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안에서 배현수는 그녀를 얼마나 안고 있었는지 모른다.눈 내리는 밤, 조유진이 엄씨 사택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후에야 뒤돌아섰다.조유진은 살금살금 침실로 들어가 2층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봤다.그 검은 차는 엄씨 사택에서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되어 있었다.배현수는 몸을 숙여 뒷좌석에 탔다. 차가 천천히 떠났다.차 안에서, 운전하는 서정호가 백미러를 힐끗 쳐다보았다.배현수가 안경을 쓰고 있었다.서정호는 한마디 불평했다.“배 대표님, 이번에 해독제가 없었으면 죽을 뻔했어요. 눈도 일시적으로 실명했는데 조유진 씨가 진짜로 대표님을 내버려 두고 진주시로 출장 가는 거예요?”적어도 2, 3일은 같이 있어 줘야 하는 거 아닌가.너무 양심이 없다.배현수는 약지의 플래티넘 반지를 들여다보며 말했다.“SY그룹도 뒤치다꺼리해야 할 일이 많으니 급할 거 없어. 오늘만 있는 것도 아니고.”서정호는 다 알면서도 말을 아꼈다. 그저 웃으며 한마디 했다.“배 대표님, 사실 애교 좀 배워요. 애교를 부리면 조유진 씨의 마음이 분명 약해질 거예요.”애교?이 단어는 배현수와 극도로 어울리지 않는다. 심지어 위화감까지 있다.남자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이내 본론으로 돌아왔다.“강이찬이 나를 찾은 적 있어?”“아니요. 강 사장이 손에 있던 지분 10%를 매각한 후, 더 이상 움직임이 없어요. 설마 동생의 복수를 하려는 건 아니겠죠? 배 대표님, 조유진 씨에게 경호원 몇 명을 붙일까요? 강 사장이 혹시라도 조유진 씨를 납치해 복수한다면...”배현수는 그 말을 바로 부정했다.“강이찬은 그렇게 못해.”첫째, 이것은 강이찬의 성격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이다.그리고 둘째는 강이찬도 조유진에게 마음이 흔들린 적이 있다. 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인간쓰레기가 아닌 이상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에게 손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강이찬이 그 정도로 치사하지 않다.“강이찬의 주식을 산 사람을 알아냈어?”서정호가 대답했다. “열오라는 벤처회사입니다. 규모가 작아서 눈에 띄지 않아요.”
하지만 진주시에서 돌아오면 성남 기온으로 보아 이 세 명의 눈사람은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흰 베일에 머메이드 웨딩드레스를 입은 그 눈사람은 아주 잘 만들었다.조유진은 휴대전화를 꺼내 여러 장의 사진을 찍어 기념으로 남겼다.도 집사는 그녀가 매우 좋아하는 것을 보고 웃으며 농담을 건넸다.“아가씨, 이 눈사람들이 정말 좋으면 냉동고에 옮겨서 얼려 드릴까요? 그럼 계속 보관할 수 있어요.”조유진이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그러면 더욱 이상할 것이다.엄씨 사택 밖에 경적이 울렸다. 엄명월의 차가 도착했다.도 집사는 그녀의 작은 캐리어를 트렁크에 넣었다.조유진은 차에 오른 후 도 집사에게 말했다.“집사님, 돌아가세요. 제가 없는 동안 저희 아빠와 선유를 잘 부탁드립니다.”“아가씨와 명월 씨, 잘 다녀오세요. 어르신께서 진주시에서 해결하지 못할 일이 있으면 전화하라고 하셨습니다.”인사를 마친 후 차는 공항으로 달렸다. 운전기사가 운전했다.조유진과 엄명월은 뒷좌석에 앉아있다.조유진은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첩을 열고 눈사람 사진을 다시 보았다.엄명월이 고개를 내밀며 물었다.“뭘 그렇게 흥미진진하게 봐요?”조유진은 얼른 휴대전화를 거두며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다 봤는데도 변명할 거예요? 그런데 배 대표가 이렇게 순정적일 줄 몰랐네요? 이렇게 눈사람을 만들 정도로?”엄명월은 꽤 의외라고 생각했다.조유진은 평범한 행동이라고 느꼈다.“고작 눈사람 만드는 게 순정적이라고요? 연애해본 적 없어요?”하...엄명월은 시선을 돌렸다. 표정이 좀 불편해 보였다.조유진은 바로 알아차렸다.“엄 팀장님, 설마 진짜로 연애해본 적 없어요?”조유진은 마치 무슨 신대륙을 발견한 것처럼 약간 과장된 표정을 지었다.엄명월은 다소 어색한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왜요? 이상해요? 하루 종일 회사 일 떄문에 그렇게 바쁜데 남자 만날 시간이 어디 있어요?”조유진은 얼른 다독였다.“진주시 출장에서 돌아오면 엄 팀장님도 휴가 좀 내세요. 시간 내
강아지 스타일?엄명월은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흥이 빠진 얼굴로 말했다.“싫어요.”청순한 남자도 강아지 같은 스타일도 싫었다.“그럼 잘 노는 스타일? 아니면 나쁜 남자 스타일?”잘 노는 스타일...조유진의 물음에 왠지 모르게 전 비서의 모습이 떠올랐다.김씨?엄명월은 바로 거절했다.“다 싫어요!”이어 조유진은 한 동영상 플랫폼을 열어 잘생긴 남자의 동영상을 여러 개 뒤졌다.엄명월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마디 했다.“파운데이션을 이렇게 두껍게 바르고 필터를 이렇게 많이 씌운 사람이면 실물은 분명 눈에 담기도 어려울 거예요.”차라리 김씨가 마음에 훨씬 마음에 들었다.중요한 건 김씨 이 녀석은 무책임하긴 하지만 업무 능력 하나만은 최고였다.조유진은 피식 웃었다.“엄 팀장님, 일 욕심은 많으신데 사람 보는 눈은 하나도 없는 거 아닙니까?”엄명월은 눈살을 찌푸렸다.“아까 내가 잘못 본 거 아니죠? 배현수 대표가 머메이드 웨딩드레스 입은 눈사람을 만들고 머리에 흰 베일까지 씌웠잖아요?”조유진은 윙크하며 말했다.“뭐가 문제 있나요?”엄명월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문제가 있고 말고요. 사랑에 미친 사람이 어떻게 일은 이렇게 크게 할 수 있어요?”“지금 현수 씨가 사랑에 미쳤다고 욕하는 거예요?”엄명월은 대뜸 정색하며 말했다.“아니요. 그런데 머메이드 웨딩드레스가 정말 좋아 보여요. 인터넷에 올리면 눈사람 만들기 열풍이 불지도 모르겠네요. 저번에 둘이 운전하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도망가는 영상이 아직도 핫하잖아요.”그 두 대의 차는 번호판이 너무 눈에 띄었다.그러다 보니 신분이 바로 발각되었다.인터넷이 또 한 번 떠들썩했다.[지난번엔 약혼 기사가 잘못된 거라고 해 놓고 지금은 또 술래잡기하고 있어요.][그러게요. 제가 볼 때는 커플이 지금 화해한 것 같아요. 그렇죠?][우리 네티즌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어요. 그저 구경이나 할 뿐이죠.][아아! 배 대표님과 엄환희 씨! 너무 잘 어울려요.][조햇살은 멀리 떨어져
문득 악플 하나가 눈에 띄었다.[조햇살은 멀리 떨어져! 배 대표님과 엄환희 씨야말로 환상의 커플이지!]배현수의 눈빛은 다소 차가워졌다. 그리고 비밀 계정으로 바로 대댓글을 달았다.비밀 계정의 닉네임은 Y이다.[눈 좀 똑바로 뜨고 다녀. 배 대표 옆에는 여자가 한 명밖에 없어! 조햇살뿐이라고!]배현수의 디스가 끝나자마자 ‘내가 너의 아빠다’라는 계정이 다시 답장했다.[너야말로 눈 좀 크게 뜨고 다녀. 배 대표님 옆에 있는 사람은 엄환희 씨야. 조햇살은 누구야!] [걔는 기껏해야 떳떳하지 못한 애인일 뿐이야. 배 대표가 진작 걷어찼어. 이런 팬들은 무슨 자신감으로 이렇게 날뛰는지 모르겠다니까!][얘기해봐. 조햇살에게 발을 한 번 씻겨주는 데 얼마 받아? 많으면 나도 같이 벌어!]이런 더러운 말들에 배현수의 관자놀이가 움직였다.바로 배현수의 디스가 이어졌다.[조햇살과 엄환희는 같은 사람이야. 배현수에게는 그 여자밖에 없어.]그러자 ‘내가 너의 아빠다’라는 계정에서 또 답장이 왔다.[무슨 이런 황당한 농담을 하는 거야? 조햇살이 엄환희와 같은 사람이면 내가 물구나무를 서서 똥을 먹을게!][똑똑히 기억해! 그때 가서 잡아떼지 말고.]‘내가 너의 아빠다’라는 계정에서 또 답장이 왔다.[미쳤구나! 조햇살과 엄환희가 같은 사람이라고 하다니! 절대 그럴 리가 없어. 네가 말한 배 대표에게는 여자가 조햇살뿐이었다는 그 말도 틀렸어! 송인아는 사람 아니야? 배 대표의 약혼녀로도 이름이 거론된 적 있어!]배현수도 계속 답장했다.[도대체 어느 포인트에서 송인아가 배 대표의 약혼녀라고 생각한 것인데? 쓸데없는 사람 갖다 붙인 너야말로 틀렸어!] [송인아가 트위터에 배 대표가 선물한 비둘기 알만한 다이아몬드 반지를 올렸어! 혹시 네가 사는 그곳에는 인터넷이 안 돼?][송인아가 올린 비둘기 알만한 다이아몬드 반지는 배 대표가 준 게 아니야.][네가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게 되는 거야? 네가 뭔데? 송인아와 배 대표가 아무런 사이도 아니면 내가 물구나무서
조유진과 엄명월이 진주시에 도착하자마자 휴대폰이 울렸다.남초윤에게서 걸려온 전화다. 받자마자 무턱대고 물었다. “SY그룹이 드디어 배현수와 송인아의 관계에 대해 입을 열었어. 유진아, 너 지금 배현수와 무슨 상황이야? 배현수의 약혼 소식은 또 어떻게 된 거야? 전에는 감히 물어보지도 못했어!”조유진은 순간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몰랐다.“말하자면 길어. 나중에 얘기할까? 나 지금 막 진주시에 도착했어.”남초윤은 어리둥절한 듯 물었다.“진주시? 왜 갑자기 진주시에 간 거야?”“출장 왔어. 성행 그룹에 취직했어. 차가 와서 이만 끊을게. 저녁에 호텔에 도착하면 연락할게.”전화를 끊은 조유진은 차에 탄 후 궁금한 마음에 SNS에 들어갔다.SY그룹이 공식성명을 발표했다.또한 이 성명에는 SY그룹에 막강한 변호인단이 있고 루머 유포자가 있으면 엄중히 경고한다는 내용까지 있었다.내용 아래에 있는 네티즌들의 열띤 댓글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망했어. 배 대표가 진짜로 순정파인가 봐. 또 조햇살과 같이 있는 거 아니야?][동공 지진... 배 대표는 조햇살에게만 마음이 있다는 뜻인가?][그럼 엄씨 집안 그 딸은 어떻게 된 거야?][설마 엄환희 씨와 조햇살이 똑같이 생긴 거야? 대역 게임이라도 한 거야?][연극도 이보다 더 재미있지 않을 거야! 점점 더 흥미진진해지네!][설마. 엄씨 아가씨와 조햇살이 같은 사람이라고 하지 마. 막장도 이런 막장이 있다고?][아니, 돈도 많고 권력도 있는 사람이 잘생긴 남자가 여자를 한 명밖에 안 만났다고? 이런 판타지 이야기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눈 뜨고 거짓말을 해도 이렇게 말하지 못하지!][아아! 절대 인정할 수 없어! 조햇살은 전생에 나라를 구한 거야? 왜 이렇게 운이 좋아!][배 대표가 또 조햇살과 함께하면 행복하기를 바랄게! 대신 SY 주식이 바닥을 치기도 바라!]...이런 댓글을 본 조유진은 마음을 이루 말로 형용하기 어려웠다.배현수가 드디어 나서서 그녀를 두둔해 주니 당연히 기뻤다.
가게 안의 손님들이 계산한 후 연이어 퇴장했다.곧 떠들썩하던 불야항 바 안이 점점 조용해졌다.배현수는 카시트 쪽에 앉았고 육지율은 한쪽 무대 끝에 앉았다.그리고 강이찬은 계단에 앉았다.멀리 떨어져 앉은 세 사람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며 말을 하지 않았다.배현수가 코웃음을 쳤다.“손님들 다 나갔으니 계속해.”육지율은 손가락을 들어 강이찬을 가리키며 말했다.“강이찬, 너는 평소에 제일 성실한 척해놓고 알고 보니 제일 쪼잔했어! 너 지금 행동이 등에서 칼을 꽂는 것과 뭐가 달라? 우리가 알고 지낸 세월이 얼마인데 이렇게 배신할 수 있어?”주먹을 꽉 쥔 강이찬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어두컴컴한 빛 속에서 그의 얼굴의 감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육지율의 개 같은 성질은 또다시 참지 못하고 성큼성큼 걸어가 또 싸우려고 했다.그러다가 배현수에게 가로막혔다.강이찬은 바닥에 떨어진 코트를 들고 툭툭 치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다 때렸어? 충분히 때렸으면 먼저 갈게.”“지금 사람 말이 말 같지 않아?”육지율은 또다시 앞으로 돌진했다.배현수는 육지율을 막으며 고개를 돌려 강이찬에게 말했다.“강이찬, 밖에서 기다려. 할 말 있어.”강이찬은 고개만 끄덕이더니 아무 말 없이 나갔다.육지율은 이를 갈았다.“강이찬, 너 오늘 이 문밖으로 나갈 생각하지도 마! 나가는 순간 우리 인연은 끝이니까!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놈에게는 좋은 결말이 없어!”이 말에 불야항 바를 나가던 강이찬의 걸음이 갑자기 뚝 멈췄다.그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더니 시뻘건 두 눈으로 육지율을 노려보며 말했다.“그래, 나 강이찬! 감정적이야! 육지율, 만약 너의 친동생이 비참하게 죽는다면 너는 어떨 것 같아? 너의 일이 아니라고 함부로 말하지 마!”육지율은 목덜미에 핏대를 세우며 말했다.“아무리 바보 멍청이라도 형제를 배신하지는 않아! 너의 동생? 강이진이 내 여동생이었다면 나는 진작 죽였을 거야! 이런 결과가 다 누구 탓인데 그래!”이 말을 들은 강이
담배를 깨문 강이찬은 얼떨떨한 얼굴을 짓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그러게 말이야. 앞으로 가능성이 없는 일은 억지로 하려 하지 마. 나같이 담배를 못 피우는 사람에게 라이터를 줘봤자 소용이 없는 것처럼 말이야.”그러더니 손을 번쩍 들어 손에 들고 있던 라이터를 저 멀리 강에 던졌다.‘풍덩’하는 작은 소리가 났다.강물에 작은 잔물결이 일었지만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을 되찾았다.이 라이터는 SY그룹을 설립할 때 배현수가 선물한 것이다.창업은 곧 접대를 의미한다.담배도 술도 할 줄 모르면 고객 대응이 어렵다.하지만 이제는 필요 없다.친분도 없는데 이 라이터를 남겨서 뭐하겠는가?강을 바라보는 배현수의 시선은 점점 깊어졌다.“나를 친구로 생각하든 말든 강이찬, 너에게 미안한 마음은 없어. 지금 너는 주식을 돈으로 바꿔서 이곳을 떠났어. 예전에 너와 약속했던 1조 원의 재산이 지금 실현되었네? 내가 감옥에 있었던 3년 동안, 네가 SY그룹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아. 그러니까 이건 네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들이야. 그러니까 나도 너를 막지 않을게.”강이찬은 이를 악물더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증권감독위원회에서 나에게 연락하지 않았어. 혹시 네가 미리 얘기한 거야?”배현수는 부인하지 않았다.“별로 큰일도 아니잖아. 증권감독위원회가 너를 찾는다고 해도 기껏해야 일상적인 조사일 뿐이야. 벌금 정도 물겠지. 하지만 네가 꼭 가겠다면 아무도 막을 수 없어.”강이찬의 손가락 사이로 타오르고 있던 담배는 찬 바람이 불자 선홍빛을 띠었다.“대학 때부터 지금까지 거의 14년이 지났어. 하지만 우리는 결코 같은 편이 아니었어. 배현수, 앞으로 너는 네 길을 가고 나는 내 길을 가고, 각자 다른 길을 가는 게 좋을 것 같아.”배현수는 가볍게 웃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처음 약속은 지켰으니 더 이상 같이 이 길을 걸을 필요가 없겠지. 그동안 고마웠어.”“그래. 그럼 그렇게 해.”강이찬은 타버린 담배꽁초를 버리더니 코트를 들고 강
조유진의 전화였다.배현수는 감정을 추스른 후 아무렇지 않은 듯 전화를 받았다.“진주시에 도착했어?”“네, 오후에 공장을 둘러보고 이제 막 호텔에 들어왔어요.”전화기 너머로 윙윙거리는 바람 소리를 들은 조유진이 물었다.“지금 어디예요?”배현수는 가볍게 웃더니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순찰 중?”조유진은 진심으로 받아들였다.“네, 순찰 중이요... 그런데 잘 안 돼요?”“아니.”배현수는 휴대전화를 손에 쥔 채 난간에 한쪽 팔을 기댔다.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는 여유로운 듯 보였다.건축자재 공장의 최근 자료를 보는 조유진은 휴대폰을 얼굴과 어깨에 끼고 통화를 하면서 말했다.“그래서 지금 대체 어디에 있는 건데요?”“불야항 바, 육지율이 술 마시자고 해서.”“전화기 너머로 바람 소리가 들려요.”그러자 배현수가 말했다.“귀가 밝네? 가게 안에 오래 있었더니 답답해서 바람 쐬러 나왔어.”조유진이 갑자기 물었다.“강이찬 씨와 완전히 끝난 거예요?”배현수는 순간 넋을 잃었다. 눈살마저 찌푸려졌다.“소식이 아주 빠르네. 유진아, 왜 갑자기 내 일에 이렇게 관심이 많은 거야? 나중에 결혼하면 네 손에 죽는 거 아니야?”나태한 배현수의 말투는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하지만 그럴수록 더 이상하게 들렸다.조유진은 일부러 한마디 했다.“아직 결혼하겠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결혼 후에 아내가 엄격하게 관리할까 봐 걱정돼요? 신경 쓸지 말지도 아직 생각하지 못했어요.”배현수는 한 손에 휴대전화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담배를 든 채 난간에 느슨하게 기댔다.“네가 나 신경 써주지 않으면 누가 나를 신경 써주는데?”담뱃재가 한 움큼 타오르자 남자는 툭툭 털었다. 그러자 담뱃재가 사방에 흩날렸다.조유진은 입꼬리를 치켜세우며 말했다.“말꼬리 잡지 말아요. 강이찬 씨가 2조 원의 주식을 현금화해서 SY그룹을 떠났잖아요. 두 사람 사이가 완전히 틀어진 거예요?”“나 하나만 신경 써. 강이찬까지 신경 쓸 필요 없어.”배현수는 사실 조유진에게 이런
육성일의 압도적인 기운은 전화 너머에서도 남초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묵직한 압박감은 느껴졌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어떻게 육씨 집안에 시집갔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구걸을 하더라도 절대 육씨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남초윤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저희가 약속했던 건 두 달 전이었잖아요. 아직 두 달이 채 안 지났고, 제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해도 확인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육성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전화를 겨우 넘겼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번엔 ‘개자식’ 육지율이었다. “...” 할아버지와 손자는 통화 시간까지 맞춘 것처럼 기가 막히게 연달아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요?” 육지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요?” 육지율이 자신의 책을 내리게 만들고, 지난달과 이번 달 원고료도 다 날려버린 상황에서 그녀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아직 유지 중이었고 필요한 것도 있으니 남초윤은 결국 목소리를 가다듬고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지율 오빠, 무슨 일이에요?” “... 뭐라고 불렀어요?” “지~율~오~빠~” 그녀는 유설영의 말투를 흉내 내며, 아니, 오히려 더 능숙하게 말했다. 육지율은 순간 닭살이 돋았다. “제발 평소처럼 말해요. 저녁에 내 친구가 귀국하는데 같이 식사해요. 6시에 잡지사로 데리러 갈게요.” 남초윤은 단번에 거절했다. “난 안 갈래요.” “저녁에 뭐 다른 약속 있어요?” 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혼한 지 3년 됐지만 당신은 나한테 친구 한 명도 소개해 준 적 없잖아요.” 그리고 이제 곧 이혼할 텐데 친구를 만날 필요는 더 없었다.이혼하고 나서 친구들이
조유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히진 않았어?” 배선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응,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할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셔서 선생님들도 항상 나한테 잘해주시고 많이 관심 해주셨어. 그래서 나도 함부로 장난칠 수가 없어. 혹시 선생님이 할아버지한테 이르실까 봐.” 배현수는 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배선유는 작은 악동처럼 말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배현수의 말에도 자주 대꾸를 하니, 만약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벌써부터 떠벌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성남에서 엄준은 배선유를 엄청나게 아끼며 키웠고, 그래서인지 아이는 주눅이 들지 않고 활발하게 자랐다.조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행이네. 우리 선유가 공부를 게을리할 걱정은 없겠어.” 배현수는 딸을 겁주듯 말했다. “너 공부 안 하고 일찍 연애라도 시작하면, 널 대제주에 데려와서 24시간 동안 지켜볼 거야.” 배선유는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건 너무 심해요! 나 혹시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거 아니에요?”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 안 하면 좋은 날은 없을 거야.” 잠시 후, 학교 종이 울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배선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친구가 그린 결혼사진 두 장을 영상 속으로 건네받았다. “선유야! 너랑 지우의 결혼사진 내가 그려놨어! 한 번 봐봐!” 배선유가 물었다. “한 장에 얼마야?” “너니까 공짜로 해줄게! 대신 다음번엔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어?” “생각해볼게!” “...” 이 속도로라면 그들 부부는 도대체 몇 명의 사위를 맞이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스타라이트 매거진에서.남초윤이 사이트 편집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의 책은 예상대로 플랫폼에서 삭제되었고 이달 원고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
[합법적 부부] 함께 올라온 사진엔 결혼반지를 낀 두 손이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 게시글이 올라가자마자 마치 깊은 바다에 떨어진 폭탄처럼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반응했다. 육지율: [8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자랑할 수 있네!] 송하진: [어! 전 두 사람 목숨 구해준 은인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어떻게 혼인신고까지 했겠어요? 당장 절 주빈으로 식사 대접해요!] 남초윤: [아아아아! 유진이를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다니! 대표님 너무하세요!] 엄창민: [내 여동생한테 잘해요. 혹시라도 괴롭히면 내 주먹이 용서 못 해요!] 엄명월: [형부! 이렇게 좋은 일에 저희한테 뭐라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이찬: [축하해, 결국 원하는 대로 됐네.] 심미경: [백년해로하세요.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서정호: [대표님, 일 다 끝냈으면 빨리 돌아오세요. 의사 선생님이 여기서 엄청 화내고 있어요. 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학교 가기 싫어: [와! 아빠랑 엄마가 드디어 결혼했네요! 헤헷, 아빠, 나도 오늘 결혼했어요!] 배현수는 배선유의 댓글을 보고 순간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유진이 운전하며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래요?” “선유가 결혼했다는데.” “뭐라고요?” 조유진은 깜짝 놀라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급히 배선유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저쪽에서 배선유는 학교에 있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외국어 학교라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들은 평소에도 부모님과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배선유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엄마, 아빠! 나 사진 보고 싶어!” 조유진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물었다. “선유야, 아까 결혼했다고 했잖아. 누구랑 결혼한 거야?” “우리 반 한지우랑! 엄마, 나 오늘 엄청 많은 축의금을 받았어! 내가 다 적어 놨어!”
조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갈게요.”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번 한 번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정호가 산성 별장에서 두 벌의 정장과 결혼 서류를 준비해왔다. 조유진은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도 고데기로 말았다. 그녀는 하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썼다. 그녀는 한동안 이렇게까지 꾸미지 않았는데 하이힐을 신고 배현수 앞에 서니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나 어때요?” “아름다워. 넌 언제나 아름다워.” 배현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조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옆에 있던 넥타이를 집어 들고 배현수에게 매어주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길에 고개를 숙이며 협조했다. 조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더 복잡하고 정중한 ‘엘드리지 매듭’으로 넥타이를 맸는데 배현수는 평소에 간단한 윈저 매듭만 했었다. “이 매듭은 좀 생소하네.” 조유진은 넥타이를 다 매고 나서 그의 셔츠와 정장 재킷의 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게 엘드리지 매듭이라고 해요. 중요한 자리에서 어울리는 방식이죠. 어때요, 괜찮아요?” “멋져. 하지만 여보, 우리 서둘러야 해. 조금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웃으며 농담하듯 이야기하던 배현수는 조유진의 외투를 챙겨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고, 그녀를 한 손으로 감싸 병실을 몰래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마치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 그들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가 병실에 회진을 왔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곳에는 ‘무관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의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정호를 보며 물었다. “환자는 어디 갔죠? 튜브까지 다 뽑다니, 누가 뽑았습니까?” 서정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환자 본인이 뽑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간 겁니까? 팔을 정말 망가지게 할 작정인가요
배현수의 가슴이 떨렸다. 그는 조유진과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때 난 네 옆에 있진 않았지만 네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울었어?” “현수 씨 생각이 났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거든요.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웠죠. 그래서 울었어요.” 지금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조유진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이나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감동과 감사함 때문이었다. 운명이 그들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묶어 놓았고, 그들 사이에선 이제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깊은 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현수는 긴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끼워 넣으며 손을 꼭 맞잡았다. 순간 그들의 손바닥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아, 넌 한 번도 날 잃은 적 없어. 우리가 몇 번을 떨어져도,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더라도 난 결국 널 찾아내서 꼭 안고 말해줄 거야. 사랑한다고. 오직 너만 사랑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유진은 배현수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조유진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현수 씨,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의 대답은 8년 전과 똑같았다. 짧지만 확고했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목에 걸린 달콤한 연녹색 비취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나으면 우리 같이 아주머니를 위한 좋은 묘지를 고르러 가요. 그분을 위한 의관묘라도 만들어 드리는 게 어때요?” “아직도 ‘아주머니’라고 불러?” 조유진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며 말투를 바꿨다. 배현수는 그녀의 팔찌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풍수 좋은 곳을 따로 고를 필요는 없어. 어머니께
육지율은 그 필명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기억해 냈다. “이 자식! 기억났어! 이 녀석이 책에서 날 모욕하지 않았나? 내 명성을 망가뜨렸잖아?” 남초윤은 급하게 말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비엘 작가가 주인공을 모욕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밥숟가락 들고 욕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나를 ‘수’로 묘사한 게 모욕이 아니고 뭐예요? 왜 항상 배현수가 공이냐고?” 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였다.남초윤은 그가 진짜 작가를 고소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다. “다음번엔 지율 씨가 공이고, 배 대표님이 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원래 BL 소설에서는 공수 구분이 모호해요. 겉보기에 수 같아도 사실은 공일 수도 있다고요!” 조유진은 살짝 의문을 제기했다. “난 현수 씨가 수 같지는 않았는데. 만약 현수 씨가 진짜 수라면 캐릭터 붕괴지. 차라리 육 변호사님이 수인 게 더 어울려.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다정하잖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육지율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조유진에게 따졌다. “아니, 조유진. 내가 약해 보이는 수 같은 느낌을 준다고?” “...” 배현수는 차갑게 말했다. “유진이가 쓴 것도 아닌데 왜 화내? 그럴 시간 있으면 작가나 고소해.” 남초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냥 재미로 쓴 거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작가를 고소하면 너무 쪼잔해 보일 거예요!” 하지만 육지율은 이성을 잃고 이를 악물었다. “쪼잔해 보이든 말든, 그 책을 하차할 거예요!” 자신이 소설 속에서 수 역할로 묘사되었고,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조유진은 객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아요. 꽤 재미있고 독자도 많아요.” “독자가 몇 명인데?”“몇만 명 정도?” “뭐?”‘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수로 상상했
병실에서 조유진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에 들어서도 손가락이 배현수의 손에 살짝 얽혀 있었는데 다정하고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진은 완전히 남자 친구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원 생활이 지루하다고 하다니.육지율이 댓글을 남겼다. “뭐야, 입원했어? 혹시 가정 폭력이라도 당한 거야?” 댓글을 남기고 나서 육지율은 차에 시동을 걸며 남초윤에게 말했다. “과일 바구니 좀 사서 병문안이나 가요. 친구가 입원했어요.” “친구? 설마 배 대표님이세요? 어디 아파요?” 육지율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진짜 아플 수도 있고 그냥 꾀병일 수도 있고.” 혹시 모른다. 꾀병일지도....병원에서는 조금 전 장은숙이 산성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밤은 죽 같은 유동식만 먹어야 했다. 배현수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조유진이 죽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그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첫 숟가락을 그의 입 앞에 가져가자 배현수는 뜨겁다고 투덜댔다. 조유진이 후후 불어 온도를 맞춘 후 말했다. “이제 적당히 식었어요.” 배현수는 그제야 죽을 한 입 삼켰다.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난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아기로 됐네? 밥도 혼자 못 먹고, 조유진이 널 너무 오냐오냐한 거 아냐?” 조유진이 놀라서 뒤돌아보니, 육지율과 남초윤이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설명했다.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며칠 동안 오른손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상처가 더 심해질 수 있거든요.” 그러자 육지율은 다짜고짜 그의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진짜야?” 배현수는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아!” 조유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변호사님, 진짜로 다쳤다니까요! 어깨에 구멍이 났다고요,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그녀를 겨우 한 번 데리러 온 김에 출퇴근길의 불편함을 느끼고는 아예 차를 사서 해결하려고 하다니, 정말 육지율 다운 방식이었다.이 4S 매장에서 파는 차들은 모두 포르쉐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저렴한 모델도 수천억 원대였다. 남초윤은 이미 남씨 집안이 육지율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그가 차를 선물해 주겠다고 해도 받을 수 없었다.남초윤은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는 출퇴근 길에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굳이 차를 선물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순간 멈칫했다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차 한 대 선물한다고 귀찮다는 딱지가 붙어요? 이런 확산적 사고방식은 참 대단하네.”“....”정말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평소에도 성격이 불 같았던 육지율은 차를 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녀를 달래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어이없어 웃었다. 둘 중 누가 더 성격이 나쁜지 모를 일이었다.영업 직원은 남초윤을 육지율이 외부 애인으로 오해했고, 이 큰 거래가 깨질까 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변호사님께서 차를 사주시는 건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이 아닐까요?”남초윤은 더 이상 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갚을 수 없는 빚이 너무 많았고 계속해서 더 쓴다면 두 아이를 낳아야 겨우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육지율은 그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 그는 VIP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골라요. 차 안 사면 집에 못 돌아가요.”남초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영업 직원이 다가와 다양한 모델을 소개할 때, 그저 듣기만 했다. 그 직원은 미소를 띠며 말도 아주 달콤하게 했다. “변호사님은 저희 매장의 단골이세요. 그런데 여자를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변호사님이 정말로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비싼 차를 고르시면 아마 더 기뻐하실 거예요.”역시, 판매왕이었다.감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남초윤은 그저 외부의
남초윤은 결혼 상태를 한 번도 업데이트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 눈에는 여전히 미혼으로 보였다.처음 그녀와 육지율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사실 모두 육지율의 매력적인 외모 때문이었다. 아무도 남초윤처럼 작고 평범한 존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지율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침대 사진이 언론이나 남재원에게 유출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육지율이라는 유명한 바람둥이가 ‘함정'에 빠져 순진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소문만 믿고 있었다.육지율이 연예계 인물이 아닌 만큼 동료들 중에서도 아무도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육지율이 ‘좋은 집안의 아들’ 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의 결혼 상대가 누군지에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그의 곁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초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다.동료들은 그저 그녀가 조금 집안 배경이 있는 부유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고 육지율의 아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육지율의 아내라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그들과 같이 일하며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과거에 파파라치 일을 했더라도 그렇게 높은 곳에 시집갔다면 육씨 집안이 그녀를 계속 그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비록 세상은 모두 직업의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상류 사회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체면과 명예가 그들의 신분과 존엄을 상징했다. 파파라치라는 직업은 육씨 집안에게 있어 절대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으니, 육지율과 강란희가 그녀에게 좀 더 체면 있고 유망한 직업들을 제안했지만 남초윤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을 보낸 끝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퇴근하고 남초윤만 남았다. 한 시간이 흐른 뒤 남초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그녀는 통화 기록을 훑어보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