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황당하게 맺어진 혼인이기에 이제 끝을 맺을 때가 온 것이다.남초윤은 더는 남재원의 끝이 보이지 않는 통제를 받고 싶지 않았다.그녀가 이토록 정중하게 육지율을 향해 이혼을 제안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남초윤이 진지하다는 것을 눈치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김성혁과 다시 만날 생각이 없다면 나와 이혼하는 건 무슨 의미입니까? 나와 이혼을 하면 누가 당신에게 그 많은 가방을 사줘요?”“그 가방은 이제 다 필요 없습니다. 다시 돌려드릴게요. 그리고 당신 카드도 이제 사용하지 않을 겁니다.”육지율은 손을 들어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헤쳤고 그의 눈빛에는 짜증이 역력했다. 이윽고 그는 갑자기 손을 뻗어 남초윤을 의자로부터 끌어당겼다.“지금 대체 뭐 하자는 거예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육지율의 할아버지가 오늘 밤 그녀를 데리고 본가로 내려와 저녁 식사를 하라고 전화를 걸었었다.그때 남초윤이 고개를 들어 육지율의 눈을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육지율. 저를 사랑해요?”“...”침묵이 곧바로 그의 답이었다.사랑하지 않는데 대체 왜 이혼을 하려 하지 않는단 말인가?서로 감정도 없는 혼인을 질질 끄는 게 재밌단 말인가? 이혼을 하고 나면 육지율은 이제 밖에서 몇 시까지 놀든, 누구와 놀든 모두 상관없었다. 혼인의 족쇄가 이제 사라지는 건데 좋지 않단 말인가?육지율은 계속하여 몇 초 동안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이윽고 그는 남초윤을 빤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사랑이 당신에게는 그렇게 중요한가요?” 20대 때 육지율은 몇 차례 연애를 거쳤었다.한 달, 석 달, 그리고 반 년짜리 연애도 모두 겪어봤었다.장난삼아 연애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헤어지곤 했었다. 그리고 그 몇 번의 장난스러운 연애는 모두 그가 먼저 이별 통보를 했었다.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질렸기 때문이다.육지율은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사랑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남초윤이 대체 왜 그가 유설영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는지도 의문이었다.육지율에게 연애란 그저 조제물일뿐 있으
남초윤이 대체 무슨 수로 그 많은 돈을 돌려준단 말인가?남초윤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자 육지율이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며 입을 열었다.“장난이에요. 할아버지께서 저녁에 함께 본가에서 식사하라고 당부하셨어요. 할아버지께서 당신을 보지 못한다면 또 잔소리를 한가득 퍼부을 거예요. 그러니 저와 함께 가요. 네?”육지율은 여전히 남초윤이 심술을 부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아마 최근 몇 년 동안 남초윤이 너무 얌전히 지내서 그런지 육지율은 그녀에게 이혼할 용기와 자금이 있을 리가 없다고 여겼다.그렇다. 확실히 그녀에게 이혼할 자금은 없었다.하지만 이번이야말로 남초윤은 더는 그와 부부연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남초윤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 매우 굳건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방금 지율 씨가 말한 남씨 가문에 투자한 돈은 제가 당신에게 빚진 게 아니에요. 남씨 가문의 법인도 제가 아니고요. 빚이라면 남씨 가문의 가주인 남재원을 찾아가세요. 당신도 변호사이니 소송을 제기한다고 하더라도 제 책임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겠죠.”“...”육지율의 눈빛이 희미하게 떨리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초윤 씨, 이제 심술을 부리는 것도 정도가 있어야 할거예요.”육지율은 남초윤의 합법적인 남편으로서 이미 충분히 관대하게 그녀와 김성혁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대했다.결혼하기 전, 남초윤이 김성혁과 연애를 했었고 김성혁과 과거의 시간을 함께했다고 하여도 그는 아무렇지도 않았다.누구에게 과거 하나 없겠는가?그래, 육지율은 그들의 과거를 따지지 않았다.남초윤이 김성혁과 몰래 만나고 있는 것만 아니라면 모두 괜찮았다.하지만 육지율 또한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만일 다른 사람이었다면 육지율은 그 키스를 누가 먼저 했든 진작에 걷어차 버렸을 것이다.그리고 오늘 아침, 그들의 스캔들은 바로 실시간 검색어에 올라왔다.육지율의 핸드폰은 육씨 가문 측에서 걸려온 전화로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지경이었다.가문의 어르신들은 전화기로 남초윤의 욕설을 퍼부었다.
남재원의 아부에 육지율은 싸늘한 목소리로 그를 쏘아붙였다.“한 번만 더 초윤 씨에게 손을 대시면 앞으로 저한테서 한 푼도 받을 생각 마세요. 초윤 씨 얼굴을 때린다는 건 제 얼굴을 때리는 것과 같습니다. 어찌 되었든 초윤 씨는 지금 제 호적에 올려진 사람이니까요. 그러니 당신은 초윤 씨를 혼낼 자격이 없다는 말입니다.”그때 남초윤이 육지율과 결혼을 할 때 남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부추겨 호적을 정리하여 육씨 가문으로 호적을 옮기도록 하였다.육씨 가문 역시 남재원의 심보를 모를 리가 없었다. 호적을 옮긴다는 것은 결국 나중에 재산을 나눠 받기 위함인 것이다.육씨 가문의 지위로 남씨 가문을 막으려 마음을 먹는다면 남초윤이 이혼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한 푼도 가져갈 수 없을 것이다.호적을 옮기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육지율은 비록 전 여자친구들한테는 잘해주지 않았지만, 그의 아내에게는 매우 대범하였다. 육씨 가문은 가풍이 비교적 전통적이었기에 집안 남자들의 사상도 보수적인 편이었다. 하여 그들은 결혼하고 여자들이 경제적으로 남편에 완전히 의지하는 것은 별로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다.그 때문에 육지율은 당시 남초윤이 호적을 옮기는 것을 흔쾌히 동의하였다.남재원이 다시 얼굴을 들이밀며 아부를 떨었다.“그럼 그럼. 초윤이는 이미 육 서방에게 시집을 갔으니 확실히 육씨 집안의 사람인 셈이지. 다들 시집간 딸은 엎지른 물과도 같다잖아. 그러니 나도 더는 관여하지 않을게. 이제 육 서방 마음대로 해. 그나저나 육 서방, 오늘 우리 집에서 저녁 식사나 하고 갈래?”남재원은 육지율이 남초윤과 이혼만 하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상관없었다.권세에 빌붙어 아부를 떨어대는 남재원의 모습을 보니 유지율은 속이 울렁거리는 기분이었다.“괜찮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저녁에 집에 들러 식사하라고 하셔서 나중에 초윤 씨를 데리고 본가에 다녀올 겁니다.”그러자 남재원은 더욱 환하게 웃어 보였다.“그렇다면 무조건 가야지. 이따가 내가 초윤이한테 잘 보일 수 있도록 말 좀 잘하
배현수가 육지율을 다시 한번 측은하게 바라보았다.“그럼 넌? 넌 초윤 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데?”전에 남초윤과 육지율이 이혼소동을 일으킬 때 남초윤이 육지율에게 딱 한 번 물어봤었다. 하지만 당시 육지율의 대답은 생각해 본 적이 없다였다.육지율도 확실히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어릴 적부터 육지율이 자라온 생활환경에서는 항상 그에게 한가지 관념을 밀어 넣곤 했었다.사람과 사람 사이의 왕래는 모두 이익에 의해 대체된다는 것이다.감정이라는 것은 변화무쌍한 것이기에 이익보다 온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마치 육지율의 부모님처럼 모두 상정 이익으로 혼인을 맺었다.부모님의 관계는 줄곧 담담했지만, 또한 상당히 안정적이었다.그 때문에 육지율은 그와 남초윤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로 그가 남씨 가문에 투자하고 남초윤에게 가방을 사 주면 남초윤은 그저 순순히 육 사모님 역할만 잘 해내면 된다고 생각해 왔었다.이런 관계에 문제 될 게 뭐가 있겠는가?육지율은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이 관계에 대해 부적절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오늘 남초윤은 매우 슬픈 표정으로 육지율에게 자신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고 상대방이 자신을 사랑해줬으면 좋겠다고 선포했다.사랑?그깟 사랑이 몇 푼이나 한다고?사랑이 벽 전체에 걸려 있는 저 많은 가방을 사 줄 수 있는가?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육지율은 손으로 담뱃불을 끄고 콧방귀를 뀌었다.“첫사랑이 아무리 좋아도 결국 다 기한이 지난 존재일 뿐이야.”남초윤은 현재 육지율 호적에 올려진 사람이다.김성혁이 아무리 천한 사람일지라도 설마 상간남이 되고 싶은 건 아니겠지?육지율의 자신만만한 말에 배현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잠시 고민 끝에 의미심장한 말을 꺼냈다.“조심해. 첫사랑과의 추억은 쉽게 떨쳐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내가 충고하는데, 빨리 이혼해서 첫사랑과 재결합하도록 도와주면 좋은 사람으로라도 남을 수 있을 거야.”“...”배현수의 말에 육지율의 안색이 철저히 어두워졌다.“너
육지율이 과거에 했던 연애는 대체로 이런 경우였다. 육지율에게 있어 연애란 그저 심심할 때 시간 보내기 용이었다.하여 육지율이 첫사랑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정상이었다.“육 변호사님은 전에... 연애를 많이 하셨었나요?”육지율의 연애사가 그렇게나 풍부하다고?“구체적인 건 잘 모르지만, 육지율과 함께 있는 여자는 초윤 씨밖에 못 봤어.”“...”이건 친구 사이에 의리를 지키는 화법인 건가?조유진은 배현수의 말에 대해 반신반의하였다....산성 별장에 도착하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조유진은 권 여사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그 연애 프로그램 말이에요, 이미 확정되었으니 다음 주에 바로 첫 촬영이 시작될 예정입니다. 대본 보내드릴 테니 요 며칠 동안 꼭 봐봐요.”“벌써요? 대제주시에서 촬영하는 거예요?”“아니요. 인천에서 촬영할 예정입니다. 그런데 유진 씨가 받게 될 캐릭터가 조금 미움을 살수도 있는 캐릭터예요. 유진 씨는 계속 짝사랑만 할 거고 세 명의 남자 게스트들은 모두 처음에 유진 씨를 좋아하지도, 선택하지도 않을 텐데 괜찮겠어요?”조유진은 돈을 받으러 가는 것이기에 이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괜찮아요. 여사님, 정말 고마워요.”권 여사에게는 이미 생각이 있었다.“원래는 누구나 다 유진 씨에게 매혹되는 여신 이미지를 주려고 했는데 정말 프로그램에서 게스트와 이어지기라도 한다면 방송이 끝나고 다시 공식 이별을 선언하기에는 너무 복잡하거든요. 그리고 또 그럴 필요도 없고요.”“네. 아부만 떤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매니저님, 그럼 이따가 저한테 구체적인 일정과 시나리오를 보내주세요.”“그래요. 아 맞다, 그리고 오늘 밤에는 얼굴을 공개한 영상을 하나 올려요. 연애 프로그램에 나오기 전에 얼굴 공개 먼저 하고 미리 이슈 좀 터뜨리도록 합시다.”조유진은 항상 얼굴을 공개하지 않은 채 노래만 불러 왔었기에 막상 정말 얼굴 공개를 하자니 조금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하지만 이미 조유진은 권 여사와 계약을 마친 상태
천우 별장 안.서재로부터 실랑이를 벌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오빠, 난 다 오빠를 위해서 하는 거라니까. 오빠가 조유진을 좋아하는 걸 아니까 오빠와 조유진을 이어주려고 하는 거였다고요. 그런데 그 음료수를 현수 오빠가 마실 줄 알았나...”“짝!”강이찬의 손이 강이진의 뺨을 거칠게 스쳤다.“너 정말 미쳤어?”강이진의 뺨이 화끈거리게 아파져 왔다.강이진은 손가락을 꽉 쥐더니 이내 피식 냉소를 터뜨렸다.“만약 그날 밤에 오빠가 정말 조유진과 자게 됐다면 지금 이렇게 나한테 화를 내고 때렸을 것 같아요? 강이찬. 이제 인정해. 오빠는 나보다 나을 게 없는 사람이에요. 그저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기 두려워하는, 아무것도 못 하는 겁쟁이일 뿐이라고요!”눈앞의 강이진을 바라보는 강이찬의 눈 속에는 슬픔과 의혹의 기색이 역력했다.“너 예전에는 안 이랬잖아. 이진아, 대체 왜 이렇게 변해버린 거야?”“난 안 변했어! 오빠가 나에 대해서 모르는 거예요. 하지만 내가 보기에 오빠는 나에 대해서 모를 뿐만 아니라 오빠 본인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어. 오빠 심미경 사랑해요? 심미경 안 사랑하면서 왜 그 여자와 결혼한 거예요? 오빠는 그저 마음이 공허한데 현수 오빠와 조유진을 뺏을 용기가 없으니까 한 걸음 물러나서 다른 사람 찾은 거잖아요!”“...”강이찬은 주먹을 꽉 쥔 채 새파랗게 질려버린 얼굴로 강이진을 바라보았으나 결국 끝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때, 서재를 지나가다가 우연히 그들의 대화를 듣게 된 심미경이 시선을 내리고 손을 뻗어 아직 눈에 띄지 않는 복부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자신의 배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시울이 어느새 빨갛게 물들었다.‘아가야, 만약 엄마가 너를 데리고 이곳을 떠나, 그리고 아빠를 떠난다면 어때?’이건 심미경이 처음으로 어딘가를 떠나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어젯밤, 강이찬이 그녀의 옆에 누워 잘 때 그녀를 품에 안고 또 한 번 조유진의 이름을 불렀었다.강이찬이 꿈속에서 무심결에 조유진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심미경은
「!! 나 아직 육씨 가문 잔치에 있어서 좀 이따 네 영상 딱 기다리고 있을게. 영상 올릴 때 나한테 귀띔 좀 해줘!」육씨 가문 잔치?「너 육 변호사님과 화해한 거야?」「아니. 그냥 임무 완수하러 온 거야. 육지율 할아버지께서 우리한테 대체 둘 중 누구한테 문제가 있길래 아직도 아기가 안 생기냐고 물으셨어. 어르신께 우리 둘 다 문제가 있다고 알려드리고 싶은데 우리더러 병원을 다녀오래.」몇 초 뒤, 남초윤이 두 장의 사진을 보냈다.「한의사님께 부탁하셔서 우리를 위해 끓이신 임신보조제래. 진짜 맛없어 죽을 것 같아. 그런데 내가 맛을 봐보니까 육지율 약이 더 토 나오더라.」이윽고 남초윤은 토하는 이모티콘 하나를 덤으로 보냈다.이 몇 가지 메시지를 보자 조유진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화면 너머로부터 남초윤이 얼마나 이 보조제를 혐오하는지 너무 잘 느껴졌다.한편으로는 이혼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억지로 임신보조제를 먹어야 한다니 참으로 우스웠다.우습기도 했지만, 조유진은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나 다음 주면 연애 프로그램 촬영하러 인천에 가는데 너도 나랑 같이 갈래? 촬영장은 바다뷰가 보이는 별장인데 환경도 좋으니까 나랑 같이 기분 전환하러 가자.」「나한테 시간이 어디 있어? 좀 이따 네가 영상을 올리고 나면 난 또 그때부터 야근하면서 원고를 써야 해. 이렇게 안 하면 어떻게 독점 뉴스를 뺏을 수 있겠냐. 다음 주에 엄청 지위가 상당하신 분과 인터뷰 잡아서 시간 못 낼 것 같아. 아 너무 고통스러워. 그나저나 네가 연애 프로그램에 출연한다는데 배 대표님께서 반대 안 하셨어?」당시 배현수가 조유진더러 2800억을 갚으라고 하면서 조유진은 빚을 갚기 위해 권 여사의 요청을 수락하였다. 그리고 권 여사도 매우 흔쾌하게 연애 프로그램 자원을 조유진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솔직히 프로그램 하나로 2억의 출연료도 받고 인기도 얻을 수 있는 건데 아부만 떤다고 해도 완전히 이득인 셈이다.게다가 당시 이미 계약서를 모두 작성했기에 인제 와서 후회해도 소
조유진의 마음속에서는 선유가 배현수보다 더 중요할 것이다. 이건 인정할 수 있다.어찌 되었든 선유의 몸에서는 그녀의 피가 흐르고 있고 그들의 딸이기 때문이다.그는 충분히 조유진이 다시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안정희도 배현수보다 더 중요할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7년 전의 법정에서 안정희가 아닌 그를 선택했을 것이다.하지만 이 또한 7년 전의 일이고 이미 다 뒤엎어진 일이니 넘길 수 있다.그러나 지금은, 이놈 저놈 다 배현수보다 중요했다.조유진이 고개를 들어 배현수를 바라보며 목을 가다듬었다. 배현수의 말 속에 담긴 의미를 알아챈 조유진의 눈가가 붉은 기를 띄었다.“현수 씨는 아직도 제가 그때 당신을 선택하지 않은 것을 원망하고 있군요. 그래요. 어떤 일은 이미 발생하면 엎질러진 물과도 같이 다시 되돌릴 수가 없어요. 그때는 제가 정말 죄송했어요. 만약 아직도 제가 당신에게 빚지고 있다고 생각되시면 저도 안 갈게요...”그때, 배현수의 핸드폰이 울렸다.발신자는 어머니가 머무는 요양원이었다.조유진도 화면을 보게 되었고 아마 또 예지은에게 문제가 생겼음을 눈치챘다.배현수가 등을 돌려 전화를 받았다.“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배현수가 통화하고 있을 때 조유진은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조유진은 알고 있다. 배현수가 여전히 넘기지 못하는 마음속의 고비는 7년 전 조유진이 법정에서 그를 선택하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그렇다면 조유진은? 조유진의 마음속 고비는 예지은이 정희를 죽였다는 것이다.배현수는 만약 그들이 결혼하게 된다면 절대 그녀 혼자 혼인 속의 사소한 문제들을 맞서게 하지 않으리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이 또한 결국 만약에 그칠 뿐이다.조유진은 배현수의 아내가 되고 싶지만, 예지은의 며느리가 될 수는 없다.자신의 어머니를 죽인 범인의 며느리가 된다는 것은 너무 우스꽝스러운 일이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정원으로부터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이윽고 배현수가 항상 몰고 다니는 검은 마이바흐가 산성 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