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유진은 고개를 들어 배현수를 향해 새하얀 목덜미를 드러내며 눈을 꼭 감았다.그리고는 떨리는 마음을 애처 참으며 입을 열었다. “현수 씨, 하려면 빨리해요.”순간 배현수는 그녀의 목을 잡고 몸을 수그렸고 그의 뜨거운 몸이 그녀를 전부 감쌌다....한편 테라스에서.남초윤이 김성혁을 밀치자 낯익은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지율 씨...”그는 얼음장같이 차가운 얼굴로 남초윤의 앞에 선 채 두 사람을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너무 일찍 와서 두 사람 방해했네요? 옛날얘기는 잘하셨어요?”옛날얘기.육지율은 특히 이 두 단어에 무거운 감정을 싣고 물었다.남초윤의 화사한 얼굴도 점점 핏기 없이 창백해졌다.사실 조금 전, 그녀도 김성혁이 그녀에게 키스할 줄 몰랐다.김성혁은 자기 분수를 잘 아는 사람이라 상황 파악도 잘하고 가벼운 행동을 쉽게 하지 않는다. 하물며 두 사람은 진작에 헤어졌다. 그런 그가 남초윤을 만나자마자 이렇게 자신을 통제하지 못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조금 전 키스는 남초윤이 먼저 한 게 아니다. 그리고 그녀와 육지율의 결혼도 비즈니스 필요로 한 것이지 서로에게 감정이란 전혀 없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육지율과 마주쳤을 때 남초윤은 저도 모르게 죄인이 된 것 같았다. 그녀가 육지율을 향해 걸음을 옮기려 하자 갑자기 옆에 있던 김성혁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얼마나 세게 꽉 잡았던지 남초윤이 벗어나려고 해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때 김성혁이 입을 열었다.“윤이야. 나에게 소개 안 해줘? 이분은?”윤이야?육지율은 처음으로 남초윤을 부르는 애칭이 윤이라는 걸 알았다. 순간 남초윤은 목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저는 육지율이라고 합니다. 초윤이 남편 되는 사람이에요.”육지율은 말이 끝나자마자 성큼성큼 걸어가 남초윤의 손목을 잡았다.하지만 김성혁이 손을 놓지 않자 육지율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비웃는 얼굴로 말했다.“김 대표님도 체면이 있는 분이신데 이렇게 남의 아내를 붙잡고 손을 놓지 않으면 사람들이 안 좋게 보
“남초윤이 언제 결혼했는지 알아봐 줘. 또... 결혼한 이유도.”...육지율은 남초윤의 손을 끌고 연회장에서 나왔다.그의 걸음 폭이 하도 커 하이힐을 신고 있는 남초윤이 따라가기 버거울 정도였다.그녀는 육지율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지율 씨, 뭐가 기분이 나쁜 건데요?”남자는 그녀를 세면대 쪽으로 끌고 가더니 한마디 했다.“깨끗이 씻어요.”그 말에 남초윤은 순간 멈칫했다.“뭐라고요?”“왜요? 섭섭해요? 김성혁이 돌아왔는데 더 이상 예전의 가난뱅이가 아니어서 후회돼요? 당신 아버지도 김성혁에게 꺼지라고 못 하겠고 이제는 남씨 가문의 사업을 위해서 자금을 대줄 능력도 생겼으니 나와 이혼이라도 할 거예요?”이것은 육지율이 두 번째로 그녀 앞에서 ‘이혼’이라는 단어를 언급한 것이다. 첫 번째는 선유가 그녀와 김성혁의 딸인 줄 알았을 때였다. 물론 남초윤은 이런 의심에 너무 어이가 없어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남씨 가문의 사업에 필요한 자금줄이었기에 그녀는 참을 수밖에 없었다.육지율의 말에 남초윤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결혼 전에 육 대표님이 그랬잖아요? 결혼 후에도 알아서 각자 즐기자고? 서로 사생활 침범하지 말고. 그런데 왜요? 다른 남자랑 뽀뽀한 것 같고 질투라도 하는 거예요?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뭐 그런 내로남불인 거예요?”“누구와 같이 놀든 상관 안 해요. 술집에 있는 이름 모를 아무나 다 상관없어요. 하지만 김성혁은 안 돼요. 잊지 말아요, 당신은 육 씨 집안 며느리라는걸!”그는 얼음장같이 차가운 얼굴로 말을 하고 있었다. 평소 건들거리는 모습과는 완전 딴판이었다.하지만 이것은 남초윤에게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지금 이 모습이야말로 육지율의 가면을 벗은 진짜 모습이기 때문이다.두 사람은 이제 결혼한 지 막 2년이 되었다.육지율과 관련된 스캔들은 수도 없이 많았고 남초윤이 직접 처리한 것들을 다 세려면 열 손가락으로 턱없이 부족하다. 연예계 뉴스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남초윤에게 육지율은 항
오늘 저녁, 김성혁이 돌아왔으니 환승할 곳을 찾았기에 더 이상 이혼도 두렵지 않다는 건가? 남씨 가문, 하... 지난 2년간 남씨 가문에 들어간 돈이 얼만데 차라리 지나가는 개나 줘버릴걸! 개를 키우면 뼈다귀 하나만 던져줘도 주인에게 고맙다고 꼬리를 흔드는데 남초윤은 오히려 눈을 치켜뜨며 대들고 있으니!여기까지 생각한 육지율은 인상을 더 심하게 찌푸리며 발아래 액셀을 힘껏 밟았다.육지율이 탄 컬리넌은 어두운 밤을 가르며 쏜살같이 내달렸고 남초윤에게로 유턴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남초윤은 큰길에 서서 조유진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조유진은 계속 전화를 받지 않았다.이때 검은색 벤틀리 한 대가 그녀 앞으로 다가와 차창을 천천히 내리더니 그 안에는 김성혁의 얼굴이 보였다. “타. 집까지 바래다줄게.”무슨 마음에서였을까? 몇 초 동안 망설이던 남초윤은 이내 별말 없이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고 그의 차에 올라탔다.육지율이 그녀가 환승할 곳을 찾았다고 했듯이 어쩌면 진짜 그럴지도 모른다.그래서 이혼이라도 하려고?이혼하면 하는 거지 굳이 남초윤이 세 번째로 이혼하자는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지 않은가. 매번 싸울 때마다 남초윤은 머리를 숙이고 육지율을 달랬다.육지율은 어릴 때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부잣집 도련님이다. 그래서 거만하고 제멋대로이며 그 누구도 안중에 없다. 한마디로 눈에 뵈는 게 없다. 그래서 남초윤이 그를 달래고 타이르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절대 분위기 파악을 못 하는 염치없는 사람이 아니다. 적시 적소에 항상 본인 분수에 맞게 그리고 필요할 때는 능글맞은 태도로 사람을 대한다. ...호텔 로얄 스위트룸.배현수의 입술이 하얀 그녀의 피부를 헤엄치듯 어루만지고 있었다. 조유진은 두 손을 꼭 쥔 채 온몸을 심하게 떨었다.그녀는 최대한 이 상황을 즐겨보려고 노력했지만 눈을 감자마자 안정희가 계단 아래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누워있던 모습이 저도 모르게 머릿속에 떠올랐다.그날 안정희
조유진의 모습을 본 순간, 아까부터 가까스로 욕구를 참고 있던 배현수의 눈에 빛이 반짝였다.그는 침대 머리맡에 팔을 기댄 채 일어나 앉아 힘겹게 손을 들어 문 앞에 있는 조유진을 향해 말했다.“다시 들어와 놓고 거기 그렇게 서 있으면 어떡해?”그 물음에 조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배현수는 그녀가 겁을 먹고 있다고 생각해 얼굴에 살짝 미소를 띠며 말했다.“싫으면 건드리지 않을게. 이리와 앉아, 유진아.”조유진은 한 번 크게 심호흡하더니 천천히 배현수 앞으로 다가갔다.순간 침대 끝에 앉아 있는 배현수는 그녀를 품으로 확 끌어당겼고 조유진은 그 이끌림에 따라 그의 다리에 앉았다. 배현수는 자신의 이마를 살며시 그녀에게 기대었다. 그의 욕구는 이미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지만 최대한 태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다시 돌아왔어?”사실 조유진은 그대로 갈 수도 있었다.그녀가 이렇게 배현수를 거부하는데 그가 어떻게 조유진을 잡고 놓지 않으려 하겠는가? “현수 씨는 채권자이고 저는 아직 2천 8백억 원을 빚졌어요. 빚쟁이 주제 도망치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해요.”그녀의 진지한 대답에 배현수는 피식하며 미소를 지었다.배현수는 그녀의 코끝을 한 번 톡 치더니 그녀를 바라보며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웃었다.조유진이 계약에 대해 이렇게 진지하게 생각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그녀는 빚을 갚기로 약속하고 또 정말 부지런히 빚을 갚으려 하고 있다.하지만 조유진은 배현수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배현수의 불덩이 같음 몸 상태를 빨리 해결하는 것이었다.그녀는 더 이상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내가... 내가 어떻게 하면 현수 씨를 도울 수 있을까요?”그러자 배현수는 쉰 목소리로 그녀를 보며 되물었다.“정말 나를 돕고 싶은 거야?”“네...”돕고 싶지 않았다면 절대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배현수가 물었다. “병원에 데려다줄래?”그 말에 조유진은 일어나 그를 부축하려 했다.
각자 알아서 즐기는 것은 마치 육지율에게만 적용이 된 듯 남초윤은 함부로 즐길 수도 즐겨서도 안 되었다. 이 비즈니스 결혼은 남 씨 집안에서 육지율에게 부탁해 겨우 진행된 것이다. 그래서 남초윤은 이익만 보고한 결혼 앞에서 절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지난 2년 동안, 그녀는 이렇게 힘든 날들 속에서 살아왔고... 이제 더 이상은 참기 어려울 지경까지 이르렀다.순간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남초윤은 옆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조차 잊은 듯 슬프게 흐느꼈다. 김성혁은 깨끗한 손수건을 건네며 한마디 했다. “이걸로 닦아.”“고마워요.”남초윤은 그가 건네는 손수건을 받아 눈물을 닦았고 이미지 관리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듯 코까지 풀었다.옆에 앉아 있는 김성혁은 그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쳐다봤다.남초윤은 아직도 설움이 가시지 않았는지 계속 흐느끼며 말했다. “나중에 새것 하나 사줄게요. 이건 제가 더럽혀서... 죄송해요.”하지만 김성혁이 신경 쓰는 것은 절대 손수건 하나가 아니다. 그저 자신이 그녀 옆에 없는 이 시간 동안 그녀가 어떻게 지내고 있었는지가 너무 궁금했다. 하지만 울음이 그치지 않는 그녀를 보니 분명 잘 지내지는 못한 것 같았다.김성혁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예전처럼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다.하지만 그녀가 결혼했다는 것이 순간 생각난 김성혁은 올렸던 손을 다시 내렸다. 늘 상황 파악을 잘하고 자신이 있어야 할 곳, 해야 할 일, 하면 안 되는 일, 모든 것을 자신의 분수에 맞게 행동하는 김성혁이다. 오늘 밤 그녀에게 키스한 이유는 남초윤이 결혼한 줄 진짜 몰랐기 때문이다.5년 만에 그녀를 다시 만났지만 가슴은 여전히 그때처럼 두근거렸다.젊었을 때 소중한 사람을 못 알아본 대가는 일생을 들여 치러야 했다.사실 김성혁은 그녀를 옆에서 이렇게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충분히 귀국한 가치가 있다고 여겼다. 곧 아파트 입구에 도착했고 차에서 내린 남초윤이 김성혁에게 한마디 했다. “데려다줘서
두 시간 뒤...로얄 스위트룸은 아직 애매한 분위기가 가시지 않았다.배현수가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만지며 물었다. “힘들어?”조유진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분명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당장 쓰러질 것 같이 아픈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정신이 맑아 보이지? 이미 욕구를 해결해서...? 그래서 기분이 상쾌한건가?화장실로 들어간 조유진은 수도꼭지를 틀었고 찬물이 그녀의 두 손에 남은 뜨거운 열기를 씻어냈다.그때 배현수도 화장실로 들어오더니 넓은 가슴을 그녀의 등 뒤에 대며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손이 아파?”말을 하고 있는 배현수의 얼굴은 너무 진지했고 전혀 농담하는 것 같지 않았다. 조유진은 그의 말에 아무 대꾸를 하지 않았고 대신 옆으로 걸음을 옮겨 그의 품을 벗어났다.“늦었어요. 현수 씨 상태도 많이 좋아진 것 같으니 빨리 산성 별장으로 가요. 선유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가방과 휴대전화를 챙기며 방을 나서려 했다.고개를 들어 시계를 보니 12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선유에게 전화할까 말까를 고민하면서 휴대전화를 본 조유진은 여러 통의 부재중 전화가 온 것을 발견했다. 전부 남초윤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오늘 밤 조유진에게는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 그녀는 이전의 일들을 잠시 잊었었다. 그리고 휴대전화의 남초윤의 이름을 보고서야 잠시 잊었던 기억들이 다시 생각났다.남초윤과 김성혁이 테라스에 있던 모습... 그리고 그 모습을 육지율이 보게 된 상황...물론 조유진은 그 후의 상황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지만 분명 심상치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남초윤이 이 시간에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는 것 자체가 육지율과 싸웠다는 것을 설명한다.여기까지 생각한 조유진은 급히 남초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화장실에서 셔츠를 다시 정리하고 나온 배현수는 휴대전화를 들고 초조해하는 조유진을 보고 한 마디 물었다.“왜? 무슨 일 있어?”“10시가 넘었을 때 초윤이가 나
조유진의 호소를 듣고 있는 배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결혼생활의 자질구레한 일들까지 배현수가 어찌 알겠는가?그러고 보니 조유진은 남초윤의 일에서만 이성을 잃는 것 같다. 여기까지 생각한 배현수는 기분이 조금 나빴다. 조유진도 감정이 있고 표현도 하고 화를 낼 줄 아는 사람인데 유독 자신에게만 늘 아무런 감정 없는 사람처럼 대한다. 조유진은 육지율의 막말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방을 빨리 나가려고 두리번거리며 휴대전화를 찾았다. 그러자 배현수가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뭘 찾아?”“휴대전화요.”“너의 손에 있잖아.”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숙여보니 휴대전화는 조유진 손에 쥐여 있었다. 조유진은 멋쩍은 듯 머뭇거리더니 이내 화제를 돌렸다.“가요. 늦었어요.”배현수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호텔 로얄 스위트룸을 나섰다.엘리베이터를 기다릴 때, 배현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쉽게 이혼 얘기를 꺼내는 건 지율이가 잘못한 거야.”배현수는 만약 자신이 조유진과 결혼한다면 절대 이혼이라는 말을 꺼내지 않을 거라 다짐했다.혹시라도 조유진이 이 단어를 언급하면 그는 그녀가 두 번 다시 언급 못 하도록 만들 것이다. 육지율은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 친한 친구지만 이런 부분에서 배현수는 그의 편에 설 수 없다.배현수에게 결혼이란 그 무엇보다 신성한 것으로 일단 평생 함께하기로 약속한 이상 절대 어기면 안 된다. 두 사람이 탄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네 면의 밝은 거울에 두 사람의 모습이 반사되었다. 배현수의 옆에 서 있는 조유진은 반사된 모습을 통해 곁눈질로 그를 힐끗 바라봤다.구체적으로 뭐라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확실히 배현수가 변했다는 것을 조유진은 느낄 수 있었다. 혹시 착각일까? 오늘따라 배현수가 유난히 조유진을 챙기고 그녀의 편을 들려고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조유진의 머릿속에는 온통 남초윤의 걱정뿐이다. 만약 남초윤이 결심하고 이 결혼생활을 끝내려 한다면
두 사람이 차 옆까지 걸어왔을 때 갑자기 조유진의 휴대전화가 울렸다.전화기 화면에 떠 있는 ‘엄 어르신’이라는 글자에 조유진은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엄 어르신?”“대제주시에 간 지 벌써 보름이 되었네요. 어떻게 지내요?”전화기 너머 엄준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상냥했다.조유진이 처음으로 부성애를 느낀 사람은 조범이 아니라 정말 우연히 만나게 된 엄준이다. 이 말은 어쩌면 다른 사람들의 비웃음을 살지 모르지만 엄연한 사실이었다.엄준은 조유진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오랜 친구를 만난 느낌이라고 했다. 사실 조유진도 똑같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순간, 전화를 걸어 조유진의 생활에 관심을 두는 모습이 마치 나이 드신 아버지가 밖에 출장 간 딸에게 안부를 묻는 것 같았다.휴대전화를 꽉 움켜쥔 조유진의 가슴은 벌써 뜨거운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배현수가 힘들게 하지는 않아요? 창민이가 돌아와서 유진 씨 얘기를 많이 했어요. 만약 힘들면 언제든지 성남으로 돌아와요. 엄 씨 사택이 유진 씨 집이라는 거 잊지 말고요.”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진 조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알겠어요.조금만 더 있다가... 여기 일이 다 끝나면 성남에 가서 뵙겠습니다.”운전석에 앉아 있는 배현수는 운전대를 더 꽉 쥐었다.조유진은 아직도 성남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는 생각이 배현수의 머릿속을 강타했다. 그녀는 엄준과 이런저런 인사를 더 나눈 뒤 전화를 끊었고 휴대전화의 통화기록 보던 그녀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마 어릴 때 ‘부성애’를 느껴본 적이 없어 엄준이 그녀에게 관심을 가져줄 때마다 쉽게 마음이 동요되는 것 같았다. 어려서부터 부성애가 부족한 아이는 커서도 부성애의 결핍을 늘 느끼고 있다. 그리고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이제는 부성애가 필요 없는 게 아니다. 젊었을 때 소중한 사람이 없는 빈자리의 대가는 일생을 들여 치러야 했다.이 오랜 마음의 빈자리를 어쩌면 평생이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