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브는 A시에서 유명한 부자들의 천국이자 사적인 클럽이었다. 이곳에 모여든 남자들은 모두 A시에서 잘 알려진 인물들이었다. 인아는 생애 처음으로 이곳에 발을 들였다. 그녀의 소박한 옷차림은 화려한 조명 아래 빛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눈에 띄게 어울리지 않았다. VIP룸은 이미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찼고, 그중 서영도 있었다. 서영은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두 손을 머리 뒤로 올리며, 방 안의 남자들보다도 더 여유롭고 태평한 모습이었다. “오빠, 지금 나더러 유 대표님께 사과하라는 거야?” 서영은 그렇게 말하며, 유 대표, 즉 희도와 그의 옆에 앉아 있는 연서를 힐끗 쳐다보았다. 희도는 아무런 표정 없이 소파에 기대어 다리를 꼬고 있었다. 희미한 조명이 그의 상반신만 비추고 있어, 얼굴은 어둠 속에 묻혀 신비로움과 차가운 위압감을 동시에 풍기고 있었다. 문서준은 난처한 얼굴로 조용히 중재하려 했다. “연서 씨에게 사과하면 모든 일이 끝날 거잖아.” 서영은 그 말에 비웃음을 터뜨리며 대꾸했다. “내가 왜 저 여자한테 사과해야 해? 저 여자가 뭔데?” “문서영, 제발 그만 좀 해.” 연서가 희도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서영은 겁 없이 연서에게 대놓고 도발을 걸고 있었다. “장난? 아니, 난 진심이야. 저 여자가 꼴 보기 싫어서 때린 건데.”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연서의 얼굴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녀는 벌떡 일어서려다 발목 통증에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너무하는 거 아니야? 나와 희도는 원래 사귀고 있었어!” 서영은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연서를 흘겨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럼 강인아는 10년 넘게 유희도와 함께 살았는데, 그때 넌 어디 있었지?” “그건 다르잖아! 강인아는 고아일 뿐이잖아. 유씨 가문이 불쌍해서 키워준 거지.” 쾅-연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희도가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이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술잔은 너무 세게 내려쳐
쾅- 술병이 바닥에 산산조각 나며 서영의 이마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 피는 술과 섞여 시야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모든 일이 너무 빨리 벌어졌고, 방 안에 있던 그 누구도 서영이 이렇게 극단적인 행동을 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서영아!” 서준은 깜짝 놀라 서영을 부축하며 큰 소리로 외쳤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서영은 사과를 하느니 차라리 술병으로 자신의 머리를 내리치는 고집스러운 성격을 보였다. ‘얘는 도대체 누구를 닮은 걸까?' 서영은 서준의 품에 기대면서도 희도를 향해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됐죠? 아직도 화가 안 풀렸으면 더 해보시죠.”그러면서 다시 술병을 집어 들려 했지만, 서준이 서둘러 그녀의 손을 막았다. 서준의 눈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고, 그는 붉어진 눈으로 희도를 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 “희도야, 우리는 30년을 함께 지내온 사이야. 오늘 정말 끝장을 볼 생각이야?” 바로 그때, 문이 열리며 인아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완전히 혼란 그 자체였다. 인아는 서둘러 서영에게 다가가,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보며 죄책감에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녀의 눈에는 고통과 슬픔이 가득했다. 서영도 인아를 보며 힘겹게 물었다. “인아 씨, 여기 왜 온 거야?” 희도 역시 짜증스러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누가 불렀어?” 구석에 있던 용국이 머뭇거리며 손을 들고 말했다. “저... 제가 불렀어요.” 인아는 희도와 그의 옆에 앉아 있는 연서를 슬쩍 쳐다보았다. 연서는 희도의 팔을 꽉 붙잡고 있었고, 그 손에는 두려움과 자신의 위치를 과시하려는 미묘한 감정이 엿보였다. 희도는 인아가 어떻게 행동할지 지켜보며 미간을 더욱 찌푸렸다. 방 안은 일순간 긴장감으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인아는 조용히 연서 앞에 멈춰 섰다. 연서는 도전적인 눈빛으로 인아를 응시하며, 자신감을 보여주듯 턱을 치켜들었다. 잠시의 침묵 후, 인아는 연서에게 고개를 숙이고 수화로 말
잠시 후, 희도는 인아의 손을 냉정하게 뿌리치며 고개를 돌려 연서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병원에 데려다줄게.” “하지만...” 연서는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희도의 차가운 시선에 결국 입을 다물었다. 희도가 겉으로는 부드럽게 말했지만, 그 속에는 차가운 감정이 스며있었다. 연서는 그 차가운 감정을 느끼고는 더 이상 불평하지 못했다. “발 아파, 나 좀 안아줘.” 희도는 인아가 지켜보는 가운데, 연서를 아무렇지 않게 안아 올렸다. 연서는 희도의 목을 감싸며 고의적으로 도발적인 눈빛으로 인아를 바라보았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봐, 난 너랑 달라.’ 희도는 연서를 안고 인아를 지나쳤다. 그의 발걸음이 멀어질 때, 그가 지나가며 일으킨 바람이 인아의 귀 옆 머리카락을 살짝 흔들었다. 인아는 고개를 숙이며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녀의 손끝이 떨리는 듯했다. 희도가 떠난 후, 방 안의 분위기는 차가운 정적에 휩싸였다. 그런 가운데 용국이 조심스럽게 인아에게 다가갔다. “형수님, 괜찮으세요?” 인아는 고개를 떨군 채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누구도 속일 수 없는 슬픔을 담고 있었다. 용국은 속으로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눈앞에서 다른 여자를 다정하게 안고, 자신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는 상황에서 과연 누가 괜찮을 수 있을까? “형은 진짜 바보예요! 형수님, 너무 상처받지 마세요.” 모두가 인아가 희도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있었다. 정작 희도만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인아를 단지 가족처럼만 여겼고,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져 있었다. 용국의 말대로, 이는 정말 바보 같은 일이었다. “오빠, 나 병원 좀 데려다줘. 피가 너무 나는 것 같아.” 서영은 장난스럽게 분위기를 풀어보려 했지만, 서준은 그녀를 노려보며 화를 억누른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야 정신이 드는 거야?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했어!” 서영은 입
다행히 서준이 재빨리 인아를 붙잡아 쓰러지지 않게 했다. 그녀의 어깨에서 전해지는 뜨거운 열기에 서준은 깜짝 놀라 서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열이 많이 나네.”서영도 다급해지며 소리쳤다. “빨리 의사 불러!” 인아는 마치 긴 꿈속을 헤매고 있는 듯한 느낌에 빠져들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유희연은 인아를 창고 안에 가두었고, 그곳은 어둡고 무서운 차가움으로 가득했다. 어둠은 인아를 서서히 집어삼키려 했고, 인아는 필사적으로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절망 속에서 문이 천천히 열리며 한 줄기 빛이 들어왔다. 그 빛은 점점 강해지며 어둠 속의 인아를 비추었다. 빛 속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고, 그는 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채 마치 구세주처럼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은 따뜻했고, 인아는 떨리는 손으로 그 손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손이 갑자기 멀어지며 문은 다시 닫혀버렸다. 인아는 허공에 손을 뻗었지만, 어둠은 다시 그녀를 집어삼켰다. 그때 갑자기 인아는 눈을 떴다. 눈앞에 보이는 병실의 천장은 하얗고 밝았다. 인아는 잠시 눈을 찡그리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꿈에서의 두려움은 여전히 가슴속 깊이 남아 있었다. “깨어났네.”서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듯했다. “네가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아니, 오빠가 말해.” “네가 말해줘. 네가 말하는 게 더 좋지 않겠어?” 인아는 고개를 돌려보니, 서준과 서영이 침대 앞에서 작은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서준은 기침을 한번 하고는 서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방을 나섰다. 인아는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서영에게 수화로 물었다.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어요?” 서영은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인아의 손을 잡고 앉았지만,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인아는 조용히 서영을 응시했다. 그리고 서영의 손을 살며시 놓으며 수화로 말했다. “혹시 불치병이라도 걸린 거예요? 괜찮으니 말해도 돼요. 저
서영은 의사를 찾으러 가려 했지만, 인아가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서영은 당황한 표정으로 인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설마 이 아이를 낳겠다는 건 아니겠지? 그 쓰레기 같은 놈은 절대 아이를 가질 자격이 없어!” 인아는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수화로 답했다. “희도 씨는 분명 아이를 원하지 않을 거예요.” 서영은 잠시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됐잖아. 그냥 지우자.” 그러나 인아의 얼굴은 여전히 굳어 있었고, 그녀의 손가락은 다시 빠르게 움직였다. “저는... 이 아이를 낳고 싶어요.” 서영은 그 말을 듣고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대체 왜?” 인아는 차분한 손동작으로 천천히 수화로 답했다. “이 아이는 그 사람의 아이이기도 하지만, 제 아이이기도 해요.” 서영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렇다. 이 아이는 단순히 희도의 아이가 아니라, 인아의 피와 살로 이루어진 소중한 생명이었다. 그리고 지금, 인아는 이 아이가 절실히 필요했다. 세상에 혼자 남겨진 듯한 인아에게는 자신의 가족이 필요했다. 부모도 없고, 친구도 거의 없으며, 심지어 남편조차 그녀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 지금, 인아는 사랑할 대상을 갈망하고 있었다. 서영은 그 사실을 깨달았다. 인아에게 이 아이는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 자신을 지탱할 마지막 희망이자 생명줄이었다. 서영은 인아의 손을 부드럽게 쥐고, 얼굴을 어루만지며 조용히 말했다. “좋아. 그러면 아이를 낳자. 내가 도와줄게.” 서영의 말에 인아의 눈가가 붉어졌다.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을 느끼며, 인아는 서영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서영의 머리에는 여전히 붕대가 감겨 있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인아를 향한 진심 어린 따뜻함으로 가득했다. 그 눈빛은 인아의 마음을 깊이 울렸다. 인아는 순간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녀는 자신을 진심으로 이해해주고, 필요할 때 곁에 있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서영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울지 마.
인아는 깜짝 놀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손에 쥐고 있던 임신 진단서는 구겨졌고, 그녀는 급히 정신을 차렸다. 당황한 마음을 애써 감추려 노력하며, 임신 진단서를 뒤집어 소파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최대한 침착하게 행동하려고 애쓰며 희도를 바라봤다. 수화를 통해 말했다. “이혼 합의서를 보고 있었어요. 보시겠어요?” 희도는 인아의 손끝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그녀의 얼굴로 옮겼다. 그 눈빛은 어두워졌고, 방 안의 공기는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희도는 몇 걸음에 인아 앞까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어디, 한번 보자.” 인아는 순간 굳어버린 듯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희도의 깊은 눈빛은 마치 인아의 속마음을 모두 꿰뚫어 볼 것만 같았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인아는 절대 이 아이를 잃고 싶지 않았다.결국, 인아는 떨리는 손을 내밀어 희도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힘없이 그의 어깨에 살짝 기댔다. 희도의 표정은 여전히 냉정했다. 마치 그가 모든 감정을 감춘 것처럼 보였다. 잠시 후, 인아는 천천히 그에게서 물러나며 수화로 말했다. “이혼하지 않겠어요. 제 잘못이었어요.”희도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그래?”인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심 어린 눈빛으로 희도를 바라보았다. 희도의 표정은 조금씩 부드러워졌다. 그는 손을 들어 인아의 얼굴을 가볍게 어루만지며 말했다. “앞으로 다시는 이혼 얘기하지 마. 알겠지?” 인아는 눈물을 삼키며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희도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희도는 그녀를 흘낏 바라본 후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희도가 사라지자, 인아는 긴 한숨을 내쉬며 힘없이 소파에 주저앉았다. 손에 쥐고 있던 임신 진단서를 다시 들어 올려 찢어버렸다. 찢긴 조각들은 휴지통으로 던져졌다. ‘더 이상 흔적을 남겨서는 안 돼.’희도는 서재로 들어갔고, 오늘 밤은 외출할 기색이 전혀 없었다. 인아는 주방으로
인아는 희도의 아이를 품고 있었지만, 그의 눈에는 여전히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희도는 인아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눈치채며,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재미없어?” 희도는 손을 뻗어 인아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손끝으로 인아의 눈가를 스치듯 지나갔다. 인아는 순간적으로 정신을 차리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수화로 조용히 답했다. “재미있어요.” 인아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TV 화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이미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희도의 옆에 놓인 핸드폰이 계속해서 울려댔다. 십 분에 한 번꼴로 울리는 진동 소리가 방 안을 메웠지만, 희도는 이를 무시한 채 두 편의 애니메이션이 끝날 때까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마침내 희도는 핸드폰을 집어 들고 전화를 받았다. 그 순간, 핸드폰 너머로 연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야?] “집.” 희도는 짧게 대답했다. ‘집’이라는 단어는 연서의 마음에 비수를 꽂듯 아프게 울렸다. [집? 그럼 내 집은 뭐야? 호텔 같은 거야?] 연서의 목소리는 점점 떨리며 감정이 복받치는 것이 느껴졌다. 희도는 살짝 짜증이 난 듯 눈살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또 왜 그래?” [한 달 동안 그 여자 안 본다고 약속했잖아! 어떻게 약속을 어겨?] 연서의 목소리에는 이미 울음이 섞여 있었다. 인아는 TV 소리가 너무 커서 통화 내용을 정확히 들을 수 없었지만, 희도의 냉랭한 말투만으로도 그가 연서와 통화 중임을 알 수 있었다. 희도는 짧게 한숨을 쉬며 말을 끝냈다. “나중에 이야기하자.” 희도는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고 다시 핸드폰을 내려놓고는 아무렇지 않게 인아와 애니메이션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희도는 애니메이션에 크게 흥미가 없는 듯했지만, 인아와 함께 있는 동안만큼은 진지하게 그녀와 시간을 보내려 애쓰는 듯 보였다. 인아는 희도가 기분이 좋을 때면 이러한 무의미한 일도 기꺼이 함께해준다는 것
희도는 인아의 손을 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괜찮아, 됐어.” 희도는 그렇게 말하며 욕실로 들어갔고, 곧 물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인아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본능적으로 배를 살짝 어루만졌다. 순간, 그녀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생리를 핑계로 희도를 피할 수는 있겠지만, 그 핑계가 10개월 동안 계속될 수는 없다는 사실이 그녀를 압박했다. 그 불안감은 마치 부드럽게 인아를 덮어버린 진흙탕 속에서 갑작스레 끌어내는 손길처럼 강하게 다가왔다. 아무리 부드럽다고 해도, 진흙탕은 결국 진흙일 뿐이었다. 희도는 인아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리고 진흙탕에서는 결코 꽃이 피지 않는다. 인아가 가진 그 모든 사랑은 희도에게 있어 마치 아이들의 장난감과도 같았다. 인아의 진심은 그에게 의미가 없었다.20분 후, 희도가 욕실에서 나왔다. 그의 얼굴은 씻어낸 것처럼 다시 평정을 되찾은 듯 보였다. 희도는 시간을 확인한 뒤 인아에게 말했다. “10시야. 이제 자야 할 시간이야.” 인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희도는 몸을 숙여 그녀를 들어 올렸다. 인아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목을 감싸고 그의 단단한 턱선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밤이 깊었지만, 인아는 잠들 수 없었다. 밤새 눈을 뜬 채 무거운 마음을 안고 있었다. 인아가 언제 잠이 들었는지도 모른 채 아침이 밝아왔다. 아침이 되자, 전화벨 소리가 인아를 깨웠다. 잠결에 핸드폰을 집어 든 인아는 전화를 받았다. 핸드폰 너머로 서영의 신나는 목소리가 들렸다. [인아 씨, 카톡 확인해 봐!] 서영은 그렇게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인아는 화면 잠금을 해제한 후 서영이 보낸 카톡 메시지를 열었다. 그곳에는 영상 하나가 첨부되어 있었다. 그 영상에는 서영이 그린 인아의 초상화가 담겨있었다. 그림 속에서 인아는 창가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맑은 햇살이 그녀의 눈동자에 닿아 빛나고 있었지만, 그 눈동자 속에는 깊은 슬픔이 자리 잡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