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호는 강이진을 쳐다보며 휴대전화를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 배 대표님, 강이진 씨 찾았습니다. 대제주시로 데려갈까요, 아니면 이 자리에서 처리할까요?”전화기 너머의 남자가 어떤 대답을 했는지는 모른다.서정호는 전화를 끊은 뒤 경호원에게 눈짓했다.경호원은 바로 알아채고 강이진의 어깨를 짓누르며 차 쪽으로 걸어갔다.차가운 빗줄기 속에서 강이진의 얼굴은 잿빛으로 변했다. 그녀는 입술을 부르르 떨며 소리쳤다.“대체 어쩌려는 것인데? 이거 놔! 내가 저지른 잘못은 내가 알아서 자수할 거야. 너희들이 억압할 필요 없다고!”시끄러운 소리에 서정호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경멸스러운 얼굴로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운이 좋은 줄 알아. 배 대표가 직접 나선다고 하니 오늘 밤은 살 수 있을 거야. 개처럼 계속 짖는 것보다 어떤 유언을 남길지 잘 생각해봐. 아니면 어떻게 사죄를 해야 덜 고통스럽게 죽을지 고민해 보든가.”강이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이튿날 아침.성남, 엄씨 사택.배현수는 조유진에게 작별인사를 하러 왔다.“유진아, 나는 이만 대제주시로 돌아갈게.”조유진은 자기를 성남으로 데려다준 후, 며칠 동안 같이 머물면서 배현수의 스케줄과 일들이 많이 밀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정작 떠난다고 하니 여전히 아쉬울 뿐이었다.하얀 손으로 그의 트렌치코트 소매를 움켜쥐며 말했다.“며칠 뒤 선유와 스위스에 가는데 우리를 배웅해 줄 거예요?”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배현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녀를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더 이상 속이고 싶지도 않았다.“잘 모르겠어. 회사 일이 어떻게 될지... 너무 바쁘면 아마 시간 낼 수가 없을 것 같아.”대제주시로 돌아간 후, 우선 강이진부터 처리해야 했다. 최근 밀린 회사 일도 산더미처럼 쌓였다. 몇몇 세력들은 SY그룹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오늘 아침 주식시장이 열리자마자 SY그룹의 주가가 또 출렁였다.분명 배후에 있는 세력이 일을 꾸미고 있는 것
조유진은 폐가 좋지 않아 그녀 앞에서는 거의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하지만 매번 그에게서 담배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배현수는 웃으며 말했다.“알았어.”아래층, 도 집사가 외쳤다.“배 대표님, 차가 준비됐으니 이제 공항으로 출발하실까요?”배현수는 그녀의 얼굴을 조물락 거리고 말했다.“가요.”막 뒤로 돌았을 때 그녀의 손이 또다시 그의 소매를 잡았다.뒤를 돌아보니 조유진이 아쉬운 얼굴로 그를 쉽게 놓아주지 못하고 있었다.눈동자에는 옅은 이슬이 고여 있었다.평소에 치근덕거리기 싫어하고 독립적인 사람이었지만 요즘은 어찌 된 일인지 먼 스위스에 갈 생각만 하면 자신이 없어졌다.맑은 눈물 한줄기가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배현수는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 맑은 눈물이 마치 그의 가슴을 찌르는 듯 심장이 아팠다. 다시 돌아서서 그녀 얼굴의 눈물 자국을 닦았다. 그러고는 그녀와 머리를 맞대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나도 너와 같이 가고 싶어. 같이 밥 먹고 일하고 자고... 한 발자국도 떨어지고 싶지 않아. 하지만 그러면 금방 질리지 않을까?”조유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고는 양손에 그의 옷깃을 쥐고 고개를 숙이라는 듯 잡아당겼다.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바로 알아차린 배현수는 얼굴을 숙이고 입술을 갖다 댔다.조유진이 고개를 드는 순간 두 사람의 입술이 서로 엉겨 붙었다.남자는 큰 손으로 그녀의 등을 끌어안고 깊은 입맞춤을 이어갔다.한참 동안 입을 맞추고 있을 때 위층으로 올라온 선유가 갑자기 외쳤다. “아, 부끄러워!”녀석은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조유진은 배현수를 살짝 밀었다. 선유에게 키스하는 장면이 들킨 것이 다소 쑥스러워 귀가 빨개졌다.하지만 배현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얼굴을 숙인 채 깊은 눈빛으로 조유진을 바라보더니 손을 들어 그녀의 뒤통수를 문지르며 입꼬리를 올리고 말했다.“키스 다 했으면 이제 나 좀 보내줄래?”이렇게 말하는데 조유진이 안 된다고 할 수 있겠는가?손을 놓으며 말했다.“알았어, 조심히 가.”
대제주시, 외곽의 한 사택 안.이 사택에는 지하로 연결된 비밀 층이 있었고 수옥과 각종 형벌 기구들이 설치되어 있었다.여기는 719부대의 개인 공간으로 간첩을 고문하고 남몰래 비밀 사건들을 처리하는 곳이다.강이진이 여기로 끌려와 고문당한 것은 그녀에게 큰 행운이었다.강이진 주제에 사실 이곳에 갇힐 자격이 없었다.719부대의 사적 공간을 드나들 수 있는 것은 심문자나 피 심문자 등 신분이 이상한 사람들뿐이다.유독 강이진이라는 아무런 신분이 없는 인간이 여기에 들어오긴 했지만 저지른 악행만큼은 남보다 적지 않았다. 와르르.검은 흑연 문이 천천히 열리자 바깥의 흰 빛이 순식간에 들어왔다.큰 기럭지를 자랑하는 남자가 강한 빛을 뒤로하고 천천히 그녀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강이진은 묶인 채 음습한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얇은 옷을 입은 탓에 추운 지하 감옥에서 진작 몸이 얼어붙어 입술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당장이라도 의식을 잃을 것 같았다.강렬한 빛에 그녀는 최대한 눈을 뜨려고 애썼다.누가 왔는지 본 순간 기쁨 내색 얼굴에 스쳐 지났다.“현수 오빠...”그러나 곧 그녀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얼굴이 멍해졌다.참, 배현수는 옛날 얘기하러 온 게 아니라... 그녀의 목숨을 빼앗으러 온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두렵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말을 하지 않은 이상 평생 조유진과 정정당당하게 함께할 수 없을 것이다.자기만 진실을 입 다물고 있으면 그와 조유진은 모든 대중의 시야를 벗어나 함께 있다고 해도 여전히 마음 한구석은 편하지 못할 것이다.서정호는 두 손을 뒤로 젖히고 배현수의 뒤에 서서 말했다.“우리 몇 명이 번갈아 가며 고문했는데 본인이 한 짓이 아니라고 딱 잡아떼고 있습니다.”남자는 싸늘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지시했다.“수옥에 집어넣어.”첨벙.수옥에 한바탕 물보라가 일었다.강이진은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다.“내가 한 짓이 아니에요! 현수 오빠, 나에게 이러면 안 되잖아요! 우리 오빠가 내가 이런 꼴을 당하고 있는 것을 알면
얼음장 같은 차가운 배현수의 목소리는 잠시 멈칫했다.남자는 긴 손가에 담배를 꽂고 불을 붙였다. 그러자 담뱃재가 떨어져 수옥 안의 물 위에 둥둥 떠다녔다.눈빛이 싸늘해지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너 같은 도랑 속의 쥐는 그냥 죽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러다가 나중에 다른 사고라도 치면 어떡해.”앞으로 배현수는 어쩌면 조유진과 선유의 곁을 지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만약 강이진이 지난번의 조범처럼 탈옥하여 도망친다면... 그래서 또 무슨 나쁜 마음을 먹게 된다면 무슨 일이 발생할지 아무도 모른다. 순간 배현수의 눈빛에 살기가 도사렸다.강이진은 두 눈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나를 죽이면 조유진과 함께할 수 있을 줄 알았어? 배현수,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둘은 같은 종류의 사람인 것 같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으니까! 주변의 모든 사람을 저버릴지언정 일말의 배신도 참지 못하지. 물론 배현수 당신도 나와 별 다를 바 없고. 하하... 내가 인정하지 않는 한 당신의 어머니는 영원히 살인자야! 나를 죽인 것은 단지 목격자인 내가 모든 것을 털어놓을까 봐 두려워서 그러는 거고! 조유진 어머니의 죽음에 당신 어머니가 한 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해? 똑똑히 알려줄게. 당신 어머니도 안정희의 휠체어를 밀었어. 안정희더러 목숨으로 갚으라고 하더라고! 현수 오빠, 조유진과 피맺힌 원한은 절대 지울 수 없어. 당신들은 평생 함께할 수 없어. 그렇게 서로를 잃는 거지. 그러고 보니 조유진이 나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겠네. 나는 적어도 한 번도 가진 적이 없지만 조유진은 적어도 가진 것을 잃었잖아. 훨씬 더 절망적이겠지! 하하...”강이진은 미친 듯이 크게 웃었댔다. 그 웃음소리는 감옥 안에 메아리쳤다.배현수는 손끝의 담배를 가볍게 털었다. 그러고는 새빨간 담배꽁초는 물속으로 던졌다.남자가 일어서자 검은 그림자가 수옥 안의 강이진을 뒤덮었다.이 상황은 마치 저승사자가 망자를 데리러 온 것 같았다.배현수는 온몸에 사악한 기운이 감
강이찬의 전화라는 말에 강이진의 어두웠던 눈빛이 순식간에 빛났다.눈빛에는 도움을 청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배현수가 전화를 받을지 안 받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의 얼굴을 황급히 바라보았다.강이진은 힘겹게 기어가 배현수의 발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눈물 콧물을 흘리며 말했다.“현수 오빠, 부탁할게요. 죽기 전에 오빠에게 몇 마디만 할 수 있게 해 줘요. 유언이라고 쳐도 좋고요!”배현수는 무슨 속셈인지 웬일로 자비를 베풀었다.“받아.”서정호는 전화를 받자마자 스피커 폰으로 돌렸다.전화를 받은 두 사람이 입을 열기도 전에 강이진은 큰 소리로 살려달라고 소리쳤다.“오빠, 나 현수 오빠에게 잡혔어.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는데 일단 빨리 와서 나 좀 구해줘. 만약 오지 않으면 비참하게 죽을지도 몰라! 빨리 현수 오빠에게 부탁해서 나를 빼내 줘! 이렇게 굴욕적으로 죽고 싶지 않다고!”서정호는 발을 들어 어깨를 걷어찼다.“시끄러워!”발길질을 당한 강이진은 뒤로 벌렁 나자빠져 바닥에 주저앉았다. 꼭 마치 지하 도랑에서 꿈틀거리는 구더기 같았다.전화에서 강이찬은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서정호는 일부러 모른 척하며 물었다.“강 사장님, 저에게 무슨 일로 전화하셨어요?”강이진은 울며 애원했다.“오빠, 빨리 와서 살려달라고! 여기 너무 무서워! 저 사람들이 나를 수옥에 던져 넣었어! 수옥에 죽은 쥐도 있어. 그리고 또 내 혀까지 뽑으려고 했어! 오빠... 내가 다른 사람 손에서 죽는 걸 보고만 있을 거야?”강이찬은 몇 초간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서 비서, 배 대표님 옆에 있나요? 배 대표님께 할 얘기가 있어요.”서정호는 의아한 얼굴로 배현수를 쳐다봤다.전화를 건네받은 배현수는 휴대전화를 받자마자 스피커를 끄고 바로 물었다.“여동생 대신 사정하러 온 거야?”“이진이가 많이 잘 못 했다는 것은 알아. 하지만 내 친동생이야. 우리 친구의 체면을 봐서 한 번만 자수할 수 있게 도와줘. 무기도형을 선고받아도 돼. 그런 수단만은 쓰
“현수 오빠, 오빠 자신을 속이지 마. 오빠와 조유진 사이는 아무리 노력해도 평생 이루어질 수 없는 운명이야! 내가 가지지 못한 사람 조유진도 가질 수 없어! 오빠와 조유진을 항상 저주했어. 서로 배신하고 평생 만나지 못하게 하라고!강이진의 헛소리를 들은 배현수는 화를 내는 대신 오히려 피식 웃었다.남자는 고개를 살짝 올리더니 입꼬리를 양옆으로 올리고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말 다 했어?”배현수가 고개를 옆으로 한 번 갸웃하자 뒤에 있던 부하들이 다 같이 앞으로 나섰다.뒤돌아선 남자의 눈빛은 음흉하고 흉악했다.“아!”뒤에서 울부짖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붉고 뜨거운 피가 배현수의 축 늘어진 손등 위로 튀었다.강이진의 입에는 피가 솟구쳐 흐르고 있었다.그저 ‘우우'하는 울음소리를 내며 두 손으로 더러운 땅을 헤집고 배현수의 발아래까지 기어왔다.그녀의 손이 구두를 만지자 남자는 양미간을 찌푸렸다. 눈빛에는 혐오함이 가득했다.강이진은 입꼬리를 올리며 씩 웃었다.그녀가 더럽다고 싫어하는 것일까?하지만 이제 그도 깨끗하지 않다.더러워지려면 같이 더러워져야 하지 않겠는가?떨리는 손으로 배현수의 양복바지를 쥐려고 하자 배현수는 그녀의 더러운 손을 발밑에 디딘 후 구두를 꽉 눌렀다.그리고 눈을 내리깔고 조금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이찬이가 그동안 너무 버릇없게 키웠네. 말할 줄 모르면 입을 다물라는 기본도 안 가르쳤으니... 그렇게 고집을 부리겠다면야 마지막 숨통도 남겨둘 필요가 없겠지.”강이진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배현수는 무표정한 얼굴로 한마디 했다.“다시 수옥에 던져놓고 죽기 직전에 강이찬에게 전화해 시신을 데리고 가라고 해.”강이찬과 강이진, 두 남매에게 서로 마지막 얼굴은 보여줘야 하지 않겠는가? 배현수는 단호한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일말의 인정은 있었다.강이진을 본 서정호의 눈에 안타까운 눈빛이 스쳐 지났다. 그 모습은... 정말 이루 말할 데 없을 정도로 비참했다.그는 배현수 옆에 서서 고개를 살짝 숙이고 대답했다
조유진의 다소 엉뚱한 질문에 전화기 너머의 사람은 잠시 대답을 하지 못했다.체면을 중요시하게 여기는 조유진은 2초간 기다려도 대답이 없자 헛기침을 하고 바로 말했다.“선유가 계속 전화하라고 재촉해서요. 보고 싶대요. 선유와 얘기 좀 할래요?”배현수는 그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밝히지 않았다.“응. 그래.”조유진은 선유를 불러내 녀석에게 핸드폰을 건넸다.전화에서 녀석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보세요, 아빠?”배현수는 신신당부했다.“엄마가 요즘 많이 피곤하다고 하니까 밤에 푹 주무시라고 하고 게임을 하자고 조르지 마. 알겠지?”“네. 아빠, 며칠 있으면 스위스 가는데 우리 배웅하러 올 거예요?”배현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아직 잘 모르겠어.”선유는 작은 입을 삐쭉 내밀며 말했다.“아빠가 배웅하러 오지 않으면 엄마가 슬퍼할 거예요. 아빠가 가자마자 엄마가 하루종일 멍만 때리고 있어요. 무슨 일이 있는 사람처럼요!”“응, 그래. 엄마에게 전화 좀 바꿔줘.”“네.”선유는 핸드폰을 다시 조유진에게 건넸다.조유진은 전화를 받자마자 설명했다.“선유가 헛소리하는 거예요.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난 잘 지내고 있어요. 정말 시간 내기 어려우면 배웅은 안 해줘도 돼요. 어차피 안 돌아오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저 스위스에 가서 좀 살다 올 뿐인데요.”배현수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싶지도 않고 강요하고 싶지도 않았다.서로의 감정 중 한쪽이 상대방을 압박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면 조유진은 이 감정을 유지하는 게 따분해지고 감정 자체의 의미도 없어질 거라 생각했다. 어차피 안 돌아올 것도 아니고 단지 스위스에 가서 잠시 머무는 것뿐이다.전화를 끊기 전 배현수가 조유진을 불렀다.“유진아.”“네?”배현수는 몇 초 동안 침묵한 후,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보고 싶어. 네가 나를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보고 싶어.”전화기 너머의 조유진은 전화기를 손에 꼭 쥔 채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입꼬리는 저도 모르게 귀에 걸
배현수는 입꼬리를 올리며 사늘한 어조로 말했다.“할 얘기 없어요. 특히 남녀관계는 더더욱 말할 것도 없고요. 백소미 씨, 똑똑한 사람은 적의 총구에 일부러 나타나지 않아요.”“배 대표님은 얘기도 안 해보고 내가 적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요? 혹시 알아요? 우리 서로 동맹을 맺을 수 있을지? 남녀관계는... 물론 더 이상 할 얘기가 없겠지만 저도 그렇게 가벼운 사람이 아니에요. 하지만 이익 앞에서 감정은 쓸모없는 것이 되죠. 비즈니스 대 비즈니스로 저에게 얘기할 기회를 주시지 않을래요?”배현수는 한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더욱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저는 싫어하는 사람과 일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배현수가 전화를 끊으려 할 때, 백소미가 유유히 입을 열었다.“배 대표님이 저와 협조하고 싶지 않은 건 이해하지만 목숨까지 필요 없는 것은 아니잖아요?”배현수의 눈빛이 순간 반짝였다. 살기 어린 기운이 싹 스쳐 지났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협박하다니... 내가 볼 때, 그쪽도 목숨이 아깝지 않은 것 같네요.”백소미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저야 그저 다른 사람 손에 놀아나는 바둑알에 불과하죠. 저를 죽인다고 해도 배 대표님 본인 스스로 더 번거로워질 뿐 아무 이득이 없어요.”배현수는 코웃음을 쳤다.“잘 알고 있네요.”“배 대표님, 서심 독에 걸린 것을 알고 있어요. 엄 어르신도 중독되었고요. 배 대표님이 누구보다 제일 잘 알겠죠. 드래곤 파의 보스 손에 서심 해독제가 두 개 있는 것을 발견했어요.”배현수는 미간을 찌푸렸다.“이 말을 하는 이유는요?”“내 말은... 우리가 같이 협력해서 그 해독제를 얻는 거예요. 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어요.”“말해봐요.”“해독제 중 한 알은 반드시 저에게 주셔야 합니다.”배현수는 못마땅한 얼굴로 비꼬았다.“무슨 근거로요? 내가 그렇게 친절하게 보여요?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해독제를 줄 만큼?”“양보하고 싶지 않아도 양보해야 해요. 해독제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요. 그리고 드
육성일의 압도적인 기운은 전화 너머에서도 남초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묵직한 압박감은 느껴졌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어떻게 육씨 집안에 시집갔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구걸을 하더라도 절대 육씨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남초윤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저희가 약속했던 건 두 달 전이었잖아요. 아직 두 달이 채 안 지났고, 제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해도 확인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육성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전화를 겨우 넘겼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번엔 ‘개자식’ 육지율이었다. “...” 할아버지와 손자는 통화 시간까지 맞춘 것처럼 기가 막히게 연달아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요?” 육지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요?” 육지율이 자신의 책을 내리게 만들고, 지난달과 이번 달 원고료도 다 날려버린 상황에서 그녀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아직 유지 중이었고 필요한 것도 있으니 남초윤은 결국 목소리를 가다듬고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지율 오빠, 무슨 일이에요?” “... 뭐라고 불렀어요?” “지~율~오~빠~” 그녀는 유설영의 말투를 흉내 내며, 아니, 오히려 더 능숙하게 말했다. 육지율은 순간 닭살이 돋았다. “제발 평소처럼 말해요. 저녁에 내 친구가 귀국하는데 같이 식사해요. 6시에 잡지사로 데리러 갈게요.” 남초윤은 단번에 거절했다. “난 안 갈래요.” “저녁에 뭐 다른 약속 있어요?” 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혼한 지 3년 됐지만 당신은 나한테 친구 한 명도 소개해 준 적 없잖아요.” 그리고 이제 곧 이혼할 텐데 친구를 만날 필요는 더 없었다.이혼하고 나서 친구들이
조유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히진 않았어?” 배선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응,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할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셔서 선생님들도 항상 나한테 잘해주시고 많이 관심 해주셨어. 그래서 나도 함부로 장난칠 수가 없어. 혹시 선생님이 할아버지한테 이르실까 봐.” 배현수는 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배선유는 작은 악동처럼 말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배현수의 말에도 자주 대꾸를 하니, 만약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벌써부터 떠벌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성남에서 엄준은 배선유를 엄청나게 아끼며 키웠고, 그래서인지 아이는 주눅이 들지 않고 활발하게 자랐다.조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행이네. 우리 선유가 공부를 게을리할 걱정은 없겠어.” 배현수는 딸을 겁주듯 말했다. “너 공부 안 하고 일찍 연애라도 시작하면, 널 대제주에 데려와서 24시간 동안 지켜볼 거야.” 배선유는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건 너무 심해요! 나 혹시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거 아니에요?”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 안 하면 좋은 날은 없을 거야.” 잠시 후, 학교 종이 울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배선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친구가 그린 결혼사진 두 장을 영상 속으로 건네받았다. “선유야! 너랑 지우의 결혼사진 내가 그려놨어! 한 번 봐봐!” 배선유가 물었다. “한 장에 얼마야?” “너니까 공짜로 해줄게! 대신 다음번엔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어?” “생각해볼게!” “...” 이 속도로라면 그들 부부는 도대체 몇 명의 사위를 맞이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스타라이트 매거진에서.남초윤이 사이트 편집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의 책은 예상대로 플랫폼에서 삭제되었고 이달 원고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
[합법적 부부] 함께 올라온 사진엔 결혼반지를 낀 두 손이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 게시글이 올라가자마자 마치 깊은 바다에 떨어진 폭탄처럼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반응했다. 육지율: [8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자랑할 수 있네!] 송하진: [어! 전 두 사람 목숨 구해준 은인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어떻게 혼인신고까지 했겠어요? 당장 절 주빈으로 식사 대접해요!] 남초윤: [아아아아! 유진이를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다니! 대표님 너무하세요!] 엄창민: [내 여동생한테 잘해요. 혹시라도 괴롭히면 내 주먹이 용서 못 해요!] 엄명월: [형부! 이렇게 좋은 일에 저희한테 뭐라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이찬: [축하해, 결국 원하는 대로 됐네.] 심미경: [백년해로하세요.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서정호: [대표님, 일 다 끝냈으면 빨리 돌아오세요. 의사 선생님이 여기서 엄청 화내고 있어요. 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학교 가기 싫어: [와! 아빠랑 엄마가 드디어 결혼했네요! 헤헷, 아빠, 나도 오늘 결혼했어요!] 배현수는 배선유의 댓글을 보고 순간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유진이 운전하며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래요?” “선유가 결혼했다는데.” “뭐라고요?” 조유진은 깜짝 놀라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급히 배선유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저쪽에서 배선유는 학교에 있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외국어 학교라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들은 평소에도 부모님과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배선유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엄마, 아빠! 나 사진 보고 싶어!” 조유진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물었다. “선유야, 아까 결혼했다고 했잖아. 누구랑 결혼한 거야?” “우리 반 한지우랑! 엄마, 나 오늘 엄청 많은 축의금을 받았어! 내가 다 적어 놨어!”
조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갈게요.”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번 한 번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정호가 산성 별장에서 두 벌의 정장과 결혼 서류를 준비해왔다. 조유진은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도 고데기로 말았다. 그녀는 하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썼다. 그녀는 한동안 이렇게까지 꾸미지 않았는데 하이힐을 신고 배현수 앞에 서니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나 어때요?” “아름다워. 넌 언제나 아름다워.” 배현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조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옆에 있던 넥타이를 집어 들고 배현수에게 매어주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길에 고개를 숙이며 협조했다. 조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더 복잡하고 정중한 ‘엘드리지 매듭’으로 넥타이를 맸는데 배현수는 평소에 간단한 윈저 매듭만 했었다. “이 매듭은 좀 생소하네.” 조유진은 넥타이를 다 매고 나서 그의 셔츠와 정장 재킷의 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게 엘드리지 매듭이라고 해요. 중요한 자리에서 어울리는 방식이죠. 어때요, 괜찮아요?” “멋져. 하지만 여보, 우리 서둘러야 해. 조금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웃으며 농담하듯 이야기하던 배현수는 조유진의 외투를 챙겨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고, 그녀를 한 손으로 감싸 병실을 몰래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마치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 그들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가 병실에 회진을 왔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곳에는 ‘무관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의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정호를 보며 물었다. “환자는 어디 갔죠? 튜브까지 다 뽑다니, 누가 뽑았습니까?” 서정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환자 본인이 뽑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간 겁니까? 팔을 정말 망가지게 할 작정인가요
배현수의 가슴이 떨렸다. 그는 조유진과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때 난 네 옆에 있진 않았지만 네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울었어?” “현수 씨 생각이 났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거든요.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웠죠. 그래서 울었어요.” 지금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조유진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이나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감동과 감사함 때문이었다. 운명이 그들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묶어 놓았고, 그들 사이에선 이제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깊은 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현수는 긴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끼워 넣으며 손을 꼭 맞잡았다. 순간 그들의 손바닥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아, 넌 한 번도 날 잃은 적 없어. 우리가 몇 번을 떨어져도,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더라도 난 결국 널 찾아내서 꼭 안고 말해줄 거야. 사랑한다고. 오직 너만 사랑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유진은 배현수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조유진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현수 씨,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의 대답은 8년 전과 똑같았다. 짧지만 확고했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목에 걸린 달콤한 연녹색 비취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나으면 우리 같이 아주머니를 위한 좋은 묘지를 고르러 가요. 그분을 위한 의관묘라도 만들어 드리는 게 어때요?” “아직도 ‘아주머니’라고 불러?” 조유진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며 말투를 바꿨다. 배현수는 그녀의 팔찌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풍수 좋은 곳을 따로 고를 필요는 없어. 어머니께
육지율은 그 필명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기억해 냈다. “이 자식! 기억났어! 이 녀석이 책에서 날 모욕하지 않았나? 내 명성을 망가뜨렸잖아?” 남초윤은 급하게 말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비엘 작가가 주인공을 모욕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밥숟가락 들고 욕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나를 ‘수’로 묘사한 게 모욕이 아니고 뭐예요? 왜 항상 배현수가 공이냐고?” 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였다.남초윤은 그가 진짜 작가를 고소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다. “다음번엔 지율 씨가 공이고, 배 대표님이 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원래 BL 소설에서는 공수 구분이 모호해요. 겉보기에 수 같아도 사실은 공일 수도 있다고요!” 조유진은 살짝 의문을 제기했다. “난 현수 씨가 수 같지는 않았는데. 만약 현수 씨가 진짜 수라면 캐릭터 붕괴지. 차라리 육 변호사님이 수인 게 더 어울려.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다정하잖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육지율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조유진에게 따졌다. “아니, 조유진. 내가 약해 보이는 수 같은 느낌을 준다고?” “...” 배현수는 차갑게 말했다. “유진이가 쓴 것도 아닌데 왜 화내? 그럴 시간 있으면 작가나 고소해.” 남초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냥 재미로 쓴 거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작가를 고소하면 너무 쪼잔해 보일 거예요!” 하지만 육지율은 이성을 잃고 이를 악물었다. “쪼잔해 보이든 말든, 그 책을 하차할 거예요!” 자신이 소설 속에서 수 역할로 묘사되었고,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조유진은 객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아요. 꽤 재미있고 독자도 많아요.” “독자가 몇 명인데?”“몇만 명 정도?” “뭐?”‘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수로 상상했
병실에서 조유진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에 들어서도 손가락이 배현수의 손에 살짝 얽혀 있었는데 다정하고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진은 완전히 남자 친구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원 생활이 지루하다고 하다니.육지율이 댓글을 남겼다. “뭐야, 입원했어? 혹시 가정 폭력이라도 당한 거야?” 댓글을 남기고 나서 육지율은 차에 시동을 걸며 남초윤에게 말했다. “과일 바구니 좀 사서 병문안이나 가요. 친구가 입원했어요.” “친구? 설마 배 대표님이세요? 어디 아파요?” 육지율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진짜 아플 수도 있고 그냥 꾀병일 수도 있고.” 혹시 모른다. 꾀병일지도....병원에서는 조금 전 장은숙이 산성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밤은 죽 같은 유동식만 먹어야 했다. 배현수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조유진이 죽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그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첫 숟가락을 그의 입 앞에 가져가자 배현수는 뜨겁다고 투덜댔다. 조유진이 후후 불어 온도를 맞춘 후 말했다. “이제 적당히 식었어요.” 배현수는 그제야 죽을 한 입 삼켰다.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난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아기로 됐네? 밥도 혼자 못 먹고, 조유진이 널 너무 오냐오냐한 거 아냐?” 조유진이 놀라서 뒤돌아보니, 육지율과 남초윤이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설명했다.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며칠 동안 오른손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상처가 더 심해질 수 있거든요.” 그러자 육지율은 다짜고짜 그의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진짜야?” 배현수는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아!” 조유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변호사님, 진짜로 다쳤다니까요! 어깨에 구멍이 났다고요,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그녀를 겨우 한 번 데리러 온 김에 출퇴근길의 불편함을 느끼고는 아예 차를 사서 해결하려고 하다니, 정말 육지율 다운 방식이었다.이 4S 매장에서 파는 차들은 모두 포르쉐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저렴한 모델도 수천억 원대였다. 남초윤은 이미 남씨 집안이 육지율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그가 차를 선물해 주겠다고 해도 받을 수 없었다.남초윤은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는 출퇴근 길에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굳이 차를 선물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순간 멈칫했다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차 한 대 선물한다고 귀찮다는 딱지가 붙어요? 이런 확산적 사고방식은 참 대단하네.”“....”정말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평소에도 성격이 불 같았던 육지율은 차를 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녀를 달래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어이없어 웃었다. 둘 중 누가 더 성격이 나쁜지 모를 일이었다.영업 직원은 남초윤을 육지율이 외부 애인으로 오해했고, 이 큰 거래가 깨질까 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변호사님께서 차를 사주시는 건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이 아닐까요?”남초윤은 더 이상 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갚을 수 없는 빚이 너무 많았고 계속해서 더 쓴다면 두 아이를 낳아야 겨우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육지율은 그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 그는 VIP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골라요. 차 안 사면 집에 못 돌아가요.”남초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영업 직원이 다가와 다양한 모델을 소개할 때, 그저 듣기만 했다. 그 직원은 미소를 띠며 말도 아주 달콤하게 했다. “변호사님은 저희 매장의 단골이세요. 그런데 여자를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변호사님이 정말로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비싼 차를 고르시면 아마 더 기뻐하실 거예요.”역시, 판매왕이었다.감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남초윤은 그저 외부의
남초윤은 결혼 상태를 한 번도 업데이트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 눈에는 여전히 미혼으로 보였다.처음 그녀와 육지율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사실 모두 육지율의 매력적인 외모 때문이었다. 아무도 남초윤처럼 작고 평범한 존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지율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침대 사진이 언론이나 남재원에게 유출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육지율이라는 유명한 바람둥이가 ‘함정'에 빠져 순진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소문만 믿고 있었다.육지율이 연예계 인물이 아닌 만큼 동료들 중에서도 아무도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육지율이 ‘좋은 집안의 아들’ 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의 결혼 상대가 누군지에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그의 곁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초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다.동료들은 그저 그녀가 조금 집안 배경이 있는 부유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고 육지율의 아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육지율의 아내라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그들과 같이 일하며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과거에 파파라치 일을 했더라도 그렇게 높은 곳에 시집갔다면 육씨 집안이 그녀를 계속 그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비록 세상은 모두 직업의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상류 사회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체면과 명예가 그들의 신분과 존엄을 상징했다. 파파라치라는 직업은 육씨 집안에게 있어 절대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으니, 육지율과 강란희가 그녀에게 좀 더 체면 있고 유망한 직업들을 제안했지만 남초윤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을 보낸 끝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퇴근하고 남초윤만 남았다. 한 시간이 흐른 뒤 남초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그녀는 통화 기록을 훑어보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