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공관에서 나와, 도혜선은 나를 집으로 데려다주었다. 나는 갈아입을 옷 두 벌을 챙겨 그녀에게 바로 공항으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가는 길에 나는 장영식과 이동철에게 각각 전화를 걸었다.그러자 이동철이 말했다.“제가 같이 가드릴 수 있어요! 혼자 괜찮겠어요?”“이동철 씨 임무가 더 막중한걸요. 반드시 증거를 찾아내야 해요. 그것이 승리의 관건이니까요. 저는 괜찮으니 걱정 마요!”나는 엄숙히 이동철에게 신신당부했다.이동철의 말투에서는 그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는듯한 게 여실히 보였다. 회사의 일은 이동철이 있기에 나는 조금도 걱정되지 않았다. 다만 이런 관계는 그가 처리할 수 없었는데, 해외에서 몇 년 동안 지낸 탓에 복잡한 인간관계에는 이미 무뎌졌기 때문이다.차 안에서 나는 도혜선을 조롱하며 말했다.“언니, 아이디어 진짜 좋은데? 나이가 많아서 그런가, 역시 이런 쪽은 언니가 나보다 낫다니까.”그러자 도혜선이 나를 힐끗 째려보았다.“나이가 많아서 그렇다니, 누가 그래? 네가 몰라서 그렇지, 네 머리는 우리 중 누구보다도 좋아. 단지 신호연에게 몇 년 동안 갇혀 사느라 쓸 기회가 없어서 무뎌진 거지. 단연코 확신하는데, 만약 네가 여태껏 신흥을 관리해왔다면, 신호연이 관리하는 현재의 신흥보다 몇 배는 더 나았을 거야.”“꼭 그렇다고 할 수도 없어. 호연 씨도 호연 씨의 장점이 있거든. 그이는 이익을 더 중요하게 여겨, 이쪽은 나보다 낫지. 나는 가끔 의리를 너무 중하게 여겨서 믿음 때문에 융통성 있게 접근하지 못해!”나는 나 자신을 검토해보았다. 사실 오늘 이청원의 가르침은, 내가 자신의 이런 약점을 더욱 명확히 알아챌 수 있게 해주었다.“인제 보니 너 더 발전할 수 있겠는데?”도혜선은 웃으며 나를 조롱했다.“다음부터는 돈이라도 받아야겠어!”그러자 나는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언니, 차라리 신흥 주식을 사지? 홍보도 담당하고 말이야!”“하... 정말 모리배 아니랄까 봐!”그녀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다 같이 놀려고
가게 주인뿐만 아니라 파마를 하고 있던 여자도 같이 대화에 참여하는 걸 보니, 그들은 그 집 사람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알고 보니 변희준이 이렇게 괴상하게 변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변희준은 학자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원래는 화학 선생님이었고 울산의 한 공대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고 한다.그는 사업에 몰두하여 늦은 나이에 결혼했고 중년의 나이에 아들을 얻었다. 이것은 가정에 그야말로 금상첨화와 같은 일이었고 나날이 행복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을까, 그의 단꿈은 5년밖에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 시기는 변희준이 가장 잘나갔던 시기로, 그는 가장 젊은 박사과정 지도교수로 임명되어 집도 나눠 받았다.원래대로라면 이것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큰 경사였지만, 모든 비극은 그 집에서 시작되었다. 거실 두 개에 방 세 개가 딸린 집은 그의 모든 기쁨을 앗아갔다. 바로 아들이 새집으로 이사 온 다음 해에 백혈병 진단을 받았기 때문이다.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변희준의 단꿈은 그만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그렇게 그는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며 아이의 병을 고쳐주다가 결국 집안 재산을 탕진하여, 돈도 사람도 전부 잃고 말았다. 변희준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이는 어려서부터 몸이 줄곧 좋을 뿐만 아니라 팔팔하고, 영리하고 총명하기 짝이 없었는데, 왜 갑자기 이런 병에 걸리게 됐는지 말이다.그는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수년 동안 노력했다. 역시나 “공든 탑이 무너지랴”라는 말이 있듯이 변희준은 마침내 놀라운 결론을 얻어냈다. 바로 그 집에 있는 유해 물질이 기준치를 심각하게 초과해 초래된 일이라는 것이었다. 조사하는 과정에서 또 한 명의 어린아이가 안타까운 일을 당했는데, 그 사실로서 변희준이 내린 결론은 더욱 힘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법원에 개발업체에 대한 고소장을 제출했다.“그 당시 그 일은 매우 떠들썩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는데, 듣자 하니 나중에 정말 승소해서 적지 않은 돈을 받았다고 하더라고!”파마하던
변희준의 표정에는 불안함이 가득했다.“나가요! 여기 아픈 사람 안 보여요?”그의 말투는 매우 짜증스러웠는데, 이건 분명히 일종의 당황스러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제가... 아내분을 좀 봐도 될까요?”나는 매우 조심스럽게 그의 의견을 물었다.“제가 보기에... 아내분이 조금 심각한 상황인 것 같아서요!”그러자 그는 조금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마에는 어느새 작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나는 서둘러 말을 이어갔다.“저 경험 있어요! 아마 도와드릴 수 있을 거예요!”몇 년간 집에서 아픈 아이를 돌봐오며, 나는 일이 생길 때마다 대부분 스스로 대처했다.그는 나를 힐끗 보더니 나의 얼굴에서 진정성을 읽었는지, 그제야 한 발짝 물러섰다. 그러고는 침대 위에 있는 여자를 보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마도 조금 열이 나는 것 같아요.”나는 얼른 앞으로 다가가 여자의 이마와 목에 각각 손을 대보았다. ‘이게 어딜 봐서 조금이야, 불덩이처럼 뜨거운 게 고열이라면 모를까!’이윽고 나는 다급히 물었다.“얼마나 됐어요?”“어젯밤부터예요, 아침까지 깨어있었는데, 내가...”“선생님, 일단 병원으로 가봐야 합니다. 이렇게 내버려 둬서는 안돼요! 체온계 있나요?”내가 이렇게 묻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어...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요!”보아하니 그는 평소에 책벌레로, 집안의 일은 모두 그의 아내가 돌보는 것 같았다.나는 서둘러 이해월에게 말했다.“빨리 구급차 물러요, 구급차!”그리고 나는 침대 위에 있는 여자를 작은 소리로 불렀다.“저기요, 일어나보세요, 제 말 들려요?”뒤이어 나는 몸을 일으켜 세우며 변희준을 바라보았다.“선생님, 병원에 가야겠습니다. 이미 정신을 잃으셨어요.”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눈빛에는 당황스러움이 가득 찬 듯 보였다. 마치 속수무책인 아이처럼, 변희준은 의지하려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아... 아가씨는... 저는 뭘 해야 되죠?”“지금은 필요 없습니다. 병원에 가서 검사받은
이 자료를 손에 넣자, 내 마음속의 그 큰 바위는 마침내 땅에 떨어졌다. 나는 변희준의 도움에 매우 감사를 표했다. 그러자 그는 또 자신의 가방에서 다른 자료를 꺼냈다.“이건 내가 특별히 에메랄드 가든의 사장에게 부탁해 얻은 홍보자료에요, 그리고 아가씨와 같은 몇 가지 재료의 자료, 심사 비준서류 복사본, 검측 보고서, 합격증 등등...”그는 하나하나 나에게 보여주며 소개를 이어갔다.“또 영상, 음성자료, 모두 에메랄드 가든 도장이 찍혀있으니 도움이 되기를 바라요!”그 자료를 보고 나는 정말 감동해 할 말을 잃었고 자신도 모르게 허리가 굳어졌다, 마침내 구원되었다고 생각되자 나는 연신 말했다.“감사합니다!”이윽고 변희준은 매우 진지하게 나에게 말했다.“아가씨, 나는 단지 아가씨가 떳떳할 수 있기를 바라요, 모든 공사 계약은 꼭 정직하게 품질을 우선으로 생각하세요!”“안심하세요, 선생님! 그게 바로 제 좌우명이니까요!”나는 정중히 그에게 보장했다.그는 시계를 힐끗 보더니 나에게 말했다.“시간이 촉박하니 더 고맙다는 말하지 않을게요. 아가씨도 이만하면 많이 도와줬으니 이만 돌아가요!”나는 서둘러 변희준에게 부인의 상태를 전했다. 그녀는 일찍 정신을 차린 뒤였고, 나는 이해월에게 간병인 한 명을 데려올 것을 부탁했다. 물론 비용은 내가 내고 말이다.모든 것을 배치하고서야, 밤중에 나는 이해월과 함께 공항으로 가서 마지막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돌아갔다.도착해서 밖으로 나온 우리는 이동철과 장영식이 데리러 나온 것을 발견했다.차에서 나는 그들에게 자료를 보여주었고, 이동철도 그들이 자료를 위조한 증거를 확보하고 관련자들을 추려냈다는 소식을 전했다.나쁜 짓을 하면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른다고, 가장 중요한 순간에 나는 천우그룹 회의실에서 아주 멋진 ‘뒤집기’ 기술을 선보였다.한편 그날, 그들은 십중팔구로 이길 것이라 생각했는지 많은 기자를 초청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오히려 나에게 잘된 꼴이 되어버렸다. 나의 강력한 증거로 그들은 전혀 반격할
나는 울산으로 돌아가 곧바로 병원으로 향했고, 다시 변희준을 만났다.이유는 바로 내가 이번 “싸움”에서 이겼기 때문에 그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해주기 위해서였다. 그는 우리가 이렇게 빨리 다시 만날 줄 전혀 생각지 못한 모양이었다.아니나 다를까, 변희준은 아내의 입원 때문에 모든 생활이 엉망이 되었고, 나는 그를 도와 집안일을 처리했다.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나는 사무실 인테리어를 하는 바람에 이번 주에는 출근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비로소 변희준은 안심하고, 도우미를 고용해 그들을 돌보게 하라는 나의 제안에 동의했다. 곧이어 나는 진사원에게 믿을 수 있는 도우미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다.일주일의 시간을 빌려, 나는 변희준과 함께 에메랄드 가든에 관련된 일들에 대해 많이 알아보았고 원료 상의 많은 문제에 대해서도 함께 얘기를 나눴다. 그제야 나는 왜 변희준이 외부 사람들에게 “가까이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는지 깨달았다.그는 원칙주의자였는데, 아들의 사망은 그가 세운 모든 원칙을 더욱 굳게 지키도록 했다. 어떠한 이유도 그의 원칙을 흔들 수는 없었다.그렇게 그는 더욱 괴팍해져갔고, 극히 적은 사람과 소통했다. 변희준의 세계에는 그가 엄격하게 통제하는 표준 데이터만이 존재했다.이동철의 전화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틀 정도 더 이곳에 머물렀을 것이다. 서울에 돌아가기 전, 나는 변희준의 집안일들을 전부 분배하고 나서야 그에게 작별인사를 건네고 떠났다.이동철이 전화로 배현우의 일을 말했기 때문에, 나는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배현우 씨 최근 상태가 좋지 않아서 M국으로 건너가 치료를 받아야 한다네요. 비록 찌라시이기는 하지만, 배유정이 이미 서울로 돌아온 것은 사실이에요.”나는 깜짝 놀랐다.“또 돌아왔다고요?”“돌아왔을 뿐만 아니라 PH재단 최대주주까지 데려왔답니다. 지분을 나눠 아시아 본부를 완전히 되찾을 생각이에요.”나는 이동철의 말을 듣고 걱정이 쌓여 말했다.“인제 보니 그럼 배유정이 얼마 전 외국으로
이동철의 말은 내가 혼란스러워했던 PH그룹과 천우그룹의 관계를 단번에 정리해주었다.“그러니까 배천석 부부가 사고를 당한 후, 배유정이 위기에 순간 천우그룹을 대신 인수했다는 말이죠?”“맞아요, 왜냐하면 그때 배현우 씨가 고작 10살밖에 되지 않았었거든요.”이동철은 아주 구체적으로 말했다.이 점은 이제 분명해졌지만, 나는 여전히 배현우가 왜 이렇게 많은 세월이 지나서야 천우그룹을 인수했는지 이해되지 않았다.그러자 이동철이 말을 이어갔다.“아마 이번에는 수법이 더 강할 겁니다. 배유정은 배현우 씨가 혼수상태에 빠진 틈을 타서 직접 PH와 천우그룹의 사업을 통합하려 하고 있어요. 그래서 지분을 나눠 PH와 천우그룹을 강제로 묶어놓으려 하는 거고요.”나는 순간 마음이 조급해졌다.“그럼 천우그룹이 너무 손해인 거 아닌가요? 이렇게 오랫동안 고생해왔는데, 남한테 죽 쒀준 꼴이 되는 거잖아요.”“그래서 이번에 배유정의 행동은 재단 전체를 뒤흔든 겁니다. 사실 대외적으로는 모두 천우그룹으로 불렸지만, 그들 내부에서는 여전히 PH재단과 천우그룹을 분리하고 있어요. 두 세력은 합해질 수 없습니다. 저는 그들 재단 전체가 천우그룹이라고 불렸던 데는 다 이유가 있다고 봐요.”나는 단번에 이동철의 말뜻을 알아차렸다.“그 말은 배유정이 겉으론 자기 오빠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왔다는...”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동철은 콧방귀를 꼈다.“어디 이것뿐이겠어요, 배유정은 분명 더 큰 권리를 장악하려고 할 겁니다. 생각해봐요, PH는 오래전부터 위축되어 있었어요. 설령 후에 살아났다 해도 그건 배천석의 공로죠. 새로 태어난 천우그룹은 재력이든 물력이든 시장이든 이윤이든 모두 PH재단보다 힘이 있습니다. 그러니 배유정은 당연히 천우그룹의 이름을 내걸어야 하겠죠. 그렇지 않으면 누가 그들 PH재단과 사업을 하겠어요?”“정말 못된 독재자가 따로 없어요!”나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이번에 배현우 씨가 혼수상태에 빠진 후에 그 사람들은 모두 본색을 드러냈어요. 심지
도혜선은 고급스러운 큰 방을 예약했고, 우리의 방은 안에 온천탕이 있는 구조였다. 그러나 아빠는 너무 보수적이어서 굳이 혼자 밖에 나가서 담그려 했고 우리도 어쩔 수 없이 아빠를 혼자 밖에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이런 곳에 처음 와본 콩이는 흥분되어 마구 소리를 질러댔다. 예쁜 수영복을 입자 콩이는 계속해서 거울을 들여다봤고 엄마도 콩이와 매우 즐겁게 놀아줬다.나는 도혜선과 천우그룹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자 그녀가 미안한 기색으로 나에게 말했다.“이번에는 나도 정말 속수무책이었어. 누구도 배현우 씨랑 만나지 못하게 해서...”“그렇게 말하지 마, 경원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거 잘 알고 있어. 게다가 현우 씨는 다친 후에 경국으로 돌아가 치료하는 중이고, 배유정이 자신의 사람을 쫙 깔아놓았으니, 사실 그건 가택연금이나 다름 없는 거지.”나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특히 지금 그를 M국으로 보내야 한다는 소식이 들려와 어딘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가 혼수상태로 배유정에 의해 M국으로 끌려가는 건, 그야말로 도마 위의 고기가 되는 거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소식 하나 들은 게 있는데, 현우 씨가 M국에 가서 치료받을 예정이래.”나는 무력한 말투로 말했다.“정신이 멀쩡할 때 가는 거면 좋은 일이지만, 지금 현우 씨는...”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도혜선이 내 뜻을 이해했다는 듯 팔을 툭툭 쳤다.“너무 많이 생각하지마!”그녀는 나를 위로하더니 금세 화제를 바꿨다.“배고파?”사실 온천에 몸을 담그는 건 생각 외로 힘든 일이라, 얼마 안 지나서 우리는 허기가 졌다.그녀의 물음에 나는 몸을 일으키며 말을 건넸다.“아빠한테 가볼 테니까, 조금 이따 먹을 거 주문하자! 먹으면서 계속하자고!”그러자 도혜선은 곧장 나의 말에 동의하며 몸을 일으켰다.“그럼 너는 아버님 부르러 가, 내가 가서 주문할게.”나는 몸을 돌려 목욕 타월을 쓰고 밖으로 걸어갔다. 바깥 복도는 고요했는데 이곳의 방음 효과는
내 마음은 북을 치는 쿵쾅거렸고 나도 모르게 두 손을 꽉 쥐었다. 닫혀있던 그 문이 이내내 앞에서 스르륵 열렸고 나의 눈은 빛의 속도로 아까 전 김우연을 보았던 자리부터 스캔했다. 자리에는 음식을 먹었던 흔적은 있지만 김우연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나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룸 안의 상황이 궁금해서 한 발 더 내딛고 그 안을 살펴보려했다. 문을 열던 이가 바로 문을 막아 나서며 내가 이상해 보였는지 뚫어지게 쳐다보며 언성을 높이며 물어왔다.“뭐 하는 거예요?”도혜선은 웃는 얼굴로 사내를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화부터 내지 마시고요. 저 여기 우연 씨 찾아왔는데, 그 사람한테 급히 할 말이 있어서.”이럴 때면 나는 참 도현선 그녀의 당당함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그 사내는 개의치 않고 도현선을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그녀 어깨 너머로 나를 쳐다보며 불쾌한 듯이 말했다.“우연? 우연이고 나발이고 여긴 없어요.”“조금 전에 여기 들어가는 걸 봤어요. 잠깐 몇 마디만 물어보면 된다고요.”도혜선은 전혀 굴하지 않고 덧붙였고, 그에 사내는 몸을 옆으로 돌려 틈을 내주면서 말했다.“여기 어디 우연인지 뭔지 하는 사람이 있는지 들어와 확인해 보던가요.”나는 혜선 언니가 진짜 쳐들어갈까 싶은 생각에 손을 뻗어 그녀의 옷깃을 잡아당겼다.“됐어, 언니. 잘못 본 것 같으니까, 우리 가요.”나는 도혜선을 끌고 우리 룸으로 돌아서려 했고 그녀는 나를 보며 추궁했다.“제대로 다 봤어? 안에 있어 없어?”나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없어. 방에 있는 사람 쓱 봤는데 안 보여. 혹시 나갔나? 그런데 누가 나가는 거 못 봤는데. 진짜 내가 잘못 봤나?”도혜선은 손을 휘저었다.“됐어. 머리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본 게 김우연 그 사람 확실하면 내 생각에는, 김우연이 저 안에 있다고 해도 없다고 우리한테 우겼을 거 같아... 그렇것 같지 않니?”도혜선은 고양이 같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향해 무언의 눈치를 주었다. 당연히 그녀가 전
나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마지못해 고개를 들어 서강민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서강민 씨, 먼저 들어가시죠. 언니가 깨서 서강민 씨를 보면 또 흥분할 것 같은데... 지금 같은 상황에 언니가 회복하는 게 제일 중요하잖아요.”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한마디 더 보탰다.“어떤 일들은 천천히 해야 해요. 언니한테 시간을 좀 주세요. 서로 생각을 정리해 봐요.”서강민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깊은 잠에 빠진 도혜선을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발길을 돌리기 전에도 아쉬움에 한 번 더 뒤돌아보며 나한테 말했다.“고생해 줘요.”나도 담담히 답했다.“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언니에게 시간을 좀 줘요. 언니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할 수 있잖아요.”내가 말하는 회복이 뭔지는 서강민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건 도혜선이 마음에 입은 상처였다. 오늘 도혜선의 행동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그녀의 상처는 아물 수 없을 것이다. 언급만 해도 피가 흘러내릴 만한 상처였다.잠시 후, 서강민은 한발 물러섰지만, 눈길은 여전히 도혜선에게 머물러 있었다. 평온해 보이는 모습 아래에서 어떠한 파도가 휘몰아치는지 나는 몰랐다.한참 전 도혜선이 했던 말들은 마디마디가 주옥이었다. 모두 그녀가 마음속으로만 담아두었던 것들이었고 또한 서강민의 약점이었다. 얼마나 아플지는 서강민 본인만 알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쓰디쓴 독주도 그는 혼자 삼켜내야만 했다.도혜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와 깨어나려는 낌새가 보이고 나서야 서강민은 조용히 병실을 나갔다.나는 마음이 아파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뻗어 도혜선의 손을 맞잡았다.인제야 하루 종일 배현우에게서 연락이 없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쪽에는 어떤 상황인지, 김우연에게서는 소식이 없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도혜선을 보니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 같아 살며시 그녀의 손을 놓고 일어서려 했을때, 그녀는 다시 나를 잡으며 미약한 목소리로 말했다.“가지 마...”나는 너무 놀라 얼른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서강민은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하는 걸까?’“당시의 사고는 내가 저지른 거야. 그녀도 나 때문에 다쳐서 지금처럼 된 거고… 나는 좋은 남편이 아니야. 아내가 식물인간이 되었는데 나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말이야...”서강민은 여기까지 말하며 후회하는 기색을 내비쳤다.“그녀를 마주할 때마다 너무 죄책감이 들고 고민스러워. 나 또한 발버둥 쳐봤지.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나의 일탈을 받아들일 수 있어 해. 그녀한테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내가 널 사랑하고 있다는 거야...”“강민 씨!”도혜선은 꾸짖는 듯한 말투로 그의 말을 잘랐다.“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당신 아내가 듣고 있을 거예요. 저를 끌어들여서 같이 속죄할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의 구세주가 아니에요. 저는 그냥 사람답게 살고 싶은 평범한 여자라고요. 저 좀 그냥 내버려둘 순 없어요?”도혜선은 말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하얗게 질린 얼굴이 일그러지며 그녀는 한 손으로 본능적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나는 깜짝 놀라 그녀 앞으로 갔다.“혜선 언니, 움직이지 마! 위험해...”늑골 골절과 뇌진탕이 있는 환자다 보니 이러한 행동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위험했다.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녀를 안으려고 하는 한지아를 제지했다.“제가 오늘 한 말이 아직도 이해가 안 되나요? 서강민 씨, 저의 인생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당신한테 묶여 당신의 부속품이 되었었는데 저도 자존심이 있어요. 더 이상 당신처럼 지난날의 죄책감을 짊어지며 답답하게 살아가지 않을 거예요.”도혜선은 여전히 분노에 차 외치고 있었다.“매일 제 앞으로 와 지난날의 행동에 대해 속죄하라고 일깨워 주실 필요 없어요! 당신을 보면 저는 지난날 모든 서울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었던 치욕적인 과거가 떠올라요. 당신은 마음 가는 대로 해요. 당신은 아내와 했던 약속을 지켜야 해요.”말을 마친 도혜선은 숨이 차올랐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보였다.
도혜선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계속하여 들려왔다.“당신은 아무런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저 같은 여자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아도 돼요.”그녀는 자기비하적인 말을 내뱉었다.”선아...”“설사 강민 씨가 와이프와의 약속을 안 지킨다 해도 당신의 신분과 지위로 당신에게 더 어울릴만한 사람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저는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하물며 당신네 부부 눈에는 저는 그냥 염치없고 미천한 사람일 뿐이죠. 저 같은 사람은 본처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아요. 사모님이라는 호칭도 어울리지 않죠.”“나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오해하지 마.”서강민은 조급함에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해명하려 했다.하지만 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를 막아섰다.“강민 씨... 해명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의 행동이 모든 걸 설명해 주고 있어요! 장담하건대 아직 당신들이 어떤 의도로 얘기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보가 된 건 아니에요. 그녀는 정말 대단하네요. 죽을 때까지도 제가 이길 수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녀는 아무리 병상에 누워있어도 고상한 사람이고 저는 그냥 미천한 사람일 뿐이니 말이에요.”도혜선은 말을 내뱉으며 입가에 처량한 미소를 비췄다. 누가 봐도 가슴 아픈 미소였다.“이전의 저는 확실히 허례허식에 차 있는 사람이었지만 저도 성장했어요. 정신 차렸어요. 당신 앞에 있는 저의 진정한 가치가 어떤 것인지 깨달았어요. 저는 하나의 도구, 들러리뿐이었지만 원망하지 않았어요.”그녀는 여기까지 말하고 한숨 돌렸다. 얼굴빛은 아까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다.“하지만 이제 저는 자존감을 챙기며 살고 싶어요. 누군가에게 의탁하지 않고 쓰레기같은 취급을 받더라도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며 살고 싶어졌어요.”점점 더 차가워지는 도혜선을 바라보며 서강민은 답했다.“혜선아, 나는 널 한 번도 무시한 적 없어. 나는 그냥 내가 뭘 하든지 네가 다 이해해 줄 줄 알았어.”도혜선의 서강민의 말을 듣고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안색은 더 창백해져 있었다.“이해? 당신이 어떤 말을
방금 허투루 한 말이 어머니의 진실인가 싶다. 보아하니 어머니가 나를 속이는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마음속의 의문점이 점점 많아졌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마치고 차씨 가문의 할머니께 말씀을 드린 후, 위층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도혜선을 보러 가려고 준비했다.그리고 팔도 겸사겸사 검사하려고 했다. 차에 앉고 나서 배현우한테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았다. 이 이른 아침에 뭐 하러 갔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김우연 쪽에 무슨 소식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생각해 보니 이렇게 빠르진 않겠지? 몇 시간밖에 안 됐는데.'병실에 도착하자마자 도혜선이 노발대발하는 장면을 포착했다. 병실에는 도혜선과 서강민 두 사람만 보이고 이미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내가 들어서자 분위기가 좀 이상하고 심상치 않는 것을 느꼈다.침대 옆 머릿장에는 보온병이 놓여있다. 서강민은 오늘도 도혜선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러 온 것 같다.서강민은 침대 앞에 떡 하니 서있었고 침대에 있던 도혜선은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도혜선은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상황을 정리하려고 다가가서 서강민에게 인사를 하고 도혜선에게 다가갔다. "오늘은 좀 어때?""별로야."도혜선은 차갑게 대답하더니 또 말을 건넸다. "지아야, 손님 좀 배웅해 줄래?"난감했다, 도혜선은 서강민을 내쫓으라고 하는 거였다. 난 당연히 그 뜻을 알고 있다. 조심스럽게 서강민을 쳐다보았다. "혜선아, 꼭 이래야 하니?"서강민은 씁쓸한 표정으로 도혜선을 바라보며 물었다."네! 서강민씨, 저는 이미 분명히 말했고 두 번 다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도혜선은 내가 그 자리에 있다고 해서 서강민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았다.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언니, 화 그만 내고 진정 좀 해. 초조해하는 거 알아, 점차 좋아질 거야. 강민씨랑 얘기 좀 하고 있어. 나는 팔 검사해야 돼서, 금방 돌아올 거야!"나는 핑계를 대고 떠나서 그들에게 자리를 비워주었다.
배현우는 나의 우울한 모습을 보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없는 동안에 회사 일도, 한심로얄의 마지막 한방도 둘 다 포기할 수 없잖아요. 신예 쪽 일도 있고, 전희가 다시 살아날 기회를 얻지 않도록 조심해야 돼요. 지금 모든 게 중요한 시기이니까요.""지금 그 누구도 아버지보다 중요하지 않아요! 수십년간 도망치면서만 살았는데 죄책감도 가지고 있었을 거예요, 분명 아주 괴로워하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는데, 내가... 내가 딸로서, 난..."배현우는 내 말을 듣고 나서 침대에 누워 나를 꼭 껴안고 말했다. "일단 내일 소식을 기다려 봅시다. 김우연 쪽에서 어떤 정보를 얻었는지 보고 결정합시다."배현우는 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제 말 듣고 일단 자세요, 내일 일어나서 먼저 할 일들을 처리하고 준비하고 있으세요, 만약에 상황이 좋으면 내일 같이 데리고 갈게요, 당신 마음 충분히 이해해요."배현우가 지금 나를 위로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내가 기분 나빠하는 모습을 보지를 못한다.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 같았다. 배현우의 따뜻한 품에 안기며 눈을 감고 내일 먼저 무엇을 처리해야 할지 생각했다.근데... 눈을 떠서 배현우를 쳐다보는데 배현우도 잠에 들지 않았다. "현우씨... 할머니가 보존하고 있는 CCTV를 보여주시겠어요?"'그 영상을 꼭 보고 싶었다, 알고 싶었다. 어머니가 어떻게...'"알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자세요, 나중에 보여 드릴게요. " 팔짱을 끼더니 분명히 나를 얼버무리고 있는 것이다. 배현우가 그 장면을 내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밤이 깊었고,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배현우의품에 안겨 점점 잠이 들었다. 아침이 밝았다. 날씨는 여전히 흐렸다. 배현우는 이미 곁에 없었고, 손을 뻗어 그가 누워 있던 곳을 만졌다. 이미 차가운 걸 보니 배현우는 일찍 침대에서 일어났나 보다.'무슨 소식이라도 왔나?'이
"할머니가 이번 사건을 피할 수 있었던 건 당시 큰 병을 앓은 것에 대해 감사해야 했어요. 제 생각에는 반은 꽤병인것 같아요. 직접 사표를 쓰고 나서도 서둘러 호주를 떠나지 않았다는 게 참 슬기로운 선택이었어요.""네?"너무 놀라서 몸 둘바를 몰랐다.배현우는 인정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는 호주를 떠나지 않으셨어요. 그곳에 머물면서 배씨 저택의 인기척을 살피다가 배씨 저택의 요상한 소문들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뒤에야 조용히 호주를 떠나셨어요."나도 모르게 할머니의 메커니즘에 감탄했다."저도 그때 상황을 잘 몰라서, 할머니도 몸이 허약했고 내 행방을 알아 볼 길이 없어 그 비밀을 계속 지켜왔었나봐요. 부하들이 할머니를 찾고 나서도 여전히 어리석은 척을 하고 있었지 뭐에요."배현우는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할머니께서 저를 두눈으로 직접 보고서야 그걸 꺼냈어요."배현우의 말을 듣고 나니 할머니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던 중 배현우가 나를 쳐다보더니 나의 지친 모습을 보고서야 손을 들어 대문을 열어 장벽들이 천천히 열리는 걸 볼 수 있었다.차는 왔던 길을 따라 경원으로 다시 돌아갔다. 벌써 자정이 되어 우리 둘은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 방에 돌아왔다.'우리를 배신한 소인이 두 집안을 풍비박산 시켰다니. 오늘 밤 일어난 모든 일들은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간단히 씻고 걱정 가득채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태어나서 얼굴도 한번 못 본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밥은 먹고 다니는지를 걱정해 발 뻗고 자지 못했다. '한강인이랑 한걸은 이미 잡혔는데, 우리 아버지는? 그의 처지는 어떤지.''한씨 부자가 그저 아버지를 인질로 삼아 그들의 안전을 확보하려 했다면 왜 배현우는 그곳의 환경이 복잡하다고 했을가.''이유는 간단하다. 누군가 아버지를 미끼로 삼으려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보고 싶으려는 걸가?''배현우? 아니면 배유정?'생각할수록 더욱 걱정이 됬다.아버지의 이번생은 이미 충분히 힘들다.어머니랑 서로
나는 걱정스레 배현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배현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계속 말했다.“후에 목격자 어르신을 찾고서 한강인을 자세히 조사하니 한강인은 이 모든 것이 일어난 뒤에야 천우 그룹을 떠난 거였어요. 지아 씨도 알잖아요. 그때 당시 천우 그룹은 아직 배유정 손에 있었어요.”“현우 씨의 말은 한강인은 배유정 과도 사이가 틀어졌단 말인가요?”나는 추측하며 물었다.“우리가 조사할 때 이상한 단서 하나가 나왔어요. 한동안 배유정도 한강인을 찾았고 심지어 한강인에 대한 추살령도 내렸어요! 참 이상해요. 배유정은 왜 한강인을 죽이라고 지령을 내린 걸까요?”“이유는 하나뿐이죠. 즉 한강인이 분명 무엇을 알아냈거나? 아니면 어떤 일에 참여하였거나?”나는 대답했다.배현우는 고개를 끄덕이었다.“진백이 죽임을 당했듯이 이 안에는 분명 남들한테 들키면 안 되는 비밀이 있는 거겠죠. 우리는 이 단서를 따라 계속 추적해 보니 한강인의 혐의가 점점 더 드러나더군요. 그리고 그의 아들 한결도 같이 도망쳤어요.”“그러고 보니 이 안에는 분명히 또 다른 요소가 있겠네요!”나는 사색에 잠겼다.“그래서 우리는 추측했죠. 한강인은 확실히 이 사건이랑 연관이 있고 둘이 도주하는 과정에 서로 연락하는 빈도를 보아서 부자 둘은 서로 다른 곳에 있는 것으로 판단했어요.”“그리고 한강인이 도망 다니는 그 시기에 그의 모친이랑 누나 모두 영문도 모른 채 실종되었어요. 지금 보니 그분들은 아마 이미 이 세상을 떠난 것 같네요. 이 때문에 한강인은 고두리에 놀란 새가 돼서 끊임없이 도망치며, 이 또한 한강인이 지금의 상태로 되게 한 원인인 것 같아요. 사실 한강인은 원래 지금의 모양이 아니거든요.”배현우의 말을 듣자 나는 저도 모르게 아까 보았던 한강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강인은 극도의 공포 속에서 엄청 정신적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다른 기타 방식으로 정신을 잃지 않게 버티고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저렇게 말라죽을 정도일 리가 없다.“그리고 한 가
배현우는 나를 한눈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었다.“맞아요. 제 씨 어머니가 얼마나 총명한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어요. 제 씨 어머니는 책 속에 카메라를 숨겨두고 만약 사고가 난다면 여기에 있는 이 물건을 숨겨두었다가 훗날 믿음직스러운 사람에게 주라고 할머니한테만 똑똑히 당부해 두셨어요!”나는 코가 찡긋거리더니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보아하니 제 씨 어머니는 분명 위험이 닥칠 거라는 것을 미리 예감했던 거네요!”배현우는 안색이 조금 어두워지더니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갑자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제 씨 어머니는 만약 자신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할머니더러 애들을 데리고 허씨 가문으로 가라고 할머니한테 당부하셨어요.”나는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고 코를 훌쩍이었다.배현우는 자기 손을 꽉 움켜쥐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참 생각지도 못한 게 모든 것이 제 씨 어머니의 예상대로 일어났고 감춰둔 카메라에 모든 것이 담겼어요! 근데 할머니는 제 씨 어머니의 뜻대로 우리 둘을 순리롭게 허씨 가문으로 데려가지 못했어요.”“급한 나머지 할머니는 고씨 가문에만 소식을 전했고 그마저도 나쁜 놈들보다 동작이 빠르지 못해 그들이 지아 씨를 데려간 후였어요. 그래서 저만 고씨 가문에서 데려갔어요.”나는 눈물을 닦아내면서 그때 당시의 내가 얼마나 힘없고 무력했을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갑작스럽게 어머니가 돌아가신 데다가 배현우와 억지로 갈라지게 되었다.배현우는 내 손을 꽉 잡으며 손에 힘을 주었다.나도 배현우 지금의 심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날 배현우는 눈앞에서 억지로 끌려 나가는 나를 보기만 하고 반항할 수도 없는 그런 무능력함은 아마 배현우한테 평생 잊지 못할 아픔이 되었을 것이다.차 안은 갑자기 조용해졌고 자동차가 앞으로 가는 소리밖에 안 들렸다.한참 뒤에야, 배현우의 잠긴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이런 것들을 찾은 후에야 비행기 추락 사고가 떠올랐고 이로써 모든 것들이 비로소 한강인을 추측하게 했으며 그 이후에 우리는 한강인
이 소식은 그야말로 나를 입이 떡 벌어지게 했다. ‘나를 데려간 게 어떻게 그 사람이지?’“맞아요. 우리는 유일한 목격자를 찾았어요. 그 당시 그쪽 산에서 약재를 캐는 어르신이신데 그때는 중년인이셨어요. 하늘의 뜻인지, 우리가 수년을 찾아 헤맨 끝에야 비로소 이 참극의 전부를 직접 목격한 증인을 찾아냈어요.”“그 어르신 정말로 전체 과정을 모두 목격하셨나요?”나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배현우 얘네가 얼마나 큰 공을 들여야 바다에서 바늘 건지는 것 같은 일을, 그것도 몇 년이 지났는데도 당시의 목격자를 찾아낸 걸까.“어르신의 말로는, 당시 자기는 산 위에서 내려오는 도중에 잠시 계단에서 쉬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아래 도로에서 일어나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해요. 알다시피 외국에서는 약재를 캐는 일은 엄청 드물어요.”배현우는 엄청 뿌듯한 말투로 말했다.“우리 형제들이 엄청나게 고생 많았어요. 십수 년을 하루같이 귀찮음을 마다하고 사건 지역을 탐방하러 다니면서 일말의 흔적도 소홀히 하지 않았어요.”나도 믿어지지 않아 입을 열었다.“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참 노고가 많았어요.”“어르신이 말씀하기를 당시의 장면은 엄청 아슬아슬했대요. 부딪힌 차는 거의 굴러떨어지기에 일보 직전이었는데 후에 폭발했대요. 어르신은 우리의 차가 폭발한 뒤 키 크고 마른 한 남자가 차에서 내리는 걸 똑똑히 봤다고 해요. 그리고 그 남자는 길 왼쪽의 언덕 아래로 달려가 무언가를 찾았대요.”배현우는 그때 당시의 장면을 묘사하였다. 나는 머릿속으로 그때 당시의 상황을 필사적으로 상상해 내려고 하니 머리가 또 아파 났지만, 배현우가 말을 멈출까 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시에 일어난 이 모든 것, 전부 나한테는 엄청난 매력이었다. 나는 지금 내가 찾아낸 산산조각 난 퍼즐들을 하루빨리 제 위치에 맞춰서 하나의 완전한 그림을 만들어 내고 싶었으며 그때 당시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되찾고 싶었다.그 뒤로 난 어떻게 Z 국의 만덕동에서 떠돌게 되었고 또 어떻게 지금의 한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