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장로님, 도련님이 참변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특별히 준비해서 찾아왔습니다!”아름다운 비단 상자를 손에 든 유진강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범인에 대한 원한도 배어 있는 표정이었다.그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말했다. “이번 일은 우리 유씨 가문의 책임이 있으므로 쉴 새 없이 찾아왔습니다.”원래도 화가 나 있었던 윤박은 이 말을 듣고 울화통이 터졌다.찰싹. 윤박은 힘차게 팔을 휘둘러 유진강의 뺨을 때렸다.또랑또랑한 따귀 소리와 함께 유진강은 제자리에서 날아갔다.보배처럼 여기던 비단 상자는 날아가 버렸다. 유진강은 공중에서 격렬하게 구르며 무려 십여 미터나 날아갔다.그리고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벽에 세게 내리쳐졌다.유진강이 바닥에 굴러떨어지면서 누런 흙먼지를 일으켰다.벽에는 거미줄 모양의 균열이 군데군데 나 있는 구덩이가 움푹 파였다. 그만큼 윤박이 때린 뺨이 무겁다는 얘기다.푸!가까스로 두 손으로 바닥을 딛고 상체를 올린 유진강은 피를 내뿜었다.“왜…왜요?”그는 어안이 벙벙해졌다.호의로 도련님을 뵈러 왔고, 그것도 값진 물건을 가지고 왔는데 귀한 대접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는데 도리어 뺨을 맞았으니 말이다. “그걸 또 물어봐? !”윤박은 호통을 쳤다. “네가 문호에게 전화하지 않았으면 문호가 질투할 리가 없었겠지. 그러면 안성시에 가지도 않았겠지! 문호가 지금 이 모양이니 된 것에 너희 유씨 집안은 당연히 모든 책임을 져야 할 거야!”유진강이 입이 가벼워 말이 새나간 탓으로 이런 일이 생긴 건 맞다.윤문호는 통제 욕이 강한 사람이라 자신은 술을 마시고 밤낮으로 놀 수 있지만 약혼녀인 유시인은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마땅히 여자의 역할과 도리를 갖추며 집에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아직 결혼하지 않은데다 유시인이 처음부터 여장부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지 않았더라면 윤문호는 그녀가 밖에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윤문호는 유시인이 염 씨라는 젊은 남자와 가깝게 지낸다는 말을 듣고 이
윤박은 기뻐해 하며 물었다. “너희 유씨 가문이 염라대왕을 찾을 수 있어?”윤박도 염라대왕에 대해 들은 바가 있는 모양이다.“우리는 염라대왕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하려는 마음만 있으면 그 어떤 곤란도 극복할 수 있다는 옛말이 있잖아요?”유진강이 자신 있게 말했다. “저는 믿어요. 정성이 지극하면 덜 위에도 꽃이 핀다는 것을요!”윤박의 안색이 조금 좋아졌다.유진강은 절뚝거리며 걸어오며 바닥에 떨어진 비단 상자를 주었다.“그게 네가 방금 말한 값진 물건이야?”윤박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유진강은 서둘러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고풍스럽고 화려한 장식의 비수가 들어 있었다.햇빛 아래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윤박은 천강종의 대장으로서 영락없는 고대 무술 능력자이다. 그래서 병기에 천성적으로 민감하다.그는 한눈에 이것이 평범한 비수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탐욕스러운 눈빛이 역력했다.그의 눈빛을 본 유진강은 더욱 자신이 생겼다.윤박은 그에게 예의를 차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윤문호를 찾아가 보라고 초대했다.침실에서 유진강은 침을 튀기면서 말을 했다. “죽음의 단도라는 것을 들어보셨어요?”“설마 [신의 세계]에서 루진 도인의 법기말이야?”윤박은 깜짝 놀라는 표정이었는데 윤문호는 어리둥절해 하는 모습이었다. 류진 도인이 누군지 그는 몰랐다. 배움이 부족하고 무식하였다. “윤 장로는 참으로 박학다식한 분이시네요. 정말 존경합니다.”유진강은 아첨을 한 뒤 말했다. “죽음의 단도는 후대 사람이 모방한 것이지만 200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어요. 희귀한 고급 법기를 재능이 없는 제가 우연히 얻게 되었습니다. 보물을 좋은 주인을 만나야죠. 저 같은 평범한 사람의 손에서는 이 값진 것을 잘 쓰지 못할 것이에요. 그래서 큰마음 먹고 도련님께 드리는 겁니다. 사죄하는 성의를 보이고 싶습니다.”윤문호는 무식하지만 이것이 2천 년이 넘는 역사가 있는 법기라는 말에 흥미를 느꼈다.“빨리 줘봐!”윤문호는 기다렸다는 듯이
침실 안의 짙은 피비린내가 소독약 냄새를 덮었다.침대 위, 바닥, 그리고 벽까지 온통 핏자국이 있었다. 이는 대동맥이 베여 피가 뿜어져 나온 결과였다.피바다에 쓰러져 있는 윤문호는 필사적으로 침대에서 내려와 도움을 청했다.피가 목구멍을 막아 사레가 들린 그는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그가 문 앞에 가기도 전에 이미 과다 출혈로 의식을 잃었다.몇 분이 지나 그가 다른 사람에게 발견되었을 때, 그는 이미 숨져 죽었다. 집사는 CCTV를 통해 윤문호가 비수를 다루다 경동맥을 벤 사실을 알게 됐다.화면 속 윤문호은 매우 이상했다.갑자기 귀신에게 홀린 것처럼 이유 없이 비수를 들어 목에 댔다.그리고는 갑자기 피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2, 3초가 지나서야 윤문호가 벌떡 일어났는데 이미 늦었다.화면 속 아들의 무기력한 표정을 보며 윤박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이럴 수가? 이럴 리가 없잖아?”당황한 유진강은 식은땀을 흘리며 급히 설명하였다. “이 보물이 제 손에 들어온 지 거의 2년이 다 돼가는데 이렇게 이상한 일은 없었습니다. 뭔가 잘못됐어요. 윤 장로님, 많은 분이 이 보물을 감정해 주셨어요. 정말 문제없습니다. 저를 믿어주세요!”그는 자기가 아끼는 귀한 선물을 준 것이다. 이것으로 윤 씨네 부자의 용서를 빌고 싶었다. 근데 윤문호가 이 보물로 인해 죽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유진강은 자기 탓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발버둥 쳤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는 끝장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귀한 법기는 무슨, 그냥 목숨을 잃게 하는 사악한 무기잖아!”윤박은 그 자리에서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호통을 쳤다. “이 개자식, 내 아들을 내시로 만들고 죽이기까지 해? 내가 너를 죽일 거야!”유진강은 급히 해명했다. “억울합니다. 정말 저랑 상관없어요. 내일에 CCTV를 다시 봅시다. 다시 보면 분명히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라고 부랴부랴 해명했다…”“보긴 개뿔!”윤박은 유진강의 정수리에 대고 세게 한 번 쳤다.찰칵!맑
유시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그녀 아빠의 전화였다.“아빠!”유시인은 아무렇지 않게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갑자기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 “뭐라고요? 둘째 삼촌이 돌아가시고 윤문호도 죽었다고요…윤씨 가문이 유씨 가문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려고 한다고요, 왜요?”“…”“알겠습니다… 새로운 소식이 있으면 바로 전해주세요.”전화를 끊고 유시인이 말했다. “유진강이 조작된 죽음의 단도를 윤 씨 가문에게 주었는데 그 단도로 인해 윤문호가 죽었어요. 유진강은 격분한 윤박의 명령으로 그 자리에서 사살당했어요.”전혀 놀라지 않은 염무현은 덤덤하게 말했다. “이상할 거 없어요. 그것은 원래 사악한 칼이니까요. 유진강이 이렇게 오래 산 것도 행운이에요.”새 주인 윤문호에 비하면 유진강이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것은 여간 행운이 아니다.소정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윤문호가 죽으면 시인 언니와 윤씨 집안의 약혼은 완전히 깨진 셈이죠?”“그렇게 간단할 리가!”유시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윤박이 우리 유씨 가문더러 모든 책임을 지라고 했어. 우리 집은 벼락같은 복수를 앞두고 있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라. 애초에 유씨 가문이 혼인을 통해 천강종에게 세력을 빌리려는 것 자체가 목적이 불순한 것이었어. 지금 이런 문제가 생긴 것은 누구도 탓하지 못해. 사람은 자신의 선택에 대가를 치러야 해.”그녀의 이런 패기와 도량은 사회경험이 없는 소정아로 하여금 존경심을 금치 못하게 했다.염무현도 칭찬을 하고픈 기색을 보였다.그리고 유시인은 계속해서 몇 통의 전화를 받았다.“무현 씨, 저희 아버지께서 무현 님이랑 영상통화를 하고 싶어 하세요. 전의 일에 대해서 말이에요.”유시인은 부끄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둘째 삼촌은 항상 무현 님께 예의를 차리지 않으셨어요. 그리고 무현 님의 말을 마이동풍으로 흘려버려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됐죠. 아버지가 삼촌 대신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 해요.”유시인은 조금 전 전화를 하면서 아버지 유진해에게 디테일한
염무현의 허락을 받은 유시인은 영상통화 화면을 벽걸이 스크린에 띄웠다.화면으로부터 유진해의 모습이 보였다.건방지게 행동하는 유진강에 비하면 유진해는 겸손하고 단정한 사람의 대명사다.회색의 안경을 쓴 유진해는 다정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그는 전혀 이익을 추구하는 장사꾼 같지 않았다. 대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 같았다. “무현 님, 죽은 내 동생 유진강을 대신해 그동안 한 일에 대해 정식으로 사과드립니다.”유진해는 90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하며 성의를 보였다.“아저씨, 별말씀을요.”염무현은 더없이 너그러운 모습이었다. “저와 시인 씨는 파트너여서 서로를 믿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다른 사람의 이간질로 인해 사이가 틀어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우리의 콜라보는 변함이 없어요. 전의 일들은 그냥 없던 일로 하죠.”유진해는 고맙다는 듯한 모습으로 말했다. “역시 무현 님께서는 너그러우시네요.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인이는 사람을 잘못 선택한 게 아니었어요. 유씨 가문이 당신 같은 사람과 파트너가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너그럽게 용서해 주신 것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앞으로의 협력이 순조롭기를 빌죠. 그럼 들어가세요.”통화를 마친 유진해는 한숨을 내쉬었다.옆에서 밍크코트를 입은 여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여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요? 염무현이라는 사람, 특별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그렇게 조심할 필요가 있나요? 그리고 우리 딸도 그래요. 그 사람한테 홀린 것인지, 어떻게 된 것인지 그렇게 일편단심이라니까요?”그러자 그녀는 눈썹을 추어올리며 말했다. “시인이 설마 그 사람을 좋아하는 건 아니겠죠? 그건 안 돼요. 우리 유씨 가문은 그 정도로 잘 사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세인시에서 명망이 있는 재벌가에요! 딸을 꼭 우리와 비슷한 집안에 시집보내야 해요. 보통 사람한테 시집을 보내서 웃음거리가 되어서는 안 돼요.”유진해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무식하기는. 보통 사람이라니, 어떤 보통 사람이 천강종
“신의님, 부디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십시오! 여자 때문에 포기할 자리가 아닙니다. 신의님만 원하시면 모델이고 배우고, 설사 한 나라의 공주라고 해도 다 보내드릴 수 있습니다.”서해 교도소, 이곳은 세계적으로도 대단한 거물만 가두기로 유명한 특별한 교도소이다.철창 앞에서 한 노인은 한참 젊은이에게 연신 굽신대면서 애원하고 있었다. 노인은 상업계의 선두 주자인 전태웅이었다. 그는 한 나라의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재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단호하고 매정하기로 유명한 사람이다.그런 사람이 글쎄 염무현을 위해 아무 죄명이나 쓰고 복역하러 왔다. 정말이지 듣도 보도 못한 희귀한 상황이다.전태웅의 뒤로 교도소 내의 모든 교도관과 죄수들이 줄을 지어 한 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염무현을 붙잡기 위해서 말이다. 그는 죄수인데도 불구하고 이곳을 제패했다.염라대왕. 생사부와 같은 의술을 가졌다고 하여 붙여진 염무현의 별명이다. 그의 손에는 두 개의 검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목숨을 살리는 메스이고, 다른 하나는 목숨을 앗아가는 비수이다. 어쩌면 생사검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평화로운 세상에서 그는 생의 신이 될 것이고, 전란의 불꽃이 튀는 세상에서 그는 사의 신이 될 것이다.“하아, 당신은 몰라요...”철창 앞에서 염무현은 우뚝 서 있었다. 머릿속에는 저도 모르게 한 여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바로 그의 아내 양희지의 모습 말이다.4년 전의 결혼식장에서 양희지는 흑심을 품고 신부 대기실에 쳐들어간 변태 때문에 험한 일을 당할 뻔했다. 다행히 처남이 술병으로 변태의 머리를 내리친 덕분에 그녀는 무사할 수 있었다.아내를 지켜주지 못한 건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한 염무현은 처남 대신 교도소에 들어갔다. 지난 4년 동안 비웃음으로 가득한 세상을 혼자 버텨내야 했을 양희지를 떠올리면, 아무리 신으로 숭배받는 그라고 해도 가슴이 답답한 것이 숨이 잘 올라오지 않았다.“희지는 특별한 사람이에요. 그만큼 우리가 나누는 감정도 소중하죠. 명예와 권력같이 세속적인 것은 우리
“좀 늦네...”염무현은 약간 의외라는 표정으로 텅 빈 주변을 둘러봤다. 그가 4년 동안 그려오던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양희지도 약속처럼 그가 출소하자마자 달려와서 안아주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양희지가 괜히 급하게 운전하다가 사고라도 당하면 큰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가만히 제자리에 서서 기다렸다.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할 무렵 하늘에서는 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야 차 한 대가 그의 앞으로 와서 멈춰 섰다.염무현은 빠른 걸음으로 마중했다. 하지만 차에서 내린 사람은 그가 기다리던 양희지가 아닌, 그녀의 친구 조윤미였다.“윤미 씨가 어떻게 왔어요? 희지는요?”조윤미는 한 손으로 우산을 든 채 차갑게 말했다.“양 대표님은 오지 않으셨어요. 저는 이제 대표님의 비서이니, 조 비서님이라고 불러줘요. 그리고 이건 대표님이 전해달라고 하신 물건이에요.”조윤미는 염무현에게 서류를 건네줬다. 이혼 합의서라는 커다란 다섯 글자는 눈이 아플 정도로 충격적이었다.염무현도 놀란 듯 잠깐 멈칫했다. 하지만 금방 미소를 되찾으면서 말했다.“장난인 거 다 알아요. 희지한테 얼른 나오라고 해줘요.”조윤미의 얼굴에는 언짢은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여전히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장난 아니거든요?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도 있듯이, 4년도 마찬가지예요. 염무현 씨 당신은 이제 우리 대표님과 어울리지 않아요.”“그게... 무슨 말이죠?”염무현은 조윤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물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한결같이 냉정했다.“지금의 당신은 우리 대표님과 다른 세상 사람이라고요. 양 대표님은 서해 최고 미녀 대표이사로 불리고 있어요. 당신의 존재는 대표님의 명성에 누가 될 뿐이에요. 대표님의 회사를 위해서라도 현실을 직시하고 떠나줘요. 괜히 근처를 맴돌면서 걸림돌이 되지 말고요.”“내 존재가 뭐 어떻다고요?”“염무현 씨는 전과자인 반면, 양 대표님은 대기업의 대표이사예요. 차도, 집도, 쓰는 물건도 전부 최고급이죠. 대표
양희지가 남도훈과 만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이때 벤츠 한 대가 빠르게 다가왔다. 그리고 뒷좌석에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을 걸친 아름다운 여자가 내렸다. 그녀의 쭉 뻗은 다리는 순식간에 모두의 시선을 끌었다. 인간계를 벗어난 우아한 아우라는 여신을 연상케 했다.4년의 세월은 마치 양희지만 피해 간 것 같았다. 아니, 커리어우먼 특유의 강한 기운만 남기고 갔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희지야...”염무현은 환한 표정으로 양희지를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그녀는 무의식으로 뒤로 피하면서 시선을 돌렸다.“미안, 급한 일이 있어서 좀 늦었어. 조 비서, 일은 어떻게 됐지?”양희지의 차가운 모습은 마치 낯선 이를 대하는 것 같았다. 조윤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부랴부랴 그녀를 향해 우산을 기울이며 말했다.“염무현 씨랑 얘기하는 중이었어요. 대표님은 남도훈 씨랑 만난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여기까지 와도 괜찮으신 거예요?”“괜찮아. 이쪽 일 먼저 해결할 정도의 여유는 있어.”양희지는 이제야 염무현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의 옷이 비에 흠뻑 젖은 것을 보고 약간 복잡한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금방 다시 차가워졌다.“오랜만이야, 무현아. 너도 알다시피 난 성격 급한 사람이니까,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네가 우리 집안을 위해 한 일은 영원히 잊지 않을 거야. 우리가 함께 한 시간도 소중히 간직할 수 있어. 하지만 우리가 부부로서 같이 지내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양희지의 말투는 아주 단호했다. 마치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이 남편이 아닌 협력 상대라도 되는 듯이 말이다.“우리 이혼하자.”이는 상의도 통보도 아닌, 그냥 명령이었다.“연애할 때도, 결혼할 때도, 너희 집안사람이 내 앞에 무릎 꿇고 처남 대신 교도소에 가달라고 할 때도, 넌 가만히 있더니...”염무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살결을 파고들고 있었지만, 그는 통증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지금 와서 좀 아닌 것 같다고?”양희지는 약간 주저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