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은 인아의 헬멧을 벗겨주며 말했다. 두 사람은 이미 비에 흠뻑 젖어 있었지만, 인아가 품에 소중히 안고 있던 커피는 기적처럼 멀쩡했다. “이 사람들 정말 미쳤나 봐. 이렇게 큰 회사에 커피머신 하나도 없다니, 믿을 수가 없네.” 서영은 투덜거리면서도, 인아의 손에서 커피를 받아들며 미소를 지었다. “인아 씨, 여기서 잠깐 기다려. 금방 다녀올게.” 서영은 회사 건물 안으로 들어갔고, 인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 자리에 남았다. 쏟아지는 빗줄기는 점점 더 거세졌고, 찬 공기는 곧 겨울이 올 것임을 알리는 듯했다.인아는 빗방울이 퍼붓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가 처음 유정석과 함께 유씨 가문에 들어갔던 날에도 비가 이렇게 무섭게 내리고 있었다. 그때 겁에 질린 인아는 유정석의 뒤에 꼭 붙어 숨어 있었고, 아홉 살의 희도는 눈을 반짝이며 그녀를 호기심 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때 희도는 유정석에게 이렇게 물었다. “얘는 누구예요?” 유정석은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네 신부야. 마음에 들어?” 그때 아홉 살의 희도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난 원숭이 같은 애는 신부로 안 삼아요.” 그 시절의 인아는 말랐고, 머리카락도 푸석푸석해서 정말로 원숭이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후 희도는 또 이런 말을 했다. “좀 더 먹어. 그렇게 말라서 어떻게 내 신부가 되겠어?” 그 말이 장난이라는 걸 알면서도, 어린 인아는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그런 생각에 잠겨 있던 인아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비가 이렇게 많이 오니, 출근하기 싫어지네. 나 먼저 갈게.” 연서가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회사 문을 나서고 있었다. 비에 젖은 인아를 발견한 그녀는 핸드폰으로 통화하면서도 인아를 향해 말을 걸었다. “강인아?”연서의 말이 통화 너머로 희도에게도 들리는 듯했다. 연서는 인아를 한 번 훑어본 뒤, 비웃음을 머금은 표정으로 다가왔다. “희도 찾으러 온 거예요?”인아는 고
회사 로비에서 희도는 연서의 부어오른 발목을 걱정스럽게 살펴보았다. 연서의 발목은 이미 퉁퉁 부어 있었고, 연서는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희도를 외면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희도가 묻자, 연서는 화난 듯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때 보안 요원이 다가와 희도에게 CCTV 영상을 담은 태블릿을 건넸다. “대표님, CCTV 영상입니다.” 희도는 영상을 확인하자마자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는 인아가 일하는 곳과 문서영의 존재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고, 서영의 또 다른 정체도 알고 있었다. 희도는 태블릿을 테이블 위에 내던지며 연서에게 말했다. “병원에 데려다줄게.”그러나 연서는 희도의 무덤덤한 반응에 화가 치밀어, 더욱 격한 목소리로 외쳤다. “나 안 갈 거야! 차라리 다리가 부러져버렸으면 좋겠네. 내연녀라는 소리를 듣는 것보단 차라리 그게 낫잖아!” 희도의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그는 연서의 짜증을 받아들이며 말했다. “그만하고 병원 가자.” 연서는 단호하게 외쳤다. “안 간다니까!” 희도는 연서와 실랑이를 벌이지 않고, 연서를 조용히 안아 들어 밖으로 나갔다....인아는 서영의 오토바이 뒤에 앉아 있었다. 빗줄기가 인아의 얼굴을 차갑게 때렸고, 서영의 따뜻한 등 뒤에 손을 내밀어 조심스럽게 감쌌다. 비는 차갑고 매서웠지만, 서영의 등은 그와 대조적으로 따뜻하고 포근했다. 인아는 서영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23년 동안 유정석과 희도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인아를 위해 나선 적이 없었다. 서영은 처음으로 그녀에게 진정한 따뜻함을 느끼게 해준 사람이었다. 서영은 잠시 멈칫하더니, 자신을 감싼 인아의 손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차가운 빗속에서 느껴지는 따뜻함이 그녀의 등에 닿는 순간, 서영도 인아의 슬픔을 이해하는 듯했다. 인아는 서영의 등에 기대어 눈물을 흘렸다. 그것은 오랜만에 마음 놓고 흘릴 수 있는 눈물이었다.서영은 카페로 돌아가지 않고, 인아를 그녀가 살고
인아는 입술을 꼭 다문 채로 오랫동안 희도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녀는 마침내 결심한 듯 그의 옷자락을 천천히 놓아주고, 거실의 소파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탁자 아래 서랍을 열었다. 희도는 뒤따라가 인아가 서랍에서 꺼낸 이혼 서류를 보고 눈을 가늘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서류는 꽤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었지만, 희도는 그 서랍을 열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까지 그 서류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했다. 희도는 의문이 가득한 눈빛으로 인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게 뭐야?” 인아는 희도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진지하게 응시하며 수화로 말했다. “이혼해요.” 희도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쓴웃음을 지으며 되물었다. “나랑 장난치는 거야?”그러나 인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을 흔들어 수화를 이어갔다. “장난이 아니에요. 이혼 서류는 오래전부터 주려고 했어요.”사실, 인아는 이혼 서류를 오래전부터 건네주고 싶었지만, 늘 용기가 부족했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마음속 무언가가 달라졌다. 혹시 친구를 잃을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일까? 아니면 고열로 인해 정신이 혼미해졌기 때문일까? 서류를 꺼내 들었을 때, 인아는 오히려 마음의 짐이 덜어진 듯한 해방감을 느꼈다. 마치 오랫동안 가슴 속에 박혀 있던 가시가 드디어 뽑힌 듯했다. 희도는 인아를 잠시 응시하다가, 다시 확인하듯 묻기 시작했다. “문서영 때문이야? 그래서 나랑 이혼하겠다는 거야?”인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수화로 답했다. “아니에요. 서영 씨 때문이 아니에요. 내가 이혼하고 싶어서예요.”인아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확고했고, 그 진심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희도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소파에 털썩 앉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좋아. 대신 빈손으로 나가. 그동안 너한테 쓴 돈 다 갚으면 이혼해줄게.”인아는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결심한 듯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희도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다. 마치
큐브는 A시에서 유명한 부자들의 천국이자 사적인 클럽이었다. 이곳에 모여든 남자들은 모두 A시에서 잘 알려진 인물들이었다. 인아는 생애 처음으로 이곳에 발을 들였다. 그녀의 소박한 옷차림은 화려한 조명 아래 빛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눈에 띄게 어울리지 않았다. VIP룸은 이미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찼고, 그중 서영도 있었다. 서영은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두 손을 머리 뒤로 올리며, 방 안의 남자들보다도 더 여유롭고 태평한 모습이었다. “오빠, 지금 나더러 유 대표님께 사과하라는 거야?” 서영은 그렇게 말하며, 유 대표, 즉 희도와 그의 옆에 앉아 있는 연서를 힐끗 쳐다보았다. 희도는 아무런 표정 없이 소파에 기대어 다리를 꼬고 있었다. 희미한 조명이 그의 상반신만 비추고 있어, 얼굴은 어둠 속에 묻혀 신비로움과 차가운 위압감을 동시에 풍기고 있었다. 문서준은 난처한 얼굴로 조용히 중재하려 했다. “연서 씨에게 사과하면 모든 일이 끝날 거잖아.” 서영은 그 말에 비웃음을 터뜨리며 대꾸했다. “내가 왜 저 여자한테 사과해야 해? 저 여자가 뭔데?” “문서영, 제발 그만 좀 해.” 연서가 희도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서영은 겁 없이 연서에게 대놓고 도발을 걸고 있었다. “장난? 아니, 난 진심이야. 저 여자가 꼴 보기 싫어서 때린 건데.”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연서의 얼굴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녀는 벌떡 일어서려다 발목 통증에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너무하는 거 아니야? 나와 희도는 원래 사귀고 있었어!” 서영은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연서를 흘겨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럼 강인아는 10년 넘게 유희도와 함께 살았는데, 그때 넌 어디 있었지?” “그건 다르잖아! 강인아는 고아일 뿐이잖아. 유씨 가문이 불쌍해서 키워준 거지.” 쾅-연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희도가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이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술잔은 너무 세게 내려쳐
쾅- 술병이 바닥에 산산조각 나며 서영의 이마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 피는 술과 섞여 시야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모든 일이 너무 빨리 벌어졌고, 방 안에 있던 그 누구도 서영이 이렇게 극단적인 행동을 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서영아!” 서준은 깜짝 놀라 서영을 부축하며 큰 소리로 외쳤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서영은 사과를 하느니 차라리 술병으로 자신의 머리를 내리치는 고집스러운 성격을 보였다. ‘얘는 도대체 누구를 닮은 걸까?' 서영은 서준의 품에 기대면서도 희도를 향해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됐죠? 아직도 화가 안 풀렸으면 더 해보시죠.”그러면서 다시 술병을 집어 들려 했지만, 서준이 서둘러 그녀의 손을 막았다. 서준의 눈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고, 그는 붉어진 눈으로 희도를 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 “희도야, 우리는 30년을 함께 지내온 사이야. 오늘 정말 끝장을 볼 생각이야?” 바로 그때, 문이 열리며 인아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완전히 혼란 그 자체였다. 인아는 서둘러 서영에게 다가가,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보며 죄책감에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녀의 눈에는 고통과 슬픔이 가득했다. 서영도 인아를 보며 힘겹게 물었다. “인아 씨, 여기 왜 온 거야?” 희도 역시 짜증스러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누가 불렀어?” 구석에 있던 용국이 머뭇거리며 손을 들고 말했다. “저... 제가 불렀어요.” 인아는 희도와 그의 옆에 앉아 있는 연서를 슬쩍 쳐다보았다. 연서는 희도의 팔을 꽉 붙잡고 있었고, 그 손에는 두려움과 자신의 위치를 과시하려는 미묘한 감정이 엿보였다. 희도는 인아가 어떻게 행동할지 지켜보며 미간을 더욱 찌푸렸다. 방 안은 일순간 긴장감으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인아는 조용히 연서 앞에 멈춰 섰다. 연서는 도전적인 눈빛으로 인아를 응시하며, 자신감을 보여주듯 턱을 치켜들었다. 잠시의 침묵 후, 인아는 연서에게 고개를 숙이고 수화로 말
잠시 후, 희도는 인아의 손을 냉정하게 뿌리치며 고개를 돌려 연서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병원에 데려다줄게.” “하지만...” 연서는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희도의 차가운 시선에 결국 입을 다물었다. 희도가 겉으로는 부드럽게 말했지만, 그 속에는 차가운 감정이 스며있었다. 연서는 그 차가운 감정을 느끼고는 더 이상 불평하지 못했다. “발 아파, 나 좀 안아줘.” 희도는 인아가 지켜보는 가운데, 연서를 아무렇지 않게 안아 올렸다. 연서는 희도의 목을 감싸며 고의적으로 도발적인 눈빛으로 인아를 바라보았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봐, 난 너랑 달라.’ 희도는 연서를 안고 인아를 지나쳤다. 그의 발걸음이 멀어질 때, 그가 지나가며 일으킨 바람이 인아의 귀 옆 머리카락을 살짝 흔들었다. 인아는 고개를 숙이며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녀의 손끝이 떨리는 듯했다. 희도가 떠난 후, 방 안의 분위기는 차가운 정적에 휩싸였다. 그런 가운데 용국이 조심스럽게 인아에게 다가갔다. “형수님, 괜찮으세요?” 인아는 고개를 떨군 채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누구도 속일 수 없는 슬픔을 담고 있었다. 용국은 속으로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눈앞에서 다른 여자를 다정하게 안고, 자신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는 상황에서 과연 누가 괜찮을 수 있을까? “형은 진짜 바보예요! 형수님, 너무 상처받지 마세요.” 모두가 인아가 희도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있었다. 정작 희도만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인아를 단지 가족처럼만 여겼고,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져 있었다. 용국의 말대로, 이는 정말 바보 같은 일이었다. “오빠, 나 병원 좀 데려다줘. 피가 너무 나는 것 같아.” 서영은 장난스럽게 분위기를 풀어보려 했지만, 서준은 그녀를 노려보며 화를 억누른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야 정신이 드는 거야?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했어!” 서영은 입
다행히 서준이 재빨리 인아를 붙잡아 쓰러지지 않게 했다. 그녀의 어깨에서 전해지는 뜨거운 열기에 서준은 깜짝 놀라 서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열이 많이 나네.”서영도 다급해지며 소리쳤다. “빨리 의사 불러!” 인아는 마치 긴 꿈속을 헤매고 있는 듯한 느낌에 빠져들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유희연은 인아를 창고 안에 가두었고, 그곳은 어둡고 무서운 차가움으로 가득했다. 어둠은 인아를 서서히 집어삼키려 했고, 인아는 필사적으로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절망 속에서 문이 천천히 열리며 한 줄기 빛이 들어왔다. 그 빛은 점점 강해지며 어둠 속의 인아를 비추었다. 빛 속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고, 그는 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채 마치 구세주처럼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은 따뜻했고, 인아는 떨리는 손으로 그 손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손이 갑자기 멀어지며 문은 다시 닫혀버렸다. 인아는 허공에 손을 뻗었지만, 어둠은 다시 그녀를 집어삼켰다. 그때 갑자기 인아는 눈을 떴다. 눈앞에 보이는 병실의 천장은 하얗고 밝았다. 인아는 잠시 눈을 찡그리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꿈에서의 두려움은 여전히 가슴속 깊이 남아 있었다. “깨어났네.”서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듯했다. “네가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아니, 오빠가 말해.” “네가 말해줘. 네가 말하는 게 더 좋지 않겠어?” 인아는 고개를 돌려보니, 서준과 서영이 침대 앞에서 작은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서준은 기침을 한번 하고는 서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방을 나섰다. 인아는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서영에게 수화로 물었다.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어요?” 서영은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인아의 손을 잡고 앉았지만,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인아는 조용히 서영을 응시했다. 그리고 서영의 손을 살며시 놓으며 수화로 말했다. “혹시 불치병이라도 걸린 거예요? 괜찮으니 말해도 돼요. 저
서영은 의사를 찾으러 가려 했지만, 인아가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서영은 당황한 표정으로 인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설마 이 아이를 낳겠다는 건 아니겠지? 그 쓰레기 같은 놈은 절대 아이를 가질 자격이 없어!” 인아는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수화로 답했다. “희도 씨는 분명 아이를 원하지 않을 거예요.” 서영은 잠시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됐잖아. 그냥 지우자.” 그러나 인아의 얼굴은 여전히 굳어 있었고, 그녀의 손가락은 다시 빠르게 움직였다. “저는... 이 아이를 낳고 싶어요.” 서영은 그 말을 듣고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대체 왜?” 인아는 차분한 손동작으로 천천히 수화로 답했다. “이 아이는 그 사람의 아이이기도 하지만, 제 아이이기도 해요.” 서영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렇다. 이 아이는 단순히 희도의 아이가 아니라, 인아의 피와 살로 이루어진 소중한 생명이었다. 그리고 지금, 인아는 이 아이가 절실히 필요했다. 세상에 혼자 남겨진 듯한 인아에게는 자신의 가족이 필요했다. 부모도 없고, 친구도 거의 없으며, 심지어 남편조차 그녀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 지금, 인아는 사랑할 대상을 갈망하고 있었다. 서영은 그 사실을 깨달았다. 인아에게 이 아이는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 자신을 지탱할 마지막 희망이자 생명줄이었다. 서영은 인아의 손을 부드럽게 쥐고, 얼굴을 어루만지며 조용히 말했다. “좋아. 그러면 아이를 낳자. 내가 도와줄게.” 서영의 말에 인아의 눈가가 붉어졌다.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을 느끼며, 인아는 서영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서영의 머리에는 여전히 붕대가 감겨 있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인아를 향한 진심 어린 따뜻함으로 가득했다. 그 눈빛은 인아의 마음을 깊이 울렸다. 인아는 순간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녀는 자신을 진심으로 이해해주고, 필요할 때 곁에 있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서영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울지 마.
인아는 한참 동안 문을 두드렸지만, 점점 힘이 빠져 결국 주저앉았다. 좁고 답답한 창고는 완전히 어둠 속에 잠겨 있었고, 침묵만이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온몸을 감싸는 어둠은 마치 촘촘한 거미줄처럼 인아를 옥죄었고, 인아는 곧 숨 쉬는 것조차 어려웠다. 차가운 바닥에 앉아 인아는 무릎을 끌어안고 몸을 웅크렸다. 방 안에서 들리는 유일한 소리는 그녀의 거친 숨소리와 빨라지는 심장 소리뿐이었다. 희도가 자신을 반성하라고 했지만, 인아는 무엇을 반성해야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레스토랑에서 다섯 시간을 기다린 것이 잘못이었는지, 아니면 장옥순을 데려다 준 것이 잘못이었는지,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주머니를 더듬어보니 핸드폰이 손에 잡혔지만, 이미 배터리가 다 떨어져 전원이 꺼져 있었다. 인아는 문 앞에 웅크리고 앉아 귀를 막으며, 자신이 침실에 있다고 상상하려 했다. 그러나 어둠에 갇혀 있는 이 상황은 어린 시절의 악몽과 너무나 비슷했다. 여섯 살 때도 이렇게 어둡고 좁은 창고에 갇혀 있었고, 그때 역시 아무도 인아를 구하러 오지 않았다. 그때 쥐와 벌레가 몸 위로 기어다니던 공포는 어린 인아에게는 너무나 컸고, 그날 이후 그 기억은 그녀에게 커다란 상처로 남았다. 인아는 그때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두려움을 표현할 방법조차 없었다. 그저 필사적으로 문을 긁고 두드렸지만, 손가락에서 피가 나올 때까지 긁어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런 인아를 처음으로 구해준 사람이 바로 희도였다. 희도가 문을 열고 그녀를 안아주었을 때 느꼈던 그 따뜻함, 은은한 박하향, 그 모든 것이 인아에게는 구원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희도가 다시 인아를 어둠 속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그 순간, 인아의 기억 속에서 완벽했던 희도의 모습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쌓아온 추억이 빠르게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낀 인아는 무거운 짐을 가슴에 안고 있었다. 마치 기억을 갉아먹는 벌레들이 마
“난 갈게.” 희도는 차갑게 말하고 뒤돌아섰다. 연서는 희도의 뒷모습을 보며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희도는 단 한 번도 연서를 위로해 주지 않았다. 더군다나 병원에서 돌아온 그녀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떠나버렸다. 희도는 차를 몰아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도착했을 때, 레스토랑은 이미 불이 꺼져 있었고 안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차 안에서 희도는 레스토랑을 한참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꺼내 인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인아의 핸드폰은 꺼져 있었다. 희도는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담배를 꺼내 두 모금 빨고는 곧바로 차창 밖으로 내던졌다. 다시 차에 올라타며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했을 때도 인아는 없었다. 침대 시트가 깔끔하게 정돈된 것을 보고 그녀가 돌아오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그제야 희도는 인아의 카드가 모두 정지되어 있었던 것을 기억했다. 인아는 집으로 돌아올 교통비조차 없었을 것이고, 돌아오는 방법도 없었을 것이다. 희도는 급히 핸드폰을 들어 원호를 호출하며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한편, 인아는 장옥순을 그녀의 임시 거처로 데려다주고 있었다. 그곳은 쓰레기장 근처에 있는 폐차 위에 철판을 덮어 만든 임시 쉼터였다. 장옥순의 말에 따르면 쓰레기장 주인이 불쌍히 여겨 마련해준 곳이라고 했다. 인아는 편의점에서 산 물건들을 내려놓으며 쉼터를 살펴보았다. 천막 속에서 특유의 쿰쿰한 냄새가 풍겼다. 장옥순이 전등을 켜자, 낡고 지저분한 침구가 드러났다. 인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슬픈 눈으로 장옥순을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 장옥순은 인아에게 글을 가르쳐주고 종이접기를 함께 하며 밤마다 이야기를 들려주던 사람이었다. 인아의 기억 속에서 장옥순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장옥순은 주름진 손을 들어 인아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손톱에 박힌 때를 보고 주저했다. 그러나 인아는 주저하지 않고 그 손을 꽉 잡고 그녀 옆에 앉았다. “이렇게 더러운 데 앉으면 네 옷이 다 망가진다. 이렇게
연서의 입가에 머물던 미소가 순간 굳어졌다.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린 후에야 겨우 미소를 되찾았다. “농담이야! 왜 그렇게 무서운 표정을 하고 있어?” 희도는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 지었다. “나도 농담이야.” ... 레스토랑 안은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인아는 조용히 앉아 희도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은 천천히 흘렀고,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희도는 나타나지 않았다. 인아는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집의 불빛이 하나둘씩 꺼지고, 한때 붐비던 거리는 점점 적막해졌다. 레스토랑의 손님들도 차츰 자리를 떠났고, 마침내 홀 안은 거의 텅 비었다. 그제야 매니저가 다가와 말했다. “사모님, 이제 곧 영업 마감 시간입니다.” 인아는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손님들은 모두 떠났고, 레스토랑 안은 조용해졌다. 하지만 이 상황이 인아에게는 더 이상 낯설지 않았다. 이런 실망은 이제 그녀에게 익숙했다. 기다리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다섯 시간이면 충분했다. 그녀가 혼자 텅 빈 집을 지키며 보냈던 지난 수많은 밤들에 비하면 다섯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인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웨이터가 작은 케이크를 들고 다가왔다. “사모님, 오늘이 생일이시죠? 미리 준비된 케이크입니다. 생일 축하드립니다.” 웨이터는 케이크를 그녀 앞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매니저가 웃으며 덧붙였다. “곧 자정이네요. 케이크를 드시고 소원을 빌어보세요.” 인아는 케이크 위에 꽂힌 작은 촛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불빛은 마치 생일을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매니저의 동정처럼 느껴졌다. 억지로라도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인아는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말했다. ‘생일 축하해, 강인아.’ 하지만 소원은 빌지 않았다. 소원을 빌어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여러 번 경험했기 때문이다.매니저는 인아의 여윈 모습을 보며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그는 인아가 몇 시간을 앉아
희도는 밤새 침실에 들어오지 않았고, 아침에 인아가 눈을 떴을 때, 그는 이미 집에 없었다. 인아는 침대에 누운 채로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몇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자신이 왜 이토록 무기력해졌는지 알 수 없었다. 마치 온 세상이 자신을 외면하는 듯한 느낌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인아는 일어나 억지로라도 죽을 끓여 두 그릇을 비웠고, 의사가 처방해준 약도 챙겨 먹었다. 인아의 마음은 텅 비어 있었고, 어떤 것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오후 다섯 시가 넘어갔을 때, 현관 벨이 울렸다. 인아가 문을 열자, 희도의 비서인 장원호가 서 있었다. “사모님, 안녕하세요. 오늘은 사모님의 생일이라 대표님께서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원호는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인아는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랐다. 원호는 수화를 이해하지 못하기에, 인아는 그저 가만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원호는 다시 설명했다. “대표님께서 사모님의 생일을 위해 준비한 새 옷을 입으시고, 함께 저녁 식사를 하시길 원하십니다.” 인아는 순간 멈칫하며 그의 말을 곱씹었다. 희도가 생일을 챙기겠다는 말이 단순한 형식적인 말일 줄 알았는데, 그가 진심이었다니. 이 상황이 어색하고 당황스러웠지만,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원호는 인아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사모님, 가고 싶지 않으신가요?”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제 희도는 그녀의 소중한 것을 불태우고, 오늘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생일을 챙기겠다고 한다. 역시나 희도에게 있어서 인아의 감정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원호는 잠시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사모님, 어쨌든 대표님은 사모님의 남편입니다. 법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대표님은 사모님의 보호자이십니다. 대표님께서 사모님을 여전히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잊지 마세요.” 인아는 그 말을 듣고 놀란 표정으로 원호를 바라보았다. 원호는 말을 이어갔다. “만약 대표님께서 사모님을 여전히 소중히 여기고 계신다면, 사모님도 대표님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
인아는 천천히 손을 뻗어 땅에 떨어진 재를 한 움큼 집어 들었다. 하지만 바람이 불자,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재가 흩어져버렸다. 인아는 무력하게 고개를 들어 희도를 바라보았다. 희도는 여전히 무심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방금 자신이 파괴한 것이 인아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 전혀 상관하지 않는 듯했다. 그의 눈에 비친 인아는, 그저 한낱 쓰레기처럼 중요하지 않은 존재처럼 느껴졌다. 인아는 자신의 모든 것들이 희도에게는 아무런 가치가 없음을 직감했다.비틀거리며 일어난 인아는 수화로 물었다. “왜! 왜 나한테 이래요?” 희도는 인아의 눈물을 손으로 닦아내며 차가운 목소리로 답했다. “이런 것들은 네 곁에 있을 자격이 없어.” 희도는 인아에게 문서영과의 관계를 끊으라고 분명히 말했지만, 그녀가 듣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희도의 눈엔 그녀가 이유 없는 고집을 피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인아는 다시 수화로 물었다. “전 친구도 못 사귀는 거예요?” 희도는 무심한 듯 부드럽게 말했다. “나만 있으면 되잖아. 친구가 왜 필요해?” 희도의 말은 인아의 가슴 깊숙이 차가운 비수를 꽂는 것 같았다. 그녀는 한 발짝 물러서서 떨리는 손짓으로 말했다. “어릴 때부터 나에겐 당신밖에 없었어요. 당신 곁엔 나 말고도 많은 사람이 있었잖아요. 전 당신에게 대체 뭐예요? 고양이? 강아지?” 그 말에 희도는 한동안 침묵했다. 그녀의 손짓은 느리지만 진심이 묻어났다. 희도는 단 한 번도 이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인아는 이어서 말했다. “난 사람이에요. 나도 마음이 있고, 슬플 때도 있고, 상처받을 때도 있어요. 하지만 당신은 단 한 번도 절 신경 쓰지 않았어요.” 인아의 눈물이 다시 흘러내렸다. “나는 강아지처럼 당신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싶지 않아요. 머리를 쓰다듬어줄 때 꼬리를 흔드는 그런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아요.” 인아의 손짓은 절규에 가까웠지만, 그 절규는 희도에게 닿지 않는 것 같았다.
희도의 길고 늘씬한 실루엣이 문가에 서 있었다. 역광 때문에 그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 특유의 존재감은 여전히 압도적이었다. 인아는 손에 쥔 접시를 무의식적으로 꼭 쥐었다. 희도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당황했지만,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지금쯤 연서와 함께 있어야 할 텐데, 왜 여기까지 찾아온 걸까? “이제 그만하지 그래?” 희도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흘러나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온한 목소리였다. 인아가 한 달이 넘게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희도는 그저 모든 걸 장난으로 받아들였다.가게 아주머니는 잠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물었다. “인아랑 무슨 사이인가요?” 희도는 아주머니를 향해 고개를 살짝 돌리며 답했다. “남편입니다.” 아주머니는 깜짝 놀라 입을 벌렸다. 그녀가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인아가 말하길, 남편은 무책임하고 그녀를 내팽개친 사람일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눈앞의 남자는 젊고 잘생긴 데다 어딘지 모르게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인아가 당신이 자기를 버렸다고 했어요. 그런데 왜 다시 찾아왔죠?” 희도는 살짝 웃으며 되물었다. “강인아가 그렇게 말했나요?” 아주머니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희도는 진실을 알고 있는 듯했다. 희도는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인아가 가출한 거예요. 그동안 많이 신경 쓰셨겠어요.” 아주머니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짓고 말했다. “아, 그렇군요. 저는 인아가 사고라도 난 줄 알았어요...” 그러나 아주머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인아의 손에서 들고 있던 접시가 ‘쨍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인아는 서둘러 접시를 주워 들며 수화로 말했다. “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사실 인아는 의도적으로 접시를 떨어뜨렸다. 주인 아주머니가 자신의 임신 사실을 희도에게 말해버릴까 봐 서둘러 주의를 돌리기 위한 행동이었다. 아주머니
가게 주인은 인아가 울먹이며 국수를 먹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운 눈빛으로 국수를 살짝 밀어주었다. “어서 먹어요. 이러다 국수가 불어버리겠어요.” 인아는 눈물을 닦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는 젓가락을 들어 국수를 입에 가득 넣기 시작했지만, 국수와 함께 쏟아지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국숫발이 입안에 넘쳐났지만, 이와 함께 가슴 속에 쌓였던 슬픔도 터져 나왔다. 가게 주인은 한참을 지켜보며 마음 아파했다. 마치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사람처럼 허겁지겁 음식을 삼키는 인아의 모습이 너무나도 처량해 보였다. 이 작은 국숫집은 중년 부부가 운영하는 곳으로, 그들은 교통사고로 자식을 잃은 후 상처받은 사람들을 돕기 위해 살아가고 있었다. 인아는 오후 내내 그곳에 앉아 있었고, 시간이 흘러 해가 저물 때까지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녀의 고요한 모습이 부부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가게 주인은 남편에게 살며시 다가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저 아이 참 불쌍해 보여요. 갈 곳이 없는 건 아닐까요?” 남편도 한숨을 내쉬며 맞장구쳤다. “그러게. 말도 못 하는 걸 보면, 이곳에 와서 일자리라도 찾으려 하는 건지도 모르지.” 저녁 시간이 지나고 가게가 한산해지자, 주인은 결국 인아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가씨, 집이 어디예요?” 그러나 인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에게는 더 이상 돌아갈 집이 없었다. 다섯 살 이후로 인아는 ‘집’이라는 곳의 의미를 잃어버렸다. 그 말을 들은 가게 주인은 더욱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만약 갈 곳이 없다면, 여기서 일하면서 지내도 돼요. 저쪽 창고방에서 잠시 머물 수 있을 거예요. 낮에는 설거지하고 가게 청소만 도와주면 되고요.” 인아는 잠시 주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깊은 고마움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모아 수화로 감사의 뜻을 전하는 인아의 모습에 주인은 깊은 감동을 받았다. “우리 딸이 살아 있었다면 아마도 아가씨와 비슷한 나이였을
서영은 어이없다는 듯이 비웃으며 천승혁을 향해 쏘아붙였다. “천 대표님, 제가 미쳤다고 이따위 광고 때문에 유연서랑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천승혁은 그제야 이 상황이 단순한 광고 캐릭터를 두고 벌이는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이곳에서는 자존심을 건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무실 안의 분위기는 갑자기 무거워졌고, 연서를 향한 사람들의 시선이 미묘하게 변했다. 연서는 그 시선을 느끼며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결국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서영을 향해 소리쳤다. “문서영, 너 제정신이야? 대체 왜 강인아를 그렇게까지 도와주는 거야? 나랑 싸워봤자 네가 얻는 게 뭐야?” 서영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내 맘이야. 남편이란 인간은 뭐 하나 신경도 안 써주는데, 내가 안 챙기면 누가 챙기겠어? 너처럼 남자만 보면 정신 못 차리는 애는 이해 못 하겠지. 우리 인아 씨는 너처럼 남의 남편한테 붙어서 얼굴 철판 깔고 살지는 않거든.” 연서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분노가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그녀는 서영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주변 사람들이 겨우 말리면서 더 큰 싸움으로 번지는 것은 막았다. 그때 누군가가 소리쳤다. “유 대표님이 오셨어요!” 사무실 안은 일순간 고요해졌다. 모든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희도는 깔끔한 정장 차림으로 문 앞에 서 있었고,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차갑게 사무실을 둘러보고 있었다. 희도의 시선은 연서를 지나 서영에게 향했다가, 결국 인아에게 멈췄다. 인아는 그와 눈 마주치자 고개를 떨구었다. 연서는 희도가 들어오자마자 그에게 달려갔다.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한 표정으로 희도에게 기대며 말했다. “희도야, 문서영이 자꾸 날 괴롭혀!” 서영은 그 모습을 보고 혐오스럽다는 듯이 쳐다보며 독설을 날렸다. “그 입 좀 다물어. 정말 부끄럽지도 않니?” 천승혁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희도에게 다가가 공손하게 말했다. “유 대표님, 어서 오십시오. 안으로 들어가
서영의 입가에 머물던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 그녀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한숨을 쉬며 인아의 손을 잡고 말했다. “미안해. 사실 인아 씨를 여기로 오게 하고 싶어서 그런 거야. 진짜로 차단하려던 건 아니었어.” 그러고는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근데 이렇게 달려온 걸 보니, 내가 그 남자보다 더 중요하다는 거 맞지?” 서영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인아를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됐어, 이제 너를 다시 친구 목록에 추가할게.” 서영은 핸드폰을 꺼내 인아를 다시 친구로 추가하며 가볍게 웃었다. “그럼 이제 SY게임즈에 갈 거야?” 인아는 잠시 망설였지만, 서영의 눈빛에 힘입어 거의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영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좋아, 그런데 지금 이 옷차림으로는 안 돼. 내가 옷 좀 가져다줄게.” 곧이어 서영은 인아에게 어울릴 만한 옷을 가져왔다. 서영의 옷은 편안하면서도 세련된 스타일이었고, 인아에게 조금 크긴 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둘은 서영의 차를 타고 SY게임즈로 향했다. 회사에 도착한 그들은 접수처에서 간단한 절차를 마치고 홍보팀으로 안내받았다. 천승혁은 그들을 매우 반갑게 맞이했지만,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연서가 이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분위기가 묘해졌다. 연서는 네일을 만지작거리며 비꼬듯 물었다. “천 대표, 이 사람이 청월을 코스프레할 사람이야?” 천승혁은 당황한 듯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연서 씨와 인아 씨는 서로 다른 스타일이니, 연서 씨는 서연 캐릭터를 맡으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연서는 비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난 청월을 코스프레할 거야.” 천승혁과 제작진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연서가 청월을 고집하면, 인아에게 맡길 캐릭터가 없기 때문이다. 서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천승혁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에요?” 천승혁은 곤란한 얼굴로 서영에게 작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연서 씨는 우리 게임 서버에서 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