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소월은 표정을 관리하느라 애썼다. “사실은...” 정소월이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수줍게 얘기했다. “그냥 친구관계는 아니었어요... 태준이가 절 오래 쫓아다녔거든요. 근데 인연이 아니었는지 결국 태서 씨랑 결혼했죠.” 심유진은 태서라는 사람이 방금 나란히 앉아있던 허태준의 사촌 형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저랑 태준이 관계 신경 쓰시는 건 아니죠?” 정소월이 살짝 도발하며 심유진을 바라봤다. “다 지난 일이에요. 이젠 둘 다 결혼도 했고... 그냥 오랜만에 보니까 옛날 생각이 나네요.” 심유진은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그럼요. 신경 안 써요.” 솔직히 얘기하면 심유진은 가슴이 답답하고 이상하게 우울해졌다. 방금 만난 다음의 반응으로 봐서는 정소월이 혼자 허태준을 좋아한 건 줄 알았는데 실은 반대였다. 심유진은 문득 허태준이 잠결에 집안이랑 연을 끊더라도 그 여자랑은 결혼하지 않겠다며 잠꼬대를 하던 일이 생각났다. 그 여인이 바로 정소월이었던 것일까? 심유진은 생각할수록 속상했다. 그 남자의 아내 앞에서 신경 쓰이진 않냐며 묻는 건 선을 넘는 행동이었다. 심유진은 요리하는 속도를 높였다. 그냥 식사 준비가 빨리 끝나서 정소월과 단둘이 있지 말았으면 했다. 정소월은 겨우 반죽을 완성했다. 재벌 집 딸은 아니었어도 외동딸로 태어나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자란 여자였다. “이젠 뭘 할까요?” 그녀가 심유진에게 물었다. 심유진은 처참한 반죽 상태를 확인하고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혹시 만두피는 만들 줄 알아요?”사실 대답이 예상가긴 했지만 심유진은 그래도 한번 물어봤다. 역시나 정소월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그냥 들어가서 쉬세요. 제가 할게요.” 심유진이 예의상 웃으며 말하자 정소월도 사양하지 않고 손을 씻더니 주방에서 나갔다. “그럼 수고하세요.” 심유진은 양념장을 다 만들고 반죽을 다시 하고는 만두를 빚었다. 요리가 끝났을 땐 이미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주방에는 셰프님 몇 분이 바
고용인들 모두 심유진을 알고 있었기에 고독하게 혼자 문 아래에 앉아있는 그녀를 보자 다들 걱정돼서 다가왔다. “괜찮으세요?” 심유진은 웃으며 그들을 안심시켰다. “괜찮아요, 오래 서있었더니 좀 힘들어서 그래요.” 주방에 의자가 없었고 다들 바빠서 의자를 가져다줄 사람도 없었다. 아마 가져다 준다고 해도 심유진이 거절했을 것이다. 반 시간가량 지나자 주방에서 누군가 불렀다. “만두 다 삶아졌어요!” 심유진은 얼른 일어나서 확인했다. 그리고 먹음직스럽게 완성된 만두를 접시에 예쁘게 담아 방으로 가져갔다. 식탁은 이미 정중앙에 펴져있었고 셰프님들이 만든 요리도 하나씩 올려지는 중이었다. 할아버지는 상석에 앉았고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자리에 착석해 있었다. 심유진이 들어갔을 때는 다들 이미 잔을 부딪치고 있었다. 앞접시에 이미 음식이 놓여있는 것을 보니 식사를 시작한 모양이었다. 누구도 그녀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이 생각을 하니 심유진은 갑자기 너무 서러워져 코끝이 찡해났다. 그녀는 또다시 눈물을 참으며 억지로 웃었다. “만두 다 됐어요!” 심유진이 먼저 할아버지 앞에 한 접시를 올려놓고는 다른 손님들 쪽에도 올려놨다. 그리고 그제야 허태준 옆에 앉았다. “고생했네.” 할아버지가 심유진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가 왠지 아까 열정적으로 맞이해 주실 때의 웃음 하고는 다른 느낌을 주었다. 허태준의 얼굴에도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그냥 직원들에게 앞접시를 하나 더 달라고 해서 심유진 앞에 놓아줬을 뿐 그 뒤로 아무런 말이 없었다. “죄송해요, 이렇게 고생하셨는데 기다렸다가 같이 식사할 걸 그랬어요.” 결국 먼저 사과를 건넨 건 허택양이었다. “원래 부르러 가려고 했는데 태준 형님이 괜찮다고...” “네, 괜찮아요.” 심유진은 자연스럽게 허태준 편을 들었다. 허태준은 냉담한 말투로 얘기했다. “날도 추운데 할아버지께서 찬 음식 드시면 안 되잖아요.” “맞아요.” 심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는 연세가 있으셔서 저녁 9시가 되자 잠자리에 드셨다. 허태준은 할아버지를 부축하며 심유진에게 말했다. “식탁 좀 치워줘.” 심유진은 멈칫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할아버지를 따라 나가고 이 큰 방에 심유진 혼자만 남았다. 저녁을 풍성하게 차렸으나 다들 얼마 먹지 않았기에 거의 반은 넘게 남겼다. 심유진은 이 남은 음식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다. 한참 고민하고 있는데 집사님이 직원들을 몇 명 데려오더니 신속하게 남은 음식들을 쓰레기통에 버리기 시작했다. 만두를 버리려고 하자 심유진이 다급히 달려가 제지했다. “혹시 이건 제가 포장해 가도 될까요?” 오후 내내 고생해 가며 만든 음식인데 그냥 이렇게 버려지는 건 두고 볼 수 없었다. 다행히도 집사님은 친절하게 포장 용기까지 가져다가 남은 만두를 포장해 줬다. “혹시 부족하시면 다른 반찬들도 더 만들어 드릴까요?” “아니에요, 이것만 있으면 돼요.” 얘기를 나누는데 밖에서 차 시동 거는 소리가 들렸다. “도련님들이 가시려나 봐요.” 집사님이 말씀하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허태준이 돌아왔다. “다 치웠어?” “네. 거의 다 직원분들이 치우셨어요.”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면 심유진은 그걸 꼭 짚고 넘어가는 스타일이었다. 허태준은 더 이상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방을 나섰다, “호텔로 돌아가자.” 차가운 밤공기와 그 차가운 목소리가 심유진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둘은 가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허태준은 내일 일찍 일어나라고 말하고는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오늘 저녁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해석도 없었다. 또 최악의 연말이다. 사실 익숙했으나 그래도 속상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심유진은 포장해온 만두를 전자레인지에 덮이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TV로 예능을 틀었다. 하지만 사실 그녀는 예능을 보는 걸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이것 외에는 할 일이 없을 뿐이었다. 심
심유진은 멍하니 그 봉투를 쳐다만 보고 있었다. 살면서 처음 받아보는 용돈이었다. 설날마다 심연희를 부러워했었다. 심연희가 받았던 수많은 봉투 중에 심유진 건 하나도 없었다. 심유진은 그냥 모른 척 받고 싶었으나 간신히 그 충동을 참아냈다. “제가 나이가 얼만데 무슨 용돈이에요.” 심유진은 웃으며 봉투를 밀어냈다. “할아버지한테 돌려드리세요.” “그럼 직접 돌려드려.” 허태준은 억지로 심유진 손에 봉투를 밀어 넣었다. “난 심부름 안 해.” 허태준은 말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갔다. 봉투가 무척 두꺼운 걸 보니 금액도 꽤 될 것 같았다. 심유진은 정말로 받을 생각이 없었기에 봉투를 열어보지도 않고 탁자에 올려두었다. 벌써 시간은 12시가 되었다. TV에서는 다들 한데 모여 큰소리로 카운트다운을 하고 있었다. “5,4,3,2,1!” 종소리와 함께 폭죽 소리가 들려왔다. 커튼을 열어보니 화려한 불꽃이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근방에서 불꽃놀이를 하는 건 금지되어 있기에 아마 호텔에서 하는 이벤트일 것 같았다. 심유진은 베란다에 나가 난간에 기대선 채 폭죽을 바라봤다. 갑자기 맥주가 마시고 싶어졌다. 심유진은 주방에서 와인을 가져다가 컵도 없이 병째로 마셨다. “진짜 예쁘네” 그녀는 손을 뻗어서 폭죽을 만져보려 했다. “아쉽다…” 이 아름다운 장면을 그녀와 함께 구경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슬픔이 휘몰아쳐서 그녀를 덮쳤다. 술은 금세 바닥을 보였다. 심유진은 손이 미끄러져 술병을 놓치고 말았고 병은 바닥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병이 깨지는 소리는 폭죽 소리에 묻혀 허태준의 주의를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심유진은 바닥에 쪼그려 앉아 파편을 줍기 시작했고, 그러다가 조심하지 않아 손가락을 베이고 말았다. 알싸한 고통이 손가락을 타고 온몸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이 기쁘기만 해야 할 밤에 그녀는 취기를 빌려 무릎을 끌어안은 채 펑펑 울었다. 올해는 다를 줄 알았다. 올해는 같이 새해를 맞을 가족이 생겼으니
심유진은 간신히 눈을 떴지만 허태준이 여러 개로 보였다. 그녀는 어젯밤에 토한 탓에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았다. “저… 몸이 안 좋아요.”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허태준은 불을 켜고 그녀에게로 가까이 갔다. 심유진의 창백한 얼굴색을 보고 허태준은 깜짝 놀랐다. 이마를 짚어보니 몸이 불덩이 같았다. 허태준은 얼른 심유진에게 두꺼운 패딩을 입히고 그녀를 꽁꽁 싸매고 나서 그녀를 안은 채 병원으로 향했다. 휴가철이 되니 경주는 인구가 반은 준 것 같았다. 게다가 이른 아침이니 길에는 차가 거의 없었고 가끔 버스 몇 대만이 통행할 뿐이었다. 의사 선생님은 심유진이 어젯밤 폭식을 한 데다가 술을 마시고 찬바람을 맞아서 급성 위장염에 고열이 온 것이라고 진단했다. 심한 병은 아니었지만 수액을 맞아야 했다. 심유진은 머리가 아팠지만 아침에 허태준이 일어나라고 재촉했던 일은 기억이 났다. 허태준은 오늘 부모님을 뵈러 가기로 했었다. 어쩌면 허태준 부모님은 지금도 아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집에 가봐요.” 심유진이 말했다. “전 혼자 있으면 돼요.” 어제 할아버지와 있었던 일로 인해 심유진은 이 집안이 슬슬 두렵기까지 했다. 자신이 또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이 될 것 같았다. 허태준은 의자에 앉은 채 가만히 있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엄마, 저예요.” “네, 오늘 가기로 했는데 좀 늦을 것 같아요.” “급한 일이 생겼는데 아마 점심 전에는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회사 일은 아니고요.” “네.” “네, 그럼 이따 뵐게요.” 허태준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더니 심유진을 차갑게 바라봤다. “많이 컸네? 와인을 한 병이나 마시고?” 심유진은 고개를 숙였다.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그녀의 눈에 어린 슬픔을 가려주는 것 같았다. 그녀는 아무런 변명도 할 수가 없었다. 허태준은 주먹을 꽉 쥐었다가 또 힘을 풀었다. “어제저녁부터 아팠는데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자는 줄 알았어요
“아!” 간호사가 주머니에서 쪽지 한 장과 지폐 몇 장을 꺼냈다. “뭔가 급한 일이 있으신지 전화를 받더니 나가셨어요. 혹시 깨어나시면 이걸 건네주라고 하시더라고요. 택시를 타고 여기에 적힌 주소로 오면 된다고 전해달라 하셨어요.” 심유진은 쪽지를 건네받고 대충 한번 보고는 접어서 버려버렸다. 그리고 현금은 옷주 머니에 잘 넣어뒀다. 아마 부모님 집 주소인 것 같았다. 혹시 쪽지를 실수로 잃어버렸다고 얘기하면 믿을지 궁금했다. 심유진은 열이 너무 높은 건 아니었다. 38도 정도였기에 수액을 맞고 나서는 열이 거의 다 내렸다. 병원에서도 퇴원해도 된다고 했기에 심유진은 택시를 타고 호텔로 돌아왔다. 방은 이미 청소를 끝냈는지 어제 그 난장판이던 공간이 말끔히 정리돼 있었다. 심유진은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병원에서 받은 약도 챙겨 먹었다. 약기운이 금방 몰려와서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졸렸다. 이번에 심유진은 굉장히 오래 잤다. 밖이 어둑어둑해져서야 그녀는 잠에서 깰 수 있었다. 전화벨 소리가 계속 울렸다. 심유진은 한참을 찾아서야 거실 소파에서 언제 내팽개친 건지도 모를 휴대폰을 찾을 수 있었다. 역시나 전화를 건 사람은 허태준이었다. 심유진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전화를 받았다. “어디야?” 허태준이 물었다. 목소리가 차갑다 못해 무서울 지경이었다. 심유진은 깊게 심호흡을 하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호텔이에요.” “간호사가 쪽지 주지 않았어?” “줬는데 제가 잃어버렸어요.” “그럼 호텔로 돌아와서 나한테 전화했어야지.” “그때까지만 해도 머리가 아팠어요. 그리고 감기약을 먹었더니 졸려서 까먹었고요.” 심유진은 최대한 담담하게 대답했다. 수화기 반대편이 한참 조용하더니 허태준의 무거운 숨소리가 들렸다. 분명 화가 많이 났을 것이다. 사실 심유진은 여전히 그가 무서웠다. 하지만 그쪽 부모님을 뵙는다는 사실이 훨씬 더 두려웠다. “태준아~” 허태준 쪽에서 부드러운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
앞으로도 허태준의 부모님을 못 만난다는 건 사실 심유진이랑은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다. 사실 허태준과 진짜 부부 사이인 것도 아니고 허태준이 이혼할 생각이 없다고 했지만 언젠가는 분명 헤여질 것이다. 하지만 허태준의 강압적인 태도에 심유진은 조금 당황해서 당장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갈게요.” 허태준이 문자로 주소를 보내줬다. 택시 기사는 그 주소를 보고 고개를 돌려 심유진을 자세히 살펴보기까지 했다. 호기심과 부러움이 공존하는 눈빛이었다. 허태준의 부모님은 시 중심의 별장에 살고 계셨다. 여기에 사는 사람들은 다들 내로라하는 부자였다. 보안이 철저한 곳이어서 택시는 절대 못 들어가기도 했다. 심유진은 입구에서 내려서 찬바람을 맞으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깊숙이 자리 잡은 집이 아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으면 30분은 걸어야 했을 것이다. 매 별장마다 마당이 딸려있었다. 비록 면적이 작지 않았지만 허 씨 할아버지 집이나 심 씨네의 대저택에 비할 수는 없었다. 대문 앞에 서있으니 집의 대체적인 윤곽이 눈에 들아왔다. 그리고 창문 쪽에서 새어 나오는 따뜻한 노란색 불빛도 보였다. 벨을 누르니 집안의 사람이 빠르게 대답했다. “누구세요?” 낯선 목소리에 심유진이 조심스레 자신의 이름을 댔다. “안녕하세요, 심유진이라고 하는데요.” “아!” 상대방은 이 이름을 들은 적 있는 것 같았다. “지금 열어드릴게요!” 철제 대문이 바로 열렸다. 심유진은 좁은 돌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 집문 앞까지 갔다. 허태준이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문 앞에 서있는 것이 보였다. “이리 와.” 허태준이 심유진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손은 심유진의 손을 잡은 것이 아니라 그녀의 이마로 향했다. 찬 바람을 한참 맞았더니 허태준 손의 온도보다 이마가 훨씬 차가웠다. 다행히 열은 더 이상 나지 않았다. 허태준은 다시 손을 주머니에 넣고 돌아섰다. “들어와.” 심유진도 그의 뒤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다. 현관 쪽에서
심유진이 웃으며 그쪽으로 다가갔다. “어머님” 어머니도 기쁘신지 함박웃음을 지으며 심유진의 손을 덥석 잡으셨다. 심유진은 좁은 공간에 겨우 끼여 앉아있었고 어머니는 그런 심유진을 한참 보시더니 걱정 어린 말투로 물었다. “태준이가 아팠다고 하던데 이제 괜찮아?” 심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제 괜찮아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말에 어머니가 심유진에게 살짝 눈을 흘겼다. “그런 말이 어디 있어. 이제 가족인데 당연히 걱정해야지.” 심유진은 순간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지 몰라 망설였다. 이런 “당연”한 일들을 자기 친엄마는 한 번도 해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옆에 앉아계시던 또 다른 어머님도 말을 보탰다. 앉은 위치를 봐서는 허태서와 허택양의 어머님이신 것 같았다. “소원 이루셔서 좋겠어요! 그렇게 며느리를 바라시더니 태준이가 드디어 데려왔네!” “그러니까요!” 허태준 어머니는 내내 웃으면서 시선을 심유진에게서 한순간도 떼지 않았다. “배는 안 고파? 배고프면 지금 당장 밥상 차리라고 하게.” 어머님의 열정에 심유진은 몸 둘 바를 몰랐다. 다른 가족들이 다 가만히 앉아있기만 하는 것을 보고 심유진이 얼른 손을 저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하지만 옆에 앉아 계시던 아버님이 일어서며 말했다. “식사부터 하죠, 다들 오래 기다렸으니까.” 그가 일어서자 모두가 따라서 일어섰다. 어머님은 심유진의 손을 잡고 식당으로 가며 내내 집안사람들을 소개해 줬다. “이쪽은 둘째 삼촌, 이쪽은 셋째 삼촌…” 정소월을 소개할 차례가 되었을 때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이쪽은 태서 와이프, 정소월이라고 하고.” 표정을 보아하니 허태준과 정소월 사이의 일은 모르는 것 같았다. 이름을 불리자 정소월은 걸음을 멈춰 서서 미소를 짓고는 어머니한테 찰싹 달라붙어 팔짱을 끼고 애교를 부렸다. “전 어제 할아버지 댁에서 이미 만났어요. 그렇죠 유진 씨?” 심유진도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하은설은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시간 없어, 빨리 가자! 너 기다리다 네 남편 목 빠지겠네!”심유진은 빨리 걷기 위해 두 손으로 얼른 웨딩드레스를 들어 올렸다.“응, 그래.”화창한 날씨에 황금빛 햇살이 꽃잎 사이로 레드카펫을 비추고 있었다.심유진은 아름다운 이곳에서 머물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고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러 온실 문 앞까지 걸어왔다.온실 대문 앞에는 육윤엽이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다른 한 손은 별이의 손을 잡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별이는 심유진의 등장에 잡고 있던 육윤엽의 손을 떼고 그녀에게로 달려왔다.“엄마, 오늘 천사 같아요!”심유진도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웃었다.“고마워, 우리 별이!”오늘 결혼식의 화동인 별이는 정장 차림에 작은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앙증맞은 손에는 형형색색의 꽃잎이 들어있는 바구니가 들려있었다.온실 안에서 곧이어 결혼 행진곡이 울려 퍼졌고 육윤엽은 심유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가자.”심유진은 애써 웃고 있지만 눈물이 맺힌 육윤엽을 보고 갑자기 꼬끝이 찡해졌다.하은설은 그녀가 울려고 하자, 옆에서 한마디 했다.“참아, 울면 안 돼! 카메라가 돌고 있는데 화장 번지면 안 예쁘잖아.”심유진은 쏟아져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으면서 패딩 점퍼를 벗어 옆에 있던 스타일리스트에게 건넸고 육윤엽의 팔짱을 끼고 천천히 식장 안으로 들어갔다.별이도 앞에 서서 두 사람의 보폭에 맞춰 걸어가면서 바구니 속의 꽃잎들을 한 웅큼씩 집어서 하늘로 흩뿌렸다.신부의 등장에 하객들은 잇달아 박수를 쳤고 심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허태준은 예식장 단상 앞에서 자신을 향해 한 발짝씩 걸어오는 심유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결혼식장이 크지 않은 탓에, 육윤엽과 심유진은 2분도 안 되어 예식장 단상 앞까지 걸어왔다.행복함에 싱글벙글하던 허태준은 육윤엽이 굳은 얼굴로 헛기침을 몇 번 해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를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아버님.”육윤엽은 심유진을 한 번
육운영과 김욱은 블루 항공이 설 연휴에도 쉬지 않은 탓에 경주에서 이틀을 보내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다만 심유진은 보름 정도 되는 설 연휴 중 절반 시간을 허씨 가문의 별장에서 가족과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그도 그럴 것이 코로나로 인해 많은 공공장소가 문을 닫은 상황이라 밖을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육운영과 김욱은 짧은 휴가가 끝난 뒤, 업무에 복귀했다.별이도 설 연휴가 끝난 뒤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허태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별이의 유치원 픽업을 위해 일부러 허태준과 심유진이 사는 동네에 집까지 샀다.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지나, 블루 항공 경주 지사의 재건축도 이제는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김욱은 몇 명의 핵심 직원들을 경주 지사 쪽으로 파견시켜 심유진과 함께 회사 초반 운영을 하도록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의 운영은 정상 궤도에 올랐고 일부 본사의 업무도 경주 지사 쪽으로 넘어왔다.회사가 눈코 뜰 새 바빠지자, 심유진은 5월 예정이었던 결혼식을 취소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허태준이 결혼식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것을 알기에 바쁜 일정 속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서 디자이너들을 만나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면서 결혼식 준비를 했다....5월이 되자, 모두의 예상대로 코로나는 국내에서 유럽과 미국으로 퍼졌다.블루 항공은 다행히 코로나가 N시티에서 유행하기 전, 대부분의 부서를 이동한 상황이라 큰 타격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진성그룹과의 협업을 통해 국내의 여러 의료기기 공장을 설립하고 마스크 등 의료 물자를 전 세계로 운송하면서 큰돈을 벌었다. 반면 모어 항공은 블루 항공과의 소송에서 패한 뒤, 입소문이 나쁘게 퍼져서 고객들을 블루 항공에 뺏긴 신세가 되었다.게다가 이번 사건의 주역이었던 마리아는 집에서 쫓겨났다는 소문까지 돌았다.모든 일이 잘 풀리는 중, 심유진과 허태준의 결혼식 날도 다가왔다.심유진은 결혼식 날이면 해방감이 들 줄 알았지만, 날이 다가올수록 기대감과 긴장감으로 잠을 설쳤다....YT 그룹이 부
허아주머니는 특별히 심유진을 위해 아침밥을 남겨두었다.심유진은 허아주머니의 정성에 감동했고 맛있게 아침을 먹었다.허태준과 별이는 그녀가 아침을 다 먹자,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고 때마침 허아주머니는 주방에서 만두가 가득 담긴 도시락통을 허태준에게 건넸다.“자, 이거 잊지 마.”“고맙습니다.”허태준은 심유진을 바라보며 물었다.“떠나도 될까요?”심유진은 어젯밤의 일로 토라져서 답도 하기 싫었지만, 허아주머니 앞에서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짧게 답했다.“네, 가죠.”그녀는 답을 하고 나서 별이의 손을 잡고는 허아주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대문을 나섰다.허태준도 귀여운 그녀의 행동에 웃음을 머금으며 두 사람을 뒤따랐다....허태준이 별이에게 미리 증조할아버지를 뵈러 간다고 말했고, 별이는 가는 내내 차 안에서 폭풍 질문을 던졌다.“증조할아버지는 왜 증조할아버지라고 부른 거예요?”“증조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아빠인 건가요?”“증조할아버지는 무서워요?”“증조할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만두를 먹을 수 있어요?”...허태준은 별이의 모든 질문에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대답했다.그동안 심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볼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허태준은 냉랭한 심유진의 태도에 어젯밤 자기의 행동이 과한 것 같아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하지만 허태준은 그녀가 거부할수록 점점 더 야만적으로 변하는 자기를 도저히 통제할 수 없었다.허태준은 어젯밤 생각에 몸이 반응해 오면서 또 피가 끓기 시작했다....허태준은 별이를 안고 묘지 입구에서 산 꽃다발을 무덤 앞에 놓았고, 몸을 굽혀 물티슈로 쌓인 먼지를 꼼꼼히 닦아냈다.“할아버지, 저 왔습니다.”심유진도 허태준의 할아버지를 보자, 화가 풀리는 느낌이었다.그녀는 별이와 함께 무덤을 향해 절을 세 번 올렸다.심유진은 사진 속의 자상한 노인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할아버지, 저 기억하세요? 태준 씨 아내 심유진이에요.”그러고는 별이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심유진이 혼자 방에서 나오자, 사람들은 그녀에게 엄청난 질문 세례를 했다.“태준이는? 왜 같이 내려오지 않았어?”“아빠는 어디 있어요? 불꽃놀이 시켜준다고 저랑 약속했단 말이에요.”심유진은 방에서 나오면서 침착하게 둘러댔다.“샤워하고는 피곤하다고 일찍 잠들었어요.”어른들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고 김욱만이 그녀를 몇 초 동안 주시했다.별이는 실망한 듯 입을 삐쭉거렸다.“아빠 미워! 오늘 같은 날 왜 이렇게 빨리 주무시는 거죠?”심유진은 그런 별이가 사랑스러운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피곤해서 일찍 잠들었어. 내일 아빠가 우리 별이랑 같이 불꽃놀이 해주실 거야, 그때까지 참을 수 있지?”그녀의 말이 끝나고 허태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세뱃돈을 심유진과 별이에게 건넸다.허아주머니는 두 사람을 보면서 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유진아,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심유진은 허아주머니에게 다가가더니 뜨겁게 포옹했다.“어머님, 고마워요.”허아주머니는 심유진의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그녀를 더욱 꽉 껴안았다.“우리 유진이는 너무 착해.”이어 육운엽과 김욱도 세뱃돈을 건넸고, 별이는 많은 세뱃돈을 받은 것에 기뻐서 펄쩍펄쩍 뛰었다.늦은 시간 탓에 몇몇 어른들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때마침 허아주버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늦었는데 다들 이만 들어가서 쉬지.”심유진도 별이에게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허태민, 너도 이제 자야지.”별이는 아쉬운 표정으로 한 손에는 두툼한 돈봉투를 꼭 쥐고 다른 한 손은 심유진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다....심유진은 별이를 재운 뒤에도 허태준의 화가 아직 풀리지 않은 것 같아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방으로 향했다.다들 잠들었는지 온 집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심유진이 조심스레 방문을 열자, 그녀가 켜놓았던 무드등조차 꺼져 있어 칠흑같이 어두웠다.그 순간,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방안으로 끌어당겼고, 놀라서 비명을 지르려고 할 때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더니 발끝으
“새해 복 많이 받아요.”왜인지 심유진의 눈가는 촉촉해졌다, 그녀는 울먹거리며 말했다.“왜 그래요?”허태준은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어쩔 줄 몰랐다. 그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불꽃놀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요?”심유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완전 좋았어요!”“근데 왜 우는 거예요?”허태준은 그녀가 우는 게 싫었다.심유진이 울면 허태준도 덩달아 마음이 아팠다.“너무 감동적이어서요.”심유진은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훌쩍거렸다.“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새해를 보낼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해요.”“사랑하는 사람...”허태준의 입꼬리가 점점 귀에 걸리더니 심유진의 허리를 더 꼭 껴안았다.“저도 사랑해요, 유진 씨.”그는 머리를 숙이고 심유진의 이마에 키스했다.심유진은 허태준의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다급히 그를 밀어냈다.하지만 워낙 세게 껴안아 밀어 지지 않았다.“모두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어요.”심유진은 이성을 잃은 허태준을 일깨워 줬다.김욱은 그녀가 잠에서 깬 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불꽃 쇼도 끝난 상황에 허태준과 위에 오래 무르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게 뻔했다.심유진은 그 의심을 피할 수 있을 만큼 낯이 두껍지 못했다. 허태준은 그녀를 화나게 했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것을 알기에 그녀를 놓아줬다.“잠시 후에 꼭 보충해야 해요.”허태준은 위협적으로 말했다.“어떻게 때울까요?”심유진은 웃음을 터뜨리면서 서둘러 내려가지 않았다.그녀는 까치발을 들고 허태준의 턱으로부터 그의 얼굴 곳곳에 키스했다.“이러면 돼요?”심유진은 허태준의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웃음치며 그를 유혹했다.“아니면 이렇게?”그녀는 허태준의 몸을 어루만지며 그를 달아오르게 했다.허태준의 검은 눈동자는 반짝 빛났고 몸에 뜨거운 피가 흘렀다.하지만 그는 꾹꾹 참으며 인내심 있게 심유진의 다음 유혹을 기다렸다.“우리... 스릴 넘치게 놀아 볼래요?”심유진은 허태준의 턱을 잡으며 그의 애간장을 태웠다.그녀는 마치 섹시한
설날에 모처럼 대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니 저녁이 되자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들 모두 약주를 하자 허 아주머니는 육윤엽과 김욱을 모두 집에 못 가게 막았다.아침 일찍 일어나 쉴 새 없이 바빴던 심유진은 저녁이 되자 졸음이 쏟아졌다.허 아주머니는 피곤해하는 심유진을 발견하고 먼저 올라가서 쉬라고 했다.하지만 심유진은 주먹을 꽉 쥐며 졸음을 떨쳐내려 애썼다.“조금만 더 버텨볼게요.”심유진은 격식을 따지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새해 카운트 다운을 하기도 전에 잠에 들었다. 하지만 올해는 먼저 자고 싶지 않았다.올해 그녀는 더 이상 떠돌이 처지가 아닌 가족과 함께였기에 더욱 이 소중한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만끽하고 싶었다.허태준은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를 극구 말렸다.“먼저 올라가서 눈 붙이고 있어요.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기 전에 깨워줄게요.”허태준은 심유진이 무슨 마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마음이 아프고 미안해졌다.허태준이 말리자 나머지 사람들도 그녀를 말리기 시작했다.별이 마저도 심유진의 손을 힘껏 잡아당기며 잠을 권했다.결국 심유진은 그들의 의견을 꺾지 못하고 일일이 인사를 나눴다. 그러고는 하품하며 침실로 향했다....“유진아! 심유진! 빨리 일어나! 12시야!”누군가 심유진의 뺨을 툭툭 치면서 깨웠다.심유진이 눈을 뜨자 눈앞에는 장난꾸러기처럼 웃는 김욱이 있었다.심유진은 김욱의 손을 치우고 그를 세게 때렸다.복수를 마친 심유진은 그제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왜 오빠가 날 깨우러 온 거야? 태준 씨는?”“아래층에 있어. 별이가 태준 씨를 놔주지 않아서 내가 올라왔지.”김욱은 방금 맞은 곳을 문지르며 투덜거렸다.“이럴 줄 알았으면 깨우지 않는 건데.”“오빠가 먼저 날 때렸잖아! 내 탓 하지 마!”심유진은 이불을 젖히고 몸을 일으켰다.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물었다.“지금 몇분이야?” 김욱은 휴대폰 화면을 켜고 말했다.“11시 59분이야. 이미 카운트 다운 시작됐어.”“이렇게 빨리?”조금만 잔줄 알
심유진은 생각을 되짚어보고는 문득 허태준이 유럽으로 갔었던 일이 떠올랐다.하지만 허태준은 허택양의 일을 처리하러 유럽으로 가는 거라 핑계를 댔었다.“허태준은 너보다도 경우가 있는 사람이었어.”육윤엽은 코웃음 치고는 투덜거리기 시작했다.“너는 참 결혼하기 전부터 남편 생각밖에 안 하네.”“아이참...”심유진은 헛웃음 지으며 이를 꼭 깨물었다.그녀는 이미 들킨 바에 모든 사실을 다 털어버리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사실, 저와 태준 씨 이혼한 적 없어요. 저 이미 6년 전에 태준 씨와 결혼 했었어요.”허태준은 이 사실을 육윤엽한테 말한 적 없었다.심유진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육윤엽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너희 둘...”육윤엽은 가슴을 쥐어 잡고 괴로워했다.심유진과 김욱은 급히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요? 심장이 아파요?”육윤엽은 심유진의 뒤통수를 공격한 후에야 표정이 온화해졌다.그의 손이 너무 매웠는지 심유진은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났다.“앞으로 또 이런 중요한 일을 숨겼다간 더 아프게 때릴 줄 알아.”육윤엽은 험상궂은 얼굴로 겁을 주었다.심유진은 뒤통수를 쥐어 잡으며 대답했다.“다시는 안 숨길게요!”허태준의 부모님은 육윤엽과 김욱을 반갑게 맞이했다. 두 사람이 별장에 들어서서부터 허 아주머니는 차를 따라주고 과일을 내오며 쉬지도 않고 대접했다.육윤엽은 젠틀하게 허태준의 부모님을 대했다. 아무래도 오는 길에 심유진을 실컷 욕한 덕분일 수 있다.게다가 육윤엽은 두 사람의 선물도 준비해 왔다.그는 허 아주버님한테 비싼 브랜드 시계를, 허 아주머니한테는 경매에서 낙찰받은 비싼 보석 세트를 선물로 줬다.두 사람은 한참 거절하다가 끝내 심유진의 설득에 못 이겨 선물을 받았다.양쪽 부모님은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이번에 여기에 온 것은 아이들과 같이 설을 보내고 싶어서 이기도 하지만 두 분과 결혼식에 대해 상의하려고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그들이 중요한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허태준과
심유진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육윤엽과 김욱을 데리러 가야 했다. 그녀는 저녁밥을 먹은 후 방으로 올라가 샤워하고 잘 준비를 했다.하지만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였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그때 허태준은 별이를 재우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방에 불이 아직 켜져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서 물었다.왜 아직도 안 자고 있어요?”심유진은 이불을 들춰 몸을 일으켰다.“저 지금 너무 걱정돼요.”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헝클어진 채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뭐가 걱정돼요?”허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내일 저의 아버지가 여기에 오시잖아요... 만약 어머니와 아버님과 트러블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죠?”심유진은 내일 육윤엽과 허태준의 부모님이 싸우기라도 할까 봐 생각만 해도 머리가 뻐근했다.“아버님은 현명하신 분이니 걱정하지 말아요.”허태준은 심유진을 다독였다.“아버님께서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눈치 보게 하는 분은 아니잖아요.”허태준의 말에 심유진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태준 씨가 아버지 눈치를 많이 보던데요?”허태준은 마른기침하며 핑계를 둘러댔다.“그것도 이유가 있으니까 그런 거잖아요.”허태준은 이미 겁에 잔뜩 질려 육윤엽이 없어도 감히 그의 나쁜 말을 하지 못했다. 심유진은 이를 이미 알아차렸다.“아무래도 오빠한테 전화해서 신신당부해야겠어요.”그녀가 충전 케이블을 뽑자 휴재폰 충전이 중단되었다.허태준은 다급하게 그녀를 뜯어말렸다.“두 분 이미 잠에 드셨을 거예요. 할 말은 내일 아침에 데리러 갈 때 해도 늦지 않았어요.”심유진은 고민하다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하긴. 그렇긴 하네요.”허태준은 심유진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주었다.“됐어요. 얼른 자요.”허태준은 방안의 불을 끄고 무드등 하나만 켜뒀다.“내일 할 일이 워낙 많아서 쪽잠을 잘 시간도 없을 거예요.”심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허태준을 쳐다봤다.그녀는 갑자기 장난꾸러기같이 웃었다.“저 잠 좀 재워주지 않을래요? 아무 이야기를 해
“네. 그럼 우리 먼저 가볼게요.”심유진은 들고 온 가방을 챙기고 허태준을 데리고 집을 떠났다.“내일 아침 제가 데리러 올게요. 설날이어서 택시가 잘 잡히지 않을 거예요.”육윤엽은 거절 대신 한가지 요구를 말했다.“그럼 너 혼자와.”심유진은 멈칫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육윤엽은 변하지 않았다.“알겠어요.”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저는 아버지가 다 받아들인 줄 알았어요.”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심유진은 투덜거렸다.“아직도 태준 씨를 싫어하시는 거였어요.”허태준은 심유진의 손을 꼭 잡으며 미소를 띠었다.“우리 천천히 해요.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하죠.”허태준은 육윤엽이 하루아침에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는 일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심유진의 입술은 삐죽 튀어나왔다.“뭐 아버지가 저를 막 대하는 것도 아니고 태준 씨가 괜찮다면 저도 괜찮아요.”허태준은 그런 심유진이 마냥 귀여웠다.“그럼 제가 마음이 급했다면 어쩔 생각이에요?”그는 고개를 숙이고 부드러운 눈길로 심유진을 놀렸다.“저는...”심유진은 육윤엽의 태도를 바꿀 방법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천천히 하죠. 천천히 해!”육윤엽과의 부녀 관계를 끊을 수도 없으니 그녀는 결국 자포자기하며 외쳤다....심유진과 허태준 별장으로 돌아오자 허 아주머니는 적잖게 놀란 동시에 조금 심술이 났다.“너희 둘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왜 사돈이랑 더 같이 있어 주지 않고!”허 아주머니는 물어보면서 허태준을 탓했다.“사돈께서 멀리서 오셨는데 잘 모셔야 할 것 아니야!”심유진은 허태준의 편을 들어줬다.“태준 씨가 모시고 싶지 않아서 온 건 아니에요. 저의 아버지와 오빠가 오랜 비행으로 잠을 못 자서 많이 피곤해하셨어요. 대꾸할 맥도 없어서 저희를 내쫓으셨어요.”“아... 그랬구나.”육윤엽의 거친 성격을 잘 몰랐던 허 아주머니는 머쓱하게 웃었다.“그럼 어쩔 수 없지.”심유진과 허태준이 밖에 나갔다가 온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