심지안이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길 위에서 강아지 포획 전문가 두 사람이 새벽 한 시까지 심지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심지안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자 결국 의뢰인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전화기 너머의 여자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얘기했다.“오늘은 산책하러 나오지 않을 테니 돌아가서 자세요. 내일 아침에 일찍 와요. 기억해요, 꼭 내가 알려준 길로 가요.”“네, 알겠습니다.”비가 내린 후의 이튿날 아침 공기는 유달리 맑았다.어제 산책을 하지 않은 게 마음에 걸린 심지안은 일부러 반 시간 일찍 일어나 오레오와 원이를 데리고 나갈 준비를 했다.두 강아지를 데리고 별장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는 김윤아의 전화를 받았다.“팀장님, 저 오늘 아침에 일찍 회사에 도착했는데 경호팀이 아직 출근하지 않아서요. 1층 비밀번호가 뭐예요?”“7 여섯 개예요. 그런데 이렇게 일찍 가서 뭐 해요?”“오늘 회의 때 쓸 PPT를 만드는 걸 까먹었어요.”대답한 김윤아가 계속 물었다. “팀장님, 저 올라왔어요. 기획팀의 비밀번호도 모르는 데, 알려주실 수 있어요?”“1층의 비밀번호랑 같아요.”“아, 알겠습니다.”그리고 김윤아는 업무로 화제를 돌려 질문을 계속하며 심지안과 통
전체 과정은 5분도 걸리지 않았다. 딱 봐도 그들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심지안은 머리가 아파 났다. 다리를 절뚝거리며 그들을 따라갔다.“누가 보낸 거야. 내가 돈을 두 배로 줄 테니까 강아지를 내놔!”두 남자는 잠시 멈칫거리더니 고개도 돌리지 않고 발걸음을 재촉해 심지안을 멀리 떨어뜨려 놓았다. 그리고 눈 깜빡할 사이에 사라졌다.심지안은 조급해서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나올 때 휴대폰을 들고나오지 않아 집에 돌아가 성연신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힘들게 발을 움직였다.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발목이 욱신거리며 아팠다. 돌아가는 길에 그녀는 임시연과 마주쳤다.“집에 가서 지안 씨를 찾으니까 강아지 산책시키러 나갔다고 하던데.”임시연이 의문스럽다는 듯 물었다.“원이랑 오레오는요?”심지안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임시연에게 원이와 오레오가 낯선 남자들에 의해 끌려갔다고 얘기했다.“아까 이 길로 올 때 두 남자 못 봤어요? 얼른 관리사무소에 전화해서 물어봐요. 어쩌면 잡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임시연의 시선이 더욱 의미심장해졌다.“못 봤는데요. 혹시 잘못 본 거 아니에요?”“아니에요! 제가 직접 봤어요!”심지안은 임시연이 그녀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을 보고 다른 말을 하지 않고 바로 휴대폰을 빌려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걸고 또 성연신에게 전화를 걸었다. 성연신은 먼저 심지안이 있는 곳으로 달려와 사건의 자초지종을 다 들었다. 그의 표정은 차갑게 가라앉았고 눈빛은 베일 듯이 날카로웠다.중정원같은 고급 별장의 관리사무소는 함부로 낯선 사람들 들여보내지 않는다. 게다가 대낮에 다른 사람의 강아지를 훔치는 일이라니. “중정원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잖아요. 입구에도 경호원들이 24시간 대기하고 있는데.”임시연이 형용하기 어려운 시선으로 심지안을 쳐다보았다.“정말로 잘못 본 게 아니에요? 혹시... 다른 일이 발생했다거나. 강아지 두 마리를 신경 써주느라 고생한 건 알지만...”심지안이 미간을 찌푸렸다.“제가 일부러 강아지
심지안은 숨이 멎는 듯했다. 성연신까지 자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임시연은 아무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그래요, 믿지 않는다면 제가 증명해 드릴게요. 그들이 아무리 별장 구역의 CCTV를 피해 다녔다 해도 꼭 놓친 CCTV가 있을 거예요. 그것만 찾으면 증거가 생기겠죠.”심지안은 홱 하고 돌아서서 뒤도 안 돌아보고 그 두 남자의 행적을 찾으러 나섰다.작고 연약한 뒷모습의 그녀의 하얗고 가녀린 발목에는 빨갛게 부어오른 흔적이 선명하게 보였다. 걸음걸이도 절뚝거리는 게 불편해 보였는데 보는 사람이 가슴 아플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의 발걸음만은 아주 당당했다. 그 누구도 망가뜨릴 수 없다는 듯한 강인한 느낌을 주었다.성연신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말을 할지 말지 망설이다가 끝내는 입을 열지 못했다. 임시연은 갑자기 성연신의 팔을 잡더니 말했다.“우리 먼저 별장 구역 한 바퀴 돌아보지 않을래? 지안 씨 말대로라면 내가 오는 길에 그 사람들과 마주쳤어야 하는데 난 보지 못했거든. 그 사람들 아직 별장 구역을 벗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잖아.”성연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심지안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그러자 임시연은 입을 막고 기침을 몇 번 하더니 성연신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면서 팔에 묶인 의료용 거즈를 드러냈다.성연신은 결국 임시연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두 사람이 별장 구역을 한 바퀴 다 돌아보아도 낯선 남자와 두 마리 개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이때 성연신의 휴대폰이 울렸다.휴대폰을 들여다보니 회사 카톡 채팅방 메시지였다. 누군가 실수로 공지를 올려버렸다.채팅 기록을 찾아보니 김윤아가 채팅방에 강아지 사진 한 장을 올리고 내일 집이 비는데 하루만 회사에 데려오면 안 되냐고 물어보았다.인사팀 매니저가 답해줬다.「단기간이라면 괜찮을 거예요. 부문 팀장하고 물어보세요. 장기간 데려오는 건 안 됩니다.」「네? 팀장님과
심지안은 곧바로 이런 생각을 떨쳐냈다. 임시연이 원이를 싫어한다고 가정해도 오레오는 싫어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레오는 그녀에게 반려견 이상의 존재였다.결국 흔적 찾기에 실패한 심지안은 실망한 표정으로 별장에 돌아갔다. 성연신은 찾은 것이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묻기도 전에 성연신이 싸늘한 눈빛으로 물었다.“지안 씨 그렇게 안 봤는데, 참 독한 사람이네요.”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던 심지안은 어리둥절해서 가만히 있었다. 이때 뒤늦게 찾아온 정욱이 테이블 위에 사진을 내려놓으며 복잡한 표정으로 말했다.“지안 씨, 이건 지나가던 사람이 찍은 사진이에요.”사진 속에는 두 마리의 강아지가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원이와 오레오였다.심지안은 눈앞이 핑 도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뒤늦게 정신 차리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말도 안 돼요. 둘이 마취제를 맞는 모습을 제가 똑똑히 봤다고요.”성연신은 피식 웃으며 물었다.“진실을 ‘똑똑히’ 알면서도 거짓말하는 건 아니고요?”“아니에요... 지금 설마 제 말을 의심하는 거예요?”“믿을 이유가 있어야 말이죠.”성연신은 단톡방의 채팅 기록을 내밀면서 말을 이었다.“강아지를 키우기 싫으면 그냥 솔직하게 말하지, 왜 굳이 이 사달을 내는 거예요?”마취제를 맞고 나면 적어도 몇 시간은 지나야 의식을 회복할 수 있다. 원이가 실종한 지는 이제 두 시간밖에 안 됐는데, 개 도둑은 도대체 왜 원이와 오레오를 풀어줬는지 의문이었다.심지안은 조용히 김윤아가 보낸 채팅 기록을 보고 있다가 몸을 흠칫 떨었다.“저는 이런 말을 한 적 없어요...”“그럼 김윤아 씨가 지안 씨를 모함했다는 건가요?”성연신의 태도는 여전히 차갑기만 했다. 마음속을 정복한 무기력감에 심지안은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믿든 말든 알아서 해요. 저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네요.”“연신아, 그만해. 원이랑 오레오를 발견한 사람이 나타났으니까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야.”임시연이 돌연 끼어들어 말했다. 그러고는 실망
김윤아와 마주친 심지안은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윤아 씨, 회사 단톡방에서는 왜 헛소리를 했어요?”김윤아는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제가 무슨 헛소리를 했다고 그래요. 증거 있어요?”심지안은 김윤아를 빤히 쳐다보다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목적이 뭐예요? 누구한테 사주받은 거예요, 아니면 그냥 연신 씨의 관심을 받고 싶은 거예요?”김윤아는 잠깐 당황하더니 곧 표정 관리를 하며 뻔뻔하게 답했다.“저는 있는 그대로 말했을 뿐이에요. 그리고 왜 대표님을 연신 씨라고 불러요? 대표님 이름을 그렇게 부르는 건 좀 아니지 않나요?”“윤아 씨가 무슨 자격으로 저한테 이래라저래라하는 거죠? 잊었나 본데, 저는 윤아 씨 상사예요.”“이... 이건 직장 내 괴롭힘이에요!”심지안은 피식 웃었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는 말이 무엇인지 이토록 뼈저리게 느끼는 건 또 처음이었다.이때 곁에 함께 있던 동료가 나서서 중재했다.“둘 다 그만 해요. 지안 씨도 없는 얘기를 하는 건 아닐 테니까 둘이 따로 조용히 해결해요. 하지만 지안 씨가 대표님의 이름을 부르는 건 저도 좀 불편하네요. 아무리 많은 보너스를 받았다고 해도 기본적인 존중을 잊어서는 안 되죠.”김윤아는 눈을 팽글팽글 돌리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지금 설마 대표님이 제 커피를 받았다고 질투하는 거예요? 그래서 갑자기 트집 잡는 거죠?”“하하, 질투를 논하기 전에 윤아 씨 본인의 처지부터 돌아보는 건 어때요?”김윤아의 수단으로는 동네 양아치만 꼬실 수 있었다. 그래서 심지안은 성연신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신입사원 때문에 불편한 얘기를 하기 싫어서 지금껏 묵인하고 있기도 했다.김윤아는 돌연 눈빛이 변하며 물었다.“팀장님 설마 진짜 대표님이랑 뭐가 있는 거예요?”김윤아의 곁에 있던 동료는 화제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보고 심지안에게 눈치를 줬다. 회사 앞에서는 말조심하라고 말이다.성연신이 심지안에 대한 편애는 모든 직원이 다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흥분을 가라앉힌 후, 심지안은 자신이 5년 전 해외에서 살았던 작은 별장과 흡사한 곳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외부 경관이 달라 의아해하며 말했다.“5년 전과 똑같은 별장을 지었어요?”고청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다가 기침을 몇 번 하며 대답했다.“맞아요. 거의 차이가 없죠?”심지안은 방 안의 모든 물건을 둘러보며 고청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조금 부드러워졌고, 마치 그를 가족으로 생각했던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어떻게 하지원을 설득했어요?”그녀는 고청민이 하지원을 이용하여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든 것에 의아함을 감추지못했다.“한마디 했더니 바로 승낙했어요.”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하지원은 이처럼 온 마음을 다해 고청민을 따랐다.심지안은 복잡한 마음으로 물었다.“하지원 씨에게 미안하지 않아요?”고청민은 아무런 감정 없이 말했다.“보상해 줄 거예요.”‘보상? 어떻게 보상할 건데? 여자의 청춘을 어떻게 보상할 건데...’심지안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하지원에게는 그저 사랑이었으니까...“밤새 아무것도 안 먹어서 배고프죠? 지안 씨가 좋아하는 비빔면을 준비해 뒀어요. 게살 비빔면이요.”고청민은 웃으며 심지안에게 말했다.“지안 씨가 분명 좋아할 거예요.”심지안은 배가 고파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식탁에 다가가기 전, 그녀는 게살 비빔면의 향긋한 냄새를 맡았다.고청민은 게살 비빔면을 그녀 앞에 놓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먹어요. 제철 대게는 정말 맛있거든요.”심지안은 망설임 없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맛있었다. 커다란 게살이 면과 어우러져 입안 가득 풍미를 더했다.고청민의 뜨거운 시선에 심지안은 불편해하며 말했다.“청민 씨도 먹어요. 나만 보지 말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을 들어 면을 집어 먹으려 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기침이 그를 멈추게 했다.연달아 몇 번의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점차 그의 가냘프고 쇠약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기침이 점점 심해지자 그
집에 돌아온 후, 성연신은 성우주를 재우고 나서 긴급한 회사 업무를 처리했다. 일을 마치고 나니, 이미 새벽 3시가 넘어 있었다.성연신은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어 고청민의 상황을 물어볼까 했지만, 숙면을 방해할까 봐 포기했다.다음 날 아침, 성연신은 일찍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6시 30분이었다. 그는 심지안이 오늘 세움의 신제품 출시 준비로 일찍 출근할 거로 생각하고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으려 했다.이때 손이 미끄러져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주어 보니 액정이 나가 있었다.갑작스러운 실수에 그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깨진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불안감이 스며들었다.성연신은 다른 휴대폰으로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결국 부재중으로 받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성씨 가문으로 출발했다.성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 성동철은 막 깨어나서 정원에서 산책 중이었다.성연신으로부터 두 사람이 지난밤 함께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직전에 했던 말이 떠올라 이마를 찡그렸다.‘그 녀석이 설마...’성연신은 성동철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급하게 물었다.“어르신, 혹시 지안 씨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어디죠?”“해외에 있을 가능성이 크네.”성연신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무슨 말씀입니까?”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전에 했던 특별한 부탁을 성연신에게 말해주고, 동시에 고청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성연신은 주먹을 꽉 쥐고 심지안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한참의 신호음 끝에 전화가 연결되었다.“지안 씨, 어디에 있어요?”“성연신 대표님, 접니다.”고청민의 평온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고, 성연신의 신경을 자극했다.성연신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이 자식아, 지안 씨를 어디로 데려간 거야?”“우리는 해외에 있어요.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고청민은 계속해서 말했다.“지안 씨를 며칠만 빌리는 셈이에요. 너무 무리한 일은 하지 않을 테니, 흥분하지 마세요
“네. 할아버지, 그러니 제발 막지 말아 주세요.”“지금 나와 상의하는 게 아니라 통보하는 거구나!”“할아버지, 용서해 주세요.”성동철은 입을 열었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한순간에 십 년은 늙은 것처럼 보였고, 무력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한참 후에야 그는 천천히 말했다.“해외 전문가와 이미 연락을 취했으니, 너는 안심하고 치료에 전념해라. 우리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청민은 그의 고집을 읽고 눈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이 갑자기 젖어 들었다.사실, 그도 할아버지와 몇 년 더 함께하고 싶었다.집에 돌아오니, 성동철이 연락한 해외 전문가로부터 답변이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신의라 불리는 의사가 이미 고청민을 치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들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고청민은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성동철을 안심시키며 주제를 돌렸다.“할아버지, 해외로 며칠 다녀오고 싶어요. 오랫동안 여행을 못 갔어요.”“안 돼. 네 몸 상태로는 그렇게 멀리 갈 수 없어!”성동철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아직 민채린의 스승에게 도움을 청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러나 고청민은 말했다.“민채린이 해외에 있어요. 그녀가 옆에 있으면 할아버지도 안심하실 거예요.”“민채린?”성동철의 얼굴에 희미한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그렇다면 민채린의 스승에게 직접 찾아갈 수 있는 거니?”“제 병에 대해 이미 채린이의 스승님께 여쭤봤어요.”“결과는 어땠니?”“스승님께서 알려줄 수 있는 것은 모두 알려 주셨어요. 하지만 정말 치료하기 어려운 병이래요.”성동철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을 느꼈다.결국, 그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래. 가고 싶다면 가도 좋아. 다른 환경에서 지내는 것이 네 몸에도 좋을 거다.”게다가 민채린이 옆에 있으니, 문제가 생기더라도 신속히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오늘 바로 떠나려고 해요.”“이렇게 갑자기?”“그냥 즉흥적으로 생각한 거예요. 가고 싶을 때 가야죠.”고청민은 말하며 눈치를 보지 않았다
30분 후, 성동철과 고청민이 병실에서 나왔다. 성동철은 걱정스럽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의사가 병원에 며칠 더 있으라 했잖니? 왜 말을 안 들어? 적어도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이렇게 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잖아. 치료 시간을 늦출 수도 있다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은 햇살처럼 부드러워 보였다.“괜찮아요. 집에 있는 의료 장비로도 충분해요.”성동철은 한숨을 쉬며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집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집에 있으면 이 녀석을 더 볼 수 있잖아...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고...’성동철은 운전기사에게 차를 병원 앞에 대라고 지시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병원 입구의 벤치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주변을 둘러보며 의아해했다.“지안이 여기 앉아 있지 않았니? 어디 갔지?”고청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고운 속눈썹은 한껏 아래로 드리워 있었다. 눈에 감춰진 복잡한 감정이 보이지 않게 덮여 있는 것 같았다.“그리고 지원이도 보이지 않네. 네가 전화를 걸어 연락해 봐. 이제 집에 가야 한다고...”성동철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청민에게 말하며,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는 계속 부재중이었다.고청민은 하지원에게 전화를 걸지 않고 바로 말했다.“지원이 오빠가 찾으러 왔어요. 아마도 지안 씨는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요. 저희 먼저 집에 가죠.”성동철은 방금 의사가 자신에게 따로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빨리 집에 가서 외국의 의료 전문가들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그래. 우리라도 먼저 가자.”‘성연신이 지안이를 데려갔을 수도 있어. 어쨌든 지안이는 다 큰 어른이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야.’넓은 승용차 안에서, 고청민이 갑자기 성동철에게 말했다.“할아버지, 제가 죽으면 제 심장을 지원이에게 주세요.”어차피 죽으면 남겨둘 이유가 없으니,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덕을 쌓는 일일 것이다.성동철은 얼굴빛이 변하며 호통쳤다.“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심지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하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모든 사람이 자기를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바칠 수 있는 것은 아니야.”심지안은 사랑의 위대함에 감탄했지만, 그런 희생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왜냐하면 난 인간미가 있고, 지안 씨는 없으니까요. 임시연이 당신 앞에서 죽었을 때, 살아있던 한 생명이 죽었는데도 지안 씨는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무관심했잖아요.”심지안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지금까지의 무심한 태도를 거두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하지원을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맞아요. 임시연은 내 아이를 훔치고, 내 남자를 빼앗고, 내 결혼을 망쳤어요. 게다가 여러 번 나를 죽이려고 했었죠. 이번에 죽은 사람이 임시연이 아니었다면, 다음번에 죽을 사람은 나일 수도 있어요. 지금 임시연이 죽어서 폭죽이라도 터뜨리고 싶은 마음이니까, 자기 일 아니라고 그런 쉬운 소리 하지 마세요!”처음에는 임시연의 죽음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곧 심지안은 깨달았다. 임시연의 죽음은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녀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임시연은 살아서 더 많은 사람을 해치려 했기에 어쩌면 이렇게 죽는 것이 더 나은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큰 목소리에 깜짝 놀라 얼굴이 창백해졌고, 잠시 말을 잃었다.“지원 씨는 사랑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난 아니에요. 날 냉정하다고 생각해도 좋아요.”심지안은 하지원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하지원도 불쌍한 사람일 뿐이었다. 심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로 들어가려 했다. 한 발을 내딛자, 하지원이 다시 말을 걸었다.“정말로 청민 선배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거예요? 사람 하나 구한다고 생각해 줘요... 평생 고마워할게요.”심지안은 잠시 멈칫했지만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그건 도움을 청하는 게 아니라 도덕적 강요에요.”심지안은 친구로
성동철은 깜짝 놀라 지팡이도 잊은 채 급히 움직였다. 카펫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휘청거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집사는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 전화를 걸었고, 남은 하인들은 손님들을 휴식 공간으로 안내했다. 연회 내내 활기찼던 분위기가 갑자기 혼란스럽고 긴장된 분위기로 바뀌었다.심지안은 찡그린 얼굴로 성동철의 뒤를 따라 고청민의 방으로 들어갔다.커튼은 빛 한 줄기도 들어오지 못하게 꽉 닫혀 있었지만, 문을 열자 짙은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하인이 먼저 한 발 앞으로 나서서 전원 스위치를 켜자, 방 안은 갑자기 밝아졌다.우드톤 가구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옷들도 정리되어 소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심지안은 방 안을 둘러보았지만, 고청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심지안은 약간 열려 있는 화장실 문을 바라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이때, 하지원이 화장실을 가리키며 말했다.“안에 있어요.”성동철은 떨리는 손으로 화장실 문을 열었다.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바닥에는 붉은 핏자국이 가득했다.고청민은 욕조 안에 누워 있었다. 옷은 물에 젖어 축축하게 몸에 붙어 있었고, 두 손은 욕조 가장자리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머리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입가에는 피가 묻어 있어 원래 창백한 피부가 더욱 하얗게 보였다.고청민은 말라비틀어진 채 생기가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성동철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손가락을 고청민의 코 밑에 대어 보았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하인들에게 소리쳤다.“구급차가 일찍 도착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 빨리 차에 태워서 병원으로 데리고 가!”하인들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고청민을 욕조에서 꺼냈다.심지안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겁에 질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녀는 혼이 나간 하지원을 바라보았다.“청민 씨... 어쩌다 이렇게 된 거죠? 왜 이렇게 피를 많이 흘린 건가요?”이 상황이 마치 자살을 암시하는 것 같았지만, 하지원은 그 말을 입 밖에
심지안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말 좀 해봐요. 정말 시연 씨가 죽길 바란 거예요? 시연 씨가 죽으면 속 시원할 것 같았냐고요!”변석환은 심지안에게 소리쳤다. 울부짖는 변석환의 두 눈은 심하게 충혈되어 무섭게 보였다. 그리고 그의 큰 목소리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변요석과 성연신이 먼저 달려왔다. 성연신은 심지안을 보호하며 변석환을 몇 걸음 뒤로 밀어냈다. 성연신의 행동은 냉담하면서도 약간의 분노가 섞여 있었다.“지안 씨 앞에서 임시연 그 여자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마. 다시 한번 실수하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하하하! 살인범을 감싸고 도는 건가요?”변석환이 큰 소리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맞아요. 시연 씨의 죽음에는 당신과 심지안 씨도 책임이 있어요.”“퍽!”변요석은 변석환의 얼굴을 한 대 때렸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정신 차려. 임시연은 원래 죽어 마땅한 여자야! 더 이상 나를 창피하게 만들지 마!”변석환은 변요석을 바라보며, 맞은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중얼거렸다.“원래 죽어야 했고... 맞아... 나를 속이고 이용했어... 죽어 마땅한 여자야...”하지만 변석환은 스스로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 없었다.임시연이 죄를 지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변석환은 여전히 너무나도 힘들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녀를 미워하면서도 그녀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변요석은 주변에 지켜보는 눈이 많다는 것을 의식하며 분노를 억누르고 변석환에게 경고했다.“지금 당장 성씨 가문을 떠나. 네가 정신 차리고 지안 씨에게 사과할 준비가 되면... 그때 돌아와.”변석환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비틀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사람들 사이로 문득 익숙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다.변석환은 그 그림자를 쫓아갔지만,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변석환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고, 그제야 그것이 자신의 착각임을 깨달았다.살아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다. 임시
자책하는 심지안을 보는 성연신은 가슴이 아픈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당연히 아니죠. 임시연의 죽음은 지안 씨와 아무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혼자 그런 생각 하지 마요.”심지안도, 성연신도, 그 누구도 임시연이 거기서 뛰어내릴 거라고는 생각 못 했을 것이다.임시연이 심지안 앞에서 그리고 성원 그룹에서 죽은 건 심지안과 성연신에게 트라우마를 남겨주기 위해서였다.만약 제가 잘못되어 죽는다 해도 살아있는 사람들도 마음이 편하진 않을 테니까 그걸 노리고 뛰어내렸던 것 같다.성연신도 놀라긴 했지만 직접 본 게 아니니 그리 큰 충격은 받지 않았는데 문제는 심지안이었다.물론 임시연도 죽을 줄은 모르고 뛰어내렸겠지. 그냥 크게 다쳐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게 감옥에 있는 것보단 나으니까 뛰어내린 걸 텐데 이렇게 죽어버려서 심지안만 힘들어하고 있었다.심지안은 공허한 눈으로 성연신을 보며 웃어보려 했지만 표정이 잔뜩 굳어있어서 웃는 게 우는 것보다 더 이상했다.“당신 말이 맞아요. 임시연은 천벌 받아서 죽은 건데 내가 기뻐하는 게 맞죠.”“그래요, 안 뛰어내렸어도 경찰한테 잡혀서 자유롭진 못했을 거예요.”성연신은 심지안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내가 지안 씨더러 임시연 잡아놓으라고 한 거잖아요. 귀신이 되어도 날 찾아올 거니까 지안 씨는 아무 걱정 하지 마요.”그때 오지석이 사실은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오려 했지만 임시연이 미리 눈치를 채고 송준에게 도움을 청할까 봐 성연신이 말렸었는데 임시연이 이렇게 극단적인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심지안을 절대 혼자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알겠어요.”긴장이 풀렸는지 심지안이 눈을 살짝 감으며 말했다.“나 아까 제대로 못 쉬어서 좀 잘래요.”“그래요, 내가 옆에 있을게요.”“네, 할아버지랑 우주한테는 나 병원에 있단 말 하지 마요.”“네.”가족들이 괜히 걱정할까 봐 신신당부를 하고서야 심지안은 침대에 누웠다.제 앞에 앉아있는 듬직한 성연신을 보니 안심이 되는지 그렇게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한편 성연신은
그렇게 회의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누구는 임시연을 구하겠다고 1층으로 달려 내려가고 누구는 창가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아직 살아있어요!"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심지안은 사람들의 인영이 환영처럼 눈 앞을 스쳐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머리도 어지럽고 귀에 까지 이명이 들려 온 세상이 흐릿하게 보였다.임시연이 뛰어내리는 결말을 예상해본적은 없었는데, 3층이 아주 높진 않지만 그렇다고 낮은 층수도 아니었다.조금 정신을 차린 심지안은 사람들의 질책이 담긴 시선을 느꼈다. 그들은 저들끼리 수군대며 심지안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사모님도 너무 하시지, 어떻게 사람을 뛰어내릴 때까지 몰아붙여? 저러면 밤에 악몽 안 꾸나?""그리고 왜 자꾸 연다빈 씨한테 임시연이라고 하는 거야? 너무 간 거 아니야?""다빈 씨가 죽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럼 사모님이 살인자 되는 거야?""다빈 씨가 귀신 돼서 사모님한테 복수하겠다고 찾아올 것 같아요."그 말을 듣고 있던 심지안은 이마에 힘을 주며 소리질렀다."내가 몰아붙인 거 아니고 본인이 뛰어내린 거야. 나랑 상관 없다고."심지안의 호통에 수군거림은 사라졌지만 그녀를 보는 시선은 여전히 매정했다.다들 "연다빈"에게 일이 생기면 심지안 책임으로 돌릴 준비가 되어있는 듯 싶었다.심지안은 애써 심호흡을 하며 현기증을 이겨내려 했다. 그리고 구급차를 부르려고 뒤를 돌 때 마침 이곳으로 뛰어오는 성연신과 오지석을 발견했다.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는 성연신이 빠르게 다가와 심지안의 어깨를 잡으며 주드럽게 다독였다."괜찮아, 내가 왔잖아. 내가 알아서 할게."속눈썹이 떨릴 정도로 긴장하고 있던 심지안은 마침 다가오는 성연신을 보고 무슨 말이 라도 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다리에 힘이 풀리며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시간이 조금 흘러 심지안이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흰 벽과 소독약 냄새, 그리고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성원 그룹 직원 자살 사건은 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