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준아.” 허태서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얼른 와서 앉아.” “형.” 허택양도 아는 체를 했다. “태준아...” 정소월이 그를 불렀다. 목소리가 부드럽고 온화했다. “돌아왔구나.” 정소월이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 웃음에 왠지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숨어있는 것 같았다. 허태준은 허태서의 옆에 앉는 것이 아니라 심유진을 데리고 할아버지 옆에 착석했다. 허태서는 그제야 심유진에게 눈길이 갔다. “이분은 누구셔?” 허태서가 물었다. 허태준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제 아내입니다. 심유진이라고 합니다.” 심유진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얼핏 정소월의 낯빛이 창백해지는 것이 보였다. 허택양은 놀란척하며 물었다. “언제 결혼했어요? 저희한테는 왜 얘기 안 했어요.” 순간 허택양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 같았다. “저희를 가족으로 여기지 않는 건 아니죠?” 허태준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어. 혼인신고만 하고 식도 아직 안 올렸고.” 할아버지도 그 사실을 나무랐다. “나도 얼마 전에야 알았다.” 허택양은 그제야 더 이상 캐고 들지 않았다. “결혼식 할 때는 꼭 알려줘요.” 허태준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당연하지.” “근데 만두는 다 빚었어?” “아직이요.” 허태준이 대답했다. “형님이랑 오셨다길래 인사하러 잠깐 나왔어요. 형님이 혹시 예의 없다고 나무라 실가 봐요.” “이 형님 그렇게 쪼잔한 사람 아니다?” 허태서가 웃으며 대답했으나 허태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럼 인사도 다 나눴으니까 얼른 만두나 만들어와.” 할아버지의 말에 심유진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정소월도 벌떡 일어났다. “저도 도울게요.” 심유진이 허태준을 바라보며 대신 거절해 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허태준은 의자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 심유진은 정말 당장이라도 고개를 돌려 이 집을 나서고 싶었으
정소월은 표정을 관리하느라 애썼다. “사실은...” 정소월이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수줍게 얘기했다. “그냥 친구관계는 아니었어요... 태준이가 절 오래 쫓아다녔거든요. 근데 인연이 아니었는지 결국 태서 씨랑 결혼했죠.” 심유진은 태서라는 사람이 방금 나란히 앉아있던 허태준의 사촌 형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저랑 태준이 관계 신경 쓰시는 건 아니죠?” 정소월이 살짝 도발하며 심유진을 바라봤다. “다 지난 일이에요. 이젠 둘 다 결혼도 했고... 그냥 오랜만에 보니까 옛날 생각이 나네요.” 심유진은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그럼요. 신경 안 써요.” 솔직히 얘기하면 심유진은 가슴이 답답하고 이상하게 우울해졌다. 방금 만난 다음의 반응으로 봐서는 정소월이 혼자 허태준을 좋아한 건 줄 알았는데 실은 반대였다. 심유진은 문득 허태준이 잠결에 집안이랑 연을 끊더라도 그 여자랑은 결혼하지 않겠다며 잠꼬대를 하던 일이 생각났다. 그 여인이 바로 정소월이었던 것일까? 심유진은 생각할수록 속상했다. 그 남자의 아내 앞에서 신경 쓰이진 않냐며 묻는 건 선을 넘는 행동이었다. 심유진은 요리하는 속도를 높였다. 그냥 식사 준비가 빨리 끝나서 정소월과 단둘이 있지 말았으면 했다. 정소월은 겨우 반죽을 완성했다. 재벌 집 딸은 아니었어도 외동딸로 태어나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자란 여자였다. “이젠 뭘 할까요?” 그녀가 심유진에게 물었다. 심유진은 처참한 반죽 상태를 확인하고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혹시 만두피는 만들 줄 알아요?”사실 대답이 예상가긴 했지만 심유진은 그래도 한번 물어봤다. 역시나 정소월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그냥 들어가서 쉬세요. 제가 할게요.” 심유진이 예의상 웃으며 말하자 정소월도 사양하지 않고 손을 씻더니 주방에서 나갔다. “그럼 수고하세요.” 심유진은 양념장을 다 만들고 반죽을 다시 하고는 만두를 빚었다. 요리가 끝났을 땐 이미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주방에는 셰프님 몇 분이 바
고용인들 모두 심유진을 알고 있었기에 고독하게 혼자 문 아래에 앉아있는 그녀를 보자 다들 걱정돼서 다가왔다. “괜찮으세요?” 심유진은 웃으며 그들을 안심시켰다. “괜찮아요, 오래 서있었더니 좀 힘들어서 그래요.” 주방에 의자가 없었고 다들 바빠서 의자를 가져다줄 사람도 없었다. 아마 가져다 준다고 해도 심유진이 거절했을 것이다. 반 시간가량 지나자 주방에서 누군가 불렀다. “만두 다 삶아졌어요!” 심유진은 얼른 일어나서 확인했다. 그리고 먹음직스럽게 완성된 만두를 접시에 예쁘게 담아 방으로 가져갔다. 식탁은 이미 정중앙에 펴져있었고 셰프님들이 만든 요리도 하나씩 올려지는 중이었다. 할아버지는 상석에 앉았고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자리에 착석해 있었다. 심유진이 들어갔을 때는 다들 이미 잔을 부딪치고 있었다. 앞접시에 이미 음식이 놓여있는 것을 보니 식사를 시작한 모양이었다. 누구도 그녀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이 생각을 하니 심유진은 갑자기 너무 서러워져 코끝이 찡해났다. 그녀는 또다시 눈물을 참으며 억지로 웃었다. “만두 다 됐어요!” 심유진이 먼저 할아버지 앞에 한 접시를 올려놓고는 다른 손님들 쪽에도 올려놨다. 그리고 그제야 허태준 옆에 앉았다. “고생했네.” 할아버지가 심유진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가 왠지 아까 열정적으로 맞이해 주실 때의 웃음 하고는 다른 느낌을 주었다. 허태준의 얼굴에도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그냥 직원들에게 앞접시를 하나 더 달라고 해서 심유진 앞에 놓아줬을 뿐 그 뒤로 아무런 말이 없었다. “죄송해요, 이렇게 고생하셨는데 기다렸다가 같이 식사할 걸 그랬어요.” 결국 먼저 사과를 건넨 건 허택양이었다. “원래 부르러 가려고 했는데 태준 형님이 괜찮다고...” “네, 괜찮아요.” 심유진은 자연스럽게 허태준 편을 들었다. 허태준은 냉담한 말투로 얘기했다. “날도 추운데 할아버지께서 찬 음식 드시면 안 되잖아요.” “맞아요.” 심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는 연세가 있으셔서 저녁 9시가 되자 잠자리에 드셨다. 허태준은 할아버지를 부축하며 심유진에게 말했다. “식탁 좀 치워줘.” 심유진은 멈칫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할아버지를 따라 나가고 이 큰 방에 심유진 혼자만 남았다. 저녁을 풍성하게 차렸으나 다들 얼마 먹지 않았기에 거의 반은 넘게 남겼다. 심유진은 이 남은 음식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다. 한참 고민하고 있는데 집사님이 직원들을 몇 명 데려오더니 신속하게 남은 음식들을 쓰레기통에 버리기 시작했다. 만두를 버리려고 하자 심유진이 다급히 달려가 제지했다. “혹시 이건 제가 포장해 가도 될까요?” 오후 내내 고생해 가며 만든 음식인데 그냥 이렇게 버려지는 건 두고 볼 수 없었다. 다행히도 집사님은 친절하게 포장 용기까지 가져다가 남은 만두를 포장해 줬다. “혹시 부족하시면 다른 반찬들도 더 만들어 드릴까요?” “아니에요, 이것만 있으면 돼요.” 얘기를 나누는데 밖에서 차 시동 거는 소리가 들렸다. “도련님들이 가시려나 봐요.” 집사님이 말씀하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허태준이 돌아왔다. “다 치웠어?” “네. 거의 다 직원분들이 치우셨어요.”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면 심유진은 그걸 꼭 짚고 넘어가는 스타일이었다. 허태준은 더 이상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방을 나섰다, “호텔로 돌아가자.” 차가운 밤공기와 그 차가운 목소리가 심유진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둘은 가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허태준은 내일 일찍 일어나라고 말하고는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오늘 저녁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해석도 없었다. 또 최악의 연말이다. 사실 익숙했으나 그래도 속상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심유진은 포장해온 만두를 전자레인지에 덮이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TV로 예능을 틀었다. 하지만 사실 그녀는 예능을 보는 걸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이것 외에는 할 일이 없을 뿐이었다. 심
심유진은 멍하니 그 봉투를 쳐다만 보고 있었다. 살면서 처음 받아보는 용돈이었다. 설날마다 심연희를 부러워했었다. 심연희가 받았던 수많은 봉투 중에 심유진 건 하나도 없었다. 심유진은 그냥 모른 척 받고 싶었으나 간신히 그 충동을 참아냈다. “제가 나이가 얼만데 무슨 용돈이에요.” 심유진은 웃으며 봉투를 밀어냈다. “할아버지한테 돌려드리세요.” “그럼 직접 돌려드려.” 허태준은 억지로 심유진 손에 봉투를 밀어 넣었다. “난 심부름 안 해.” 허태준은 말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갔다. 봉투가 무척 두꺼운 걸 보니 금액도 꽤 될 것 같았다. 심유진은 정말로 받을 생각이 없었기에 봉투를 열어보지도 않고 탁자에 올려두었다. 벌써 시간은 12시가 되었다. TV에서는 다들 한데 모여 큰소리로 카운트다운을 하고 있었다. “5,4,3,2,1!” 종소리와 함께 폭죽 소리가 들려왔다. 커튼을 열어보니 화려한 불꽃이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근방에서 불꽃놀이를 하는 건 금지되어 있기에 아마 호텔에서 하는 이벤트일 것 같았다. 심유진은 베란다에 나가 난간에 기대선 채 폭죽을 바라봤다. 갑자기 맥주가 마시고 싶어졌다. 심유진은 주방에서 와인을 가져다가 컵도 없이 병째로 마셨다. “진짜 예쁘네” 그녀는 손을 뻗어서 폭죽을 만져보려 했다. “아쉽다…” 이 아름다운 장면을 그녀와 함께 구경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슬픔이 휘몰아쳐서 그녀를 덮쳤다. 술은 금세 바닥을 보였다. 심유진은 손이 미끄러져 술병을 놓치고 말았고 병은 바닥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병이 깨지는 소리는 폭죽 소리에 묻혀 허태준의 주의를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심유진은 바닥에 쪼그려 앉아 파편을 줍기 시작했고, 그러다가 조심하지 않아 손가락을 베이고 말았다. 알싸한 고통이 손가락을 타고 온몸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이 기쁘기만 해야 할 밤에 그녀는 취기를 빌려 무릎을 끌어안은 채 펑펑 울었다. 올해는 다를 줄 알았다. 올해는 같이 새해를 맞을 가족이 생겼으니
심유진은 간신히 눈을 떴지만 허태준이 여러 개로 보였다. 그녀는 어젯밤에 토한 탓에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았다. “저… 몸이 안 좋아요.”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허태준은 불을 켜고 그녀에게로 가까이 갔다. 심유진의 창백한 얼굴색을 보고 허태준은 깜짝 놀랐다. 이마를 짚어보니 몸이 불덩이 같았다. 허태준은 얼른 심유진에게 두꺼운 패딩을 입히고 그녀를 꽁꽁 싸매고 나서 그녀를 안은 채 병원으로 향했다. 휴가철이 되니 경주는 인구가 반은 준 것 같았다. 게다가 이른 아침이니 길에는 차가 거의 없었고 가끔 버스 몇 대만이 통행할 뿐이었다. 의사 선생님은 심유진이 어젯밤 폭식을 한 데다가 술을 마시고 찬바람을 맞아서 급성 위장염에 고열이 온 것이라고 진단했다. 심한 병은 아니었지만 수액을 맞아야 했다. 심유진은 머리가 아팠지만 아침에 허태준이 일어나라고 재촉했던 일은 기억이 났다. 허태준은 오늘 부모님을 뵈러 가기로 했었다. 어쩌면 허태준 부모님은 지금도 아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집에 가봐요.” 심유진이 말했다. “전 혼자 있으면 돼요.” 어제 할아버지와 있었던 일로 인해 심유진은 이 집안이 슬슬 두렵기까지 했다. 자신이 또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이 될 것 같았다. 허태준은 의자에 앉은 채 가만히 있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엄마, 저예요.” “네, 오늘 가기로 했는데 좀 늦을 것 같아요.” “급한 일이 생겼는데 아마 점심 전에는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회사 일은 아니고요.” “네.” “네, 그럼 이따 뵐게요.” 허태준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더니 심유진을 차갑게 바라봤다. “많이 컸네? 와인을 한 병이나 마시고?” 심유진은 고개를 숙였다.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그녀의 눈에 어린 슬픔을 가려주는 것 같았다. 그녀는 아무런 변명도 할 수가 없었다. 허태준은 주먹을 꽉 쥐었다가 또 힘을 풀었다. “어제저녁부터 아팠는데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자는 줄 알았어요
“아!” 간호사가 주머니에서 쪽지 한 장과 지폐 몇 장을 꺼냈다. “뭔가 급한 일이 있으신지 전화를 받더니 나가셨어요. 혹시 깨어나시면 이걸 건네주라고 하시더라고요. 택시를 타고 여기에 적힌 주소로 오면 된다고 전해달라 하셨어요.” 심유진은 쪽지를 건네받고 대충 한번 보고는 접어서 버려버렸다. 그리고 현금은 옷주 머니에 잘 넣어뒀다. 아마 부모님 집 주소인 것 같았다. 혹시 쪽지를 실수로 잃어버렸다고 얘기하면 믿을지 궁금했다. 심유진은 열이 너무 높은 건 아니었다. 38도 정도였기에 수액을 맞고 나서는 열이 거의 다 내렸다. 병원에서도 퇴원해도 된다고 했기에 심유진은 택시를 타고 호텔로 돌아왔다. 방은 이미 청소를 끝냈는지 어제 그 난장판이던 공간이 말끔히 정리돼 있었다. 심유진은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병원에서 받은 약도 챙겨 먹었다. 약기운이 금방 몰려와서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졸렸다. 이번에 심유진은 굉장히 오래 잤다. 밖이 어둑어둑해져서야 그녀는 잠에서 깰 수 있었다. 전화벨 소리가 계속 울렸다. 심유진은 한참을 찾아서야 거실 소파에서 언제 내팽개친 건지도 모를 휴대폰을 찾을 수 있었다. 역시나 전화를 건 사람은 허태준이었다. 심유진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전화를 받았다. “어디야?” 허태준이 물었다. 목소리가 차갑다 못해 무서울 지경이었다. 심유진은 깊게 심호흡을 하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호텔이에요.” “간호사가 쪽지 주지 않았어?” “줬는데 제가 잃어버렸어요.” “그럼 호텔로 돌아와서 나한테 전화했어야지.” “그때까지만 해도 머리가 아팠어요. 그리고 감기약을 먹었더니 졸려서 까먹었고요.” 심유진은 최대한 담담하게 대답했다. 수화기 반대편이 한참 조용하더니 허태준의 무거운 숨소리가 들렸다. 분명 화가 많이 났을 것이다. 사실 심유진은 여전히 그가 무서웠다. 하지만 그쪽 부모님을 뵙는다는 사실이 훨씬 더 두려웠다. “태준아~” 허태준 쪽에서 부드러운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
앞으로도 허태준의 부모님을 못 만난다는 건 사실 심유진이랑은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다. 사실 허태준과 진짜 부부 사이인 것도 아니고 허태준이 이혼할 생각이 없다고 했지만 언젠가는 분명 헤여질 것이다. 하지만 허태준의 강압적인 태도에 심유진은 조금 당황해서 당장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갈게요.” 허태준이 문자로 주소를 보내줬다. 택시 기사는 그 주소를 보고 고개를 돌려 심유진을 자세히 살펴보기까지 했다. 호기심과 부러움이 공존하는 눈빛이었다. 허태준의 부모님은 시 중심의 별장에 살고 계셨다. 여기에 사는 사람들은 다들 내로라하는 부자였다. 보안이 철저한 곳이어서 택시는 절대 못 들어가기도 했다. 심유진은 입구에서 내려서 찬바람을 맞으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깊숙이 자리 잡은 집이 아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으면 30분은 걸어야 했을 것이다. 매 별장마다 마당이 딸려있었다. 비록 면적이 작지 않았지만 허 씨 할아버지 집이나 심 씨네의 대저택에 비할 수는 없었다. 대문 앞에 서있으니 집의 대체적인 윤곽이 눈에 들아왔다. 그리고 창문 쪽에서 새어 나오는 따뜻한 노란색 불빛도 보였다. 벨을 누르니 집안의 사람이 빠르게 대답했다. “누구세요?” 낯선 목소리에 심유진이 조심스레 자신의 이름을 댔다. “안녕하세요, 심유진이라고 하는데요.” “아!” 상대방은 이 이름을 들은 적 있는 것 같았다. “지금 열어드릴게요!” 철제 대문이 바로 열렸다. 심유진은 좁은 돌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 집문 앞까지 갔다. 허태준이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문 앞에 서있는 것이 보였다. “이리 와.” 허태준이 심유진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손은 심유진의 손을 잡은 것이 아니라 그녀의 이마로 향했다. 찬 바람을 한참 맞았더니 허태준 손의 온도보다 이마가 훨씬 차가웠다. 다행히 열은 더 이상 나지 않았다. 허태준은 다시 손을 주머니에 넣고 돌아섰다. “들어와.” 심유진도 그의 뒤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다. 현관 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