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채는 서연의 비꼬는 말투에 눈빛이 어두워졌다. 곧 은비와 서연의 관계가 좋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은채는 서연을 가만히 바라보며 차분하게 물었다. “내가 이 자리를 오래 지킬 수 없다는 걸 어떻게 확신하는 거지?” “난 오래는 못 앉아도, 적어도 한 번은 앉아 봤잖아. 근데 넌 이 자리에 오르는 것조차 힘들잖아, 안 그래?” 서연은 은채의 도발에 얼굴이 일그러지며, 마치 꼬리를 밟힌 고양이처럼 분노에 휩싸였다. “류은비!” “3년 만에 보는데, 여전히 얄밉네. 그 사고 때 네 동생이 아니라 네가 다쳤어야 했는데.” 은채의 얼굴이 굳어졌다.3년 전의 사고는 류씨 가문이 비밀로 묻어두었던 사건이었다.은비 대신 은채가 하씨 가문에 시집갈 수 있도록 조작된 일이었다. 서연이 그 사고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에 은채는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네가 어떻게 내 동생을 알고 있지?” 은채는 류씨 가문에서도 존재감이 낮았고, 대부분의 사람은 은채를 은비로 알고 있었다.은채가 자기를 진지하게 바라보자, 서연은 실수를 깨닫고 얼버무리듯 답했다. “가끔 주혁 오빠한테 들었거든.” 은채는 말없이 서연을 지켜보았다. 서연은 비웃으며 도발적으로 말했다. “류은채, 주혁 오빠가 데려온 여자가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아?” 서연의 도발에도 은채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은비와 달리 여유롭게 서연의 시선을 마주했다. “난 그 사람 일에 관심 없어. 하주혁이 외국에서 누구를 데려왔든, 하씨 가문의 며느리가 되진 못할 거야.” 서연은 은채의 태도에 표정이 어두워졌고, 조소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람은...” 서연이 말을 이어가려는 순간, 은채는 차갑게 말을 끊었다. “그 사람이 누구든 상관없어. 난 전혀 관심 없어.” 은채는 단호하게 말한 뒤 무심히 서연을 지나 걸어갔다. 그러나 몇 걸음 가지도 않아, 뒤에서 누군가 그녀의 팔을 세게 붙잡았다. 강한 힘에 손목이 부러질 듯했다.은채는 얼굴을 찡그리며 뒤를
주혁은 말을 마치자마자 은채의 팔을 단단히 잡아채 병실로 끌고 들어갔다. 그는 망설임 없이 은채의 소매를 걷어 올리며 차갑게 의사에게 지시했다. “채혈해.” 은채는 눈을 크게 뜨며 이를 악물고 저항했다. “하주혁, 이거 놔.” 그들의 격렬한 움직임에 잠시 멍하니 바라보던 서연은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이내 표정이 냉혹하게 변했다. 그녀는 은채의 팔을 더 강하게 제압하며 억누르려 했다. 의사는 서둘러 채혈 도구를 준비해 은채에게 다가왔다. 은채는 팔에 찌릿한 통증이 스며들자 숨을 삼켰다. 서늘한 감촉이 피와 함께 유리관을 타고 흘러내리며 혈액팩이 서서히 채워졌다. 서연은 은채의 피가 채워지는 걸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은채의 팔을 더욱 강하게 눌러 고통을 가중시켰다. “가만히 있으면 돼. 주혁 오빠도 널 다치게 하진 않을 거야.” 서연은 뻔뻔스럽게 말하며 덧붙였다. “네가 언니한테 헌혈해주겠다고 약속했으니, 주혁 오빠가 널 받아준 거야. 이제 와서 후회하는 건 아니겠지.” 서연의 말에 은채는 고개를 숙여 생각에 잠겼다. 이내 모든 것이 명확해졌고, 머릿속에서 흩어졌던 퍼즐 조각들이 하나로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고요하게 주혁을 응시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놔.” 그러나 주혁은 여전히 은채의 팔을 강하게 잡고 있었고, 그 힘에 은채는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서연은 한술 더 떠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며 상처를 입힐 듯 더욱 힘을 주었다. 은채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차분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자신의 분노가 더 큰 갈등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평정을 잃지 않으려 했다. “하주혁, 협조할 테니까 이거 놔.” 주혁은 그녀를 잠시 응시하다가, 혈액팩이 가득 찬 것을 확인하자 천천히 손을 놓았다. 그의 눈빛은 미안함 없이 오직 냉정함만이 서려 있었다.“처음부터 얌전히 있었으면 나도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을 거야.” 그의 말투는 마치 무심하게 일상 대화를 나누는
은채가 펜트하우스 문을 열고 들어서려는 순간 갑작스러운 어지러움이 밀려와 비틀거렸다. 집안일을 하고 있던 이성연은 은채의 상태를 보고 급히 달려와 그녀를 부축했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이성연은 은채가 주혁과 결혼할 때부터 곁을 지켜온 사람이었으며, 심혜영의 지시에 따라 은채를 감시하기 위해 류씨 가문에서 파견된 인물이었다. 은채는 이성연의 손길을 뿌리치며 담담한 어조로 답했다. “괜찮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표정에도 별다른 감정의 변화가 없었다. 이성연은 은채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약간 난처한 듯 웃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안색이 좋지 않으세요. 혹시 그날이 다가와서 그러신 건가요.” 은채는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이성연이 3년 동안 자신의 생리 주기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내심 놀랐기 때문이다. “그런 것 같아요. 요즘 속도 안 좋아요.” “먼저 위층에 가서 좀 쉬고 있을게요. 저녁에 불러주세요.” 은채는 그렇게 말한 후 곧장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 순간 그녀의 마음속엔 차가운 결심이 들기 시작했다. 이성연을 곁에 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점점 더 확고해지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임신 사실이 들통날 게 분명했다. 은채는 침실에 들어서며 화장대를 살폈다. 누군가 다녀간 흔적이 어지럽게 남아 있었다. 이성연이 사소한 물건에 욕심을 내며 손버릇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은채는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으나, 이제 그녀를 내보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은채는 잠시 숨을 고른 후 방을 나와 계단 위에서 아래층을 향해 단호히 외쳤다. “정 집사님 어디 계시죠? 절 만나러 오시라고 전해주세요.” 뒤뜰에서 일하던 정이훈은 곧 호출을 받고 거실로 들어왔다. 은채는 굳은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있었고, 거실에는 이미 여러 명의 아주머니들이 모여 있었다. “사모님, 무슨 일이십니까.” 정이훈은 은채의 평소와 다른 엄격한 모습에 놀란 듯했다. 은채는 그
30분 후, 보안팀이 모든 아주머니들의 방을 철저히 수색하고 거실로 돌아와 보고했다. “사모님의 물건은 어디에서도 찾지 못했습니다.” 은채는 살짝 눈썹을 치켜올리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본 이성연이 다급하게 나서며 말했다. “아가씨, 혹시 물건이 어디에 떨어져 있는 건 아닐까요? 제가 가서 찾아볼게요. 괜히 사람을 의심해서는 안 되잖아요...” 이성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에게 꾸중을 들었던 한 아주머니가 서둘러 끼어들었다. “근데 이 아주머니의 방은 아직 안 뒤져봤잖아요.” 이성연의 얼굴이 순간 굳어지더니 화난 듯 그 아주머니를 노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무슨 뜻이지? 난 우리 아가씨와 함께 온 사람이에요. 내가 아가씨 물건을 훔쳤을 리가 없잖아요.” 상대 아주머니도 지지 않고 맞섰다. “그건 어떻게 알겠어요? 모두의 방을 수색했으니, 이젠 이 아주머니의 방도 확인해야죠.” 이성연은 늘 은채와 함께 들어왔다는 이유로 자부심을 가지고 다른 아주머니들을 무시해 왔기 때문에, 많은 불만을 사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은 은채가 바라던 바였다. 은채는 고요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아주머니, 방 문을 열어 보안팀더러 수색하라고 하세요.” 이성연은 잠시 주저하다가 은채를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아가씨, 저를 못 믿으세요?” 은채는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제가 왜 아주머니를 못 믿겠어요? 하지만 지금 아주머니의 방을 안 뒤지면 다른 사람들이 불만을 가질 겁니다. 전 이 집의 여주인으로서 공정함을 보여야 하니까요.” 이성연은 이를 악물고 은채의 냉정한 표정을 바라보다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좋아요. 대신 아가씨께서 직접 수색해 주세요.” 이성연은 은채가 자신의 비밀을 지켜줄 거라 기대하며 마지막 자존심을 내세운 것이었다. 그러나 은채는 그녀를 냉랭하게 쳐다보며 대답했다. “제가 수색하면 모두 제가 아주머니를 감싸고 있다고 생각할 거예요. 그냥 보안팀더러 수색하게 하세요.” 곁
“류은채, 대체 뭘 하려는 거야.” 아주머니가 방에서 나가자마자, 심혜영은 은채를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보며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은채에 대한 혐오감이 짙게 서려 있었다. “이성연을 쫓아내서 대체 무슨 득을 보겠다는 거지?” 은채는 심혜영의 날카로운 태도에 익숙해진 듯, 담담하게 미소를 지으며 이불을 걷고 일어나 조용히 답했다. “엄마, 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있으신 줄 알았는데, 고작 손버릇 나쁜 사람 문제 때문에 이러시는 건가요?” “이 아주머니는 제가 쫓아낸 게 아니라, 하주혁이 정한 규칙을 어겼기 때문이에요.” 이 펜트하우스의 규칙은 모두 하주혁이 정한 것이었고, 이성연도 그 사실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이성연은 심혜영에게 펜트하우스의 소식을 전하며 규칙들을 계속 알려주곤 했던 사람이다. 심혜영은 은채의 차분한 태도에 속으로 이를 갈았다. “막을 수도 있었잖아.” 은채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강렬한 눈빛으로 심혜영을 응시하며 말했다. “엄마, 모르셨나요? 하주혁이 외국에서 여자를 데려왔어요. 그래서 요즘 모두 제가 실수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죠. 제 옆에 틈을 노리는 사람이 있으면 정말 위험했을지도 몰라요. 그런 사람이 제 옆에, 아니 언니의 곁에 있어도 괜찮으신가요?” 심혜영의 얼굴이 굳어지고,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녀는 하주혁이 외국에서 여자를 데려왔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은채의 진지한 표정을 보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래도, 이성연은 너와 은비의 모든 걸 알고 있어. 너무 매정하게 굴면 곤란하지 않겠니?” 은채는 여전히 냉정한 표정으로 응답했다. “엄마라면 이성연의 입을 막을 방법쯤은 가지고 있겠죠.” 은채는 이미 모든 결과를 예상하고 있었다. 그녀는 담담하게 상황을 받아들이며 준비가 되어 있는 듯 보였다. 심혜영은 은채의 단호하고 평온한 눈빛을 보며 잠시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은채가 더 이상 어렸을 적 농촌에서 데려온 그 순진했던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이 실감됐
하주혁은 무표정으로 침실 문가에 서서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심혜영을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좀 됐어요.” 주혁의 말에 심혜영은 더욱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그 모습을 본 은채는 재빨리 다가가 그녀 곁에 서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이제 돌아가요. 시간 나면 내가 은채 보러 갈게요.” 은채는 침착하게 말했지만, 그 속엔 결연함이 서려 있었다. 이 말을 들은 심혜영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주혁 옆을 지나 계단을 내려갔다. 그녀는 주혁이 자신을 부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깊게 숨을 내쉬었다. 아마도 주혁은 그녀들의 대화를 듣지 못했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안도시켰다. 조금 가벼운 표정으로 심혜영은 서둘러 펜트하우스를 나섰다. 은채는 그녀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며 천천히 주혁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한동안 집에 안 올 줄 알았어.” 주혁은 은채를 짙은 눈빛으로 바라보며, 마치 그녀를 꿰뚫어 보려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은채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담담하게 맞서며 미소를 지었다. “왜 그래?” 그녀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물었다. 주혁이 자신과 심혜영의 대화를 얼마나 들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의 눈빛에서 의심의 기운을 감지했다. 주혁은 원래 신중하고 예민한 성격이기에 은채는 최대한 침착하게 행동하려 했다. 잠시 그녀를 주시하던 주혁은 고개를 돌리고 방 안으로 들어와 외투를 벗었다. “방금 너희 엄마가 무슨 일로 널 찾아왔던 거야?” 그가 무심한 척 물으며 외투를 건네자, 은채는 그것을 받아들고 말없이 옷걸이에 걸었다. “별 거 아냐. 가족끼리 자잘한 일이지.” 은채는 태연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돌려 주혁의 눈을 피했다. 그의 시선이 자신을 깊이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에, 최대한 평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리고 이성연 아주머니 일 때문에 많이 놀라셨나 봐. 그래서 오셔서 물으셨던 거야.” 주혁은 그녀의 말을 듣고 눈을
주혁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얼마 전까지 나랑 이혼하겠다고 난리더니, 이제 와서 자신의 지위를 지키겠다고?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여?” 주혁의 날카로운 시선이 은채를 꿰뚫듯 다가왔다. 은채는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고, 두어 걸음 물러서다가 갑작스러운 어지럼증에 벽을 붙잡았다. 속이 울렁거렸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차분히 진정한 후, 은채는 주혁을 똑바로 쳐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래, 난 너랑 이혼하고 싶어. 하지만 하씨 가문의 며느리로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있으니까, 그동안 참고 지냈던 거야.” 주혁의 눈에는 차가운 빛만이 서려 있었다. 은채는 입술을 꽉 깨물며 말을 이어갔다. “넌 내 피가 필요하고, 나는 네 지위가 필요해. 서로 간섭하지 않고 지내는 게 서로에게 유리하잖아. 안 그래?” 주혁은 그녀를 쓸쓸히 비웃으며 냉정하게 답했다. “오늘 네가 한 말을 잊지 마.” 은채는 고개를 끄덕이며 힘주어 말했다. “잘 기억하고 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주혁의 눈빛이 어두워지며 더욱 냉정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내일 아침 일찍 병원으로 가서 채혈 준비해. 내일 또다시 피를 뽑아야 해.” 오늘 이미 피를 뽑은 상태에서, 내일 다시 채혈을 하는 것은 은채 뱃속의 아이에게 해로울 것이 분명했다. 은채의 얼굴이 창백해졌고, 경악한 표정으로 주혁을 바라보며 단호히 대답했다. “싫어.” 주혁은 그녀의 단호한 거절에 더욱 냉랭한 눈빛을 보이며 비아냥거렸다. “너한테 거절할 권리 따위는 없어. 내가 네 일에 간섭하지 않기를 바란다면 네가 할 일은 다 해야지.” 은채는 눈살을 찌푸리며 차가운 표정으로 주혁을 바라보았다. 지난 3년 동안의 모든 기억들이 하나하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은채는 내면의 괴로움을 억누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넌 할 수만 있다면 당장 내 피를 다 뽑아내고 싶나 보지?” 주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흔들림이 전혀 없었
은채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결연한 의지를 다졌다. 그러고는 천천히 화장실을 나와 마음속으로 굳게 결심했다. ‘이 아이를 절대 남겨서는 안 돼.’ 다음날 아침, 은채는 우유를 한 모금 마신 후 천천히 일어섰다. 이때 정국이 다가와 말했다. “대표님께서 사모님을 모시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은채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네.” 그녀는 차분했지만,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정국은 그녀가 손도 대지 않은 아침 식사를 보고 잠시 망설였다. 옆에서 아주머니가 은채에게 말했다. “사모님, 어젯밤부터 아무것도 안 드셨으니 아침이라도 드시고 가세요.” 하지만 은채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입맛이 없어서요.” 뒤돌아보지 않고 걸어 나가는 그녀를 위해 정국이 서둘러 차 문을 열어주었다. 은채가 차에 타자, 그는 조심스럽게 차 문을 닫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차가 출발하자 은채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며 문득 입을 열었다. “그 여자는 무슨 병에 걸린 거죠?” 정국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가, 말을 고르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사모님. 그건 대표님의 사적인 일이라 저도 잘 알지 못합니다.” 은채는 냉소적인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잘 모르는 게 아니라 말하기 싫은 거겠죠?” 정국은 은채의 비꼬는 말에도 차분함을 유지하며, 대답 대신 침묵을 지켰다. 그는 주혁의 비서로서 그의 개인사까지 잘 알고 있었지만, 함부로 발설하지 않는 신중한 성격이었다. 그가 내린 침묵이란 답변에 은채는 더욱 실망한 듯 말했다. “괜찮아요, 제가 이미 알아냈으니까요. 패혈증이죠?” 은채는 밤잠을 설치며 알아본 끝에, 지속적인 혈액이 필요한 질환이 패혈증임을 알아냈다. 만약 그녀의 추측이 맞았다면, 주혁은 은비를 만나기 전부터 모든 계획을 세운 셈이었다. 은채는 은비가 이 일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정국은 잠시 말을 잃고 조용히 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