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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4화

작가: 남희은
last update 최신 업데이트: 2024-01-27 19:00:00
두 시간 뒤...

로얄 스위트룸은 아직 애매한 분위기가 가시지 않았다.

배현수가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만지며 물었다.

“힘들어?”

조유진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분명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당장 쓰러질 것 같이 아픈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정신이 맑아 보이지?

이미 욕구를 해결해서...? 그래서 기분이 상쾌한건가?

화장실로 들어간 조유진은 수도꼭지를 틀었고 찬물이 그녀의 두 손에 남은 뜨거운 열기를 씻어냈다.

그때 배현수도 화장실로 들어오더니 넓은 가슴을 그녀의 등 뒤에 대며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손이 아파?”

말을 하고 있는 배현수의 얼굴은 너무 진지했고 전혀 농담하는 것 같지 않았다.

조유진은 그의 말에 아무 대꾸를 하지 않았고 대신 옆으로 걸음을 옮겨 그의 품을 벗어났다.

“늦었어요. 현수 씨 상태도 많이 좋아진 것 같으니 빨리 산성 별장으로 가요. 선유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가방과 휴대전화를 챙기며 방을 나서려 했다.

고개를 들어 시계를 보니 12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선유에게 전화할까 말까를 고민하면서 휴대전화를 본 조유진은 여러 통의 부재중 전화가 온 것을 발견했다. 전부 남초윤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오늘 밤 조유진에게는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 그녀는 이전의 일들을 잠시 잊었었다. 그리고 휴대전화의 남초윤의 이름을 보고서야 잠시 잊었던 기억들이 다시 생각났다.

남초윤과 김성혁이 테라스에 있던 모습... 그리고 그 모습을 육지율이 보게 된 상황...

물론 조유진은 그 후의 상황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지만 분명 심상치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남초윤이 이 시간에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는 것 자체가 육지율과 싸웠다는 것을 설명한다.

여기까지 생각한 조유진은 급히 남초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

화장실에서 셔츠를 다시 정리하고 나온 배현수는 휴대전화를 들고 초조해하는 조유진을 보고 한 마디 물었다.

“왜? 무슨 일 있어?”

“10시가 넘었을 때 초윤이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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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사람이 차 옆까지 걸어왔을 때 갑자기 조유진의 휴대전화가 울렸다.전화기 화면에 떠 있는 ‘엄 어르신’이라는 글자에 조유진은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엄 어르신?”“대제주시에 간 지 벌써 보름이 되었네요. 어떻게 지내요?”전화기 너머 엄준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상냥했다.조유진이 처음으로 부성애를 느낀 사람은 조범이 아니라 정말 우연히 만나게 된 엄준이다. 이 말은 어쩌면 다른 사람들의 비웃음을 살지 모르지만 엄연한 사실이었다.엄준은 조유진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오랜 친구를 만난 느낌이라고 했다. 사실 조유진도 똑같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순간, 전화를 걸어 조유진의 생활에 관심을 두는 모습이 마치 나이 드신 아버지가 밖에 출장 간 딸에게 안부를 묻는 것 같았다.휴대전화를 꽉 움켜쥔 조유진의 가슴은 벌써 뜨거운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배현수가 힘들게 하지는 않아요? 창민이가 돌아와서 유진 씨 얘기를 많이 했어요. 만약 힘들면 언제든지 성남으로 돌아와요. 엄 씨 사택이 유진 씨 집이라는 거 잊지 말고요.”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진 조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알겠어요.조금만 더 있다가... 여기 일이 다 끝나면 성남에 가서 뵙겠습니다.”운전석에 앉아 있는 배현수는 운전대를 더 꽉 쥐었다.조유진은 아직도 성남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는 생각이 배현수의 머릿속을 강타했다. 그녀는 엄준과 이런저런 인사를 더 나눈 뒤 전화를 끊었고 휴대전화의 통화기록 보던 그녀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마 어릴 때 ‘부성애’를 느껴본 적이 없어 엄준이 그녀에게 관심을 가져줄 때마다 쉽게 마음이 동요되는 것 같았다. 어려서부터 부성애가 부족한 아이는 커서도 부성애의 결핍을 늘 느끼고 있다. 그리고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이제는 부성애가 필요 없는 게 아니다. 젊었을 때 소중한 사람이 없는 빈자리의 대가는 일생을 들여 치러야 했다.이 오랜 마음의 빈자리를 어쩌면 평생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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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유진은 양치하고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켰고 휴대전화 화면에는 몇 개의 인기 검색어가 메인에 떠 있었다.「동진 과학 김성혁 CEO 어제 귀국.」「김성혁 심야에 유부녀와 데이트.」「육지율과 전 여친의 재회.」「육 씨 부부의 불륜.」...조유진은 이 파격적인 실검을 보면서 점점 예감이 좋지 않음을 느꼈다.이 실검들은 조회수를 높이기 위해 정말 피비린내가 날 지경이었다.이 몇 개의 인기 검색어를 클릭해 들어가면 모두 실제 기사와 사진들까지 떡하니 기재되어 있었다. 남초윤이 김성혁의 차에 올라타...유설영이 육지율을 부축해 메리어트 호텔로...정말 하나같이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때 씻고 내려온 배현수가 테이블에 앉자 조유진이 한 마디 물었다. “실검 봤어요?”조금 전, 배현수가 씻고 있을 때 서정호가 이 실시간 검색어를 그에게 보내며 사람을 찾아 기사 정보를 삭제하지 않겠냐고 물었었다. 육지율이 SY그룹의 임원으로서 결혼한 임원이 이런 스캔들에 휘말려 드는 일은 그룹 이미지에 큰 영향을 준다. “응. 봤어.”배현수는 담담한 얼굴로 대답했다.하지만 이런 일을 육 씨 집안과 육지율 당사자조차 모두 별로 신경 쓰지 않는데 외부인인 배현수는 더욱 나설 필요가 없었다.육지율이 사람을 시켜 기사를 막지 않는 거로 보아 분명 그럴 생각 자체가 없을뿐더러 이런 상황이 일어나길 바랄지도 모른다.어쩌면 이 실검 기사도 육지율이 사람을 시켜 쓴 것일 수도 있다.그리 불가능한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육지율은 SY의 임원일 뿐만 아니라 재벌 집 자제로서 이런 기사들은 그의 허락 없이 절대 함부로 외부에 퍼뜨릴 수 없다. 하지만 조유진이 이런 걸 어찌 알겠는가?그녀는 재빨리 음식을 몇 점 먹더니 배현수를 향해 물었다. “나 오늘 초윤이와 남 씨 집에 가기로 약속했는데 차 좀 빌려주면 안 돼요?”“내가 데려다줄게. 지율이와 초윤 씨가 대체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지 알아도 볼 겸.”“그래요.”조유진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배현수가 그의 손목을 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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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뚜뚜...전화가 끊어졌다.남재원의 얼굴은 흉하기 짝이 없을 정도로 변했다.하지만 남초윤은 놀라는 기색이 하나도 없었다.두 사람이 결혼한 이래 이런 일들이 한두 번 있은 게 아니기에 남초윤에게는 일상이나 다름없었다. 육지율이 얼마나 바람둥이인지는 그녀가 제일 잘 알고 있을 것이다.남초윤은 담담한 얼굴로 남재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육 씨 집안에서 저를 반품할까 봐 전전긍긍하기보다는 이후 남 씨 집안 사업을 어떻게 할지 걱정하는 게 더 빠를 거예요.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지율 씨가 남 씨 집안 사업에 후원할지 안 할지는 그 사람 마음에 달려있다고요.”찰싹!남재원은 손을 들어 남초윤의 뺨을 세게 내리쳤다.“여보! 왜 이러는 거예요!”손바닥으로 볼을 움켜쥔 남초윤은 순간 입가에 피비린내가 물씬 풍기는 것을 느꼈다. 남재원의 따귀는 귀에 이명이 들릴 정도로 셌고 그는 또 한 번 언성을 높여 외쳤다.“네가 좀만 노력해서 육 씨 집안에 떡두꺼비 같은 아들이라도 낳아줬더라면 안주인 자리를 다른 여자에게 뺏기지 않았겠지! 밖에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육지율 같은 남자와 자고 싶어 하는지 몰라? 너는 온종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그깟 회사 뭘 다닐 필요가 있다고 집안일에 신경도 안 쓰고 맨날 회사일... 회사일... 조금이라도 육지율에게 신경 좀 썼더라면 이혼이라는 ‘이’자도 안 나왔을 거야!”남초윤은 한쪽 입꼬리만 올린 채 피식 웃었다. 그녀는 남재원의 말에 반박하기조차 귀찮았다.남재원의 생각에 육지율이 밖에서 여자와 노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재력과 권력을 가진 사림은 충분히 실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아내인 남초윤이 그를 이해해 주고 그의 마음을 잡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남재원이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자신도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기 때문이다. 그가 남초윤을 끌고 육 씨 집으로 가서 사과하기 위해 집 대문을 나서려는데 마주 오는 배현수와 조유진을 마주쳤다.조유진이 남재원을 향해 달려들며 화를 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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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유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히진 않았어?” 배선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응,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할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셔서 선생님들도 항상 나한테 잘해주시고 많이 관심 해주셨어. 그래서 나도 함부로 장난칠 수가 없어. 혹시 선생님이 할아버지한테 이르실까 봐.” 배현수는 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배선유는 작은 악동처럼 말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배현수의 말에도 자주 대꾸를 하니, 만약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벌써부터 떠벌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성남에서 엄준은 배선유를 엄청나게 아끼며 키웠고, 그래서인지 아이는 주눅이 들지 않고 활발하게 자랐다.조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행이네. 우리 선유가 공부를 게을리할 걱정은 없겠어.” 배현수는 딸을 겁주듯 말했다. “너 공부 안 하고 일찍 연애라도 시작하면, 널 대제주에 데려와서 24시간 동안 지켜볼 거야.” 배선유는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건 너무 심해요! 나 혹시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거 아니에요?”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 안 하면 좋은 날은 없을 거야.” 잠시 후, 학교 종이 울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배선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친구가 그린 결혼사진 두 장을 영상 속으로 건네받았다. “선유야! 너랑 지우의 결혼사진 내가 그려놨어! 한 번 봐봐!” 배선유가 물었다. “한 장에 얼마야?” “너니까 공짜로 해줄게! 대신 다음번엔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어?” “생각해볼게!” “...” 이 속도로라면 그들 부부는 도대체 몇 명의 사위를 맞이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스타라이트 매거진에서.남초윤이 사이트 편집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의 책은 예상대로 플랫폼에서 삭제되었고 이달 원고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

  • 언젠가 다시 만나요   제965화

    [합법적 부부] 함께 올라온 사진엔 결혼반지를 낀 두 손이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 게시글이 올라가자마자 마치 깊은 바다에 떨어진 폭탄처럼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반응했다. 육지율: [8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자랑할 수 있네!] 송하진: [어! 전 두 사람 목숨 구해준 은인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어떻게 혼인신고까지 했겠어요? 당장 절 주빈으로 식사 대접해요!] 남초윤: [아아아아! 유진이를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다니! 대표님 너무하세요!] 엄창민: [내 여동생한테 잘해요. 혹시라도 괴롭히면 내 주먹이 용서 못 해요!] 엄명월: [형부! 이렇게 좋은 일에 저희한테 뭐라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이찬: [축하해, 결국 원하는 대로 됐네.] 심미경: [백년해로하세요.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서정호: [대표님, 일 다 끝냈으면 빨리 돌아오세요. 의사 선생님이 여기서 엄청 화내고 있어요. 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학교 가기 싫어: [와! 아빠랑 엄마가 드디어 결혼했네요! 헤헷, 아빠, 나도 오늘 결혼했어요!] 배현수는 배선유의 댓글을 보고 순간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유진이 운전하며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래요?” “선유가 결혼했다는데.” “뭐라고요?” 조유진은 깜짝 놀라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급히 배선유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저쪽에서 배선유는 학교에 있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외국어 학교라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들은 평소에도 부모님과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배선유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엄마, 아빠! 나 사진 보고 싶어!” 조유진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물었다. “선유야, 아까 결혼했다고 했잖아. 누구랑 결혼한 거야?” “우리 반 한지우랑! 엄마, 나 오늘 엄청 많은 축의금을 받았어! 내가 다 적어 놨어!”

  • 언젠가 다시 만나요   제964화

    조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갈게요.”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번 한 번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정호가 산성 별장에서 두 벌의 정장과 결혼 서류를 준비해왔다. 조유진은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도 고데기로 말았다. 그녀는 하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썼다. 그녀는 한동안 이렇게까지 꾸미지 않았는데 하이힐을 신고 배현수 앞에 서니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나 어때요?” “아름다워. 넌 언제나 아름다워.” 배현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조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옆에 있던 넥타이를 집어 들고 배현수에게 매어주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길에 고개를 숙이며 협조했다. 조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더 복잡하고 정중한 ‘엘드리지 매듭’으로 넥타이를 맸는데 배현수는 평소에 간단한 윈저 매듭만 했었다. “이 매듭은 좀 생소하네.” 조유진은 넥타이를 다 매고 나서 그의 셔츠와 정장 재킷의 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게 엘드리지 매듭이라고 해요. 중요한 자리에서 어울리는 방식이죠. 어때요, 괜찮아요?” “멋져. 하지만 여보, 우리 서둘러야 해. 조금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웃으며 농담하듯 이야기하던 배현수는 조유진의 외투를 챙겨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고, 그녀를 한 손으로 감싸 병실을 몰래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마치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 그들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가 병실에 회진을 왔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곳에는 ‘무관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의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정호를 보며 물었다. “환자는 어디 갔죠? 튜브까지 다 뽑다니, 누가 뽑았습니까?” 서정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환자 본인이 뽑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간 겁니까? 팔을 정말 망가지게 할 작정인가요

  • 언젠가 다시 만나요   제963화

    배현수의 가슴이 떨렸다. 그는 조유진과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때 난 네 옆에 있진 않았지만 네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울었어?” “현수 씨 생각이 났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거든요.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웠죠. 그래서 울었어요.” 지금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조유진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이나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감동과 감사함 때문이었다. 운명이 그들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묶어 놓았고, 그들 사이에선 이제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깊은 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현수는 긴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끼워 넣으며 손을 꼭 맞잡았다. 순간 그들의 손바닥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아, 넌 한 번도 날 잃은 적 없어. 우리가 몇 번을 떨어져도,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더라도 난 결국 널 찾아내서 꼭 안고 말해줄 거야. 사랑한다고. 오직 너만 사랑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유진은 배현수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조유진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현수 씨,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의 대답은 8년 전과 똑같았다. 짧지만 확고했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목에 걸린 달콤한 연녹색 비취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나으면 우리 같이 아주머니를 위한 좋은 묘지를 고르러 가요. 그분을 위한 의관묘라도 만들어 드리는 게 어때요?” “아직도 ‘아주머니’라고 불러?” 조유진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며 말투를 바꿨다. 배현수는 그녀의 팔찌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풍수 좋은 곳을 따로 고를 필요는 없어. 어머니께

  • 언젠가 다시 만나요   제962화

    육지율은 그 필명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기억해 냈다. “이 자식! 기억났어! 이 녀석이 책에서 날 모욕하지 않았나? 내 명성을 망가뜨렸잖아?” 남초윤은 급하게 말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비엘 작가가 주인공을 모욕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밥숟가락 들고 욕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나를 ‘수’로 묘사한 게 모욕이 아니고 뭐예요? 왜 항상 배현수가 공이냐고?” 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였다.남초윤은 그가 진짜 작가를 고소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다. “다음번엔 지율 씨가 공이고, 배 대표님이 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원래 BL 소설에서는 공수 구분이 모호해요. 겉보기에 수 같아도 사실은 공일 수도 있다고요!” 조유진은 살짝 의문을 제기했다. “난 현수 씨가 수 같지는 않았는데. 만약 현수 씨가 진짜 수라면 캐릭터 붕괴지. 차라리 육 변호사님이 수인 게 더 어울려.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다정하잖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육지율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조유진에게 따졌다. “아니, 조유진. 내가 약해 보이는 수 같은 느낌을 준다고?” “...” 배현수는 차갑게 말했다. “유진이가 쓴 것도 아닌데 왜 화내? 그럴 시간 있으면 작가나 고소해.” 남초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냥 재미로 쓴 거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작가를 고소하면 너무 쪼잔해 보일 거예요!” 하지만 육지율은 이성을 잃고 이를 악물었다. “쪼잔해 보이든 말든, 그 책을 하차할 거예요!” 자신이 소설 속에서 수 역할로 묘사되었고,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조유진은 객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아요. 꽤 재미있고 독자도 많아요.” “독자가 몇 명인데?”“몇만 명 정도?” “뭐?”‘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수로 상상했

  • 언젠가 다시 만나요   제961화

    병실에서 조유진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에 들어서도 손가락이 배현수의 손에 살짝 얽혀 있었는데 다정하고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진은 완전히 남자 친구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원 생활이 지루하다고 하다니.육지율이 댓글을 남겼다. “뭐야, 입원했어? 혹시 가정 폭력이라도 당한 거야?” 댓글을 남기고 나서 육지율은 차에 시동을 걸며 남초윤에게 말했다. “과일 바구니 좀 사서 병문안이나 가요. 친구가 입원했어요.” “친구? 설마 배 대표님이세요? 어디 아파요?” 육지율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진짜 아플 수도 있고 그냥 꾀병일 수도 있고.” 혹시 모른다. 꾀병일지도....병원에서는 조금 전 장은숙이 산성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밤은 죽 같은 유동식만 먹어야 했다. 배현수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조유진이 죽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그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첫 숟가락을 그의 입 앞에 가져가자 배현수는 뜨겁다고 투덜댔다. 조유진이 후후 불어 온도를 맞춘 후 말했다. “이제 적당히 식었어요.” 배현수는 그제야 죽을 한 입 삼켰다.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난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아기로 됐네? 밥도 혼자 못 먹고, 조유진이 널 너무 오냐오냐한 거 아냐?” 조유진이 놀라서 뒤돌아보니, 육지율과 남초윤이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설명했다.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며칠 동안 오른손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상처가 더 심해질 수 있거든요.” 그러자 육지율은 다짜고짜 그의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진짜야?” 배현수는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아!” 조유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변호사님, 진짜로 다쳤다니까요! 어깨에 구멍이 났다고요,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 언젠가 다시 만나요   제960화

    그녀를 겨우 한 번 데리러 온 김에 출퇴근길의 불편함을 느끼고는 아예 차를 사서 해결하려고 하다니, 정말 육지율 다운 방식이었다.이 4S 매장에서 파는 차들은 모두 포르쉐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저렴한 모델도 수천억 원대였다. 남초윤은 이미 남씨 집안이 육지율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그가 차를 선물해 주겠다고 해도 받을 수 없었다.남초윤은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는 출퇴근 길에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굳이 차를 선물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순간 멈칫했다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차 한 대 선물한다고 귀찮다는 딱지가 붙어요? 이런 확산적 사고방식은 참 대단하네.”“....”정말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평소에도 성격이 불 같았던 육지율은 차를 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녀를 달래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어이없어 웃었다. 둘 중 누가 더 성격이 나쁜지 모를 일이었다.영업 직원은 남초윤을 육지율이 외부 애인으로 오해했고, 이 큰 거래가 깨질까 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변호사님께서 차를 사주시는 건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이 아닐까요?”남초윤은 더 이상 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갚을 수 없는 빚이 너무 많았고 계속해서 더 쓴다면 두 아이를 낳아야 겨우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육지율은 그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 그는 VIP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골라요. 차 안 사면 집에 못 돌아가요.”남초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영업 직원이 다가와 다양한 모델을 소개할 때, 그저 듣기만 했다. 그 직원은 미소를 띠며 말도 아주 달콤하게 했다. “변호사님은 저희 매장의 단골이세요. 그런데 여자를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변호사님이 정말로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비싼 차를 고르시면 아마 더 기뻐하실 거예요.”역시, 판매왕이었다.감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남초윤은 그저 외부의

  • 언젠가 다시 만나요   제959화

    남초윤은 결혼 상태를 한 번도 업데이트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 눈에는 여전히 미혼으로 보였다.처음 그녀와 육지율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사실 모두 육지율의 매력적인 외모 때문이었다. 아무도 남초윤처럼 작고 평범한 존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지율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침대 사진이 언론이나 남재원에게 유출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육지율이라는 유명한 바람둥이가 ‘함정'에 빠져 순진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소문만 믿고 있었다.육지율이 연예계 인물이 아닌 만큼 동료들 중에서도 아무도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육지율이 ‘좋은 집안의 아들’ 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의 결혼 상대가 누군지에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그의 곁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초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다.동료들은 그저 그녀가 조금 집안 배경이 있는 부유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고 육지율의 아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육지율의 아내라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그들과 같이 일하며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과거에 파파라치 일을 했더라도 그렇게 높은 곳에 시집갔다면 육씨 집안이 그녀를 계속 그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비록 세상은 모두 직업의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상류 사회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체면과 명예가 그들의 신분과 존엄을 상징했다. 파파라치라는 직업은 육씨 집안에게 있어 절대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으니, 육지율과 강란희가 그녀에게 좀 더 체면 있고 유망한 직업들을 제안했지만 남초윤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을 보낸 끝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퇴근하고 남초윤만 남았다. 한 시간이 흐른 뒤 남초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그녀는 통화 기록을 훑어보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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