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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이마를 문지르며 눈물마저 찔끔 나왔고 고개를 들어보니 내가 부딪힌 것은 벽이 아니라 곽서준의 단단한 가슴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양씨 아주머니 1억 명이 모여서 널 배불리 먹여도 난 거덜 안 나.”

곽서준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지만 스쳐 지나가는 싫은 기색이 내 눈에 포착되었다. 뭐가 그렇게 당당해, 돈이 아무리 많아도 양씨 아주머니 월급은 내가 주는데.

나는 캐리어 손잡이를 끌고 그를 무시한 채 지나쳐갔다.

곽서준은 무표정하게 나를 가로막더니 캐리어 밑부분을 발로 차며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양씨 아주머니에게 명령했다.

“이 사람 물건 제자리에 갖다 놓으세요.”

양씨 아주머니는 얼른 미끄러지는 캐리어를 잡았고 나는 그녀가 의리 없다고 탓하지 않았다. 곽서준에게 들켜도 민망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집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니까.

“착한 개는 주인 길을 안 막아.”

곽서준과 알고 지낸 이후로 내가 뱉은 가장 독한 말이었다.

그는 내 말에 대답 대신 몸을 반쯤 굽히더니 어느 틈엔가 내 두 발이 허공에 들렸다. 그 가 나를 둘러멘 것이다.

내가 몸부림치자 그는 내 엉덩이를 찰싹 때렸고 당황한 나는 그의 어깨를 깨물며 반항했다.

이빨의 통증과 함께 순식간에 형언할 수 없는 시큰함이 내 가슴에 퍼졌고 한심하게 눈물이 투두둑 떨어졌다.

왜 나를 보내주지 않는 걸까. 배덕한 변두리에서 아내와 내연녀를 동시에 즐기고 싶은 걸까, 아니면 몰래 하는 사랑의 긴장과 짜릿함에 중독되어 버린 걸까?

나는 못된 생각으로 내 마음속 고통을 떨쳐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가 나를 침대에 던지고 몸을 덮쳐오며 내 얼굴에 마구 입을 맞추었지만 짭짤한 눈물에 닿을 뿐이었다.

“나한테 손대지 마!”

이미 혼자 해결해 놓고 또 실전까지 해대면 정력이 남아나겠나.

나는 그와 두 번 연속으로 해본 적도 없었고 솔직히 말해서 그 짓이 어떤 느낌인지도 가물가물했다.

그는 다소 놀란 눈으로 똑바로 날 바라보았다.

“아침에 나랑 못한 게 억울해서 우는 거야?”

“아니!”

내가 반박했다.

“나 당신이랑 싶지 않아. 이혼할래.”

이혼이라는 단어가 내 입에서 나왔을 때 매우 고통스럽고 슬퍼질 줄 알았는데 그렇진 않았다. 오히려 해방감이 들기까지 했다.

그동안 잘 보이기 급급해 하던 나날도 이젠 지쳤다.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난 이날을 기다려온 걸지도 모른다.

내가 그렇게 잘해줘도 왜 나한테 늘 무심한지 의아했는데 진작 그의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었던 거다.

곽서준의 얼굴에 있던 온화함은 사라지고 한없이 서늘한 차가움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윤아가 다쳐서 옆에 있어 주는데 나랑 이혼하겠다고? 안예린, 떼를 써도 용납할 수 있는 선에서 써.”

나는 차분하고 조용히 그를 바라보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곽서준, 아내가 있는 사람한테 선이 뭔지는 알아?”

“지금 나한테 선 얘기 했어? 맞선에서 바로 나한테 고백할 때 넌 여자로서 선 지켰어? 그리고 윤아는 내 동생이야. 걔랑 나는 계속 이래왔어. 그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 네가 문제인 건 아닌지 반성해 봐.”

나는 멍하니 입을 벙긋했다. 곽서준이 내가 먼저 고백한 일을 먼저 꺼낼 줄은 몰랐다.

곽서준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우연히 파티에서 ‘엄친아’의 모습으로 무대에서 연주하고 있었다.

당시 J시 상류층에서 곽씨 가문 도련님을 언급하면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나도 첫눈에 반한다는 게 뭔지 알았다.

SNS에 나만 보이는 글로 이렇게 올렸던 것까지 기억난다.

[곽서준, 내가 첫눈에 반한 사람.]

첫눈에 마음이 설렌 사람인데 어떻게 그냥 친구로만 지내겠나.

이어지는 그와의 우연한 만남은 모두 계산된 나의 노력이었고 대외적으로는 정략결혼이라며 투덜거려도 그와 함께하기 위해 얼마나 큰 노력을 했는지는 나만 알고 있었다 ...

“당신 눈에 내가 그렇게 볼품없는 여자면 우린 갈라서는 게 맞지.”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결혼식에 했던 세레나데 연주해 줘. 그럼 위자료 한 푼 안 받고 나갈게, 어때?”

4년이 지나고 [사랑의 맹세]를 다시 듣는 지금은 그때와 전혀 다른 마음이었다.

곽서준이 거실 한가운데 있는 피아노 앞에 앉아 손끝을 살짝 움직이며 건반을 문지르자 로맨틱한 세레나데 멜로디가 저택 전체에 울려 퍼졌다.

결혼식 때 곽서준이 나를 위해 피아노를 연주해 줬을 때 나는 진심으로 행복했다. 그가 지금 다시 이 노래를 연주하는 것도 행복을 위해서지만 그와 나 각자, 서로가 없는 행복을 바라고 있었다.

잠시 무아지경에 빠진 나는 그에게 쏟아지는 햇살의 잔영이 너무 밝았던 것인지, 아니면 그 자체로 충분히 빛났던 것인지 눈가에 물기가 어리며 흔들렸다.

떠날 거야!

나는 뒷걸음질 쳤다. 이대로 빠져 살아선 안 된다!

하지만 돌아서자마자 뜨거운 품에 안겼고 타오르는 열기는 마치 그가 날 필요로 한다는 착각이 들게 했다.

나는 두 번이나 몸부림쳤지만 집요했던 남자는 내가 잠깐 방심한 틈을 타 나를 피아노 위에 앉혔다.

아주 시끄러운 소리에 양씨 아주머니는 거실 커튼을 닫고 뛰쳐나갔다.

집 거실은 공공장소이면서도 사적인 공간이라는 짜릿함이 있었고 나는 그의 손에 이끌려 피아노를 연주했지만 불협화음이 들려왔다.

곡은 이제 막 연주하기 시작했고 속상한 마음에 협조하지 않자 높낮이가 다른 음들이 길고 짧게 울려 퍼졌다.

하지만 흥분한 그는 나를 피아노 끝에서 끝으로 갈 때까지 입을 맞추었고 본론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거실 전화기가 울렸다.

가문에서 온 전화였기에 곽서준은 멈출 수밖에 없었고 나는 헐떡이며 피아노 위에 엎드린 채 조금만 움직여도 소리가 나자 곽서준이 전화를 다 받을 때까지 움직이지 못했다.

그는 나를 피아노에서 안아 내려주더니 볼에 살며시 입 맞추었다.

“엄마가 오래.”

“안 가, 어차피 우리 헤어질 텐데.”

“이혼하고 싶은데 나한테 안겨?”

“억울하긴 싫어서. 당신이 밖에 있는 제비들보다는 깨끗하잖아, 게다가 공짜고.”

나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고 내가 더 이상 살갑게 굴지 않자 곽서준도 차갑게 웃었다.

“우리 결혼식 때 생각나게 하려고 우리 결혼식 노래 꺼낸 거 아니야? 내가 수작 부리는 것도 참아줬는데 날 갖고 장난쳐?”

“난 당신이 날 쫓아내려고 피아노 연주한 줄 알았는데.”

그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애정 어린 말투로 잔인한 말을 내뱉었다.

“멍청하긴, 우리가 이혼해도 내가 원하지 않으면 넌 한 푼도 못 받아.”

나에 대한 인내심엔 정도가 있는지 곧바로 평소 차갑던 얼굴로 돌아왔다.

“우리 부모님이 널 어떻게 대했는지 네가 잘 알잖아. 아빠는 몸도 안 좋으셔. 네가 억울한 게 있어도 그분들 눈에 보이지 마.”

“그럼 이참에 가서 이혼하겠다고 말씀드려.”

홧김에 한 말이란 건 나도 인정한다. 그의 부모님은 나한테 잘해주었고 곽서준과 사이가 틀어져도 어르신들에게 영향을 미칠 것까진 없었다.

곽서준은 어렸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그를 키워서 효자로 소문났기에 일부러 그의 화를 돋우려고 한 말이었다.

곽서준은 내가 진심인 줄 알고 손을 들어 내 머리를 잡아당겼다.

“한마디라도 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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