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유진의 호소를 듣고 있는 배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결혼생활의 자질구레한 일들까지 배현수가 어찌 알겠는가?그러고 보니 조유진은 남초윤의 일에서만 이성을 잃는 것 같다. 여기까지 생각한 배현수는 기분이 조금 나빴다. 조유진도 감정이 있고 표현도 하고 화를 낼 줄 아는 사람인데 유독 자신에게만 늘 아무런 감정 없는 사람처럼 대한다. 조유진은 육지율의 막말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방을 빨리 나가려고 두리번거리며 휴대전화를 찾았다. 그러자 배현수가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뭘 찾아?”“휴대전화요.”“너의 손에 있잖아.”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숙여보니 휴대전화는 조유진 손에 쥐여 있었다. 조유진은 멋쩍은 듯 머뭇거리더니 이내 화제를 돌렸다.“가요. 늦었어요.”배현수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호텔 로얄 스위트룸을 나섰다.엘리베이터를 기다릴 때, 배현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쉽게 이혼 얘기를 꺼내는 건 지율이가 잘못한 거야.”배현수는 만약 자신이 조유진과 결혼한다면 절대 이혼이라는 말을 꺼내지 않을 거라 다짐했다.혹시라도 조유진이 이 단어를 언급하면 그는 그녀가 두 번 다시 언급 못 하도록 만들 것이다. 육지율은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 친한 친구지만 이런 부분에서 배현수는 그의 편에 설 수 없다.배현수에게 결혼이란 그 무엇보다 신성한 것으로 일단 평생 함께하기로 약속한 이상 절대 어기면 안 된다. 두 사람이 탄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네 면의 밝은 거울에 두 사람의 모습이 반사되었다. 배현수의 옆에 서 있는 조유진은 반사된 모습을 통해 곁눈질로 그를 힐끗 바라봤다.구체적으로 뭐라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확실히 배현수가 변했다는 것을 조유진은 느낄 수 있었다. 혹시 착각일까? 오늘따라 배현수가 유난히 조유진을 챙기고 그녀의 편을 들려고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조유진의 머릿속에는 온통 남초윤의 걱정뿐이다. 만약 남초윤이 결심하고 이 결혼생활을 끝내려 한다면
두 사람이 차 옆까지 걸어왔을 때 갑자기 조유진의 휴대전화가 울렸다.전화기 화면에 떠 있는 ‘엄 어르신’이라는 글자에 조유진은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엄 어르신?”“대제주시에 간 지 벌써 보름이 되었네요. 어떻게 지내요?”전화기 너머 엄준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상냥했다.조유진이 처음으로 부성애를 느낀 사람은 조범이 아니라 정말 우연히 만나게 된 엄준이다. 이 말은 어쩌면 다른 사람들의 비웃음을 살지 모르지만 엄연한 사실이었다.엄준은 조유진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오랜 친구를 만난 느낌이라고 했다. 사실 조유진도 똑같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순간, 전화를 걸어 조유진의 생활에 관심을 두는 모습이 마치 나이 드신 아버지가 밖에 출장 간 딸에게 안부를 묻는 것 같았다.휴대전화를 꽉 움켜쥔 조유진의 가슴은 벌써 뜨거운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배현수가 힘들게 하지는 않아요? 창민이가 돌아와서 유진 씨 얘기를 많이 했어요. 만약 힘들면 언제든지 성남으로 돌아와요. 엄 씨 사택이 유진 씨 집이라는 거 잊지 말고요.”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진 조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알겠어요.조금만 더 있다가... 여기 일이 다 끝나면 성남에 가서 뵙겠습니다.”운전석에 앉아 있는 배현수는 운전대를 더 꽉 쥐었다.조유진은 아직도 성남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는 생각이 배현수의 머릿속을 강타했다. 그녀는 엄준과 이런저런 인사를 더 나눈 뒤 전화를 끊었고 휴대전화의 통화기록 보던 그녀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마 어릴 때 ‘부성애’를 느껴본 적이 없어 엄준이 그녀에게 관심을 가져줄 때마다 쉽게 마음이 동요되는 것 같았다. 어려서부터 부성애가 부족한 아이는 커서도 부성애의 결핍을 늘 느끼고 있다. 그리고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이제는 부성애가 필요 없는 게 아니다. 젊었을 때 소중한 사람이 없는 빈자리의 대가는 일생을 들여 치러야 했다.이 오랜 마음의 빈자리를 어쩌면 평생이라는
조유진은 양치하고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켰고 휴대전화 화면에는 몇 개의 인기 검색어가 메인에 떠 있었다.「동진 과학 김성혁 CEO 어제 귀국.」「김성혁 심야에 유부녀와 데이트.」「육지율과 전 여친의 재회.」「육 씨 부부의 불륜.」...조유진은 이 파격적인 실검을 보면서 점점 예감이 좋지 않음을 느꼈다.이 실검들은 조회수를 높이기 위해 정말 피비린내가 날 지경이었다.이 몇 개의 인기 검색어를 클릭해 들어가면 모두 실제 기사와 사진들까지 떡하니 기재되어 있었다. 남초윤이 김성혁의 차에 올라타...유설영이 육지율을 부축해 메리어트 호텔로...정말 하나같이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때 씻고 내려온 배현수가 테이블에 앉자 조유진이 한 마디 물었다. “실검 봤어요?”조금 전, 배현수가 씻고 있을 때 서정호가 이 실시간 검색어를 그에게 보내며 사람을 찾아 기사 정보를 삭제하지 않겠냐고 물었었다. 육지율이 SY그룹의 임원으로서 결혼한 임원이 이런 스캔들에 휘말려 드는 일은 그룹 이미지에 큰 영향을 준다. “응. 봤어.”배현수는 담담한 얼굴로 대답했다.하지만 이런 일을 육 씨 집안과 육지율 당사자조차 모두 별로 신경 쓰지 않는데 외부인인 배현수는 더욱 나설 필요가 없었다.육지율이 사람을 시켜 기사를 막지 않는 거로 보아 분명 그럴 생각 자체가 없을뿐더러 이런 상황이 일어나길 바랄지도 모른다.어쩌면 이 실검 기사도 육지율이 사람을 시켜 쓴 것일 수도 있다.그리 불가능한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육지율은 SY의 임원일 뿐만 아니라 재벌 집 자제로서 이런 기사들은 그의 허락 없이 절대 함부로 외부에 퍼뜨릴 수 없다. 하지만 조유진이 이런 걸 어찌 알겠는가?그녀는 재빨리 음식을 몇 점 먹더니 배현수를 향해 물었다. “나 오늘 초윤이와 남 씨 집에 가기로 약속했는데 차 좀 빌려주면 안 돼요?”“내가 데려다줄게. 지율이와 초윤 씨가 대체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지 알아도 볼 겸.”“그래요.”조유진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배현수가 그의 손목을 잡
이 말에 남재원은 더욱 화를 냈다.“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그렇게 하는 게 모두 너를 위해서 아니야? 육 씨 집안과 같은 명문가가 김성혁 그 빈털터리 자식보다 못한단 말이야?”‘나를 위해서?’그 말에 남초윤은 피식 웃음을 보였다.“진짜 나를 위한 게 맞아요? 이익만 본 게 아니라요? 나를 위한 건데 친딸을 낯선 남자의 침대로 보낸 거예요? 남재원 씨, 잊었어요? 2년 전, 당신은 나를 육지율의 침대로 보내려고 일부러 나에게 약까지 먹였어요!”딸을 사랑하는 어느 아버지가 자신의 친딸이 먹는 음식에 몰래 약을 넣겠는가?더욱 우스운 것은 그녀가 가장 믿는 엄마까지도 그 행동에 가담했다는 것이다.그녀와 육지율의 첫 만남은 침대에서였다.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찍, 파파라치가 문 앞에 모여 그들이 하룻밤을 보낸 사실을 인터넷에 퍼뜨렸다.남초윤은 굳이 누가 그랬는지 조사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남재원이 그렇게 한 것은 육지율이 그녀와 하룻밤을 보내고 나서 모른 척하고 그녀와 결혼하지 않을까 봐 였다. 그렇게 되면 남재원의 계획은 모두 수포로 돌아간다.그래서 남재원은 이 소식을 언론에 흘리고 육 씨 집안에 결혼을 강요했다.육 씨 집안은 대제주시의 명문가로서 체면을 중요시한다. 그래서 다음날 육 씨 집안에서는 남 씨 집에 와서 혼담 얘기를 꺼냈다.이 일로 육지율은 평소에도 남초윤을 조롱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남 씨 집안사람들은 수법이 정말 대단해. 돈이라면 못 하는 일이 없는 것 같아.”육지율의 눈에 2년 전 그날 밤은 그들이 짜고 치는 고스톱에 자신이 놀아난 것이었고 남초윤 또한 그 짜고 치는 고스톱에 가담한 일원이다. 그 후로 남초윤은 육지율이 자신을 건드리는 것 자체를 거부했다. 남초윤의 행동은 육지율의 눈에 그저 그녀가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것으로 보였고 실제 그녀가 모르는 남자와 강제로 관계를 맺게 한 것은 그녀의 부모님이 설계한 ‘걸작’이라는 것을 육지율은 모르고 있었다. 이 비즈니스 결혼은 시작부터 터무니없었다.
“당신...”뚜뚜...전화가 끊어졌다.남재원의 얼굴은 흉하기 짝이 없을 정도로 변했다.하지만 남초윤은 놀라는 기색이 하나도 없었다.두 사람이 결혼한 이래 이런 일들이 한두 번 있은 게 아니기에 남초윤에게는 일상이나 다름없었다. 육지율이 얼마나 바람둥이인지는 그녀가 제일 잘 알고 있을 것이다.남초윤은 담담한 얼굴로 남재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육 씨 집안에서 저를 반품할까 봐 전전긍긍하기보다는 이후 남 씨 집안 사업을 어떻게 할지 걱정하는 게 더 빠를 거예요.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지율 씨가 남 씨 집안 사업에 후원할지 안 할지는 그 사람 마음에 달려있다고요.”찰싹!남재원은 손을 들어 남초윤의 뺨을 세게 내리쳤다.“여보! 왜 이러는 거예요!”손바닥으로 볼을 움켜쥔 남초윤은 순간 입가에 피비린내가 물씬 풍기는 것을 느꼈다. 남재원의 따귀는 귀에 이명이 들릴 정도로 셌고 그는 또 한 번 언성을 높여 외쳤다.“네가 좀만 노력해서 육 씨 집안에 떡두꺼비 같은 아들이라도 낳아줬더라면 안주인 자리를 다른 여자에게 뺏기지 않았겠지! 밖에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육지율 같은 남자와 자고 싶어 하는지 몰라? 너는 온종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그깟 회사 뭘 다닐 필요가 있다고 집안일에 신경도 안 쓰고 맨날 회사일... 회사일... 조금이라도 육지율에게 신경 좀 썼더라면 이혼이라는 ‘이’자도 안 나왔을 거야!”남초윤은 한쪽 입꼬리만 올린 채 피식 웃었다. 그녀는 남재원의 말에 반박하기조차 귀찮았다.남재원의 생각에 육지율이 밖에서 여자와 노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재력과 권력을 가진 사림은 충분히 실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아내인 남초윤이 그를 이해해 주고 그의 마음을 잡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남재원이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자신도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기 때문이다. 그가 남초윤을 끌고 육 씨 집으로 가서 사과하기 위해 집 대문을 나서려는데 마주 오는 배현수와 조유진을 마주쳤다.조유진이 남재원을 향해 달려들며 화를 내려
메리어트 호텔의 로얄 스위트룸. 유설영은 깔끔한 옷차림을 한 맞은편의 남자에게 휴대전화를 전달하며 말했다. “내가 네 말대로 연기는 했는데 너는 진짜로 이혼하고 싶은 거야 아니면 그냥 복수하고 싶은 거야?”육지율은 휴대전화를 휙 낚아채더니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왜? 이혼이라도 하고 너와 같이 살까?” 육지율의 비꼬는 말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유설영은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세우더니 농담 반 진담 반인 얼굴로 대답했다. “안 될 것도 없지? 네가 재혼이라도 난 상관없어.”육지율 같은 남자는 여러 번 재혼해도 아마 수많은 여자가 그와 함께하려 할 것이다. 육 씨 집안 배경은 일반 사람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육지율은 코웃음을 치더니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어떡하지? 나는 상관있는데? 나는 떠난 버스는 안 잡거든.” 그는 핸드폰을 손에 든 채 차가운 얼굴로 로얄 스위트룸을 나섰다. 육지율이 차에 타자마자 손에 있던 핸드폰이 또 울렸다.이번에는 남 씨 집안이 아닌 배현수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배현수가 바로 물었다. “너 계속 오지 않으면 남재원이 너의 와이프를 때려죽일지도 몰라.”순간 육지율은 인상을 찌푸리더니 물었다.“너... 남초윤 친정에 있어?”“어, 유진이가 나 끌고 온 거야.”“남재원은 바보 멍청이라 한 대 때리면 정신 차릴 거야.”그 말에 배현수는 차가운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내 아내 아버지도 아닌데 내가 왜 때려?”육지율도 어이가 없어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올 거야 안 올 거야? 안 오면 나는 유진이 데리고 갈게.”남초윤의 아버지 남재원은 배현수가 시큰둥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한 시간 넘게 그에게 아부를 퍼붓고 있었다. 지하 주차장을 나서고 있는 블랙 컬리넌에 탄 육지율은 이를 한 번 악물더니 말했다. “기다려.” ...문명희는 의약 상자와 과일을 들고 위층에 있는 남초윤의 방으로 향했다. 그동안 두 사람의 짜고 친 판
앞서 그녀는 문명희가 그녀를 이해해주고 그녀와 같은 전선에 서주도록 시도했었지만, 알고 보니 문명희 역시 그 상황을 설계한 장본인이었다...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마저 단 한 번도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그래서, 이번에는 정말로 이혼을 하려는 것이야?”결국, 문명희의 포인트는 여전히 이혼이었다. 그녀는 마치 남초윤의 감정은 안중에도 없고 그저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을 듣기 위해 남초윤을 몰아세우고 있는듯했다.곁에서 듣고 있던 조유진마저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하물며 친딸인 남초윤은 더욱 말할 것도 없었다.남초윤은 손을 뻗어 얼굴을 감싸 쥐고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엄마, 저 좀 진정할 수 있도록 나가주실래요?”문명희도 결국 별다른 방법이 없어 방을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방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싸늘한 얼굴을 한 육지율의 모습에 문명희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육 서방...”그때, 아직 되돌릴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여긴 문명희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육 서방, 방에 들어가서 초윤이와 잘 얘기해 봐. 이젠 둘 다 화내지 말고. 초윤이와 김성혁은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야. 헤어진 지 5년이나 되고 초윤이도 그 사람한테 연락한 적 없어. 정말이야.”문명희는 육지율에게 남초윤의 일편단심을 강조하며 말을 늘어놓았다. 그녀는 육지율이 남초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오직...육지율이 남초윤을 버리기라도 할까 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육지율은 입을 열지 않았고 긴 다리를 뻗어 성큼성큼 남초윤의 방으로 들어갔다.같은 시각, 방안에서는 조유진이 면봉으로 남초윤의 상처를 치료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육지율이 방으로 들어오자 조유진은 잠시 멈칫했고 둘을 위해 자리를 비켜주어야 하나 고민하기도 전에 배현수가 그녀를 끌고 방 밖으로 나왔다.그렇게 방안에는 육지율과 남초윤만이 덩그러니 남겨졌다.육지율은 긴 팔을 뻗어 옆에 놓여있던 의자를 끌어와 그녀의 앞에 털썩 앉았다.“말해요. 이번에는 가방 몇
처음부터 황당하게 맺어진 혼인이기에 이제 끝을 맺을 때가 온 것이다.남초윤은 더는 남재원의 끝이 보이지 않는 통제를 받고 싶지 않았다.그녀가 이토록 정중하게 육지율을 향해 이혼을 제안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남초윤이 진지하다는 것을 눈치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김성혁과 다시 만날 생각이 없다면 나와 이혼하는 건 무슨 의미입니까? 나와 이혼을 하면 누가 당신에게 그 많은 가방을 사줘요?”“그 가방은 이제 다 필요 없습니다. 다시 돌려드릴게요. 그리고 당신 카드도 이제 사용하지 않을 겁니다.”육지율은 손을 들어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헤쳤고 그의 눈빛에는 짜증이 역력했다. 이윽고 그는 갑자기 손을 뻗어 남초윤을 의자로부터 끌어당겼다.“지금 대체 뭐 하자는 거예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육지율의 할아버지가 오늘 밤 그녀를 데리고 본가로 내려와 저녁 식사를 하라고 전화를 걸었었다.그때 남초윤이 고개를 들어 육지율의 눈을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육지율. 저를 사랑해요?”“...”침묵이 곧바로 그의 답이었다.사랑하지 않는데 대체 왜 이혼을 하려 하지 않는단 말인가?서로 감정도 없는 혼인을 질질 끄는 게 재밌단 말인가? 이혼을 하고 나면 육지율은 이제 밖에서 몇 시까지 놀든, 누구와 놀든 모두 상관없었다. 혼인의 족쇄가 이제 사라지는 건데 좋지 않단 말인가?육지율은 계속하여 몇 초 동안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이윽고 그는 남초윤을 빤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사랑이 당신에게는 그렇게 중요한가요?” 20대 때 육지율은 몇 차례 연애를 거쳤었다.한 달, 석 달, 그리고 반 년짜리 연애도 모두 겪어봤었다.장난삼아 연애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헤어지곤 했었다. 그리고 그 몇 번의 장난스러운 연애는 모두 그가 먼저 이별 통보를 했었다.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질렸기 때문이다.육지율은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사랑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남초윤이 대체 왜 그가 유설영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는지도 의문이었다.육지율에게 연애란 그저 조제물일뿐 있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