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경준의 팔을 잡고 수영장을 빠져나간 연가희는 너무 즐거워 발걸음이 가벼워지고입꼬리도 살짝 올라갔다.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고 성씨 가문에까지 이 소식이 전해지면 엄지연처럼 파렴치한 여자는 성씨 가문 문턱에 발도 들일 수 없을 것이었다.‘엄지연은 내연녀가 어울려! 빛도 못 보고 숨어 사는 게 딱이야.’...룸으로 향하는 복도에서 엄지연과 성연우가 함께 걷고 있었다.“아까 고마웠어요.”엄지연은 진심으로 고맙다고 인사했다.의식을 찾은 후 그녀는 물을 제일 무서워했는데 수영장에 빠진 그 순간 그녀는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하지만 그녀는 성씨 가문이 이 리조트의 투자자일 줄 생각지도 못했다.“아까 그 웨이터는...”이성호와 연가희의 거래를 모르는 엄지연은 단순 사고인 줄로만 알고 웨이터를 위해 말을 꺼냈다.“그 직원은 해고할 거예요. 모든 고객이 누나처럼 소통하기 쉬운 게 아니에요. 나중에 까다로운 고객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리조트는 물론 심지어 그룹에도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어요.”두 사람은 말하며 이내 엄지연의 묵고 있는 룸 앞에 다다랐다.성연우는 신사답게 문 앞에 멈춰 서며 부드럽게 말했다.“누나, 먼저 샤워하세요. 다 씻고 저한테 전화하거나 문자 보내면 약을 가져다줄게요.”“그러지 않아도 돼요. 핸드폰도 챙겨 오지 않아서...”핸드폰을 룸에 두고 나온 엄지연이 성연우의 호의를 거절했다.성연우가 수영장에서 물에 뛰어들어 그녀를 구한 후부터 엄지연은 그가 주차장에서 트러블 났을 때처럼 싫지 않았다.“제가 카카오 친구 추가했으니 확인하시고 문자 하세요.”성연우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얼른 들어가세요. 다 되면 연락하세요.”성연우는 신사답게 자리를 뜨며 엄지연에게 혼자 있을 시간을 주었다.엄징연은 지문 인식을 통해 방에 들어갔다.입실할 때 지문을 등록하고 퇴실하면 지문을 삭제하는 시스템을 사용하는 리조트였다.엄지연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검은 그림자가 갑자기 뒤에서 나타나 그녀를 방 안으로 밀어 넣은 후 재빨리 문을
엄경준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떠났다.‘엄지연, 왜 다른 남자랑 함부로 자면서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거야! 내 앞에서는 온갖 도도한 척을 다 하더니 뒤에서는 다른 남자랑 침대에 기어 올라가?! 남자가 한시라도 옆에 없으면 안 되나 보지?!’엄경준은 미간을 찌푸린 채 셔츠를 아래로 세게 끌어내리며 성큼성큼 걸어갔다.그러다 모퉁이에서 갑자기 나타난 섹시한 몸매의 여성과 그만 정면으로 부딪쳐버리고 말았다.엄경준과 정면으로 부딪친 여성은 인상을 쓰며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젠장, 눈은 장식으로 달고 다니나.’여성은 한소리 하기 위해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하지만 눈앞에 있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금세 인상을 펴며 눈을 반짝였다.아까 수영장 옆에서 봤었던 남자였다.여성은 그가 윤성 그룹의 대표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봤다.‘아까 봤을 때는 웬 여자랑 함께 있었는데?’윤성 그룹의 대표는 리조트에 있는 모든 남자를 통틀어 최상급이었다.“어머나, 죄송해요. 제가 앞을 제대로 봤어야 하는데.”여자가 애교스러운 말투로 사과했다.여자는 엄경준을 아래위로 쭉 훑어보다가 그의 목덜미에 피멍이 든 상처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빨 자국이 선명한 것으로 보아 여자가 깨물어버린 게 확실했다.그리고 엄경준의 흰색 셔츠의 가슴 부분에는 파운데이션 자국이 있었는데 이건 방금 그녀와 부딪히면서 생긴 자국 같았다.“어머... 제가 옷을 더럽혔네요. 어느 룸에 계시는지 알려주시면 세탁해서 돌려드릴게요.”여자가 파운데이션 자국을 가리키며 말을 걸었다.“그리고 목에 난 상처는 한시라도 빨리 약을 바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혼자 약 바르는 게 불편하면 제가 도와드리고요.”여자가 다정하게 말하며 그에게 윙크를 보냈다.“꺼져.”하지만 엄경준은 냉랭하게 한마디를 남긴 채 여자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다시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여자는 단호하게 거절당하자 다시 원래 표정으로 돌아와 콧방귀를 꼈다.“비싼 척하긴.”말을 마친 여자는 다시 또각또각 하이힐
백세훈은 연가희의 말에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연가희의 방식은 그에게 통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평소에도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기에 지금 이렇게 단둘이 말없이 나란히 걷는 장면은 상당히 어색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복도에는 마침 발걸음 소리조차 나지 않게 카펫까지 깔려 있어 더더욱 어색했다.“몸은 좀 어때? 이마에 땀이 가득한 걸 보면 아직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은데.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기 전에는 영양소를 충분히 섭취하고 피로하지 않게 많이 쉬어야 해.”결국 백세훈이 먼저 말을 걸며 어색한 분위기를 깼다.연가희에게 이렇다 할 호감은 없었지만 엄경준이 좋아하는 여자이기 때문에 백세훈은 그녀에게 당부의 말을 건넸다.그녀의 몸에 문제가 생긴다면 팔불출인 엄경준은 분명 병원장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고 그러면 그때 가서 야근하며 고생하는 사람은 그가 될 테니까.엄경준은 자기 여자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챙기는 그런 사람이었다.그래서 백세훈은 연가희가 제대로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놀러 나온 것에 불만이 많았다.연가희는 백세훈의 당부에 담담하게 대꾸했다.“걱정해줘서 고마워. 건강은 많이 좋아졌어. 땀을 흘린 건 너무 더워서 그래.”밖에서 땀이 나는 건 그렇다 해도 실내에는 에어컨을 조금 추울 정도로 에어컨을 틀어놨는데?백세훈은 그녀의 거짓말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왜 거짓말을 했는지는 구태여 묻지 않았다. 그저 다시 입을 꾹 닫은 채 말없이 앞으로 걸어갔다.어느새 엄경준의 방문 앞에 다다르고 두 사람의 발걸음은 그제야 멈췄다. 엄경준의 왼쪽 방은 백세훈의 방이고 오른쪽 방은 연가희의 방이었다.방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을 보아하니 두 사람 모두 엄경준을 찾으러 온 게 분명했다.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그저 힐끔 바라볼 뿐 누구도 먼저 말하거나 노크하지 않았다.거실.엄경준은 탁자 위에 거울과 약상자를 올려놓았다.그러고는 소파에 앉아 약상자를 열고 안에서 빨간약을 꺼내 면봉에 적신 후 거울을 보며 상처를
“누구야? 그 상처, 누가 그랬어?”연가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이에 엄경준은 입을 꾹 닫은 채 한껏 굳어진 표정으로 백세훈을 바라보며 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도움의 눈길을 보냈다.두 사람을 구경하고 있던 백세훈은 갑작스러운 그의 눈빛에 눈살을 찌푸렸다.‘연가희를 버리고 다른 여자랑 놀다가 온 것도 모자라 자국까지 남겨놓고 나한테 도와달라고? 엄경준 이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쓰레기였네. 그런데 대체 어떤 여자랑 놀았길래 이래?’엄경준은 거의 눈으로 레이저 쏘듯 백세훈을 뚫어지라 쳐다보았다.‘그래, 친구가 아무리 멍청한 짓을 해도 끝까지 도와줘야지.’백세훈은 안경을 위로 밀어 올리며 연가희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가희야, 경준의 목에 난 상처는 내가 문 거야. 너 설마 뭐 오해한 건 아니지?”그 말을 들은 엄경준은 매서운 눈빛으로 백세훈을 바라봤다.‘상황을 더 안 좋게 만들면 어쩌자는 거야?!’백세훈은 콧잔등을 어색하게 긁으며 엄경준의 시선을 피했다.‘상처가 딱 봐도 이빨자국인데 내가 여기서 뭘 어떻게 더 도와줘.’“아니면 내가 여기서 어떻게 물었는지 다시 한번 보여줄까?”백세훈이 입을 열면 열수록 엄경준의 얼굴은 점점 더 험악해져 갔다.그때 입을 꾹 닫고 있던 연가희가 무척이나 서러운 얼굴로 엄경준을 바라보며 말했다.“경준아, 만약 나를 좋아하지 않으면 차라리 그렇다고 솔직하게 얘기해줘. 내가 없는 게 네가 더 행복하다면 그렇게 해줄게...”말을 마치자마자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연가희는 터져 나오려는 서러움을 참기 위해 입을 가리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뛰어갔다.서러운 마음을 표출하려 했던 것인지 방문이 조금 세게 닫혔다.물론 움찔할 정도의 큰 소리는 아니었다.‘경준이 목에 난 상처는 엄지연의 짓인 게 분명해!’직접 본 건 아니었지만 연가희는 아주 직감적으로 엄지연이 한 짓이라는 것을 알아챘다.문 뒤에 기대 선 그녀의 두 눈이 질투와 분노로 일렁였다.‘엄지연, 경준이가 네
약을 다 바른 후 백세훈은 거즈로 상처를 싸맸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 지경까지 된 거야?”백세훈이 면봉 등 쓰레기를 휴지통에 버리며 말했다.그 말에 엄경준의 눈빛이 사나워졌다.“그 말 하려고 찾아왔어? 그런 거면 나가.”“알았어. 얘기 안 할게.”백세훈이 두 손 들어 항복하며 엄경준을 진정시켰다.그때 문자 알림 소리가 들려오고 잠금을 풀고 휴대전화를 확인하던 백세훈의 입꼬리가 위로 씩 올라갔다.“너 연가희 주려고 불꽃놀이 세트 많이 사뒀었지? 그거 어디 있어? 나한테도 좀 줘.”엄경준은 기분이 나빠 있던 터라 친구의 이상함도 눈치채지 못한 채 턱을 치켜들며 한 방향을 가리켰다.“비밀번호는 0000이야.”백세훈은 캐리어를 열고 막대 폭죽을 꺼내며 말했다.“고마워.”그러고는 떠나기 전 그는 친구가 곤란해지는 건 싫었는지 고개를 돌려 엄경준에게 귀띔해줬다.“셔츠에 핏자국 있으니까 갈아입어.”말을 마친 백세훈이 미련 없이 문을 닫고 가버린 후 엄경준은 바로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확실히 백세훈의 말대로 옷깃에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이에 엄경준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셔츠를 벗어 쓰레기통에 버리고 새 옷을 찾으러 갔다.잠시 후 그는 다시 거실로 돌아와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 감기약, 진정제, 그리고 붓기를 가라앉히는 약을 구매했다.빠뜨린 게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그는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새 셔츠로 갈아입은 후 막대 폭죽을 들고 문을 나섰다....엄지연은 엄경준이 떠난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서 내려와 엄경준의 냄새를 없애려고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욕실에 가서 샤워하며 가글도 몇 번 했다.하지만 여전히 피 냄새가 진동해 입안에 상쾌한 느낌이 들 때까지 양치질을 두 번이나 더 했다.오른손을 움직일 때 약간의 통증이 있어 그녀는 왼손으로 서투르게 샤워를 한 후 거울을 비춰보았다.목 근처에 몇 곳이 빨갛게 부어올랐는데 가려워서 긁고 싶은 거로 보아 아마 모기에 물린 것 같았다.바닷가에는 흰색과 검은색의 줄무늬를 띈
엄지연은 약이 들어있는 봉투를 건네받았다.“고마워요.”‘카톡 추가하자마자 약을 보냈네.’그녀는 성연우가 이렇게 빨리 일을 처리할 줄 몰랐다.엄지연은 약을 받은 후 곧장 그에게 감사하다고 카톡을 보냈다.봉투를 열어보니 안에는 붓기를 가라앉히는 약 외에 감기약과 수면제도 있었다.감기약?며칠 전처럼 쌀쌀하기는커녕 날씨가 좋아 물도 차갑지 않았는데 감기약은 왜 넣었지?물론 수면제는 도움이 될 것 같았다.상처를 입고 기억을 잃은 후 줄곧 물을 두려워했었는데 오늘처럼 갑자기 수영장에 빠진 날 잠자기 전에 먹기 딱 좋았다.‘섬세한 사람이네.’엄지연은 마음속으로 성연우를 칭찬했다.그때 초인종 소리가 또다시 울렸고 그녀는 다시 문을 열었다.“성연우 씨?”직원이 이불을 갈러 온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문밖에는 성연우가 서 있었고 이에 엄지연은 깜짝 놀랐다.성연우는 손에 든 봉투를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누나, 약 가져왔어요.”‘약? 약이라면 아까 보내 놓고 왜...’엄지연이 고개를 돌려 거실 탁자 위에 놓인 약 봉투를 바라보았다.성연우가 약을 보내온 게 아니면 대체 누가 약을 보내온 거지?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얼굴이 어렴풋이 떠올랐다.‘설마 엄경준...?’성연우 외에 그녀가 상처를 입었다는 것을 알고 물에 빠졌다는 것도 알고 있을뿐더러 방 번호도 알고 있는 사람은 엄경준밖에 없었다.‘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화를 내며 돌아간 인간이잖아. 혹시 모르니까 저 약은 버리는 게 좋겠어.’엄지연은 거실로 돌아와 탁자 위에 놓인 약을 다시 봉투에 넣고 잘 묶은 다음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버렸다.만약 모르는 사람이 준 약이라면 함부로 먹으면 안 되고 엄경준이 보냈다고 하더라도 더더욱 버려야 한다.엄지연의 뒤에 섰던 성연우도 탁자에 놓인 약을 발견했다.그는 그녀가 약을 봉투째로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을 보고 무슨 상황인지 어렴풋이 짐작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오히려 기분이 좋아졌는지 미소를 지으며 못 본 척 소파에 앉아 자신이 가
세 사람은 종종 함께 어울려 얘기도 하고 카드놀이도 했다.그리고 리나는 두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다가도 금세 새로 알게 된 남자와 함께 자리를 떴다.며칠 동안 엄경준을 피해 다녀서인지 엄지연은 그날 뒤로 그를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주차장.리나의 차는 접촉 사고로 카센터에 맡겨야 했기에 성연우는 두 사람을 바래다줄 차량과 함께 운전해줄 기사도 보냈다.이에 리나는 성연우를 칭찬했다.“너 사람 괜찮네. 일 처리도 깔끔하고.”성연우는 차량을 제공한 것 외에 보상금도 시원시원하게 물어주었다.며칠 함께 지내며 웃고 떠들다 보니 어느새 정이 들었는지 리나는 이제 그를 완전히 용서했다.성연우는 칭찬을 듣더니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다 제가 해야 하는 것들인데요, 뭘.”그러면서 그는 옆에 있는 친구들을 시켜 엄지연과 리나의 캐리어를 트렁크에 넣게 했다.만약 잠시 후 친구들과의 약속이 없었다면 그는 아마 직접 운전해서 엄지연을 집으로 데려다주려고 했을 것이다.엄지연과 리나는 차 문을 열고 손을 흔들며 차에 앉으려 했다.“다음에 봐.”“네. 형수님, 안녕히 가세요!”성연우의 곁에 있던 친구들이 일제히 소리쳤고 그중 이성준의 목소리가 가장 컸다.성연우가 주차장에서 싸웠던 늙은 여자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그는 그간 답답했던 게 뻥 뚫리며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지연이한테 왜 그렇게 잘해주나 했는데 그게 다 내 친구가 마음에 들어서였구나, 너?”차에 앉은 리나가 창문을 내리고 성연우를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리나야, 재미없으니까 그런 농담 하지 마.”그러자 엄지연이 표정은 굳힌 채 리나를 향해 말했다.성연우는 화를 내는 엄지연을 힐끔 보더니 이내 뒤로 돌아 히죽거리며 장난치는 친구에게 발길질하며 헛소리 말라고 혼내주었다.그러고는 기사에게 빨리 운전하라고 눈짓했다.“우정으로 하는 건 줄 알았는데 지연이한테 딴 맘 품고...”차가 움직이자 리나의 말도 바람에 흩어졌다.“성연우, 너 정말 그 늙은 여자의 친구가
“그럼 내가 도와줄게.”연가희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그래.”이에 엄경준은 덤덤하게 대꾸했다.사실 그는 다른 사람이 짐 정리해주는 걸 썩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연가희가 상처를 받을 수 있기에 엄경준은 그녀가 도와주게 내버려 뒀다.어차피 그저 옷 몇 벌일 뿐이니 말이다.캐리어를 다 싸고 나니 마침 백세훈도 캐리어를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가자.”엄경준은 두 사람과 함께 나란히 룸을 나섰다.백세훈은 밖으로 걸어 나가면서도 끊임없이 휴대전화를 바라보며 메시지에 답장했다.입꼬리가 위로 올라가고 눈이 예쁘게 휘어진 것이 상당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백세훈은 엄경준과 가는 길이 달랐기에 먼저 가보겠다고 했다.“그래.”이에 엄경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먼저 보냈다.연가희의 캐리어까지 들어준 탓에 엄경준의 양손은 모두 캐리어에 묶여 있었다.장수철은 차 안에서 대기하다 엄경준이 다가오는 것을 보더니 서둘러 차에서 내려 얼른 그의 손에 있는 두 개의 캐리어를 트렁크에 담았다.“대표님, 차에 타시죠.”그러고는 뒷좌석 문을 열고 엄경준을 향해 말했다.“응.”엄경준은 담담하게 대답한 후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그러자 그때 뒤에 서 있던 연가희가 달콤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경준아.”엄경준은 그녀의 부름에 뒤를 돌아 연가희를 바라보았다. 불러놓고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엄경준은 잠깐 뭔가를 생각하더니 이내 그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챈 듯 연가희의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작은 손을 잡고 열려 있는 문으로 향했다.엄경준의 행동에 연가희는 무척이나 기뻤다.그녀는 두 눈이 반달 모양이 되게 눈웃음을 지어 보이더니 이내 엄경준의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갔다.엄경준은 신사답게 연가희를 먼저 차에 태우고 문을 닫아준 후 유유하게 반대편 걸어가 차량에 올라탔다.장수철은 그런 엄경준과 연가희를 넌지시 바라보았다.대표님을 위해 문을 열어준 게 결과적으로 연가희를 위한 게 되어버렸지만 크게 문제 될 건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