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은 북을 치는 쿵쾅거렸고 나도 모르게 두 손을 꽉 쥐었다. 닫혀있던 그 문이 이내내 앞에서 스르륵 열렸고 나의 눈은 빛의 속도로 아까 전 김우연을 보았던 자리부터 스캔했다. 자리에는 음식을 먹었던 흔적은 있지만 김우연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나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룸 안의 상황이 궁금해서 한 발 더 내딛고 그 안을 살펴보려했다. 문을 열던 이가 바로 문을 막아 나서며 내가 이상해 보였는지 뚫어지게 쳐다보며 언성을 높이며 물어왔다.“뭐 하는 거예요?”도혜선은 웃는 얼굴로 사내를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화부터 내지 마시고요. 저 여기 우연 씨 찾아왔는데, 그 사람한테 급히 할 말이 있어서.”이럴 때면 나는 참 도현선 그녀의 당당함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그 사내는 개의치 않고 도현선을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그녀 어깨 너머로 나를 쳐다보며 불쾌한 듯이 말했다.“우연? 우연이고 나발이고 여긴 없어요.”“조금 전에 여기 들어가는 걸 봤어요. 잠깐 몇 마디만 물어보면 된다고요.”도혜선은 전혀 굴하지 않고 덧붙였고, 그에 사내는 몸을 옆으로 돌려 틈을 내주면서 말했다.“여기 어디 우연인지 뭔지 하는 사람이 있는지 들어와 확인해 보던가요.”나는 혜선 언니가 진짜 쳐들어갈까 싶은 생각에 손을 뻗어 그녀의 옷깃을 잡아당겼다.“됐어, 언니. 잘못 본 것 같으니까, 우리 가요.”나는 도혜선을 끌고 우리 룸으로 돌아서려 했고 그녀는 나를 보며 추궁했다.“제대로 다 봤어? 안에 있어 없어?”나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없어. 방에 있는 사람 쓱 봤는데 안 보여. 혹시 나갔나? 그런데 누가 나가는 거 못 봤는데. 진짜 내가 잘못 봤나?”도혜선은 손을 휘저었다.“됐어. 머리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본 게 김우연 그 사람 확실하면 내 생각에는, 김우연이 저 안에 있다고 해도 없다고 우리한테 우겼을 거 같아... 그렇것 같지 않니?”도혜선은 고양이 같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향해 무언의 눈치를 주었다. 당연히 그녀가 전
수상쩍은 생각이 들던 순간, ‘띵’하고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고 고개를 들자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스르륵 열렸다.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은 채 눈앞에 펼쳐진 19금 장면에 깜짝 놀라 얼굴이 화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엘리베이터 안에 있는 그들도 낯선 시선을 느꼈는지 화들짝 놀라며 두 사람으로 갈라졌고 4개의 동공이 나를 행했다. 생각지도 못한 마주침과 갑작스러움에 나는 정신이 반쯤 나갔고, 두 손이 내 생각을 거치지 않고 그들을 향해 마구 흔들고 있었다.“아무것도 못 봤어요! 두 분 하시던 거 계속...”눈앞의 둘이 바로 이미연과 한 사내였다. 어색한 상황에 너무 자세히 쳐다볼 수 없었지만, 사내는 마른 체격에 큰 키의 소유자였고 얼핏 보기엔 소탕해 보였다. “지아야.”그녀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내 이름을 부르며 발 빠르게 엘리베이터에서 걸어 나와 나의 손목을 붙잡았다.“지아야... 왜...”이미연에게서 옅은 술 냄새가 풍기는 걸 보니 둘이 한잔 걸친 모양이다.“음... 그게, 우리 본 지도 오래되었고, 내가... 울산에서 올라오는 길이라... 내일! 내일 얘기하는 게 좋겠어.”그 사내가 엘리베이터에서 걸어 나오는 걸 본 나는 얼른 도망치듯 미연의 손을 뿌리치고 엘리베이터로 도망치듯이 들어갔다.이미연은 얼굴이 홍당무로 달아올라서는 발을 동동 구르며 나를 불렀다.“지아야! 정말 뭔 일 있는 거 아니야?”“아니야, 내일 전화해.”나는 그녀를 향해 통화의 제스쳐를 취했고 마침 엘리베이터 문도 닫혔다. 나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헛웃음을 지었다.‘우리 이미연 씨가 그동안 연애하느라 바쁘셨네. 우정보다 사랑이다. 이거지? 내일 제대로 혼내줘야지. 죽었어! 이미연. 이렇게 중차대한 일을 나한테 귀띔도 안 해주고 말이야.’그럼에도 나는 내심 기뻤다. 이미연 그녀 역시 곁에 반쪽이 필요하다 늘 생각하고 있었다. 아까 그 사내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 마냥 아쉬웠다.온천에 놀러 가서 체력을 너무 소모해서인지 이미연 커플을 봐서 마음이
나는 그런 생각이 든 자신에게 깜짝 놀랐다. 언제부터 그렇게 이청원을 믿고 의지했다고 그러는지 자신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핸드폰을 켜 다시 기사를 열어보았다. 밑에 새로 달리는 댓글을 보면 여러 가지 관점이 끊임없이 나타났고 별의별 말들이 다 있었다.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흐름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었다. 누군가는 배현우의 상태가 이상적이지 않은 점이 그룹에는 큰 리스크기에 배유정에 권리를 넘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큰 회사에 지도자가 없다는 건 절대 이지적이지 못하다는 건 누구나 다 하는 도리다. 언제까지 배현우가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게 경영에 있어 정답은 아니라는 입장이었다.크디큰 재단이 경영자 한 사람 때문에 멈춰 설 수는 없는 법이고, 천우 그룹 또한 함께하는 파트너와 제휴업체들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게 댓글에서 비치는 대세 목소리였다. 그와 반대로 배현우의 이익을 지켜야 한다는 목소리도 컸다. 그들은 배유정이 이 시점에서 천우 그룹을 통합하는 걸 극도로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업무 대리를 봐도 되는 데 굳이 손을 뻗어 세력을 키우려는 게 야심이 너무 빤히 드러난다고 했다.그리고 중립적인 입장을 보이는 글들은 배유정이 지나친 건 맞다고 하면서도 천우 그룹에 지도자가 비어서는 안 된다고 짚었다.소식은 눈덩이가 구르듯 조금씩 커졌고 전혀 잠잠해질 것 같지 않았다. 추세가 배유정을 지지하는 측으로 기울기 시작했고 대서 무리도 점점 커져만 갔다.소식은 일파만파 빠르게 퍼져서 나중에는 많은 누리꾼들이 아예 배유정이 통합에 대해 공식적인 발표 하기를 기다리기에 이르렀다.나 역시도 그들의 정서에 영향을 받기 시작했고, 좌불안석이었다.대중의 목소리가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걸 보고 있자니 끝내 참지 못하고 조민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기는 여전히 꺼진 상태였다.대세가 이미 꺾인 것 같은 불안감이 밀려왔고 어제 김우연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게 설명이 되는 것 같기도 했다. ‘나를 원망하고 있는 것
나는 눈앞의 광경에 경악을 금치 못한 채 멍해지고 온몸이 굳어졌다. 현실인지 꿈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이 머리가 순간 하얘지고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멀지 않은 곳에 있는 천우 그룹 빌딩에서 줄지어 선 차량이 차례로 문 앞 작은 광장에 멈춰 섰고 뒤이어 정장 차림의 경호원들이 줄지어 차에서 내렸다. 정예 군대가 전장을 나가듯이 열을 맞춰 우르르 달려드는 기자들을 격리했다.처음에는 무슨 대단한 인물이 왔나 싶었다. 뒤이어 드러난 모습에 나는 정신을 똑바로 차릴 수 없었다.중앙에 세워둔 마이바흐에서 곧게 뻗은 실체가 차에서 내리자, 주변의 여성들은 여느 팬클럽을 겨눌 정도의 비명을 질러댔다. 모두 그의 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그에게 빨려 들어갔다.그 순간 나는 내 두 눈으로 그 형체를 똑똑히 보고야 말았고, 기자들도 미친 듯 웅성거렸다.‘저... 저건 배현우?’밤이고 낮이고 손꼽아 그려보던 배현우였다.차갑지만 선이 뚜렷한 얼굴에 하늘에서 재림한 왕처럼 당당한 기세를 보여주고 있었고 제왕 같은 고귀함과 위엄을 온몸으로 풍겼다. 깔끔하게 떨어지는 검은 색 슈트도 그의 위엄을 한층 업그레이드시켜 주며 아무도 비길 수 없는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차에서 내린 그는 태연하게 정장 단추를 정리하며 어깨를 펴고 당당한 모습으로 그의 빌딩 안으로 걸어 들어갔고 내딛는 발걸음마다 모두의 경악을 불러왔다.아마 이 순간 전 세계가 놀라움에 탄성을 내지르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이런 연극은 정말 상상치도 못한 것이었다.그의 옆에는 김우연이 함께 있었다.나는 차 안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며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고 차에서 내려 뛰어갈 힘마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깨어났다고? 현우 씨가 정말 깨어난 거야? 아니면 애초에 쓰러진 적이 없었던 걸까?’그 당당한 기세와 여전히 아름다운 미모에 모두를 놀라게 할 위엄까지...어딜 봐도 근 한 달간 사경을 헤맨 환자 같지는 않았다.‘그래, 현우 씨는 애초에 병상에 누워있지 않았을 거야.’나는 너무 놀
나는 그를 바라보았고, 마음속에서 의심이 들었다. 혹시 그가 나도 속인 것은 아닐까? 마치 배현우가 설계한 이 판에 속은 상대는 나 하나밖에 없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예전부터 이 판에서 나는 아마도 늘 교묘하게 이용당하는 장기 말일 뿐이었고, 그저 아무것도 모른 채 홀린 듯 누군가의 손짓에 따라 움직여지고도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는 존재 같았다.동철은 내 눈빛에 놀랐는지 입꼬리에 경련을 일으키더니 말했다."대표님!"나는 그제야 번뜩 정신이 들어 눈빛을 거두고는 웃으며 말했다."또 내가 알아야 할 뉴스가 있나요? 날 보기 좋게 속인 게 좋은 소식이겠지만요!""대표님, 설마 제가 대표님을 속이고 있다고 의심하는 겁니까?"동철이 민감하게 반응하며 질문했다.나는 어이가 없었다. 배현우도, 조민성도, 김우연도 줄줄이 나를 배신했는데 이제 와서 내가 누굴 믿을 수 있겠는가?나에게는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 설마 배현우가 모르고 있단 말인가?생사의 갈림길이라고? 하, 걱정으로 잠을 설쳤던 날들도, 모두 나 혼자만 놀라고 걱정했던 게 고작 그들의 ‘쇼’에 놀아난 것이었다니.나는 감정을 추스르고 동철을 보며 물었다."말해봐요, 또 무슨 뉴스가 있나요?"동철은 나를 한 눈 쳐다보더니 물었다. "호주를 제외하고 기타 나라에 있는 천우 그룹의 재무 정보가 모두 봉쇄되었다고 합니다."나는 순식간에 깨달았다.설마 우연...?"인제 보니 아주 큰 금액이 되겠네요!" 나는 중얼거렸다.아무리 바보여도 마음속으로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이 잘 짜인 판에서 내가 모르는 세세한 디테일이 있을 것이고, 내가 아무리 그 과정을 좇아간다 한들 결과는 이미 정해졌을 것이다.나는 검정 가죽 의자에 기댄 채 허탈하게 웃었다. 스스로에 대한 비웃음이었다.‘그래, 어찌 됐든, 장기 말이라고 해도 쓸모 있는 장기 말이겠지!’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사람들을 향해 손짓했다."그들은 그들이고, 우린 우리대로 살아야죠. 해야 할 일들도 많고, 논할 비즈니스도 아직 많으니까요. 오
배유정은 이대로 끝낼 수가 없어 천우 그룹의 모든 경영권을 내놓는 대신 배현우더러 이른 시일 내에 이세림과 결혼식을 올리라고 요구했다. 결혼 후 기존 배 씨 세력과 천우 그룹을 합병시키고 은퇴하겠다는 뜻이었다.하지만 뜻밖에도 이렇게 큰 유혹을 배현우는 모든 주주 앞에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해버렸다. 그는 배유정이 내놓은 협상안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고 이세림과 정략결혼을 하지도 않을 것이며 배씨 가문과 합병할 생각도 없다고 했다. 배 씨의 낡은 잔재는 배유정에게 영원히 남겨둔 채 천우 그룹과의 모든 연결을 끊어낸다는 뜻이었고, 앞으로의 비즈니스도 자연스럽게 끊기게 된 것이었다.배유정은 말문이 턱 막혔다. 배현우가 이토록 단호하게 거절할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다시 말해 이번에 천우 그룹은 철저히 배 씨라는 짐 덩어리를 벗어던지고 새로 태어나 독립된 천우 그룹으로 다시 세상에 나온 것이었다.이제야 나는 왜 배현우가 천우 그룹의 본부를 호주에 세우지 않고 J국에 세웠는지를 깨달았다.배유정은 천우 그룹과 앞으로 어떠한 관계도 이어지지 못하고 심지어 파트너 관계도 유지할 수 없음을 알게 되고는 화를 못 이겨 병원에 입원했다고 한다.또 어떤 뉴스에서는 이것마저 회의장을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 고의로 쓰러졌다는 소문도 있었다.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반 달이 지났고 뜨거운 감자였던 천우 그룹 사건도 조금씩 매듭이 지어졌다.나는 천우 그룹의 프로젝트 부서에 불려가 계약 문제를 논의했다.배유정의 임명으로 기 대표가 아시아 본부 CEO 자리에 앉아있었는데 20여 일 만에 배유정의 실패와 함께 사라짐에 따라 그가 처리했던 모든 사항이 백지화가 된 것이었다.이전의 계약은 회복됐고 천우 그룹과 체결한 계약서도 효력을 회복했지만 다시 서명이 필요한 상황이었다.그 순간 나는 긴장감에 몸을 떨었다. 반 달이나 기다린 끝에 드디어 처음으로 만나는 자리인데 어떻게 그를 마주하고 뭐라 말하면 좋을지 몰랐다.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해월이와 법무팀과 함께
천우 그룹을 나서자 나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해월이도 내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다가와서 말했다."제가 운전할게요."차 키를 해월에게 건네주고 차에 오르고는 창밖으로 빌딩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웃음을 내뱉었다. 어쩌면 이 빌딩의 존재 자체가 나한테는 순식간에 사라져 없어지는 신기루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아니면 처음부터 나라는 존재는 웃음거리일 뿐이었을 수도 있다. 임윤아가 있든 없든 나는 그저 방패막이에 불과했으니까.회사로 돌아온 나는 내내 기분이 다운되어 있었다. 해월은 나를 찾아온 직원을 모두 돌려보내고 나에게 혼자만의 공간을 만들어줬다. 나만의 공간에서 의자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배현우와의 모든 만남을 회억해 보았다. 사소한것 하나하나 다 기억하고 있었지만 정작 그와 나의 관계를 정의할 수가 없었다.얼마나 지났을가, 해월이 노크하고 들어왔다. 그녀는 손에 카드 한 장을 들고는 조심스럽게 나한테 물어봤다.“대표님, 천우 그룹에서 오늘 저녁 스타라이트에서 오래된 고객님들을 위한 감사연회를 연다고 하시는데…. 가실건가요?”나는 가만히 앉아 잠깐 고민했다. 우리도 그 사람 고객인데 안 갈 이유가 없지!“당연히 가야죠! 장 부장님한테 얘기해줘요, 같이 참석하자고.”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몇 시라고 했죠?”“7시요!” 해월은 한시름 놨다는 듯이 재빨리 답했다.“알겠어요. 그럼 장 부장님한테 저녁 6시에 저희 집으로 데리러 와달라고 해 줘요. 전 먼저 가볼게요.”나는 가방을 들고 나가려고 하는데 동철이 급급히 들어왔다.조급한 기색을 보아하니 무슨 일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무슨 일이에요?”해월이 눈치껏 자리를 피하자 동철이 앞으로 다가왔다.“대표님, 유보욱 손에 있던 USB를 확보했습니다!”나는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동철을 바라보며 물었다.“그... 그러니까 그 사람이 죽으면서 손에 쥐고 있던 USB 말이에요?”“네, 천신만고 끝에 결국 얻어냈어요.” 동철이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뭐가 들어 있
우리는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눴고 그때 해월이 다가와 알려줬다.“한 대표님,이미 퇴근 시간 이예요, 연회도 가져야 하잖아요?”나는 고민하다 동철과 해월를 보며 말했다.“두 분도 얼른 준비하세요. 같이 가요!”해월은 동철을 힐끔 훔쳐보더니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나는 그들 간의 미묘한 분위기를 분석할 여유 따윈 없었다.“먼저 들어가 볼게요!”동철에게 말을 남기고는 황급히 내려와 집으로 향했다. 다행히 퇴근길 러시아워 전에 회사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가는 길에 나는 교통사고의 모든 가능성에 대해 분석해봤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제대로 알아낼 수가 없었고 그저 이 모든 게 일어날 수 없는 경우의 수 같았다.나는 세 가지 가능성을 생각했다.하나는 배유정이 손을 써서 그가 외국으로 가는 것을 막기 위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배현우가 판을 설계하여 배유정을 끌어들이기 위했다는 것이며 세 번째는 전날 주주총회 전 인터넷에 떠돌던 세 가지 세력처럼 또 다른 세력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그동안 벌어진 사건들 모두 의심 가는 점이 너무 많아 어느 것 하나 아니라고 쉽게 단정 지을 수 없었다.나는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이렇게 복잡하게 살 필요가 있을까, 혼자 추리물을 찍는 것처럼 내 편도 네 편도 알지 못한 채 싸울 필요가 있겠냐고 생각했다.'간단하게 살면 얼마나 좋아, 꼭 이렇게 치고받고 싸우지 못해 안달 나야 할까?'이런 생각이 들다가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신호연이 바람을 피우고 재산을 빼돌린 것처럼 내 턱밑까지 쫓아와 나를 괴롭히는데 내가 손 놓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나는 집 앞에 차를 세워놓고 멍하니 앉아 이혼 전 신호연이 날 모욕했던 순간들을 떠올렸다.또 배유정의 행적을 생각하면 배현우가 말한 비행기 사고 또한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뇌리에 스치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만약 배현우가 말한 것처럼 비행기 사고도 ‘예고’된 불의의 사고였다면, 교통 사고 따윈 너무 쉬운 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