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은비는 교통사고를 당했고, 류씨 가문은 기자들의 관심을 차단하며 사고 소식을 외부에 거의 알리지 않았다. 은채는 은비의 신분을 대신하며 류씨 가문에 들어왔지만, 그녀의 존재감이 크지 않았기에 갑작스럽게 사라져도 주위 사람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진희는 은채를 찾기 위해 몇 번이나 류씨 가문을 찾아갔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늘 ‘은채가 유학을 갔다’는 말뿐이었다. 류씨 가문은 진희에게 은채가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으니 연락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진희는 은채가 스스로 더 나은 길을 선택해 완전히 자신들과 단절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3년 만에 다시 만난 은채가 은비의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러니까, 너는 부모님의 부탁을 들어 언니 신분을 대신하고 주혁과 결혼한 거야?” 진희는 은채가 전한 이야기를 되새기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은채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은비의 사고에 죄책감을 느끼고, 류씨 가문에 인정받고 싶어 부모님의 황당한 결정을 따랐던 것이다. 진희는 그녀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정말 바보네. 아직도 모르겠어? 네 어머니는 널 은비만큼 소중하게 여기지 않아.” “그리고 네가 그렇게 아파할 필요는 없어. 내 사촌 오빠 운기만 해도 너한테 부족하지 않았잖아?” 은채는 입술을 깨물며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의 머릿속에 따뜻한 미소를 지었던 소년의 얼굴이 떠올랐고, 가슴이 아팠다. “난 운기랑 어울리지 않아.” 은채의 눈물을 보며 진희는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은채와 오랜 친구였기에 그녀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예전에 고운기가 은채를 쫓아다녔을 때, 은채는 신중하고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두 사람의 관계가 발전하려 할 무렵, 은채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진희는 당시 은채의 갑작스러운 이별을 원망했지만, 지금의 무력한 그녀를 보자 마음이 아팠다. 그녀는 잠시 침묵하다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뭘 도와주면 되는
진희는 진지한 눈빛으로 은채를 바라보았다. 은채의 결심이 확고함을 느낀 진희는 약간 찌푸린 이마를 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우선 우리 집으로 가자. 엄마도 오늘 집에 계시니까, 엄마의 의견도 들어보자.” 그 말에 은채는 순간적으로 감동을 받아 환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고마워.” 오랜만에 연락이 끊겼던 진희가 여전히 자신을 이렇게 도와주려 한다는 사실에 은채는 마음이 따뜻해졌다. 진희는 변함없이 그녀의 진정한 친구였다. 진희 또한 은채의 복잡한 가정 사정을 알고 있었기에 특별히 묻지 않았다. 두 사람은 오랜 친구였으므로, 진희는 은채가 힘들 때 자신을 찾지 않은 점에 대해 서운함을 느꼈을 뿐이었다. “대신,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면 나한테 먼저 말해줘야 해.” 진희는 오랫동안 은채와 연락이 끊긴 허전함을 느꼈던 만큼, 그녀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은채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희에게 감사를 표했다. 두 사람은 서씨 저택으로 향했다. 서씨 저택. 엄정화는 정원에서 꽃을 다듬고 있었다. 진희가 집에 도착하자 엄정화는 꽃 가위를 내려놓고 반갑게 진희를 맞이하며 안았다. “우리 딸, 드디어 왔네!” 은채는 엄정화와 진희의 다정한 모습에 부러움이 섞인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심혜영은 한 번도 은채에게 그런 따뜻함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그녀는 은비의 신분으로 살아온 시간 동안, 심혜영의 모성애를 단지 사람들 앞에서 가끔씩만 보았다.반면 진희는 항상 따뜻한 가정에서 자라왔고, 은채는 그런 진희를 부러워했다. 엄정화는 진희와 잠시 이야기를 나눈 후 은채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반갑게 물었다. “너, 은채 맞지?” 은채와 은비가 너무 닮아서 처음 은채를 봤을 때 엄정화는 은비로 착각했었다. “안녕하세요, 이모님. 오랜만이에요.” 은채는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인사했다. 엄정화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오랜만이구나. 어서 들어와.” 진희는 자연스럽게 은채의 팔을
진희는 은채가 고집을 꺾지 않는 모습을 보고, 그녀가 이 상황에서 얼마나 벗어나고 싶어 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엄정화가 미간을 찌푸리자, 진희는 서둘러 말했다. “엄마, 은채 상황이 정말 절박해요.” 엄정화는 병원에서 다양한 이유로 아이를 포기하려는 환자들을 많이 보아왔기에, 은채의 사정을 따로 묻지는 않았다. 은채를 오랫동안 지켜봐 온 그녀는 은채와 운기가 잘되기를 바랐기에, 은채가 아이를 지우려 한다는 소식이 마음에 무겁게 다가왔다. “알겠다.” “우선 오후에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보자.” 엄정화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은채와 적당한 거리를 두었다. “검사 후 별문제가 없다면 30분 정도면 수술이 끝날 거야.” 은채는 엄정화의 표정에서 불쾌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면서도 더는 변명할 방법이 없었다. 진희는 은채의 움츠린 모습이 안쓰러워 그녀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위로했다. “괜찮아. 엄마는 그저 조금 속상해서 그래.” 은채는 그 말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아.” 은채는 결코 이 아이를 남길 수 없었다. 아이를 포기하는 대신, 오랜 친구를 되찾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스스로를 위로했다. 점심을 먹고 난 후, 엄정화는 직접 차를 몰고 진희와 은채를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병원에 도착한 엄정화는 자신의 손으로 은채의 상태를 검진했다. 검사 결과를 확인한 후, 엄정화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너 혈액형이 RH-O형이구나?” 은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엄정화는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RH-O형은 출산이 쉽지 않은 혈액형이야. 이 아이를 지우면 다시는 임신할 수 없을지도 몰라.” “그래도 정말 아이를 포기하겠니?” 은채는 차분하게 그녀의 말을 듣고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미 알고 있었어요.” 은채는 이 문제에 대해 많은 정보를 찾았기에 자신의 상태를 잘 알고 있었다. 엄정화는 검사 결과
수술실 안. 은채는 차가운 수술대에 누워 있었다. 엄정화는 이미 수술복으로 갈아입었고, 옆에서 간호사가 주사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은채는 간호사가 주사기를 들고 다가오는 모습을 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잠깐만요.” 엄정화는 은채의 목소리에 간호사를 바라보았다. 간호사는 즉시 동작을 멈추고, 은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엄정화를 바라보며 약간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이모님, 죄송해요. 잠시만 시간을 주세요.” “저는...” 엄정화는 이해하는 표정으로 은채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네 상태가 남들과 다르니 신중하게 생각하는 건 당연해.” 결국 은채는 수술을 마치지 못했다. 수술대에서 내려온 은채를 본 진희는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 한숨을 쉬며 다가갔다. “안 되겠으면 그냥 낳아. 내가 같이 키우면 되잖아.” 은채는 진희의 말에 감동했다. 자신의 마음이 변덕스러워졌을 때 화를 낼 줄 알았던 진희는 오히려 그녀를 이해해 주었다. “네가 있어줘서 정말 다행이야.” 은채는 진희가 없었다면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 진희는 다정한 미소로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아직 고민할 시간이 두 달이나 남았잖아.” 은채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시울을 붉혔다. 진희 역시 무거운 마음으로 은채의 손을 잡고 병원을 나왔다. 두 사람은 오랜만에 만나 길을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었고, 더 이상 아이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저녁이 되어 진희는 은채를 펜트하우스에 데려다준 후 떠났다. 그 후 고운기에게서 전화가 왔지만, 진희는 오랜 고민 끝에 말했다. “은채는 지금 잘 지내고 있어. 오빠, 이제 그만 포기해.” 이미 그들 사이에는 넘어설 수 없는 벽이 있었다. 진희는 은채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은채가 주혁과 맺어지지 않더라도 운기와 함께할 일은 없을 것이다. 전화기 너머에서 운기는 긴 침묵을 지켰다. 진희도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해 그저 침묵을 함께 나
“류은채 씨, 임신하셨습니다.”의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은채의 심장은 거세게 조여오는 듯한 통증에 휘말렸다. 마치 무언가가 그녀의 가슴 깊숙이 들어와 옥죄고 있는 기분이었다. 손에 쥔 임신확인서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낀 은채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겨우 입을 뗐다.“다시 한번 확인해 주세요.”의사는 잠시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류은채 씨, 믿기 어려우시면 큰 병원에서 다시 검사해 보셔도 됩니다.”그 말을 들은 은채의 얼굴은 서서히 하얗게 질려갔지만, 목소리는 흔들림 없이 짧게 대답했다.“괜찮아요.”은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임신확인서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은 채 병원을 나섰다....펜트하우스.은채가 조용히 거실로 들어서는 순간, 한 남자의 차가운 시선이 그녀를 꿰뚫고 있었다. 막 외출하려던 주혁은 그녀를 발견하자 고개를 돌려,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어디 갔다 왔어?”주혁의 강렬한 눈빛에 은채는 숨이 막힐 듯한 답답함을 느꼈다. 마음속 깊이 숨을 들이쉬고 주혁과 눈을 마주친 은채는 오랜 망설임 끝에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하주혁, 우리 이혼해.”은채의 말이 끝나는 순간, 무거운 정적이 집 안에 내려앉았다. 마치 모든 공기가 얼어붙은 것처럼 차갑고 적막했다. 잠시 후, 주혁의 낮고 냉소적인 웃음이 그 정적을 깨트렸다.“아직도 열이 안 내렸나 보네? 아침부터 무슨 헛소리야.”주혁은 여유롭게 손을 뻗어 은채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마치 그녀가 아프다고 착각한 듯,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다정하게 굴었다. 그 예상치 못한 다정함에 은채는 속에서 불쾌함이 치밀어 올라, 주혁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는 진지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혼 서류는 이미 준비했어. 확인하고 사인만 해 줘.”은채는 가방에서 이혼 서류를 꺼내 주혁에게 내밀었다. 그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주혁은 서류를 받아들고 천천히 내용을 훑어보면서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미소는
주혁은 은채의 손을 뿌리치며 비웃듯이 말했다. “다 안다면서? 그럼 직접 알아봐.” 은채는 주혁이 무심히 옆을 지나쳐 나가는 모습을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그녀의 가슴 속에 서늘한 감정이 스며들며 얼어붙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은채는 주먹을 꽉 쥐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 있었다. 시간이 많지 않았기에, 이혼을 더 미룰 수는 없었다. 류씨 가문은 결코 은채가 이 아이를 낳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었다. 은채는 배가 불러오기 전에, 가능한 한 빨리 B시를 떠나야만 했다.곧 은채가 이혼을 원한다는 소식이 류씨 가문에 전해졌다. 류씨 가문의 안주인, 심혜영은 은채를 급히 펜트하우스에서 데려왔다.류씨 저택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심혜영은 다가와 은채의 뺨을 세게 때리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류은채, 너 지금 우리 가문을 망하게 하려는 거야? 하씨 가문에 시집갔으면서 무슨 불만이 있다고 감히 이혼을 요구해?” 심혜영의 손길에 은채의 하얀 뺨이 붉게 부어오르며 화끈거렸다. 그 눈빛에서 나타나는 분노를 보며 은채의 눈에는 잠시 슬픔이 어렸다. 은채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하주혁은 외국에서 다른 여자를 데리고 돌아왔어요. 그래서 하주혁이 먼저 이혼을 요구하기 전에, 제가 먼저 결정을 내리는 게 나을 것 같았어요.” “엄마, 저는 3년 동안 언니의 이름으로 살아왔어요. 이제 모든 걸 끝내고 싶어요.” “저는 류은채로 살고 싶지, 류은비나 하씨 집안의 며느리로는 살고 싶지 않아요!” 은채는 억눌린 감정을 터뜨리듯 말했지만, 돌아온 것은 연민이나 따뜻함이 아니었다. 심혜영은 은채의 입을 재빨리 막으며, 이를 악물고 경고했다. “조용히 해! 은비를 망쳐놓은 것도 모자라서 이제 우리 집안까지 망치려는 거야? 류씨 가문이 무너지면 네가 편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아?” 심혜영의 매서운 모습에 은채의 입가에 쓴웃음이 스쳤고, 눈가에 맺힌 눈물이 차오르다 결국 흘러내렸다. 그녀는 눈물을 닦아내며 차분히
은채의 목소리에는 억누른 서러움이 묻어났지만, 그녀는 감정을 최대한 가라앉히려 애썼다. 그러나 은비는 은채의 미묘한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단지 감정이 북받쳐 오른 것이라 여긴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응.” 은비는 방 안을 둘러보며 다른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자,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은채와 은비는 한 배에서 태어난 쌍둥이 자매였다. 은비가 찾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은채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바로 주혁이었다. 은채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한숨이 밀려오는 것을 느끼며, 어떻게 이 상황을 설명해야 할지 망설였다. 마음 한구석이 돌덩이처럼 무겁게 내려앉은 듯 답답함이 가득했다.은채의 굳어가는 표정을 본 심혜영은 경계의 눈빛으로 그녀를 흘깃 쳐다보더니, 은비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은비야, 은채는 할 일이 많단다. 이제 보내줘야지.” 심혜영은 은채가 은비 곁에 오래 머물며 불필요한 말을 꺼낼까 봐 걱정이 됐다. 은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은채의 손을 놓아주었다. 심혜영은 기다렸다는 듯이 은채의 손목을 붙잡고 병실 밖으로 데리고 나와서는 경고하듯이 말했다. “은비는 이제 막 깨어났어. 이혼 얘기는 아직 일러.” “당분간은 내 말대로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게 좋을 거야.” 은채는 심혜영의 차가운 경고에 얼굴이 굳어졌지만, 차분하게 한숨을 내쉰 뒤 답했다. “너무 오래 기다리진 않을 거예요.” 심혜영은 불쾌한 표정으로 은채를 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 “그건 네가 결정할 일이 아니야. 잊지 마, 네 언니가 왜 병상에 누워 있는지!” 그 말에 은채는 가슴이 찔리는 듯한 아픔을 느끼며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심혜영은 여전히 냉담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차갑게 덧붙였다. “은비가 완전히 회복되면, 그때 네 자리로 돌아가면 돼.” 은채는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심혜영은 그녀의 침묵에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쏘아보다가, 멀리서 다가오는 인물을 보고 태도를 바꿨다. “됐어. 은비가
심혜영은 은채를 바라보며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은채는 지금 막 잠들었어.” “은비가 어젯밤 잠을 못 자서 몸이 좋지 않다니까, 주혁이가 은비를 데리고 가는 게 좋겠네. 은채는 다음에 다시 와서 보면 되니까 어서 가 봐.” 심혜영은 은채를 경계하듯 바라보며, 그녀가 협조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혁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은채를 바라봤다. “어디 아파?” 은채는 주혁의 말에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깊은 눈동자에는 걱정보다는 어디엔가 조소가 어리어 있었다.은채가 대답하기도 전에, 심혜영이 먼저 나서며 말했다.“은비가 어지럽다고 했으니, 먼저 가서 쉬는 게 좋을 것 같아.” 주혁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은채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은비가 몸이 안 좋다니까, 먼저 데리고 가야겠네요.” 주혁이 은채를 껴안는 모습을 본 심혜영의 얼굴에는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기쁨과 불안이 뒤섞인 표정으로,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주혁이 은채를 데리고 나가는 모습을 지켜봤다.두 사람이 병원 복도에서 사라지자, 심혜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병실로 돌아갔다. 병실 문을 열자마자, 은채와 똑같은 얼굴을 한 은비가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류승천은 조용히 은비의 뒤에 서 있었다. 심혜영의 심장은 철렁 내려앉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은비야... 다 들었어?” 은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병실 안은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은비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간신히 들려왔다. “잘 됐네.” 그녀의 목소리는 힘겨워 보였고, 붉게 충혈된 눈에서는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심혜영은 다급히 은비 앞에 무릎을 꿇고 변명하듯 말했다. “은비야, 화내지 마. 엄마가 이러는 데는 이유가 있어.” “이렇게 해야만 네 자리를 지킬 수 있었어.” 그러나 은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휠체어의 팔걸이를 꽉 잡으며 온몸이 떨리고 있었다.자신의 쌍둥이 동생이 자신의 이름으로 사랑하는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