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이진은 손을 들어 남자의 얼굴을 잡았다. 그리고 날카로운 손톱으로 상대방의 얼굴을 할퀴었다. 순간 몇 줄의 핏자국이 그려졌다.“가난한 거지 주제에 나와서 여자 찾을 생각 하고 있어! 정말 꼴불견이야!”남자도 화를 벌컥 냈다. 얼굴에 이런 자국이 남았으니 집에 가면 분명 아내가 물을 것이다. 밖에서 바람을 피우고 싶었지만 가족에게는 알리고 싶지 않았다. 모든 불똥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바로 손을 들어 강이진의 얼굴을 후려갈겼다.“개 같은 년! 감히 내 얼굴을 건드리다니! 꺼져!”너무 세게 내리친 뺨에 강이진은 머리가 윙윙거리며 이명이 들렸다. 입가에 상처가 나 피가 흘렀다.혼돈 속에서 남자는 차 문을 당겨 그녀를 끌고 나가 바닥에 내동댕이쳤다.남자는 차에 올라탄 후, 창문을 열어 그녀의 몸에 침을 뱉었다. “퉤! 싸구려 같으니라고!”욕설을 내뱉은 뒤 검은 산타나를 타고 먼지를 일으키며 사라졌다.먼지 속에 넘어진 강이진은 손으로 땅을 짚고 주먹을 꽉 쥐었다. 바닥에 긁힌 손톱은 당장이라도 피가 날 것 같았다.눈물이 한 방울 한 방울 바닥에 떨어졌다.예전에 대제주시에서 고급 쇼핑몰을 드나들며 사고 싶은 것 마음껏 샀다. 수천만 원 하는 가방 하나도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바로 샀다.그런데 지금은 2백만 원을 위해 품위 없는 중년 남자에게 짓밟혔다.어떻게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그녀도 몰랐다. 분명 오빠의 큰 나무 아래에서 보호받으며 잘 살던 공주였다. ‘심미경만 없었다면 오빠가 나를 대제주시에서 쫓아내지 않았을 거야. 조유진만 없었다면 현수 오빠도 나를 미워하지 않았을 거야.’옛날에 오빠도 현수 오빠도 그녀를 그토록 예뻐했었는데...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것일까? 강이진은 휴대전화를 잡고 일어나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갔다.밖에서는 보슬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12월의 겨울비는 당장이라도 살을 에는 듯 유난히 추웠다.한겨울이었지만 강이진은 클럽 공주 패션에 호피 무늬 민소매, 검은색 가죽 미니스커트, 망사 스타킹, 검은색 롱부
서정호는 강이진을 쳐다보며 휴대전화를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 배 대표님, 강이진 씨 찾았습니다. 대제주시로 데려갈까요, 아니면 이 자리에서 처리할까요?”전화기 너머의 남자가 어떤 대답을 했는지는 모른다.서정호는 전화를 끊은 뒤 경호원에게 눈짓했다.경호원은 바로 알아채고 강이진의 어깨를 짓누르며 차 쪽으로 걸어갔다.차가운 빗줄기 속에서 강이진의 얼굴은 잿빛으로 변했다. 그녀는 입술을 부르르 떨며 소리쳤다.“대체 어쩌려는 것인데? 이거 놔! 내가 저지른 잘못은 내가 알아서 자수할 거야. 너희들이 억압할 필요 없다고!”시끄러운 소리에 서정호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경멸스러운 얼굴로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운이 좋은 줄 알아. 배 대표가 직접 나선다고 하니 오늘 밤은 살 수 있을 거야. 개처럼 계속 짖는 것보다 어떤 유언을 남길지 잘 생각해봐. 아니면 어떻게 사죄를 해야 덜 고통스럽게 죽을지 고민해 보든가.”강이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이튿날 아침.성남, 엄씨 사택.배현수는 조유진에게 작별인사를 하러 왔다.“유진아, 나는 이만 대제주시로 돌아갈게.”조유진은 자기를 성남으로 데려다준 후, 며칠 동안 같이 머물면서 배현수의 스케줄과 일들이 많이 밀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정작 떠난다고 하니 여전히 아쉬울 뿐이었다.하얀 손으로 그의 트렌치코트 소매를 움켜쥐며 말했다.“며칠 뒤 선유와 스위스에 가는데 우리를 배웅해 줄 거예요?”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배현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녀를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더 이상 속이고 싶지도 않았다.“잘 모르겠어. 회사 일이 어떻게 될지... 너무 바쁘면 아마 시간 낼 수가 없을 것 같아.”대제주시로 돌아간 후, 우선 강이진부터 처리해야 했다. 최근 밀린 회사 일도 산더미처럼 쌓였다. 몇몇 세력들은 SY그룹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오늘 아침 주식시장이 열리자마자 SY그룹의 주가가 또 출렁였다.분명 배후에 있는 세력이 일을 꾸미고 있는 것
조유진은 폐가 좋지 않아 그녀 앞에서는 거의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하지만 매번 그에게서 담배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배현수는 웃으며 말했다.“알았어.”아래층, 도 집사가 외쳤다.“배 대표님, 차가 준비됐으니 이제 공항으로 출발하실까요?”배현수는 그녀의 얼굴을 조물락 거리고 말했다.“가요.”막 뒤로 돌았을 때 그녀의 손이 또다시 그의 소매를 잡았다.뒤를 돌아보니 조유진이 아쉬운 얼굴로 그를 쉽게 놓아주지 못하고 있었다.눈동자에는 옅은 이슬이 고여 있었다.평소에 치근덕거리기 싫어하고 독립적인 사람이었지만 요즘은 어찌 된 일인지 먼 스위스에 갈 생각만 하면 자신이 없어졌다.맑은 눈물 한줄기가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배현수는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 맑은 눈물이 마치 그의 가슴을 찌르는 듯 심장이 아팠다. 다시 돌아서서 그녀 얼굴의 눈물 자국을 닦았다. 그러고는 그녀와 머리를 맞대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나도 너와 같이 가고 싶어. 같이 밥 먹고 일하고 자고... 한 발자국도 떨어지고 싶지 않아. 하지만 그러면 금방 질리지 않을까?”조유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고는 양손에 그의 옷깃을 쥐고 고개를 숙이라는 듯 잡아당겼다.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바로 알아차린 배현수는 얼굴을 숙이고 입술을 갖다 댔다.조유진이 고개를 드는 순간 두 사람의 입술이 서로 엉겨 붙었다.남자는 큰 손으로 그녀의 등을 끌어안고 깊은 입맞춤을 이어갔다.한참 동안 입을 맞추고 있을 때 위층으로 올라온 선유가 갑자기 외쳤다. “아, 부끄러워!”녀석은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조유진은 배현수를 살짝 밀었다. 선유에게 키스하는 장면이 들킨 것이 다소 쑥스러워 귀가 빨개졌다.하지만 배현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얼굴을 숙인 채 깊은 눈빛으로 조유진을 바라보더니 손을 들어 그녀의 뒤통수를 문지르며 입꼬리를 올리고 말했다.“키스 다 했으면 이제 나 좀 보내줄래?”이렇게 말하는데 조유진이 안 된다고 할 수 있겠는가?손을 놓으며 말했다.“알았어, 조심히 가.”
대제주시, 외곽의 한 사택 안.이 사택에는 지하로 연결된 비밀 층이 있었고 수옥과 각종 형벌 기구들이 설치되어 있었다.여기는 719부대의 개인 공간으로 간첩을 고문하고 남몰래 비밀 사건들을 처리하는 곳이다.강이진이 여기로 끌려와 고문당한 것은 그녀에게 큰 행운이었다.강이진 주제에 사실 이곳에 갇힐 자격이 없었다.719부대의 사적 공간을 드나들 수 있는 것은 심문자나 피 심문자 등 신분이 이상한 사람들뿐이다.유독 강이진이라는 아무런 신분이 없는 인간이 여기에 들어오긴 했지만 저지른 악행만큼은 남보다 적지 않았다. 와르르.검은 흑연 문이 천천히 열리자 바깥의 흰 빛이 순식간에 들어왔다.큰 기럭지를 자랑하는 남자가 강한 빛을 뒤로하고 천천히 그녀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강이진은 묶인 채 음습한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얇은 옷을 입은 탓에 추운 지하 감옥에서 진작 몸이 얼어붙어 입술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당장이라도 의식을 잃을 것 같았다.강렬한 빛에 그녀는 최대한 눈을 뜨려고 애썼다.누가 왔는지 본 순간 기쁨 내색 얼굴에 스쳐 지났다.“현수 오빠...”그러나 곧 그녀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얼굴이 멍해졌다.참, 배현수는 옛날 얘기하러 온 게 아니라... 그녀의 목숨을 빼앗으러 온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두렵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말을 하지 않은 이상 평생 조유진과 정정당당하게 함께할 수 없을 것이다.자기만 진실을 입 다물고 있으면 그와 조유진은 모든 대중의 시야를 벗어나 함께 있다고 해도 여전히 마음 한구석은 편하지 못할 것이다.서정호는 두 손을 뒤로 젖히고 배현수의 뒤에 서서 말했다.“우리 몇 명이 번갈아 가며 고문했는데 본인이 한 짓이 아니라고 딱 잡아떼고 있습니다.”남자는 싸늘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지시했다.“수옥에 집어넣어.”첨벙.수옥에 한바탕 물보라가 일었다.강이진은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다.“내가 한 짓이 아니에요! 현수 오빠, 나에게 이러면 안 되잖아요! 우리 오빠가 내가 이런 꼴을 당하고 있는 것을 알면
얼음장 같은 차가운 배현수의 목소리는 잠시 멈칫했다.남자는 긴 손가에 담배를 꽂고 불을 붙였다. 그러자 담뱃재가 떨어져 수옥 안의 물 위에 둥둥 떠다녔다.눈빛이 싸늘해지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너 같은 도랑 속의 쥐는 그냥 죽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러다가 나중에 다른 사고라도 치면 어떡해.”앞으로 배현수는 어쩌면 조유진과 선유의 곁을 지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만약 강이진이 지난번의 조범처럼 탈옥하여 도망친다면... 그래서 또 무슨 나쁜 마음을 먹게 된다면 무슨 일이 발생할지 아무도 모른다. 순간 배현수의 눈빛에 살기가 도사렸다.강이진은 두 눈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나를 죽이면 조유진과 함께할 수 있을 줄 알았어? 배현수,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둘은 같은 종류의 사람인 것 같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으니까! 주변의 모든 사람을 저버릴지언정 일말의 배신도 참지 못하지. 물론 배현수 당신도 나와 별 다를 바 없고. 하하... 내가 인정하지 않는 한 당신의 어머니는 영원히 살인자야! 나를 죽인 것은 단지 목격자인 내가 모든 것을 털어놓을까 봐 두려워서 그러는 거고! 조유진 어머니의 죽음에 당신 어머니가 한 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해? 똑똑히 알려줄게. 당신 어머니도 안정희의 휠체어를 밀었어. 안정희더러 목숨으로 갚으라고 하더라고! 현수 오빠, 조유진과 피맺힌 원한은 절대 지울 수 없어. 당신들은 평생 함께할 수 없어. 그렇게 서로를 잃는 거지. 그러고 보니 조유진이 나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겠네. 나는 적어도 한 번도 가진 적이 없지만 조유진은 적어도 가진 것을 잃었잖아. 훨씬 더 절망적이겠지! 하하...”강이진은 미친 듯이 크게 웃었댔다. 그 웃음소리는 감옥 안에 메아리쳤다.배현수는 손끝의 담배를 가볍게 털었다. 그러고는 새빨간 담배꽁초는 물속으로 던졌다.남자가 일어서자 검은 그림자가 수옥 안의 강이진을 뒤덮었다.이 상황은 마치 저승사자가 망자를 데리러 온 것 같았다.배현수는 온몸에 사악한 기운이 감
강이찬의 전화라는 말에 강이진의 어두웠던 눈빛이 순식간에 빛났다.눈빛에는 도움을 청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배현수가 전화를 받을지 안 받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의 얼굴을 황급히 바라보았다.강이진은 힘겹게 기어가 배현수의 발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눈물 콧물을 흘리며 말했다.“현수 오빠, 부탁할게요. 죽기 전에 오빠에게 몇 마디만 할 수 있게 해 줘요. 유언이라고 쳐도 좋고요!”배현수는 무슨 속셈인지 웬일로 자비를 베풀었다.“받아.”서정호는 전화를 받자마자 스피커 폰으로 돌렸다.전화를 받은 두 사람이 입을 열기도 전에 강이진은 큰 소리로 살려달라고 소리쳤다.“오빠, 나 현수 오빠에게 잡혔어.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는데 일단 빨리 와서 나 좀 구해줘. 만약 오지 않으면 비참하게 죽을지도 몰라! 빨리 현수 오빠에게 부탁해서 나를 빼내 줘! 이렇게 굴욕적으로 죽고 싶지 않다고!”서정호는 발을 들어 어깨를 걷어찼다.“시끄러워!”발길질을 당한 강이진은 뒤로 벌렁 나자빠져 바닥에 주저앉았다. 꼭 마치 지하 도랑에서 꿈틀거리는 구더기 같았다.전화에서 강이찬은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서정호는 일부러 모른 척하며 물었다.“강 사장님, 저에게 무슨 일로 전화하셨어요?”강이진은 울며 애원했다.“오빠, 빨리 와서 살려달라고! 여기 너무 무서워! 저 사람들이 나를 수옥에 던져 넣었어! 수옥에 죽은 쥐도 있어. 그리고 또 내 혀까지 뽑으려고 했어! 오빠... 내가 다른 사람 손에서 죽는 걸 보고만 있을 거야?”강이찬은 몇 초간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서 비서, 배 대표님 옆에 있나요? 배 대표님께 할 얘기가 있어요.”서정호는 의아한 얼굴로 배현수를 쳐다봤다.전화를 건네받은 배현수는 휴대전화를 받자마자 스피커를 끄고 바로 물었다.“여동생 대신 사정하러 온 거야?”“이진이가 많이 잘 못 했다는 것은 알아. 하지만 내 친동생이야. 우리 친구의 체면을 봐서 한 번만 자수할 수 있게 도와줘. 무기도형을 선고받아도 돼. 그런 수단만은 쓰
“현수 오빠, 오빠 자신을 속이지 마. 오빠와 조유진 사이는 아무리 노력해도 평생 이루어질 수 없는 운명이야! 내가 가지지 못한 사람 조유진도 가질 수 없어! 오빠와 조유진을 항상 저주했어. 서로 배신하고 평생 만나지 못하게 하라고!강이진의 헛소리를 들은 배현수는 화를 내는 대신 오히려 피식 웃었다.남자는 고개를 살짝 올리더니 입꼬리를 양옆으로 올리고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말 다 했어?”배현수가 고개를 옆으로 한 번 갸웃하자 뒤에 있던 부하들이 다 같이 앞으로 나섰다.뒤돌아선 남자의 눈빛은 음흉하고 흉악했다.“아!”뒤에서 울부짖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붉고 뜨거운 피가 배현수의 축 늘어진 손등 위로 튀었다.강이진의 입에는 피가 솟구쳐 흐르고 있었다.그저 ‘우우'하는 울음소리를 내며 두 손으로 더러운 땅을 헤집고 배현수의 발아래까지 기어왔다.그녀의 손이 구두를 만지자 남자는 양미간을 찌푸렸다. 눈빛에는 혐오함이 가득했다.강이진은 입꼬리를 올리며 씩 웃었다.그녀가 더럽다고 싫어하는 것일까?하지만 이제 그도 깨끗하지 않다.더러워지려면 같이 더러워져야 하지 않겠는가?떨리는 손으로 배현수의 양복바지를 쥐려고 하자 배현수는 그녀의 더러운 손을 발밑에 디딘 후 구두를 꽉 눌렀다.그리고 눈을 내리깔고 조금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이찬이가 그동안 너무 버릇없게 키웠네. 말할 줄 모르면 입을 다물라는 기본도 안 가르쳤으니... 그렇게 고집을 부리겠다면야 마지막 숨통도 남겨둘 필요가 없겠지.”강이진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배현수는 무표정한 얼굴로 한마디 했다.“다시 수옥에 던져놓고 죽기 직전에 강이찬에게 전화해 시신을 데리고 가라고 해.”강이찬과 강이진, 두 남매에게 서로 마지막 얼굴은 보여줘야 하지 않겠는가? 배현수는 단호한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일말의 인정은 있었다.강이진을 본 서정호의 눈에 안타까운 눈빛이 스쳐 지났다. 그 모습은... 정말 이루 말할 데 없을 정도로 비참했다.그는 배현수 옆에 서서 고개를 살짝 숙이고 대답했다
조유진의 다소 엉뚱한 질문에 전화기 너머의 사람은 잠시 대답을 하지 못했다.체면을 중요시하게 여기는 조유진은 2초간 기다려도 대답이 없자 헛기침을 하고 바로 말했다.“선유가 계속 전화하라고 재촉해서요. 보고 싶대요. 선유와 얘기 좀 할래요?”배현수는 그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밝히지 않았다.“응. 그래.”조유진은 선유를 불러내 녀석에게 핸드폰을 건넸다.전화에서 녀석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보세요, 아빠?”배현수는 신신당부했다.“엄마가 요즘 많이 피곤하다고 하니까 밤에 푹 주무시라고 하고 게임을 하자고 조르지 마. 알겠지?”“네. 아빠, 며칠 있으면 스위스 가는데 우리 배웅하러 올 거예요?”배현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아직 잘 모르겠어.”선유는 작은 입을 삐쭉 내밀며 말했다.“아빠가 배웅하러 오지 않으면 엄마가 슬퍼할 거예요. 아빠가 가자마자 엄마가 하루종일 멍만 때리고 있어요. 무슨 일이 있는 사람처럼요!”“응, 그래. 엄마에게 전화 좀 바꿔줘.”“네.”선유는 핸드폰을 다시 조유진에게 건넸다.조유진은 전화를 받자마자 설명했다.“선유가 헛소리하는 거예요.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난 잘 지내고 있어요. 정말 시간 내기 어려우면 배웅은 안 해줘도 돼요. 어차피 안 돌아오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저 스위스에 가서 좀 살다 올 뿐인데요.”배현수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싶지도 않고 강요하고 싶지도 않았다.서로의 감정 중 한쪽이 상대방을 압박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면 조유진은 이 감정을 유지하는 게 따분해지고 감정 자체의 의미도 없어질 거라 생각했다. 어차피 안 돌아올 것도 아니고 단지 스위스에 가서 잠시 머무는 것뿐이다.전화를 끊기 전 배현수가 조유진을 불렀다.“유진아.”“네?”배현수는 몇 초 동안 침묵한 후,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보고 싶어. 네가 나를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보고 싶어.”전화기 너머의 조유진은 전화기를 손에 꼭 쥔 채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입꼬리는 저도 모르게 귀에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