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채가 펜트하우스 문을 열고 들어서려는 순간 갑작스러운 어지러움이 밀려와 비틀거렸다. 집안일을 하고 있던 이성연은 은채의 상태를 보고 급히 달려와 그녀를 부축했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이성연은 은채가 주혁과 결혼할 때부터 곁을 지켜온 사람이었으며, 심혜영의 지시에 따라 은채를 감시하기 위해 류씨 가문에서 파견된 인물이었다. 은채는 이성연의 손길을 뿌리치며 담담한 어조로 답했다. “괜찮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표정에도 별다른 감정의 변화가 없었다. 이성연은 은채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약간 난처한 듯 웃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안색이 좋지 않으세요. 혹시 그날이 다가와서 그러신 건가요.” 은채는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이성연이 3년 동안 자신의 생리 주기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내심 놀랐기 때문이다. “그런 것 같아요. 요즘 속도 안 좋아요.” “먼저 위층에 가서 좀 쉬고 있을게요. 저녁에 불러주세요.” 은채는 그렇게 말한 후 곧장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 순간 그녀의 마음속엔 차가운 결심이 들기 시작했다. 이성연을 곁에 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점점 더 확고해지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임신 사실이 들통날 게 분명했다. 은채는 침실에 들어서며 화장대를 살폈다. 누군가 다녀간 흔적이 어지럽게 남아 있었다. 이성연이 사소한 물건에 욕심을 내며 손버릇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은채는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으나, 이제 그녀를 내보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은채는 잠시 숨을 고른 후 방을 나와 계단 위에서 아래층을 향해 단호히 외쳤다. “정 집사님 어디 계시죠? 절 만나러 오시라고 전해주세요.” 뒤뜰에서 일하던 정이훈은 곧 호출을 받고 거실로 들어왔다. 은채는 굳은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있었고, 거실에는 이미 여러 명의 아주머니들이 모여 있었다. “사모님, 무슨 일이십니까.” 정이훈은 은채의 평소와 다른 엄격한 모습에 놀란 듯했다. 은채는 그
30분 후, 보안팀이 모든 아주머니들의 방을 철저히 수색하고 거실로 돌아와 보고했다. “사모님의 물건은 어디에서도 찾지 못했습니다.” 은채는 살짝 눈썹을 치켜올리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본 이성연이 다급하게 나서며 말했다. “아가씨, 혹시 물건이 어디에 떨어져 있는 건 아닐까요? 제가 가서 찾아볼게요. 괜히 사람을 의심해서는 안 되잖아요...” 이성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에게 꾸중을 들었던 한 아주머니가 서둘러 끼어들었다. “근데 이 아주머니의 방은 아직 안 뒤져봤잖아요.” 이성연의 얼굴이 순간 굳어지더니 화난 듯 그 아주머니를 노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무슨 뜻이지? 난 우리 아가씨와 함께 온 사람이에요. 내가 아가씨 물건을 훔쳤을 리가 없잖아요.” 상대 아주머니도 지지 않고 맞섰다. “그건 어떻게 알겠어요? 모두의 방을 수색했으니, 이젠 이 아주머니의 방도 확인해야죠.” 이성연은 늘 은채와 함께 들어왔다는 이유로 자부심을 가지고 다른 아주머니들을 무시해 왔기 때문에, 많은 불만을 사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은 은채가 바라던 바였다. 은채는 고요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아주머니, 방 문을 열어 보안팀더러 수색하라고 하세요.” 이성연은 잠시 주저하다가 은채를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아가씨, 저를 못 믿으세요?” 은채는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제가 왜 아주머니를 못 믿겠어요? 하지만 지금 아주머니의 방을 안 뒤지면 다른 사람들이 불만을 가질 겁니다. 전 이 집의 여주인으로서 공정함을 보여야 하니까요.” 이성연은 이를 악물고 은채의 냉정한 표정을 바라보다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좋아요. 대신 아가씨께서 직접 수색해 주세요.” 이성연은 은채가 자신의 비밀을 지켜줄 거라 기대하며 마지막 자존심을 내세운 것이었다. 그러나 은채는 그녀를 냉랭하게 쳐다보며 대답했다. “제가 수색하면 모두 제가 아주머니를 감싸고 있다고 생각할 거예요. 그냥 보안팀더러 수색하게 하세요.” 곁
“류은채, 대체 뭘 하려는 거야.” 아주머니가 방에서 나가자마자, 심혜영은 은채를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보며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은채에 대한 혐오감이 짙게 서려 있었다. “이성연을 쫓아내서 대체 무슨 득을 보겠다는 거지?” 은채는 심혜영의 날카로운 태도에 익숙해진 듯, 담담하게 미소를 지으며 이불을 걷고 일어나 조용히 답했다. “엄마, 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있으신 줄 알았는데, 고작 손버릇 나쁜 사람 문제 때문에 이러시는 건가요?” “이 아주머니는 제가 쫓아낸 게 아니라, 하주혁이 정한 규칙을 어겼기 때문이에요.” 이 펜트하우스의 규칙은 모두 하주혁이 정한 것이었고, 이성연도 그 사실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이성연은 심혜영에게 펜트하우스의 소식을 전하며 규칙들을 계속 알려주곤 했던 사람이다. 심혜영은 은채의 차분한 태도에 속으로 이를 갈았다. “막을 수도 있었잖아.” 은채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강렬한 눈빛으로 심혜영을 응시하며 말했다. “엄마, 모르셨나요? 하주혁이 외국에서 여자를 데려왔어요. 그래서 요즘 모두 제가 실수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죠. 제 옆에 틈을 노리는 사람이 있으면 정말 위험했을지도 몰라요. 그런 사람이 제 옆에, 아니 언니의 곁에 있어도 괜찮으신가요?” 심혜영의 얼굴이 굳어지고,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녀는 하주혁이 외국에서 여자를 데려왔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은채의 진지한 표정을 보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래도, 이성연은 너와 은비의 모든 걸 알고 있어. 너무 매정하게 굴면 곤란하지 않겠니?” 은채는 여전히 냉정한 표정으로 응답했다. “엄마라면 이성연의 입을 막을 방법쯤은 가지고 있겠죠.” 은채는 이미 모든 결과를 예상하고 있었다. 그녀는 담담하게 상황을 받아들이며 준비가 되어 있는 듯 보였다. 심혜영은 은채의 단호하고 평온한 눈빛을 보며 잠시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은채가 더 이상 어렸을 적 농촌에서 데려온 그 순진했던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이 실감됐
하주혁은 무표정으로 침실 문가에 서서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심혜영을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좀 됐어요.” 주혁의 말에 심혜영은 더욱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그 모습을 본 은채는 재빨리 다가가 그녀 곁에 서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이제 돌아가요. 시간 나면 내가 은채 보러 갈게요.” 은채는 침착하게 말했지만, 그 속엔 결연함이 서려 있었다. 이 말을 들은 심혜영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주혁 옆을 지나 계단을 내려갔다. 그녀는 주혁이 자신을 부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깊게 숨을 내쉬었다. 아마도 주혁은 그녀들의 대화를 듣지 못했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안도시켰다. 조금 가벼운 표정으로 심혜영은 서둘러 펜트하우스를 나섰다. 은채는 그녀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며 천천히 주혁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한동안 집에 안 올 줄 알았어.” 주혁은 은채를 짙은 눈빛으로 바라보며, 마치 그녀를 꿰뚫어 보려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은채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담담하게 맞서며 미소를 지었다. “왜 그래?” 그녀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물었다. 주혁이 자신과 심혜영의 대화를 얼마나 들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의 눈빛에서 의심의 기운을 감지했다. 주혁은 원래 신중하고 예민한 성격이기에 은채는 최대한 침착하게 행동하려 했다. 잠시 그녀를 주시하던 주혁은 고개를 돌리고 방 안으로 들어와 외투를 벗었다. “방금 너희 엄마가 무슨 일로 널 찾아왔던 거야?” 그가 무심한 척 물으며 외투를 건네자, 은채는 그것을 받아들고 말없이 옷걸이에 걸었다. “별 거 아냐. 가족끼리 자잘한 일이지.” 은채는 태연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돌려 주혁의 눈을 피했다. 그의 시선이 자신을 깊이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에, 최대한 평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리고 이성연 아주머니 일 때문에 많이 놀라셨나 봐. 그래서 오셔서 물으셨던 거야.” 주혁은 그녀의 말을 듣고 눈을
주혁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얼마 전까지 나랑 이혼하겠다고 난리더니, 이제 와서 자신의 지위를 지키겠다고?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여?” 주혁의 날카로운 시선이 은채를 꿰뚫듯 다가왔다. 은채는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고, 두어 걸음 물러서다가 갑작스러운 어지럼증에 벽을 붙잡았다. 속이 울렁거렸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차분히 진정한 후, 은채는 주혁을 똑바로 쳐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래, 난 너랑 이혼하고 싶어. 하지만 하씨 가문의 며느리로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있으니까, 그동안 참고 지냈던 거야.” 주혁의 눈에는 차가운 빛만이 서려 있었다. 은채는 입술을 꽉 깨물며 말을 이어갔다. “넌 내 피가 필요하고, 나는 네 지위가 필요해. 서로 간섭하지 않고 지내는 게 서로에게 유리하잖아. 안 그래?” 주혁은 그녀를 쓸쓸히 비웃으며 냉정하게 답했다. “오늘 네가 한 말을 잊지 마.” 은채는 고개를 끄덕이며 힘주어 말했다. “잘 기억하고 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주혁의 눈빛이 어두워지며 더욱 냉정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내일 아침 일찍 병원으로 가서 채혈 준비해. 내일 또다시 피를 뽑아야 해.” 오늘 이미 피를 뽑은 상태에서, 내일 다시 채혈을 하는 것은 은채 뱃속의 아이에게 해로울 것이 분명했다. 은채의 얼굴이 창백해졌고, 경악한 표정으로 주혁을 바라보며 단호히 대답했다. “싫어.” 주혁은 그녀의 단호한 거절에 더욱 냉랭한 눈빛을 보이며 비아냥거렸다. “너한테 거절할 권리 따위는 없어. 내가 네 일에 간섭하지 않기를 바란다면 네가 할 일은 다 해야지.” 은채는 눈살을 찌푸리며 차가운 표정으로 주혁을 바라보았다. 지난 3년 동안의 모든 기억들이 하나하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은채는 내면의 괴로움을 억누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넌 할 수만 있다면 당장 내 피를 다 뽑아내고 싶나 보지?” 주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흔들림이 전혀 없었
은채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결연한 의지를 다졌다. 그러고는 천천히 화장실을 나와 마음속으로 굳게 결심했다. ‘이 아이를 절대 남겨서는 안 돼.’ 다음날 아침, 은채는 우유를 한 모금 마신 후 천천히 일어섰다. 이때 정국이 다가와 말했다. “대표님께서 사모님을 모시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은채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네.” 그녀는 차분했지만,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정국은 그녀가 손도 대지 않은 아침 식사를 보고 잠시 망설였다. 옆에서 아주머니가 은채에게 말했다. “사모님, 어젯밤부터 아무것도 안 드셨으니 아침이라도 드시고 가세요.” 하지만 은채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입맛이 없어서요.” 뒤돌아보지 않고 걸어 나가는 그녀를 위해 정국이 서둘러 차 문을 열어주었다. 은채가 차에 타자, 그는 조심스럽게 차 문을 닫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차가 출발하자 은채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며 문득 입을 열었다. “그 여자는 무슨 병에 걸린 거죠?” 정국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가, 말을 고르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사모님. 그건 대표님의 사적인 일이라 저도 잘 알지 못합니다.” 은채는 냉소적인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잘 모르는 게 아니라 말하기 싫은 거겠죠?” 정국은 은채의 비꼬는 말에도 차분함을 유지하며, 대답 대신 침묵을 지켰다. 그는 주혁의 비서로서 그의 개인사까지 잘 알고 있었지만, 함부로 발설하지 않는 신중한 성격이었다. 그가 내린 침묵이란 답변에 은채는 더욱 실망한 듯 말했다. “괜찮아요, 제가 이미 알아냈으니까요. 패혈증이죠?” 은채는 밤잠을 설치며 알아본 끝에, 지속적인 혈액이 필요한 질환이 패혈증임을 알아냈다. 만약 그녀의 추측이 맞았다면, 주혁은 은비를 만나기 전부터 모든 계획을 세운 셈이었다. 은채는 은비가 이 일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정국은 잠시 말을 잃고 조용히 운전
정국은 차를 병원 입구에 멈추고 서둘러 내려 은채에게 문을 열어주려 했다. 그러나 은채는 정국이 문을 열기 전 이미 스스로 차 문을 밀고 나와 병원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어제까지 병원에 가기 싫어하던 그녀가 오늘은 마치 모든 걸 체념한 사람처럼 보였다. 은채의 이러한 변화에 정국은 내심 놀랐다.은채는 병원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에 탔고, 정국도 뒤따라 탔다. 그는 무표정하게 고시영이 입원해 있는 층의 버튼을 눌렀다. 은채의 얼굴은 여전히 냉정해 보였고,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다. 마침내 엘리베이터가 목적 층에 도착하자, 은채가 먼저 나섰다.그녀가 병실 앞으로 다가가자, 입구에 서 있는 두 명의 경호원이 눈에 들어왔다. 은채는 주혁이 시영을 위해 병원 한 층을 통째로 빌렸음을 깨달았다.“류은채 님, 이쪽으로 오세요.” 간호사 복장을 한 여성이 다가와 은채를 어제의 병실로 안내했다. 은채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워 왼손을 내밀었다.“오른손은 아직 멍이 남았으니, 왼손으로 해주세요.”간호사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곧 채혈을 시작했다. 차가운 주삿바늘이 피부를 뚫고 들어가자, 은채는 마음까지 차갑게 식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30분 정도 뒤에 간호사는 은채의 팔에서 주삿바늘을 조심스레 뽑아냈다.은채는 피가 채워진 혈액팩을 무심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이제 충분한가요?” 간호사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어제도 피를 뽑으셨는데 오늘 또 뽑으시면 건강에 무리가 가요. 당분간 충분히 쉬시고, 다음 주에 다시 오세요.”은채는 짧게 눈살을 찌푸리며 별다른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솜으로 주삿자리를 누르며 병실을 나섰지만, 갑자기 강한 어지럼증이 몰려와 한 걸음을 떼기도 전에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정국은 재빠르게 그녀를 부축했다.“사모님, 괜찮으세요?” 은채는 가늘게 숨을 몰아쉬며 겨우 말했다. “조금 어지러워요.” 정국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잠시 쉬는 게 좋겠
주혁은 차가운 표정으로 은채를 바라보며 날카롭게 말했다. “저 여자가 하는 말, 신경 쓸 필요 없어.” 주혁은 시영의 어깨를 감싸며, 방금과는 달리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정원에 가고 싶다고 했잖아. 얼른 가자.” 시영은 입술을 오므리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주혁의 팔을 잡은 채 반대 방향으로 걸어 나갔다. 은채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치 자신이 바보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마음속 깊이 울컥하는 감정을 애써 삼키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시영은 주혁이 결혼한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듯했다.정국은 은채가 더는 무언가를 말하지 않고 조용히 있는 것을 보고 안도하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사모님, 가시죠.” 은채는 무표정하게 엘리베이터에 들어섰고, 숫자가 내려가는 동안 마치 생각에 잠긴 듯 멍하니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자, 은채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녀는 뜻밖의 사람과 마주쳤다. 바로 그녀의 어머니, 심혜영이었다. 심혜영은 은채를 보고 굳은 표정을 지었지만, 곧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듯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은비야, 여기 병원엔 무슨 일이야? 어디 아픈 거 아니니?” 은채는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답했다.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심혜영은 은채 옆에 서 있는 정국을 흘깃 보고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다시 물었다. 그러나 은채는 차분하게 말했다. “위층에 있는 은채를 보고 갈 생각이에요. 진 비서님은 할 일이 많으시니 이만 돌아가 보세요.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정국이 망설이자 은채는 어두운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정국은 은채가 심혜영과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닙니다. 사모님, 그럼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정국이 떠난 후, 은채는 심혜영을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엄마, 할 말이 있어요.” 심혜영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마침 은비도 너한테 할 말이 있다고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