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님, 뭐라도 드시는 게 어떨까요? 진미가 곧 약을 가지고 올 거예요.” 은채는 이틀 동안 음식을 제대로 먹지 않았음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몸이 아픈 탓에 입맛이 없었지만, 은채는 억지로라도 조금은 먹어야 했다. 그녀가 건강을 잃어도, 아무도 동정하거나 도와주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은채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가, 상 위에 차려진 담백한 음식을 보며 깊은숨을 들이쉬었다. 입맛이 없어도 반드시 먹어야 했다. 정이훈은 은채가 조용히 식사하는 것을 확인하고 부엌을 나섰다. 잠시 후, 주혁의 전화가 걸려왔다. 정이훈은 즉시 전화를 받으며 조용히 말했다. “도련님.” [어떻게 됐어?] 주혁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정이훈은 부엌에서 식사 중인 은채를 흘깃 바라보고는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의사 말로는 사모님이 과다출혈로 면역력이 떨어진 것 같다고 합니다. 일부러 몸을 해친 건 아니라고 합니다.” 주혁은 잠시 침묵했고, 정이훈은 그의 속마음을 알 수 없어 머뭇거리며 덧붙였다. “게다가 사모님의 건강이 워낙 좋지 않아, 계속해서 채혈을 하다가는 임신이 어려워지거나 유지가 힘들 거라고 합니다.” “그 방법이 효과가 있을지조차 장담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정이훈은 말을 마치고 긴장 속에 주혁의 반응을 기다렸지만, 주혁은 말없이 전화를 끊었다. 정이훈은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자신이 한 말이 주제넘었음을 알기에 불안함이 밀려왔다. 그때, 은채가 식사를 마치고 부엌에서 나와 그의 불안한 표정을 보고 물었다. “정 집사님, 무슨 일 있어요?” 정이훈은 미소를 지으며 핸드폰을 넣고 답했다. “아무 일도 아닙니다.” 그때 진미가 약을 들고 들어왔다. 은채는 약을 바라보며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방금 저녁을 먹었으니 약은 좀 이따 가져다줘. 지금은 좀 쉬고 싶어요.” 진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이 되자, 진미가 방을 청소하러
은비는 은채의 말 속에서 느껴지는 억지스러움을 감지하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고마워, 은채야.] 은채는 아무 대꾸 없이 조용히 침묵했다. 두 사람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고, 결국 은비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은채는 끊어진 전화를 바라보며 마음이 복잡해졌다. 침대에 누워 있던 은채는 방금 전까지 졸음이 오려 했지만, 은비의 전화를 받고 나서는 잠이 달아났다. 속이 불편한 느낌이 밀려와 밤새도록 뒤척였다. 깊은 밤, 은채는 누군가 자신의 이마를 만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지만, 어둠 속에서 사람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꿈속에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남자는 조심스럽게 은채의 이마를 만지며 그녀를 깨우지 않으려는 듯 부드럽게 손길을 이어갔다. 은채는 얼굴이 뜨겁다는 것을 느끼며 본능적으로 말했다. “물 마시고 싶어.” 그 손길이 잠시 멈추더니 곧 물러갔다. 조명이 켜지고, 은채는 눈을 비비며 잠에서 완전히 깨어났다. 눈앞에는 차가운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주혁이 서 있었다. 은채는 순간 멍해졌지만 곧 입술을 오므리며 스스로 일어나 물을 마시러 가려 했다. 주혁은 여전히 차가운 표정으로 그녀를 지켜보았다. 은채는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속이 불편한 것을 참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몇 발자국 못 가서 눈앞이 캄캄해지며 바닥으로 무릎을 꿇고 말았다. 쿵- 은채의 무릎이 바닥에 부딪히며 고통스러운 표정이 스쳐갔다. 주혁은 은채에게 다가가 부축하려 했으나, 은채는 스스로 침대를 잡고 천천히 일어났다. 은채는 주혁의 손길을 잠시 바라보다가 차분히 말했다. “요즘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은채는 감정을 억누르며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그와 대화하려 했다. 언니 은비를 위해 모든 것을 참아내고 있었다. 주혁은 은채를 깊은 눈빛으로 쳐다보더니 손을 거두며 무표정하게 답했다. “이 집은 내 집이야. 내가 오고 싶을 때 언제든 올 수 있어.” 주혁의 오
은채는 주혁이 다른 행동을 하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옆에 있는 남자는 이미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의 고른 숨소리가 들려오자, 은채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그는 그저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다음 날 아침. 은채가 깨어났을 때, 주혁은 이미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침대에서 일어나자 이마에 붙어 있던 해열 패치가 떨어져 내렸다. 은채는 패치를 보며 잠시 멍해졌다. 그때 진미가 세면도구를 들고 방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사모님, 이건 주인님께서 어젯밤에 사모님을 위해 붙여 드린 해열 패치예요.” “사모님께서 어젯밤 다시 고열이 나셨거든요.” 은채는 해열 패치를 바라보다가 무심히 쓰레기통에 던졌다. 주혁이 가끔 보여주는 다정함은 은비에게 해당하는 것이지,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약을 가져와. 점심엔 나가야 하니 저녁 준비는 하지 말고.” 진미는 은채가 해열 패치를 아무렇지 않게 버리는 것을 보고 잠시 놀랐지만, 이내 약을 가져왔다. 은채는 약을 먹는 척하며 물을 마시고, 그 후 욕실로 가서 손에 숨겨둔 약을 변기에 버리고 물을 내렸다. 진미는 은채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감지했지만, 묵묵히 방을 나갔다. 은채는 옷을 차려입고 주혁의 서랍에서 아무 키나 꺼내들어 차를 몰고 서진희네 병원으로 향했다. 펜트하우스를 막 나서려는 순간, 은비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은비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럽고 나긋했다. [은채야, 나 오늘 퇴원할 거야. 앞으로는 집으로 오면 되니 병원까지 올 필요는 없어.] 은비가 막 깨어난 지 며칠밖에 안 됐는데 퇴원을 준비한다는 말에 은채는 놀랐다. “몸은 괜찮아?” 은비는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큰 문제는 없어. 병원에 있는 게 불편하기도 하고, 오늘 아침에 주혁이랑 마주칠 뻔했거든.] [주혁이가 나를 보고 의심할까 봐 퇴원했어.] 은채는 그 말을 듣고 운전대를 쥐고 있는 손을 살짝 더 세게 움켜쥐었다. 은비의 자신감 넘치는 말투가 그녀를 불편하게
시영이 귀국한 후, 주혁은 시영에게 극진히 신경을 쓰고 있었다. 비록 유정숙이 그와 시영의 관계를 반대했지만, 3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면서 그의 마음이 변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주혁이 시영의 치료를 위해 적합한 혈액형이나 다른 대안을 찾게 된다면, 은비와 은채는 그에게 그저 버려질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 심혜영은 시영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었지만, 은비의 눈치를 살피며 숨조차 크게 쉬지 못했다. 은비는 깨어난 후 짜증과 화를 내는 일이 잦아졌고, 심혜영은 이를 후유증으로 여겨 무조건 받아들이고 있었다. “네가 회복되면 그 병약한 여자는 네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야.” 은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주혁은 시영을 철저하게 보호하고 있어 그녀를 쉽게 건드릴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지금 은비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의 본래 신분을 되찾는 것이었다. 더 이상의 말이 없자 심혜영은 은비의 휠체어를 조용히 밀며 병실 밖으로 나왔다. 공항. 은채는 공항에서 기다리던 중, 서진희가 캐리어를 끌며 나오는 모습을 발견했다. 진희는 빨간 원피스와 검은 선글라스를 착용해 그녀의 세련된 분위기가 더욱 돋보였다. 문 앞에서 은채를 발견한 진희는 선글라스를 내리며 반가움과 약간의 놀라움이 담긴 눈빛으로 말했다. “은채야?” 오랜만에 나타난 은채를 본 진희는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그녀 앞에 멈춰섰다. “난 네가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줄 알았어.” 은채는 입술을 오므리고 진희를 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진희야, 부탁할 일이 있어. 아주 중요한 일이야.” 진희는 은채를 비웃듯이 쳐다보며 말했다. “정말로 나한테 부탁할 일이 생기지 않았다면, 넌 평생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았을 거지?” 은채는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지난 3년 동안 많은 일이 있었어. 한두 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워.” 진희는 은채를 차갑게 응시하며 말했다. “설명하기 어렵겠지. 하지만 네가 갑자기 사라지면서 내 사촌오빠는 죽을 뻔했어.” 은
3년 전, 은비는 교통사고를 당했고, 류씨 가문은 기자들의 관심을 차단하며 사고 소식을 외부에 거의 알리지 않았다. 은채는 은비의 신분을 대신하며 류씨 가문에 들어왔지만, 그녀의 존재감이 크지 않았기에 갑작스럽게 사라져도 주위 사람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진희는 은채를 찾기 위해 몇 번이나 류씨 가문을 찾아갔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늘 ‘은채가 유학을 갔다’는 말뿐이었다. 류씨 가문은 진희에게 은채가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으니 연락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진희는 은채가 스스로 더 나은 길을 선택해 완전히 자신들과 단절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3년 만에 다시 만난 은채가 은비의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러니까, 너는 부모님의 부탁을 들어 언니 신분을 대신하고 주혁과 결혼한 거야?” 진희는 은채가 전한 이야기를 되새기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은채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은비의 사고에 죄책감을 느끼고, 류씨 가문에 인정받고 싶어 부모님의 황당한 결정을 따랐던 것이다. 진희는 그녀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정말 바보네. 아직도 모르겠어? 네 어머니는 널 은비만큼 소중하게 여기지 않아.” “그리고 네가 그렇게 아파할 필요는 없어. 내 사촌 오빠 운기만 해도 너한테 부족하지 않았잖아?” 은채는 입술을 깨물며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의 머릿속에 따뜻한 미소를 지었던 소년의 얼굴이 떠올랐고, 가슴이 아팠다. “난 운기랑 어울리지 않아.” 은채의 눈물을 보며 진희는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은채와 오랜 친구였기에 그녀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예전에 고운기가 은채를 쫓아다녔을 때, 은채는 신중하고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두 사람의 관계가 발전하려 할 무렵, 은채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진희는 당시 은채의 갑작스러운 이별을 원망했지만, 지금의 무력한 그녀를 보자 마음이 아팠다. 그녀는 잠시 침묵하다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뭘 도와주면 되는
진희는 진지한 눈빛으로 은채를 바라보았다. 은채의 결심이 확고함을 느낀 진희는 약간 찌푸린 이마를 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우선 우리 집으로 가자. 엄마도 오늘 집에 계시니까, 엄마의 의견도 들어보자.” 그 말에 은채는 순간적으로 감동을 받아 환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고마워.” 오랜만에 연락이 끊겼던 진희가 여전히 자신을 이렇게 도와주려 한다는 사실에 은채는 마음이 따뜻해졌다. 진희는 변함없이 그녀의 진정한 친구였다. 진희 또한 은채의 복잡한 가정 사정을 알고 있었기에 특별히 묻지 않았다. 두 사람은 오랜 친구였으므로, 진희는 은채가 힘들 때 자신을 찾지 않은 점에 대해 서운함을 느꼈을 뿐이었다. “대신,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면 나한테 먼저 말해줘야 해.” 진희는 오랫동안 은채와 연락이 끊긴 허전함을 느꼈던 만큼, 그녀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은채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희에게 감사를 표했다. 두 사람은 서씨 저택으로 향했다. 서씨 저택. 엄정화는 정원에서 꽃을 다듬고 있었다. 진희가 집에 도착하자 엄정화는 꽃 가위를 내려놓고 반갑게 진희를 맞이하며 안았다. “우리 딸, 드디어 왔네!” 은채는 엄정화와 진희의 다정한 모습에 부러움이 섞인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심혜영은 한 번도 은채에게 그런 따뜻함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그녀는 은비의 신분으로 살아온 시간 동안, 심혜영의 모성애를 단지 사람들 앞에서 가끔씩만 보았다.반면 진희는 항상 따뜻한 가정에서 자라왔고, 은채는 그런 진희를 부러워했다. 엄정화는 진희와 잠시 이야기를 나눈 후 은채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반갑게 물었다. “너, 은채 맞지?” 은채와 은비가 너무 닮아서 처음 은채를 봤을 때 엄정화는 은비로 착각했었다. “안녕하세요, 이모님. 오랜만이에요.” 은채는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인사했다. 엄정화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오랜만이구나. 어서 들어와.” 진희는 자연스럽게 은채의 팔을
진희는 은채가 고집을 꺾지 않는 모습을 보고, 그녀가 이 상황에서 얼마나 벗어나고 싶어 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엄정화가 미간을 찌푸리자, 진희는 서둘러 말했다. “엄마, 은채 상황이 정말 절박해요.” 엄정화는 병원에서 다양한 이유로 아이를 포기하려는 환자들을 많이 보아왔기에, 은채의 사정을 따로 묻지는 않았다. 은채를 오랫동안 지켜봐 온 그녀는 은채와 운기가 잘되기를 바랐기에, 은채가 아이를 지우려 한다는 소식이 마음에 무겁게 다가왔다. “알겠다.” “우선 오후에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보자.” 엄정화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은채와 적당한 거리를 두었다. “검사 후 별문제가 없다면 30분 정도면 수술이 끝날 거야.” 은채는 엄정화의 표정에서 불쾌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면서도 더는 변명할 방법이 없었다. 진희는 은채의 움츠린 모습이 안쓰러워 그녀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위로했다. “괜찮아. 엄마는 그저 조금 속상해서 그래.” 은채는 그 말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아.” 은채는 결코 이 아이를 남길 수 없었다. 아이를 포기하는 대신, 오랜 친구를 되찾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스스로를 위로했다. 점심을 먹고 난 후, 엄정화는 직접 차를 몰고 진희와 은채를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병원에 도착한 엄정화는 자신의 손으로 은채의 상태를 검진했다. 검사 결과를 확인한 후, 엄정화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너 혈액형이 RH-O형이구나?” 은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엄정화는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RH-O형은 출산이 쉽지 않은 혈액형이야. 이 아이를 지우면 다시는 임신할 수 없을지도 몰라.” “그래도 정말 아이를 포기하겠니?” 은채는 차분하게 그녀의 말을 듣고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미 알고 있었어요.” 은채는 이 문제에 대해 많은 정보를 찾았기에 자신의 상태를 잘 알고 있었다. 엄정화는 검사 결과
수술실 안. 은채는 차가운 수술대에 누워 있었다. 엄정화는 이미 수술복으로 갈아입었고, 옆에서 간호사가 주사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은채는 간호사가 주사기를 들고 다가오는 모습을 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잠깐만요.” 엄정화는 은채의 목소리에 간호사를 바라보았다. 간호사는 즉시 동작을 멈추고, 은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엄정화를 바라보며 약간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이모님, 죄송해요. 잠시만 시간을 주세요.” “저는...” 엄정화는 이해하는 표정으로 은채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네 상태가 남들과 다르니 신중하게 생각하는 건 당연해.” 결국 은채는 수술을 마치지 못했다. 수술대에서 내려온 은채를 본 진희는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 한숨을 쉬며 다가갔다. “안 되겠으면 그냥 낳아. 내가 같이 키우면 되잖아.” 은채는 진희의 말에 감동했다. 자신의 마음이 변덕스러워졌을 때 화를 낼 줄 알았던 진희는 오히려 그녀를 이해해 주었다. “네가 있어줘서 정말 다행이야.” 은채는 진희가 없었다면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 진희는 다정한 미소로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아직 고민할 시간이 두 달이나 남았잖아.” 은채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시울을 붉혔다. 진희 역시 무거운 마음으로 은채의 손을 잡고 병원을 나왔다. 두 사람은 오랜만에 만나 길을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었고, 더 이상 아이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저녁이 되어 진희는 은채를 펜트하우스에 데려다준 후 떠났다. 그 후 고운기에게서 전화가 왔지만, 진희는 오랜 고민 끝에 말했다. “은채는 지금 잘 지내고 있어. 오빠, 이제 그만 포기해.” 이미 그들 사이에는 넘어설 수 없는 벽이 있었다. 진희는 은채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은채가 주혁과 맺어지지 않더라도 운기와 함께할 일은 없을 것이다. 전화기 너머에서 운기는 긴 침묵을 지켰다. 진희도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해 그저 침묵을 함께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