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간호사가 주머니에서 쪽지 한 장과 지폐 몇 장을 꺼냈다. “뭔가 급한 일이 있으신지 전화를 받더니 나가셨어요. 혹시 깨어나시면 이걸 건네주라고 하시더라고요. 택시를 타고 여기에 적힌 주소로 오면 된다고 전해달라 하셨어요.” 심유진은 쪽지를 건네받고 대충 한번 보고는 접어서 버려버렸다. 그리고 현금은 옷주 머니에 잘 넣어뒀다. 아마 부모님 집 주소인 것 같았다. 혹시 쪽지를 실수로 잃어버렸다고 얘기하면 믿을지 궁금했다. 심유진은 열이 너무 높은 건 아니었다. 38도 정도였기에 수액을 맞고 나서는 열이 거의 다 내렸다. 병원에서도 퇴원해도 된다고 했기에 심유진은 택시를 타고 호텔로 돌아왔다. 방은 이미 청소를 끝냈는지 어제 그 난장판이던 공간이 말끔히 정리돼 있었다. 심유진은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병원에서 받은 약도 챙겨 먹었다. 약기운이 금방 몰려와서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졸렸다. 이번에 심유진은 굉장히 오래 잤다. 밖이 어둑어둑해져서야 그녀는 잠에서 깰 수 있었다. 전화벨 소리가 계속 울렸다. 심유진은 한참을 찾아서야 거실 소파에서 언제 내팽개친 건지도 모를 휴대폰을 찾을 수 있었다. 역시나 전화를 건 사람은 허태준이었다. 심유진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전화를 받았다. “어디야?” 허태준이 물었다. 목소리가 차갑다 못해 무서울 지경이었다. 심유진은 깊게 심호흡을 하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호텔이에요.” “간호사가 쪽지 주지 않았어?” “줬는데 제가 잃어버렸어요.” “그럼 호텔로 돌아와서 나한테 전화했어야지.” “그때까지만 해도 머리가 아팠어요. 그리고 감기약을 먹었더니 졸려서 까먹었고요.” 심유진은 최대한 담담하게 대답했다. 수화기 반대편이 한참 조용하더니 허태준의 무거운 숨소리가 들렸다. 분명 화가 많이 났을 것이다. 사실 심유진은 여전히 그가 무서웠다. 하지만 그쪽 부모님을 뵙는다는 사실이 훨씬 더 두려웠다. “태준아~” 허태준 쪽에서 부드러운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
앞으로도 허태준의 부모님을 못 만난다는 건 사실 심유진이랑은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다. 사실 허태준과 진짜 부부 사이인 것도 아니고 허태준이 이혼할 생각이 없다고 했지만 언젠가는 분명 헤여질 것이다. 하지만 허태준의 강압적인 태도에 심유진은 조금 당황해서 당장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갈게요.” 허태준이 문자로 주소를 보내줬다. 택시 기사는 그 주소를 보고 고개를 돌려 심유진을 자세히 살펴보기까지 했다. 호기심과 부러움이 공존하는 눈빛이었다. 허태준의 부모님은 시 중심의 별장에 살고 계셨다. 여기에 사는 사람들은 다들 내로라하는 부자였다. 보안이 철저한 곳이어서 택시는 절대 못 들어가기도 했다. 심유진은 입구에서 내려서 찬바람을 맞으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깊숙이 자리 잡은 집이 아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으면 30분은 걸어야 했을 것이다. 매 별장마다 마당이 딸려있었다. 비록 면적이 작지 않았지만 허 씨 할아버지 집이나 심 씨네의 대저택에 비할 수는 없었다. 대문 앞에 서있으니 집의 대체적인 윤곽이 눈에 들아왔다. 그리고 창문 쪽에서 새어 나오는 따뜻한 노란색 불빛도 보였다. 벨을 누르니 집안의 사람이 빠르게 대답했다. “누구세요?” 낯선 목소리에 심유진이 조심스레 자신의 이름을 댔다. “안녕하세요, 심유진이라고 하는데요.” “아!” 상대방은 이 이름을 들은 적 있는 것 같았다. “지금 열어드릴게요!” 철제 대문이 바로 열렸다. 심유진은 좁은 돌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 집문 앞까지 갔다. 허태준이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문 앞에 서있는 것이 보였다. “이리 와.” 허태준이 심유진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손은 심유진의 손을 잡은 것이 아니라 그녀의 이마로 향했다. 찬 바람을 한참 맞았더니 허태준 손의 온도보다 이마가 훨씬 차가웠다. 다행히 열은 더 이상 나지 않았다. 허태준은 다시 손을 주머니에 넣고 돌아섰다. “들어와.” 심유진도 그의 뒤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다. 현관 쪽에서
심유진이 웃으며 그쪽으로 다가갔다. “어머님” 어머니도 기쁘신지 함박웃음을 지으며 심유진의 손을 덥석 잡으셨다. 심유진은 좁은 공간에 겨우 끼여 앉아있었고 어머니는 그런 심유진을 한참 보시더니 걱정 어린 말투로 물었다. “태준이가 아팠다고 하던데 이제 괜찮아?” 심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제 괜찮아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말에 어머니가 심유진에게 살짝 눈을 흘겼다. “그런 말이 어디 있어. 이제 가족인데 당연히 걱정해야지.” 심유진은 순간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지 몰라 망설였다. 이런 “당연”한 일들을 자기 친엄마는 한 번도 해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옆에 앉아계시던 또 다른 어머님도 말을 보탰다. 앉은 위치를 봐서는 허태서와 허택양의 어머님이신 것 같았다. “소원 이루셔서 좋겠어요! 그렇게 며느리를 바라시더니 태준이가 드디어 데려왔네!” “그러니까요!” 허태준 어머니는 내내 웃으면서 시선을 심유진에게서 한순간도 떼지 않았다. “배는 안 고파? 배고프면 지금 당장 밥상 차리라고 하게.” 어머님의 열정에 심유진은 몸 둘 바를 몰랐다. 다른 가족들이 다 가만히 앉아있기만 하는 것을 보고 심유진이 얼른 손을 저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하지만 옆에 앉아 계시던 아버님이 일어서며 말했다. “식사부터 하죠, 다들 오래 기다렸으니까.” 그가 일어서자 모두가 따라서 일어섰다. 어머님은 심유진의 손을 잡고 식당으로 가며 내내 집안사람들을 소개해 줬다. “이쪽은 둘째 삼촌, 이쪽은 셋째 삼촌…” 정소월을 소개할 차례가 되었을 때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이쪽은 태서 와이프, 정소월이라고 하고.” 표정을 보아하니 허태준과 정소월 사이의 일은 모르는 것 같았다. 이름을 불리자 정소월은 걸음을 멈춰 서서 미소를 짓고는 어머니한테 찰싹 달라붙어 팔짱을 끼고 애교를 부렸다. “전 어제 할아버지 댁에서 이미 만났어요. 그렇죠 유진 씨?” 심유진도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사영은”이라는 이름은 조금 나이가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다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하지만 허태준네 가족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놀라워하지 않았다. 허태준 부모님은 오히려 표정이 확연히 어두워진 것 같았다. 몇 명은 아예 고개를 숙이고 몰래 웃기까지 했다. 이 반응은 심유진이 예상한 것과 반대였다 뭐가 문제인지 몰라 심유진은 당황해하고 있었다. “정말 신기한 우연이네요!” 허태서가 이 적막을 깨뜨리며 말했다. 왠지 비웃음이 가득한 말투였다. “태준이도 그때…” “태서야!” 허태준의 아버지가 말을 끊었다. 위엄 있는 목소리에 허태서도 목덜미를 긁적이며 입을 다물었다. 어머님이 재빨리 대화 주제를 바꿨다. “왜 이렇게 말랐어. 많이 먹어 얼른.” 어머니는 계속 심유진의 그릇에 음식을 담아줬다. 더 이상 함부로 말을 하지 못하도록 입을 막으려는 것 같았다. 이 일 때문에 식사 자리도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고, 그 뒤로 아무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다들 다시 거실에 모여들었다. 심유진은 여전히 어머님 곁에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사님이 여러 가지 과일을 접시에 담아 가지고 왔다. 심유진은 딸기를 좋아했기에 시선이 저도 모르게 딸기에 꽂혔다. 허태준 어머니는 그런 눈치가 매우 빠른 사람이었다. 그래서 심유진의 마음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딸기는 유진이 앞에 놔줘.” 하지만 집사님이 그쪽으로 다가가기도 전에 허태준이 이를 제지했다. “손님 먼저 드려야죠. 소월이 앞에 놔주세요.” 정소월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허태준이 이런 행동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아니에요! 유진 씨한테 드리세요. 처음 온 건데 더 챙겨줘야죠.” 정소월은 친절하게 얘기했지만 심유진은 그 말속에 자신을 향한 도발이 숨겨져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허태준은 아예 과일 접시를 가져다가 정소월 앞에 내려놓았다. “딸기 좋아하잖아.” 중저음의 그 목소리가 유달리 따뜻하게 느껴졌다. 정소월은 얼굴을 붉히면서
심유진은 한 번도 손을 내밀지 않았다.**허태준의 둘째 삼촌, 셋째 삼촌집식구들은 여덟시 반까지 앉아있다가 모두 하나 둘 자리를 떠났다.손님들을 보낸 후 허아주버님이 허태준에게 말했다."서재로 따라오너라."말투를 들어보니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았다.허아주머니도 심유진을 데리고 위로 향했고, 그녀는 방문을 열고 유진에게 말했다."이게 바로 태준이 방이란다."방안의 인테리어 분위기는 대구의 집과는 다르게 모두 따뜻한 색조로 꾸몄으며, 방의 인테리어는 허 씨네 부모님의 스타일과 같았다."걔가 대학까지 살다가 나가고 나서 후에는 집으로 돌아오는 회수가 점차 줄어들었단다."허아주머니의 얼굴에는 근심이 어렸다."너도 알다시피 걔가 결벽증이 좀 심하잖니. 방안에 물건도 남들은 못 다치게 하고. 걔 나간 후에 내가 직접 이 방 청소했어."말을 마친 후 그녀는 근심 어린 눈빛으로 심유진을 바라보며 물어봤다."걔랑 같이 사는 거 힘들지?"심유진은 빙긋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다.심유진과 허태준은 사실 같은 방에서 같이 자지도 않거니와 그녀 또한 그의 개인 용품을 잘 건들지 않았다.그리고 집안 청소는 청소 아주머니가 따로 있었기에 이런 일로 싸우는 일은 절대 없었다."그럼 다행이구나."허아주머니는 한숨 놨다는 듯 말했다."나는 계속 걔가 그놈의 결벽증 때문에 결혼 못할 줄 알았거든."심유진은 살짝 웃기만 하고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허아주머니는 유진을 데리고 다른 방으로 갔고, 그곳에는 태준의 어릴 적 흔적이 묻어있었다.물건 하나를 쥘 때마다 허아주머니는 심유진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이건 태준이가 초등학교 때부터 받은 상이란다. 그 아이 성적은 늘 좋았어, 늘 일등이었지. 우리 부부가 걱정할 일이 없었단다.""태준이가 중학교 때 갑자기 레고 맞추기에 빠져서는 밤낮없이 이 서랍장만큼이나 맞췄단다. 집에 하도 많길래 태준이 동생들을 줬더니 글쎄 싸웠지 뭐니.""태준이가 취미가 많아, 특히 운동을 좋아해. 태권도, 씨름, 권투 이런 거 다
섭섭함은 이미 그녀의 마음속에서 지워졌고, 심유진은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그녀는 그저 허태준이 부모님의 결혼 재촉에 대처하려고 데려온 존재에 불과했고, 그가 과거에 다른 여자와 무슨 일이 있었든 그녀와는 관계가 없었다.허아주머니는 한편으론 안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안타까웠다."유진아, 태준이 그 아이는......마음속으로 뭘 생각하든 간에 입밖으로 꺼내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종종 오해를 받고는 한단다. 네가 좀 더 감당해 주고 이해해 주렴. 만약 그 아이가 널 화나게 하는 일을 했다면 엄마가 대신 미안하다."유진은 가벼운 미소를 지어 보이려 노력했다."그 사람은 절 화나게 한 적이 없는걸요. 저도 그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요, 아니면 결혼도 하지 않았겠죠." "그럼 다행이구나."허아주머니는 그녀의 손을 다독이며 마음속으로 감탄했다.'태준이가 이렇게나 속 깊은 아이를 만난 건 정말 그 아이의 복이야!'**얼마 지나지 않아 허태준과 허아주버님이 서재에서 돌아왔고, 문을 열자 심유진과 허아주머니 둘 다 자신의 방에 있는 것을 보고 그는 의외라고 생각했다. "뭐 하세요?"그는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고, 어투로 보아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내가 유진이를 네 방에 데려와 둘러보다가 네 어릴 적 얘기도 겸사겸사했단다."허아주머니가 얘기했다.허태준은 방안을 한 번 둘러보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또 제 물건을 멋대로 만지셨어요?” "안 그랬어!"허아주머니는 재빨리 부정했다."그냥 유진이한테 꺼내 보여주고 금방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은 것뿐이야!"허태준은 그녀의 행동이 마음에 안 든 듯 입을 꾹 다물었다."음......갑자기 네 아빠와 할 말이 있었다는 게 생각났다. 먼저 나가마, 둘이 잘 이야기 나누고, 싸우지 마!"허아주머니는 허태준이 화를 낼까 무서워 핑계를 대고는 급히 나갔다.심유진은 혼자 남아 허태준에게 할 말이 없어 그저 그를 바라만 보았고, 허태준은 방문을 닫고 나서 심유진한테 물었다."우리 엄마가 너한테 무
두발이 땅에서 갑자기 떨어지자 유진은 깜짝 놀라 "아!" 하며 비명을 질렀다.태준은 유진이 반응할 시간도 주지 않고 그녀를 바로 침대에 던진 후 그녀의 위로 올라탔다.“태준 씨......"유진이 그를 타이르려는 순간 입술이 포개져 말문이 막혔다.유진은 그저 역겨웠다.그녀는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잡고 힘껏 밀어냈고 동시에 고개를 돌려 그의 키스를 피했다.태준은 그녀의 반항이 마음에 안 드는 듯 한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잡아 그녀의 두 손이 머리 위에 고정되게 했고,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턱을 치켜 올려 다시 깊은 입맞춤을 했다.유진은 두 다리가 그의 허벅지 사이에 끼여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마치 도마 위의 물고기처럼 그녀는 절망의 눈물을 흘렸다.그녀의 입가에 있던 뜨겁고도 짭짤한 액체를 핥은 그는 몸을 움찔했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왜 울어?"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고, 유진은 눈물로 인해 몽롱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허태준 씨는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언제든지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는 기녀라고 생각하는 거예요?"그녀의 말에 허태준의 마음은 무너져 내렸다.그는 그녀를 품에 끌어안아 조곤조곤 달래고 따뜻하게 대해주고 싶었다.하지만 그럴 수 없었고, 그는 표정을 굳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심유진, 내가 말했지. 너는 내 와이프라고. 너한텐 부부간의 의무를 해야 할 책임이 있어.""하지만 저도 거절할 권리는 있죠!"유진은 입술을 잘근 씹고는 또박또박 대꾸했다."저를 강박하지 마세요! 아니면 혼내 강간에 속해요! 범죄라고!" "범죄?"태준은 피식했다."그럼 어디 신고라도 해봐."그는 다시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지금의 입맞춤은 방금 전에 맞췄던 것보다 더 격렬했고, 마치 그녀에게 주는 벌인 것 같았다.그는 그녀의 잠옷을 힘껏 당겼고, 잠옷의 단추는 절반 이상이 튕겨져 나가 그녀의 흰 살갗이 보였다.태준의 입술은 그녀의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유진은 고개를 돌려 누구인지 보았고, 방에 들어온 사람은 그녀가 지금 가장 보고 싶지 않았던 태준이었다.그는 어제와 같은 색상과 디자인의 캐시미어 니트를 입었는데 그녀는 이 옷이 어제와 같은 옷은 아님을 알았다.왜냐하면 그는 설사 옷에 아무것도 묻지 않았더라도 매일 옷을 바꿔 입었기 때문이다.바지는 캐주얼한 청바지를 입고 앞머리는 내렸는데, 유독 어리고 밝아 보였다.그의 손에는 종이 백이 들려 있었고, 위에는 명품 브랜드 로고가 적혀 있었다.태준은 천천히 다가가 종이 백을 침대 머리 밑의 탁상 위에 놓았다. "당신 옷."말투는 덤덤했고 아무 죄책감도 느껴지지 않았다."네."유진은 무표정으로 대답했다."일어났으면 빨리 나오지. 곧 점심을 먹어야 하니. 오후에 둘째 삼촌 집에 가서 인사해야 해." 몸 뒤에 숨긴 손은 이미 꽉 말아 쥐었지만 말투는 여전히 냉담했다."알겠어요."유진이 대답했다.태준은 입술을 잘근 씹고는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유진은 아픔을 참고 옷을 갈아입었고, 그가 사 온 옷은 하이넥 스웨터였는데 마침 그녀 목에 있는 검붉은 자국들을 가릴 수 있었다.그녀가 내려갔을 때 거실에는 사람이 없었고 그저 티비만 켜져 있는 상태였으며, 주방에서 말하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유진이는 아직 안 일어났니?"허아주머니가 물었다."네."태준이 대답했다."어제 원래 아팠었는데 오는 길도 멀어서 힘들었나 봐요."이를 들은 유진은 속으로 비웃었다, 구실도 참 잘 찾는단 말이지."내가 너한테 억지로 데리고 오지 말랬는데, 말을 안 듣더니 기어코 이 지경이 됐잖니!"허아주머니는 태준에게 화를 냈다."그 아이 경주에 친척이랑 친구도 없는데 아플 때 그 아이 혼자만 병원에 내버려 두고 가고 말이야. 네가 말해봐, 그게 사람이 할 짓이니?"태준은 말이 없었다."너 솔직히 말해보렴--"허아주머니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었다."네 마음속에 설마 아직도 소월이 있는 거 아니지?"유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