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우 별장 안.서재로부터 실랑이를 벌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오빠, 난 다 오빠를 위해서 하는 거라니까. 오빠가 조유진을 좋아하는 걸 아니까 오빠와 조유진을 이어주려고 하는 거였다고요. 그런데 그 음료수를 현수 오빠가 마실 줄 알았나...”“짝!”강이찬의 손이 강이진의 뺨을 거칠게 스쳤다.“너 정말 미쳤어?”강이진의 뺨이 화끈거리게 아파져 왔다.강이진은 손가락을 꽉 쥐더니 이내 피식 냉소를 터뜨렸다.“만약 그날 밤에 오빠가 정말 조유진과 자게 됐다면 지금 이렇게 나한테 화를 내고 때렸을 것 같아요? 강이찬. 이제 인정해. 오빠는 나보다 나을 게 없는 사람이에요. 그저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기 두려워하는, 아무것도 못 하는 겁쟁이일 뿐이라고요!”눈앞의 강이진을 바라보는 강이찬의 눈 속에는 슬픔과 의혹의 기색이 역력했다.“너 예전에는 안 이랬잖아. 이진아, 대체 왜 이렇게 변해버린 거야?”“난 안 변했어! 오빠가 나에 대해서 모르는 거예요. 하지만 내가 보기에 오빠는 나에 대해서 모를 뿐만 아니라 오빠 본인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어. 오빠 심미경 사랑해요? 심미경 안 사랑하면서 왜 그 여자와 결혼한 거예요? 오빠는 그저 마음이 공허한데 현수 오빠와 조유진을 뺏을 용기가 없으니까 한 걸음 물러나서 다른 사람 찾은 거잖아요!”“...”강이찬은 주먹을 꽉 쥔 채 새파랗게 질려버린 얼굴로 강이진을 바라보았으나 결국 끝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때, 서재를 지나가다가 우연히 그들의 대화를 듣게 된 심미경이 시선을 내리고 손을 뻗어 아직 눈에 띄지 않는 복부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자신의 배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시울이 어느새 빨갛게 물들었다.‘아가야, 만약 엄마가 너를 데리고 이곳을 떠나, 그리고 아빠를 떠난다면 어때?’이건 심미경이 처음으로 어딘가를 떠나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어젯밤, 강이찬이 그녀의 옆에 누워 잘 때 그녀를 품에 안고 또 한 번 조유진의 이름을 불렀었다.강이찬이 꿈속에서 무심결에 조유진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심미경은
「!! 나 아직 육씨 가문 잔치에 있어서 좀 이따 네 영상 딱 기다리고 있을게. 영상 올릴 때 나한테 귀띔 좀 해줘!」육씨 가문 잔치?「너 육 변호사님과 화해한 거야?」「아니. 그냥 임무 완수하러 온 거야. 육지율 할아버지께서 우리한테 대체 둘 중 누구한테 문제가 있길래 아직도 아기가 안 생기냐고 물으셨어. 어르신께 우리 둘 다 문제가 있다고 알려드리고 싶은데 우리더러 병원을 다녀오래.」몇 초 뒤, 남초윤이 두 장의 사진을 보냈다.「한의사님께 부탁하셔서 우리를 위해 끓이신 임신보조제래. 진짜 맛없어 죽을 것 같아. 그런데 내가 맛을 봐보니까 육지율 약이 더 토 나오더라.」이윽고 남초윤은 토하는 이모티콘 하나를 덤으로 보냈다.이 몇 가지 메시지를 보자 조유진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화면 너머로부터 남초윤이 얼마나 이 보조제를 혐오하는지 너무 잘 느껴졌다.한편으로는 이혼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억지로 임신보조제를 먹어야 한다니 참으로 우스웠다.우습기도 했지만, 조유진은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나 다음 주면 연애 프로그램 촬영하러 인천에 가는데 너도 나랑 같이 갈래? 촬영장은 바다뷰가 보이는 별장인데 환경도 좋으니까 나랑 같이 기분 전환하러 가자.」「나한테 시간이 어디 있어? 좀 이따 네가 영상을 올리고 나면 난 또 그때부터 야근하면서 원고를 써야 해. 이렇게 안 하면 어떻게 독점 뉴스를 뺏을 수 있겠냐. 다음 주에 엄청 지위가 상당하신 분과 인터뷰 잡아서 시간 못 낼 것 같아. 아 너무 고통스러워. 그나저나 네가 연애 프로그램에 출연한다는데 배 대표님께서 반대 안 하셨어?」당시 배현수가 조유진더러 2800억을 갚으라고 하면서 조유진은 빚을 갚기 위해 권 여사의 요청을 수락하였다. 그리고 권 여사도 매우 흔쾌하게 연애 프로그램 자원을 조유진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솔직히 프로그램 하나로 2억의 출연료도 받고 인기도 얻을 수 있는 건데 아부만 떤다고 해도 완전히 이득인 셈이다.게다가 당시 이미 계약서를 모두 작성했기에 인제 와서 후회해도 소
조유진의 마음속에서는 선유가 배현수보다 더 중요할 것이다. 이건 인정할 수 있다.어찌 되었든 선유의 몸에서는 그녀의 피가 흐르고 있고 그들의 딸이기 때문이다.그는 충분히 조유진이 다시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안정희도 배현수보다 더 중요할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7년 전의 법정에서 안정희가 아닌 그를 선택했을 것이다.하지만 이 또한 7년 전의 일이고 이미 다 뒤엎어진 일이니 넘길 수 있다.그러나 지금은, 이놈 저놈 다 배현수보다 중요했다.조유진이 고개를 들어 배현수를 바라보며 목을 가다듬었다. 배현수의 말 속에 담긴 의미를 알아챈 조유진의 눈가가 붉은 기를 띄었다.“현수 씨는 아직도 제가 그때 당신을 선택하지 않은 것을 원망하고 있군요. 그래요. 어떤 일은 이미 발생하면 엎질러진 물과도 같이 다시 되돌릴 수가 없어요. 그때는 제가 정말 죄송했어요. 만약 아직도 제가 당신에게 빚지고 있다고 생각되시면 저도 안 갈게요...”그때, 배현수의 핸드폰이 울렸다.발신자는 어머니가 머무는 요양원이었다.조유진도 화면을 보게 되었고 아마 또 예지은에게 문제가 생겼음을 눈치챘다.배현수가 등을 돌려 전화를 받았다.“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배현수가 통화하고 있을 때 조유진은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조유진은 알고 있다. 배현수가 여전히 넘기지 못하는 마음속의 고비는 7년 전 조유진이 법정에서 그를 선택하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그렇다면 조유진은? 조유진의 마음속 고비는 예지은이 정희를 죽였다는 것이다.배현수는 만약 그들이 결혼하게 된다면 절대 그녀 혼자 혼인 속의 사소한 문제들을 맞서게 하지 않으리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이 또한 결국 만약에 그칠 뿐이다.조유진은 배현수의 아내가 되고 싶지만, 예지은의 며느리가 될 수는 없다.자신의 어머니를 죽인 범인의 며느리가 된다는 것은 너무 우스꽝스러운 일이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정원으로부터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이윽고 배현수가 항상 몰고 다니는 검은 마이바흐가 산성 별
「인제 와서 갑자기 얼굴을 공개하는 건 또 무슨 뜻이래? 누가 봐도 돈 뜯어내려고 하는 거잖아. 그런데 너무 예쁘셔서 이분은 사기 쳐도 인정이다.」「햇살 여보! 저와 결혼해주세요!」「흑흑흑 어떻게 이렇게 예쁠 수 있지? 언니 드라마에 출연해주시면 안 돼요? 최근에 소설 원작 드라마 주인공이 너무 못생겨서 봐줄 수가 없다고요. 언니 진짜 소설 속에 맑고 차가우면서 희고 고운 백화와도 같은 캐릭터 이미지와 너무 어울려요! 언니! 진짜 저 사랑해주세요!」...곧 그녀가 올린 영상은 알고리즘을 타고 큰 인기를 끌었다.영상 업로드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던 남초윤은 바로 스타 엔터테인먼트의 간판을 달고 가장 먼저 이슈를 포착하여 영상을 편집해 기사를 내보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영상은 곧바로 수만 개의 좋아요를 받게 되었다.이윽고 조유진의 기본 정보도 네티즌들에 의해 낱낱이 파헤쳐지기 시작했다.대제주대학교, 신문방송학과 17학번에서 소문난 얼짱 미인.그러자 댓글 창에서는 또 한 번 난리가 났다.「씁하씁하! 언니가 명문대 출신이라니!」「인플루언서들 중에는 고학력 출신이 엄청 드문데 바로 입덕합니다! 진짜 화면에서 못 빠져나올 것 같아요.」「17학번 얼짱이셨구나. 어쩐지 예쁘시더라.」「저와 결혼해주세요. 제발요!」「언니 빨리 데뷔해주세요! 언니 얼굴은 정말 모든 로맨스 소설 속 맑고 여린 백화 여주 캐릭터 이미지와 어울려요!」...다른 한편, 배현수가 예지은의 일을 처리하고 차에 탑승하자마자 틱톡으로부터 알림 하나가 떴다--구독하신 「조햇살」님께서 새로운 영상을 업로드 하였습니다.배현수가 전에 조햇살 계정을 구독한 적이 있으므로 알림이 뜨는 것이었다.무의식 간에 알림을 클릭하여 계정으로 들어갔다.배현수는 그녀가 전에 올렸던 영상들을 계속하여 꼬박꼬박 챙겨봤었다.하지만 오늘 밤 업로드된 영상은 이전에 업로드했던 영상들과 달랐다.조유진이 얼굴을 공개한 것이다.오늘 영상의 좋아요 수와 공유 수는 전보다 몇 배나 더 많이 늘었다.조유진
선유를 씻기고 아이도 이제 잠들었지만, 마당에는 여전히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예지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조유진은 샤워를 마치고 파록세틴을 챙겨 먹은 뒤 선유의 침대에 누워 잘 준비를 하였다.하지만 아무리 뒤척여봐도 잠이 오지 않았다.핸드폰을 켜보니 벌써 자정이 넘어있었다.배현수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설마 정말 무슨 일이 생긴 걸까?생각에 잠겨있던 찰나 정원으로부터 자동차 엔진소리가 들려왔다....별장 안으로 들어오자 푹신한 고양이 침대에서 곤히 잠든 예삐가 눈에 들어왔다.1층 거실 모퉁이에는 조유진의 작은 흰색 캐리어가 놓여있었다.마치 잠시 이 집에 머무는 여행객인 것마냥 언제든지 집을 떠나가 버릴 것만 같았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골격이 분명한 손가락을 저도 모르게 꽉 움켜쥐었다.그녀의 캐리어 위에는 작은 노트 하나가 놓여있었다. 아마 넣어두는 것을 깜빡한 모양이다.조유진에게는 항상 일기를 쓰는 습관이 있었다. 그리고 이는 배현수도 잘 알고 있었다.배현수가 닥치는 대로 노트를 펼쳐보았다.그 안에는 요 며칠 동안 그들이 했던 모든 일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첫날, 채권자 사장님께 잘 자라고 저녁 인사하다.”“두 번째 날, 채권자 사장님 친구와 저녁 식사하다.”“세 번째 날, 채권자 사장님과 저녁 파티에 참석하다.”...조유진의 서술 속에서 배현수는 그저 채권자일 뿐이다.배현수가 피식 냉소를 터뜨렸다.요 며칠 동안 너무 사이좋게 지내왔던 터라 하마터면 조유진은 지금 빚을 갚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의 곁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잊을 뻔했다.결국, 조유진은 그저 건성으로 배현수에게 맞춰주고 있을 뿐이다.일기장을 쥐고 있던 손이 점점 창백해져 갔다.같은 시각, 잠옷을 입고 있는 조유진이 나무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집안에는 작은 무드등 하나만 켜져 있어 희미하고 노란 조명이 무척 암담하였다.배현수가 아래층에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을 본 조유진은 예지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먼저 관심 어
이 약은 양극성 정동장애를 치료하는데 비교적 효과적이지만 단점은 부작용이 무척 심하다는 것이다.조유진이 바다로 뛰어든 후 배현수는 그녀가 죽은 줄 알았었다.그해 배현수는 절대 이 약과 떨어져 지낼 수가 없었고 약을 먹고 토한 적도 상당히 많았다.책상 위에 놓여있는 조유진이 벗어둔 핑크 다이아몬드를 보자니 더욱 심란하고 짜증 났다.그때 배현수가 갑자기 손에 쥐어져 있던 약병을 벽에 힘껏 내동댕이쳤다.약들이 한가득 쏟아져 나왔다.배현수는 눈을 질끈 감고 쏟아진 약을 밟으며 곧장 욕실로 향했다....조유진은 선유의 방에 누워있었다.한참을 기다렸지만, 오늘 밤은 배현수가 그녀를 안고 침실로 돌아가지 않았다.조유진은 선유의 말캉한 작은 몸을 꼭 끌어안고 어렴풋이 잠이 들었다....조유진이 인천으로 가는 전날 밤.배현수와 육지율은 불야성 바에서 취기를 빌렸다.한잔에 이어 또 한잔.육지율은 배현수를 힐끗 바라보고는 눈을 가늘게 뜨고 비웃기 시작했다.“얼마 전에는 내 앞에서 그렇게 연애질을 하더니 이제 며칠 됐다고 이러는 거야? 그 말이 뭐더라... 음... 연애질할수록 빨리 죽는대.”배현수는 술잔을 쥔 채 손가락에 힘을 꽉 주며 피식 콧방귀를 뀌었다.“넌 곧 이혼하는 마당에 빨리 죽는다고 하더라도 네가 나보다 빨리 죽겠지.”“... 허, 난 지금 이혼을 하는 입장이고 넌? 넌 결혼이나 해봤냐? 조유진이 너한테 명분을 준 적이 있기는 해?”명분이 서지 않으면 말에도 이치가 맞지 않는 법이다.이렇게 생각하니 육지율의 마음도 한결 편해졌다.아무리 남초윤이 마음속에 다른 사람을 품고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법적으로는 육지율이 남초윤의 합법적 남편이고 반쪽이다.육지율한테는 엄연히 법적 증명이 있다는 소리다.육지율이 끝까지 이혼을 동의하지 않는다면 김성혁은 결국 모두가 질타하는 상간남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배현수라면... 그와 조유진 사이에는 이미 아이도 있지만, 아이를 통해 바뀐 건 없는듯하다.언제든지 성남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조유진의
늦은 밤, 12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선유와 조유진은 블루마블 게임을 하고 있었고 신나게 게임을 하며 맛을 들인 상태라 늦게까지 자지 않고 있었다.마지막 판을 놀고 선유가 입을 삐죽이며 투정을 부렸다.“아빠는 정말 왜 아직도 집에 안 들어오시지? 엄마 내일이면 아부를 떨기 위해 인천으로 가는데 나와 블루마블 게임도 안 놀아주시고. 엄마, 아빠 어디 가셨어요?”조유진이 힐끗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이 다 되어가는데 배현수는 아직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오늘 일이 많으셔서 바쁜가 봐. 엄마랑 씻으러 가자. 너무 늦었어. 이제 자야지.”요 며칠 동안 조유진은 항상 선유 방에서 잠을 잤기에 배현수와 그녀 사이의 교류는 거의 0이었다.그러나 조유진은 배현수의 기분이 좋지 않음을 명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선유는 조유진의 품속에 파고들며 입을 열었다.“엄마, 우리 아빠한테 전화해요. 나 아빠가 보고 싶어요. 저와 싸운 지도 엄청 오래됐다고요.”“...”선유의 칭얼거림에 조유진이 웃음을 터뜨렸다.“아빠가 너한테 잔소리를 안 하시는데 서운해?”“요 며칠 동안 아빠도 맨날 밥을 남기시고 내가 밥을 남겨도 뭐라 하시지 않는다고요. 요즘 아빠가 너무 이상해요! 게다가 제가 밥을 먹으면서 계속 수다를 떨어도 뭐라 하지 않으세요.”선유는 작은 두 손을 펴고 입을 삐죽이며 서운하다는 얼굴이었다.선유가 전화해보자고 말을 꺼냈으니 조유진도 거절하기 어려웠다.마침 배현수에게 전화를 걸려던 찰나 남초윤으로부터 카톡이 왔다.「나 육지율 인스타에서 본 게 있는데 너한테 보여줄지 말지 엄청나게 고민했거든? 근데 나까지 너한테 비밀로 하고 널 속이는 건 도무지 아닌 것 같아서 결국 알려주기로 했어.」이윽고 남초윤이 보낸 건 다름 아닌 사진이었다.뒷모습뿐이었지만 조유진은 그 사람이 배현수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사진 속의 배현수는 낯선 여자의 차에 탑승하고 있었다.반쯤 내려진 차 유리창 너머로 운전석에 앉아있는 여자는 배현수를 바라보며 환히 웃고 있었다
배현수의 말에 조유진은 이상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한 쌍의 젊은 남녀가, 남자는 잘생겼고 여자는 예쁘게 생겼는데 두 사람 모두 성 기능이 정상적이고 밤새 함께 있었다면 손만 잡고 수다를 떨리는 없지 않겠는가?조유진은 그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기에 그녀는 단번이 배현수의 말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배현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조유진이 그의 말을 끊어버렸다.“아니에요. 괜찮아요. 저 혼자 택시 잡고 갈 수 있어요.”“이 근처는 모두 빌라라 택시 잡기가 힘들 거야. 내가 서정호더러 데려다주라고 할게.”배현수는 항상 강압적이었다.이윽고 말을 마치고는 그대로 조유진을 지나쳐 자리를 떠버렸다.조유진은 그 순간 그의 몸에서 복합적인 술담배 냄새와 은은한 향수 냄새를 맡았다.치자나무 꽃향기였고 여자 향수 향이었다.그 순간, 계속하여 이성을 부여잡고 있던, 그렇게 강인하게 잘 버텨오던 조유진의 마음속의 방어선이 그대로 무너져내리고 말았다.긴 손끝이 저도 모르게 계속하여 손바닥을 파고 들어갔다.조유진은 잠시 목을 가다듬고 다급하게 배현수를 불러세웠다.“배현수.”배현수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그러나 그는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새로운 인생계획이 있다면 꼭 선유한테 알려줘요. 그리고 선유와 얘기도 많이 나눠주고요.”조유진은 선유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하지만 이 말은 배현수의 귀에서는 또 다른 의미로 들렸다.그에게 무슨 새로운 인생계획이 있겠는가?입술을 달싹이던 배현수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22날 후... 아니, 21날 후 대제주시를 떠나고 산성 별장을 떠날 때 선유한테 어떻게 말할지나 잘 생각해봐. 이건 네가 직접 선유한테 설명해.”배현수는 아직 선유의 감정을 신경 쓸만한 정력과 체력이 부족했다.그리고 조유진이 대제주시를 떠나고 산성 별장을 떠나게 될 일은 선유보다 배현수가 더욱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조유진이 떠나기로 했으니 선유에게 어떻게 설명할지는 조유진의 일이었다.이 말을 남긴 뒤 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