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테이블 가장자리에 기대 있었다. 은은한 향수 냄새가 살짝 풍기며 공기를 감쌌다. 인아는 고개를 들어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바로 이 카페의 사장, 문서영이었다. 서영은 178cm의 큰 키에 짧은 머리, 검은 티셔츠와 캐주얼 바지를 입고 있어, 말을 하지 않으면 종종 남자로 오해받곤 했다. 그녀의 차림새는 언제나 간결하면서도 당당했고, 그런 모습이 그녀를 더욱 특별하게 보이게 했다. 인아가 처음 이 카페에 면접을 보러 왔을 때, 서영은 장난스럽게 인아의 볼을 꼬집었고, 인아는 당황해서 크게 놀랐었다. 그때 인아는 서영이 남자인 줄 알았다. 하지만 서영이 미소를 지으며 ‘나는 여자야’라고 말했을 때, 그녀는 놀라움에 웃음이 터졌다.인아는 걸레를 내려놓고 미소를 지으며 수화로 말했다. “이제 익숙해졌어요.” 서영은 인아의 수화하는 손가락을 잠시 바라보다, 그녀의 붉어진 눈가를 힐끗 살펴보았다. 서영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익숙해졌다’라는 말이 서영에게는 너무 많은 슬픔과 억울함을 담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서영은 손에 들고 있던 밀크티를 인아에게 건네며 부드럽게 말했다. “자, 인아 씨가 좋아하는 크림 밀크티야. 오늘은 모두에게 한 잔씩 돌렸어.” 인아는 감사의 수화를 보내고 크림 밀크티를 받아 한 모금 마셨다. 달콤한 크림이 입가에 묻자, 서영은 손가락으로 그 크림을 닦아주며 또다시 인아의 볼을 가볍게 꼬집었다. “참 바보 같아.” 서영의 말 속에는 약간의 아련함과 애정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 말은 마치 무언가 더 깊은 의미를 암시하는 듯했다. 인아의 볼은 약간 통통하고, 눈은 크고 속눈썹은 길었다. 하얗고 깨끗한 얼굴로 사람을 응시할 때면 마치 작은 강아지처럼 순진해 보였다. 그런 모습이 서영에게는 안쓰럽고 동시에 귀엽게 느껴졌다. 그래서 서영은 자주 인아의 볼을 꼬집곤 했다. 처음엔 인아가 조금 어색해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에게 익숙해졌다. 익숙함이란, 때로는 무서운 것이기도 했다. 서
서영은 인아의 헬멧을 벗겨주며 말했다. 두 사람은 이미 비에 흠뻑 젖어 있었지만, 인아가 품에 소중히 안고 있던 커피는 기적처럼 멀쩡했다. “이 사람들 정말 미쳤나 봐. 이렇게 큰 회사에 커피머신 하나도 없다니, 믿을 수가 없네.” 서영은 투덜거리면서도, 인아의 손에서 커피를 받아들며 미소를 지었다. “인아 씨, 여기서 잠깐 기다려. 금방 다녀올게.” 서영은 회사 건물 안으로 들어갔고, 인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 자리에 남았다. 쏟아지는 빗줄기는 점점 더 거세졌고, 찬 공기는 곧 겨울이 올 것임을 알리는 듯했다.인아는 빗방울이 퍼붓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가 처음 유정석과 함께 유씨 가문에 들어갔던 날에도 비가 이렇게 무섭게 내리고 있었다. 그때 겁에 질린 인아는 유정석의 뒤에 꼭 붙어 숨어 있었고, 아홉 살의 희도는 눈을 반짝이며 그녀를 호기심 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때 희도는 유정석에게 이렇게 물었다. “얘는 누구예요?” 유정석은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네 신부야. 마음에 들어?” 그때 아홉 살의 희도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난 원숭이 같은 애는 신부로 안 삼아요.” 그 시절의 인아는 말랐고, 머리카락도 푸석푸석해서 정말로 원숭이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후 희도는 또 이런 말을 했다. “좀 더 먹어. 그렇게 말라서 어떻게 내 신부가 되겠어?” 그 말이 장난이라는 걸 알면서도, 어린 인아는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그런 생각에 잠겨 있던 인아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비가 이렇게 많이 오니, 출근하기 싫어지네. 나 먼저 갈게.” 연서가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회사 문을 나서고 있었다. 비에 젖은 인아를 발견한 그녀는 핸드폰으로 통화하면서도 인아를 향해 말을 걸었다. “강인아?”연서의 말이 통화 너머로 희도에게도 들리는 듯했다. 연서는 인아를 한 번 훑어본 뒤, 비웃음을 머금은 표정으로 다가왔다. “희도 찾으러 온 거예요?”인아는 고
회사 로비에서 희도는 연서의 부어오른 발목을 걱정스럽게 살펴보았다. 연서의 발목은 이미 퉁퉁 부어 있었고, 연서는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희도를 외면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희도가 묻자, 연서는 화난 듯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때 보안 요원이 다가와 희도에게 CCTV 영상을 담은 태블릿을 건넸다. “대표님, CCTV 영상입니다.” 희도는 영상을 확인하자마자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는 인아가 일하는 곳과 문서영의 존재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고, 서영의 또 다른 정체도 알고 있었다. 희도는 태블릿을 테이블 위에 내던지며 연서에게 말했다. “병원에 데려다줄게.”그러나 연서는 희도의 무덤덤한 반응에 화가 치밀어, 더욱 격한 목소리로 외쳤다. “나 안 갈 거야! 차라리 다리가 부러져버렸으면 좋겠네. 내연녀라는 소리를 듣는 것보단 차라리 그게 낫잖아!” 희도의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그는 연서의 짜증을 받아들이며 말했다. “그만하고 병원 가자.” 연서는 단호하게 외쳤다. “안 간다니까!” 희도는 연서와 실랑이를 벌이지 않고, 연서를 조용히 안아 들어 밖으로 나갔다....인아는 서영의 오토바이 뒤에 앉아 있었다. 빗줄기가 인아의 얼굴을 차갑게 때렸고, 서영의 따뜻한 등 뒤에 손을 내밀어 조심스럽게 감쌌다. 비는 차갑고 매서웠지만, 서영의 등은 그와 대조적으로 따뜻하고 포근했다. 인아는 서영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23년 동안 유정석과 희도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인아를 위해 나선 적이 없었다. 서영은 처음으로 그녀에게 진정한 따뜻함을 느끼게 해준 사람이었다. 서영은 잠시 멈칫하더니, 자신을 감싼 인아의 손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차가운 빗속에서 느껴지는 따뜻함이 그녀의 등에 닿는 순간, 서영도 인아의 슬픔을 이해하는 듯했다. 인아는 서영의 등에 기대어 눈물을 흘렸다. 그것은 오랜만에 마음 놓고 흘릴 수 있는 눈물이었다.서영은 카페로 돌아가지 않고, 인아를 그녀가 살고
인아는 입술을 꼭 다문 채로 오랫동안 희도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녀는 마침내 결심한 듯 그의 옷자락을 천천히 놓아주고, 거실의 소파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탁자 아래 서랍을 열었다. 희도는 뒤따라가 인아가 서랍에서 꺼낸 이혼 서류를 보고 눈을 가늘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서류는 꽤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었지만, 희도는 그 서랍을 열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까지 그 서류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했다. 희도는 의문이 가득한 눈빛으로 인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게 뭐야?” 인아는 희도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진지하게 응시하며 수화로 말했다. “이혼해요.” 희도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쓴웃음을 지으며 되물었다. “나랑 장난치는 거야?”그러나 인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을 흔들어 수화를 이어갔다. “장난이 아니에요. 이혼 서류는 오래전부터 주려고 했어요.”사실, 인아는 이혼 서류를 오래전부터 건네주고 싶었지만, 늘 용기가 부족했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마음속 무언가가 달라졌다. 혹시 친구를 잃을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일까? 아니면 고열로 인해 정신이 혼미해졌기 때문일까? 서류를 꺼내 들었을 때, 인아는 오히려 마음의 짐이 덜어진 듯한 해방감을 느꼈다. 마치 오랫동안 가슴 속에 박혀 있던 가시가 드디어 뽑힌 듯했다. 희도는 인아를 잠시 응시하다가, 다시 확인하듯 묻기 시작했다. “문서영 때문이야? 그래서 나랑 이혼하겠다는 거야?”인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수화로 답했다. “아니에요. 서영 씨 때문이 아니에요. 내가 이혼하고 싶어서예요.”인아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확고했고, 그 진심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희도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소파에 털썩 앉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좋아. 대신 빈손으로 나가. 그동안 너한테 쓴 돈 다 갚으면 이혼해줄게.”인아는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결심한 듯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희도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다. 마치
큐브는 A시에서 유명한 부자들의 천국이자 사적인 클럽이었다. 이곳에 모여든 남자들은 모두 A시에서 잘 알려진 인물들이었다. 인아는 생애 처음으로 이곳에 발을 들였다. 그녀의 소박한 옷차림은 화려한 조명 아래 빛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눈에 띄게 어울리지 않았다. VIP룸은 이미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찼고, 그중 서영도 있었다. 서영은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두 손을 머리 뒤로 올리며, 방 안의 남자들보다도 더 여유롭고 태평한 모습이었다. “오빠, 지금 나더러 유 대표님께 사과하라는 거야?” 서영은 그렇게 말하며, 유 대표, 즉 희도와 그의 옆에 앉아 있는 연서를 힐끗 쳐다보았다. 희도는 아무런 표정 없이 소파에 기대어 다리를 꼬고 있었다. 희미한 조명이 그의 상반신만 비추고 있어, 얼굴은 어둠 속에 묻혀 신비로움과 차가운 위압감을 동시에 풍기고 있었다. 문서준은 난처한 얼굴로 조용히 중재하려 했다. “연서 씨에게 사과하면 모든 일이 끝날 거잖아.” 서영은 그 말에 비웃음을 터뜨리며 대꾸했다. “내가 왜 저 여자한테 사과해야 해? 저 여자가 뭔데?” “문서영, 제발 그만 좀 해.” 연서가 희도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서영은 겁 없이 연서에게 대놓고 도발을 걸고 있었다. “장난? 아니, 난 진심이야. 저 여자가 꼴 보기 싫어서 때린 건데.”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연서의 얼굴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녀는 벌떡 일어서려다 발목 통증에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너무하는 거 아니야? 나와 희도는 원래 사귀고 있었어!” 서영은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연서를 흘겨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럼 강인아는 10년 넘게 유희도와 함께 살았는데, 그때 넌 어디 있었지?” “그건 다르잖아! 강인아는 고아일 뿐이잖아. 유씨 가문이 불쌍해서 키워준 거지.” 쾅-연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희도가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이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술잔은 너무 세게 내려쳐
쾅- 술병이 바닥에 산산조각 나며 서영의 이마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 피는 술과 섞여 시야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모든 일이 너무 빨리 벌어졌고, 방 안에 있던 그 누구도 서영이 이렇게 극단적인 행동을 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서영아!” 서준은 깜짝 놀라 서영을 부축하며 큰 소리로 외쳤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서영은 사과를 하느니 차라리 술병으로 자신의 머리를 내리치는 고집스러운 성격을 보였다. ‘얘는 도대체 누구를 닮은 걸까?' 서영은 서준의 품에 기대면서도 희도를 향해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됐죠? 아직도 화가 안 풀렸으면 더 해보시죠.”그러면서 다시 술병을 집어 들려 했지만, 서준이 서둘러 그녀의 손을 막았다. 서준의 눈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고, 그는 붉어진 눈으로 희도를 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 “희도야, 우리는 30년을 함께 지내온 사이야. 오늘 정말 끝장을 볼 생각이야?” 바로 그때, 문이 열리며 인아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완전히 혼란 그 자체였다. 인아는 서둘러 서영에게 다가가,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보며 죄책감에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녀의 눈에는 고통과 슬픔이 가득했다. 서영도 인아를 보며 힘겹게 물었다. “인아 씨, 여기 왜 온 거야?” 희도 역시 짜증스러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누가 불렀어?” 구석에 있던 용국이 머뭇거리며 손을 들고 말했다. “저... 제가 불렀어요.” 인아는 희도와 그의 옆에 앉아 있는 연서를 슬쩍 쳐다보았다. 연서는 희도의 팔을 꽉 붙잡고 있었고, 그 손에는 두려움과 자신의 위치를 과시하려는 미묘한 감정이 엿보였다. 희도는 인아가 어떻게 행동할지 지켜보며 미간을 더욱 찌푸렸다. 방 안은 일순간 긴장감으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인아는 조용히 연서 앞에 멈춰 섰다. 연서는 도전적인 눈빛으로 인아를 응시하며, 자신감을 보여주듯 턱을 치켜들었다. 잠시의 침묵 후, 인아는 연서에게 고개를 숙이고 수화로 말
잠시 후, 희도는 인아의 손을 냉정하게 뿌리치며 고개를 돌려 연서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병원에 데려다줄게.” “하지만...” 연서는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희도의 차가운 시선에 결국 입을 다물었다. 희도가 겉으로는 부드럽게 말했지만, 그 속에는 차가운 감정이 스며있었다. 연서는 그 차가운 감정을 느끼고는 더 이상 불평하지 못했다. “발 아파, 나 좀 안아줘.” 희도는 인아가 지켜보는 가운데, 연서를 아무렇지 않게 안아 올렸다. 연서는 희도의 목을 감싸며 고의적으로 도발적인 눈빛으로 인아를 바라보았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봐, 난 너랑 달라.’ 희도는 연서를 안고 인아를 지나쳤다. 그의 발걸음이 멀어질 때, 그가 지나가며 일으킨 바람이 인아의 귀 옆 머리카락을 살짝 흔들었다. 인아는 고개를 숙이며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녀의 손끝이 떨리는 듯했다. 희도가 떠난 후, 방 안의 분위기는 차가운 정적에 휩싸였다. 그런 가운데 용국이 조심스럽게 인아에게 다가갔다. “형수님, 괜찮으세요?” 인아는 고개를 떨군 채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누구도 속일 수 없는 슬픔을 담고 있었다. 용국은 속으로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눈앞에서 다른 여자를 다정하게 안고, 자신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는 상황에서 과연 누가 괜찮을 수 있을까? “형은 진짜 바보예요! 형수님, 너무 상처받지 마세요.” 모두가 인아가 희도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있었다. 정작 희도만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인아를 단지 가족처럼만 여겼고,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져 있었다. 용국의 말대로, 이는 정말 바보 같은 일이었다. “오빠, 나 병원 좀 데려다줘. 피가 너무 나는 것 같아.” 서영은 장난스럽게 분위기를 풀어보려 했지만, 서준은 그녀를 노려보며 화를 억누른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야 정신이 드는 거야?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했어!” 서영은 입
다행히 서준이 재빨리 인아를 붙잡아 쓰러지지 않게 했다. 그녀의 어깨에서 전해지는 뜨거운 열기에 서준은 깜짝 놀라 서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열이 많이 나네.”서영도 다급해지며 소리쳤다. “빨리 의사 불러!” 인아는 마치 긴 꿈속을 헤매고 있는 듯한 느낌에 빠져들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유희연은 인아를 창고 안에 가두었고, 그곳은 어둡고 무서운 차가움으로 가득했다. 어둠은 인아를 서서히 집어삼키려 했고, 인아는 필사적으로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절망 속에서 문이 천천히 열리며 한 줄기 빛이 들어왔다. 그 빛은 점점 강해지며 어둠 속의 인아를 비추었다. 빛 속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고, 그는 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채 마치 구세주처럼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은 따뜻했고, 인아는 떨리는 손으로 그 손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손이 갑자기 멀어지며 문은 다시 닫혀버렸다. 인아는 허공에 손을 뻗었지만, 어둠은 다시 그녀를 집어삼켰다. 그때 갑자기 인아는 눈을 떴다. 눈앞에 보이는 병실의 천장은 하얗고 밝았다. 인아는 잠시 눈을 찡그리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꿈에서의 두려움은 여전히 가슴속 깊이 남아 있었다. “깨어났네.”서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듯했다. “네가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아니, 오빠가 말해.” “네가 말해줘. 네가 말하는 게 더 좋지 않겠어?” 인아는 고개를 돌려보니, 서준과 서영이 침대 앞에서 작은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서준은 기침을 한번 하고는 서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방을 나섰다. 인아는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서영에게 수화로 물었다.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어요?” 서영은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인아의 손을 잡고 앉았지만,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인아는 조용히 서영을 응시했다. 그리고 서영의 손을 살며시 놓으며 수화로 말했다. “혹시 불치병이라도 걸린 거예요? 괜찮으니 말해도 돼요.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