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혜영은 은채를 바라보며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은채는 지금 막 잠들었어.” “은비가 어젯밤 잠을 못 자서 몸이 좋지 않다니까, 주혁이가 은비를 데리고 가는 게 좋겠네. 은채는 다음에 다시 와서 보면 되니까 어서 가 봐.” 심혜영은 은채를 경계하듯 바라보며, 그녀가 협조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혁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은채를 바라봤다. “어디 아파?” 은채는 주혁의 말에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깊은 눈동자에는 걱정보다는 어디엔가 조소가 어리어 있었다.은채가 대답하기도 전에, 심혜영이 먼저 나서며 말했다.“은비가 어지럽다고 했으니, 먼저 가서 쉬는 게 좋을 것 같아.” 주혁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은채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은비가 몸이 안 좋다니까, 먼저 데리고 가야겠네요.” 주혁이 은채를 껴안는 모습을 본 심혜영의 얼굴에는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기쁨과 불안이 뒤섞인 표정으로,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주혁이 은채를 데리고 나가는 모습을 지켜봤다.두 사람이 병원 복도에서 사라지자, 심혜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병실로 돌아갔다. 병실 문을 열자마자, 은채와 똑같은 얼굴을 한 은비가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류승천은 조용히 은비의 뒤에 서 있었다. 심혜영의 심장은 철렁 내려앉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은비야... 다 들었어?” 은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병실 안은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은비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간신히 들려왔다. “잘 됐네.” 그녀의 목소리는 힘겨워 보였고, 붉게 충혈된 눈에서는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심혜영은 다급히 은비 앞에 무릎을 꿇고 변명하듯 말했다. “은비야, 화내지 마. 엄마가 이러는 데는 이유가 있어.” “이렇게 해야만 네 자리를 지킬 수 있었어.” 그러나 은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휠체어의 팔걸이를 꽉 잡으며 온몸이 떨리고 있었다.자신의 쌍둥이 동생이 자신의 이름으로 사랑하는 남자
은채는 순간적으로 몸이 굳었지만, 곧 차분하게 마음을 다잡았다. “내가 살이 찌든 말든 너랑 무슨 상관이야?” “살찐 게 싫으면 빨리 나랑...” 은채는 말을 하다 말고, 은비가 깨어난 일이 떠오르자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이제 은비가 깨어났으니, 자신이 먼저 이혼을 요구할 자격도 사라진 셈이었다. 주혁의 눈빛이 갑자기 어두워지며, 허리를 감싸던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은채는 배를 세게 짓누르는 그의 손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은채는 그를 밀쳐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한 마디 내뱉었다. “미쳤어?” 주혁은 입꼬리를 비웃듯 살짝 올리며 말했다. “미친 사람은 너 아니야?” “네 동생이 이제 막 깨어났는데, 이혼을 하겠다고? 내가 네 집안의 자금줄을 끊어버리면 어쩔 건데? 네 아버지 회사가 망해도 괜찮은 거야?” 주혁의 목소리는 냉정했고, 그 안엔 차가운 조소가 섞여 있었다. “류씨 가문이 지금까지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건 내 덕분이었지. B시에서 너희 집안을 무너뜨리는 건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일이야.” “그러니까 내 손아귀에서 벗어날 생각은 하지 마.” 주혁의 말은 마치 얼음장 같은 차가운 물이 은채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쏟아지는 듯했다. 은채는 깊은숨을 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주혁과 끝까지 싸우면 결국 자신만 무너질 것이라는 걸. 은채는 마음속의 불안을 억누르며, 감정을 최대한 다스렸다. 은비가 깨어난 건 차라리 은채에게 다행이었다. 언젠가 신분이 바뀌기만 한다면, 벗어날 기회가 찾아올 것이다. 주혁은 은채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자, 차갑게 그녀를 힐끗 바라보고는 말을 마쳤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은채는 주혁의 차 옆으로 가 조용히 문을 열고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그 순간, 주혁의 전화가 울렸고, 그는 등을 돌리고 걸음을 옮겼다. 주혁이 서둘러 자리를 떠나자, 은채는 한숨을 내쉬며 차에서 내렸다. 그때, 붉은색 페라리가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은채는 서연의 비꼬는 말투에 눈빛이 어두워졌다. 곧 은비와 서연의 관계가 좋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은채는 서연을 가만히 바라보며 차분하게 물었다. “내가 이 자리를 오래 지킬 수 없다는 걸 어떻게 확신하는 거지?” “난 오래는 못 앉아도, 적어도 한 번은 앉아 봤잖아. 근데 넌 이 자리에 오르는 것조차 힘들잖아, 안 그래?” 서연은 은채의 도발에 얼굴이 일그러지며, 마치 꼬리를 밟힌 고양이처럼 분노에 휩싸였다. “류은비!” “3년 만에 보는데, 여전히 얄밉네. 그 사고 때 네 동생이 아니라 네가 다쳤어야 했는데.” 은채의 얼굴이 굳어졌다.3년 전의 사고는 류씨 가문이 비밀로 묻어두었던 사건이었다.은비 대신 은채가 하씨 가문에 시집갈 수 있도록 조작된 일이었다. 서연이 그 사고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에 은채는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네가 어떻게 내 동생을 알고 있지?” 은채는 류씨 가문에서도 존재감이 낮았고, 대부분의 사람은 은채를 은비로 알고 있었다.은채가 자기를 진지하게 바라보자, 서연은 실수를 깨닫고 얼버무리듯 답했다. “가끔 주혁 오빠한테 들었거든.” 은채는 말없이 서연을 지켜보았다. 서연은 비웃으며 도발적으로 말했다. “류은채, 주혁 오빠가 데려온 여자가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아?” 서연의 도발에도 은채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은비와 달리 여유롭게 서연의 시선을 마주했다. “난 그 사람 일에 관심 없어. 하주혁이 외국에서 누구를 데려왔든, 하씨 가문의 며느리가 되진 못할 거야.” 서연은 은채의 태도에 표정이 어두워졌고, 조소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람은...” 서연이 말을 이어가려는 순간, 은채는 차갑게 말을 끊었다. “그 사람이 누구든 상관없어. 난 전혀 관심 없어.” 은채는 단호하게 말한 뒤 무심히 서연을 지나 걸어갔다. 그러나 몇 걸음 가지도 않아, 뒤에서 누군가 그녀의 팔을 세게 붙잡았다. 강한 힘에 손목이 부러질 듯했다.은채는 얼굴을 찡그리며 뒤를
주혁은 말을 마치자마자 은채의 팔을 단단히 잡아채 병실로 끌고 들어갔다. 그는 망설임 없이 은채의 소매를 걷어 올리며 차갑게 의사에게 지시했다. “채혈해.” 은채는 눈을 크게 뜨며 이를 악물고 저항했다. “하주혁, 이거 놔.” 그들의 격렬한 움직임에 잠시 멍하니 바라보던 서연은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이내 표정이 냉혹하게 변했다. 그녀는 은채의 팔을 더 강하게 제압하며 억누르려 했다. 의사는 서둘러 채혈 도구를 준비해 은채에게 다가왔다. 은채는 팔에 찌릿한 통증이 스며들자 숨을 삼켰다. 서늘한 감촉이 피와 함께 유리관을 타고 흘러내리며 혈액팩이 서서히 채워졌다. 서연은 은채의 피가 채워지는 걸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은채의 팔을 더욱 강하게 눌러 고통을 가중시켰다. “가만히 있으면 돼. 주혁 오빠도 널 다치게 하진 않을 거야.” 서연은 뻔뻔스럽게 말하며 덧붙였다. “네가 언니한테 헌혈해주겠다고 약속했으니, 주혁 오빠가 널 받아준 거야. 이제 와서 후회하는 건 아니겠지.” 서연의 말에 은채는 고개를 숙여 생각에 잠겼다. 이내 모든 것이 명확해졌고, 머릿속에서 흩어졌던 퍼즐 조각들이 하나로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고요하게 주혁을 응시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놔.” 그러나 주혁은 여전히 은채의 팔을 강하게 잡고 있었고, 그 힘에 은채는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서연은 한술 더 떠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며 상처를 입힐 듯 더욱 힘을 주었다. 은채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차분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자신의 분노가 더 큰 갈등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평정을 잃지 않으려 했다. “하주혁, 협조할 테니까 이거 놔.” 주혁은 그녀를 잠시 응시하다가, 혈액팩이 가득 찬 것을 확인하자 천천히 손을 놓았다. 그의 눈빛은 미안함 없이 오직 냉정함만이 서려 있었다.“처음부터 얌전히 있었으면 나도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을 거야.” 그의 말투는 마치 무심하게 일상 대화를 나누는
은채가 펜트하우스 문을 열고 들어서려는 순간 갑작스러운 어지러움이 밀려와 비틀거렸다. 집안일을 하고 있던 이성연은 은채의 상태를 보고 급히 달려와 그녀를 부축했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이성연은 은채가 주혁과 결혼할 때부터 곁을 지켜온 사람이었으며, 심혜영의 지시에 따라 은채를 감시하기 위해 류씨 가문에서 파견된 인물이었다. 은채는 이성연의 손길을 뿌리치며 담담한 어조로 답했다. “괜찮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표정에도 별다른 감정의 변화가 없었다. 이성연은 은채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약간 난처한 듯 웃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안색이 좋지 않으세요. 혹시 그날이 다가와서 그러신 건가요.” 은채는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이성연이 3년 동안 자신의 생리 주기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내심 놀랐기 때문이다. “그런 것 같아요. 요즘 속도 안 좋아요.” “먼저 위층에 가서 좀 쉬고 있을게요. 저녁에 불러주세요.” 은채는 그렇게 말한 후 곧장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 순간 그녀의 마음속엔 차가운 결심이 들기 시작했다. 이성연을 곁에 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점점 더 확고해지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임신 사실이 들통날 게 분명했다. 은채는 침실에 들어서며 화장대를 살폈다. 누군가 다녀간 흔적이 어지럽게 남아 있었다. 이성연이 사소한 물건에 욕심을 내며 손버릇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은채는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으나, 이제 그녀를 내보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은채는 잠시 숨을 고른 후 방을 나와 계단 위에서 아래층을 향해 단호히 외쳤다. “정 집사님 어디 계시죠? 절 만나러 오시라고 전해주세요.” 뒤뜰에서 일하던 정이훈은 곧 호출을 받고 거실로 들어왔다. 은채는 굳은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있었고, 거실에는 이미 여러 명의 아주머니들이 모여 있었다. “사모님, 무슨 일이십니까.” 정이훈은 은채의 평소와 다른 엄격한 모습에 놀란 듯했다. 은채는 그
30분 후, 보안팀이 모든 아주머니들의 방을 철저히 수색하고 거실로 돌아와 보고했다. “사모님의 물건은 어디에서도 찾지 못했습니다.” 은채는 살짝 눈썹을 치켜올리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본 이성연이 다급하게 나서며 말했다. “아가씨, 혹시 물건이 어디에 떨어져 있는 건 아닐까요? 제가 가서 찾아볼게요. 괜히 사람을 의심해서는 안 되잖아요...” 이성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에게 꾸중을 들었던 한 아주머니가 서둘러 끼어들었다. “근데 이 아주머니의 방은 아직 안 뒤져봤잖아요.” 이성연의 얼굴이 순간 굳어지더니 화난 듯 그 아주머니를 노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무슨 뜻이지? 난 우리 아가씨와 함께 온 사람이에요. 내가 아가씨 물건을 훔쳤을 리가 없잖아요.” 상대 아주머니도 지지 않고 맞섰다. “그건 어떻게 알겠어요? 모두의 방을 수색했으니, 이젠 이 아주머니의 방도 확인해야죠.” 이성연은 늘 은채와 함께 들어왔다는 이유로 자부심을 가지고 다른 아주머니들을 무시해 왔기 때문에, 많은 불만을 사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은 은채가 바라던 바였다. 은채는 고요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아주머니, 방 문을 열어 보안팀더러 수색하라고 하세요.” 이성연은 잠시 주저하다가 은채를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아가씨, 저를 못 믿으세요?” 은채는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제가 왜 아주머니를 못 믿겠어요? 하지만 지금 아주머니의 방을 안 뒤지면 다른 사람들이 불만을 가질 겁니다. 전 이 집의 여주인으로서 공정함을 보여야 하니까요.” 이성연은 이를 악물고 은채의 냉정한 표정을 바라보다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좋아요. 대신 아가씨께서 직접 수색해 주세요.” 이성연은 은채가 자신의 비밀을 지켜줄 거라 기대하며 마지막 자존심을 내세운 것이었다. 그러나 은채는 그녀를 냉랭하게 쳐다보며 대답했다. “제가 수색하면 모두 제가 아주머니를 감싸고 있다고 생각할 거예요. 그냥 보안팀더러 수색하게 하세요.” 곁
“류은채, 대체 뭘 하려는 거야.” 아주머니가 방에서 나가자마자, 심혜영은 은채를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보며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은채에 대한 혐오감이 짙게 서려 있었다. “이성연을 쫓아내서 대체 무슨 득을 보겠다는 거지?” 은채는 심혜영의 날카로운 태도에 익숙해진 듯, 담담하게 미소를 지으며 이불을 걷고 일어나 조용히 답했다. “엄마, 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있으신 줄 알았는데, 고작 손버릇 나쁜 사람 문제 때문에 이러시는 건가요?” “이 아주머니는 제가 쫓아낸 게 아니라, 하주혁이 정한 규칙을 어겼기 때문이에요.” 이 펜트하우스의 규칙은 모두 하주혁이 정한 것이었고, 이성연도 그 사실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이성연은 심혜영에게 펜트하우스의 소식을 전하며 규칙들을 계속 알려주곤 했던 사람이다. 심혜영은 은채의 차분한 태도에 속으로 이를 갈았다. “막을 수도 있었잖아.” 은채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강렬한 눈빛으로 심혜영을 응시하며 말했다. “엄마, 모르셨나요? 하주혁이 외국에서 여자를 데려왔어요. 그래서 요즘 모두 제가 실수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죠. 제 옆에 틈을 노리는 사람이 있으면 정말 위험했을지도 몰라요. 그런 사람이 제 옆에, 아니 언니의 곁에 있어도 괜찮으신가요?” 심혜영의 얼굴이 굳어지고,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녀는 하주혁이 외국에서 여자를 데려왔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은채의 진지한 표정을 보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래도, 이성연은 너와 은비의 모든 걸 알고 있어. 너무 매정하게 굴면 곤란하지 않겠니?” 은채는 여전히 냉정한 표정으로 응답했다. “엄마라면 이성연의 입을 막을 방법쯤은 가지고 있겠죠.” 은채는 이미 모든 결과를 예상하고 있었다. 그녀는 담담하게 상황을 받아들이며 준비가 되어 있는 듯 보였다. 심혜영은 은채의 단호하고 평온한 눈빛을 보며 잠시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은채가 더 이상 어렸을 적 농촌에서 데려온 그 순진했던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이 실감됐
하주혁은 무표정으로 침실 문가에 서서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심혜영을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좀 됐어요.” 주혁의 말에 심혜영은 더욱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그 모습을 본 은채는 재빨리 다가가 그녀 곁에 서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이제 돌아가요. 시간 나면 내가 은채 보러 갈게요.” 은채는 침착하게 말했지만, 그 속엔 결연함이 서려 있었다. 이 말을 들은 심혜영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주혁 옆을 지나 계단을 내려갔다. 그녀는 주혁이 자신을 부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깊게 숨을 내쉬었다. 아마도 주혁은 그녀들의 대화를 듣지 못했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안도시켰다. 조금 가벼운 표정으로 심혜영은 서둘러 펜트하우스를 나섰다. 은채는 그녀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며 천천히 주혁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한동안 집에 안 올 줄 알았어.” 주혁은 은채를 짙은 눈빛으로 바라보며, 마치 그녀를 꿰뚫어 보려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은채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담담하게 맞서며 미소를 지었다. “왜 그래?” 그녀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물었다. 주혁이 자신과 심혜영의 대화를 얼마나 들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의 눈빛에서 의심의 기운을 감지했다. 주혁은 원래 신중하고 예민한 성격이기에 은채는 최대한 침착하게 행동하려 했다. 잠시 그녀를 주시하던 주혁은 고개를 돌리고 방 안으로 들어와 외투를 벗었다. “방금 너희 엄마가 무슨 일로 널 찾아왔던 거야?” 그가 무심한 척 물으며 외투를 건네자, 은채는 그것을 받아들고 말없이 옷걸이에 걸었다. “별 거 아냐. 가족끼리 자잘한 일이지.” 은채는 태연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돌려 주혁의 눈을 피했다. 그의 시선이 자신을 깊이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에, 최대한 평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리고 이성연 아주머니 일 때문에 많이 놀라셨나 봐. 그래서 오셔서 물으셨던 거야.” 주혁은 그녀의 말을 듣고 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