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나는 그의 말에 조용히 마음속으로 되뇌었다.모든 걸 인지하니 곳곳에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고 나에 대한 인내심은 전혀 없다는 증거가 눈에 보였다.나는 그를 꿰뚫어 보려고 잠시 그의 눈을 응시했다가 더 알아보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렸다. 이젠 기대도 안 한다.곽서준은 내가 가만히 있는 것을 보고 손을 뻗어내 손목을 잡아 끌었고 그가 나를 데리고 가는 곳이 드레스 룸이라는 걸 알고 거부감이 들었다.아침에 그가 거기서 그 짓거리를 했다고 생각하니 다시는 그곳에 발을 들여놓고 싶지 않았다.곽서준은 얼굴을 찡그리며 차갑게 말했다.“안예린, 이 꼴로 내가 널 어떻게 집에 데려가?”고개를 숙여 몸을 살피자 조금 전까지 다림질해서 입었던 옷은 그가 한 짓 때문에 구겨져서 더 이상 입을 수가 없었다.나와 곽서준 사이의 일은 아직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는데 벌써 그의 부모님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것도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나는 그렇게 자신을 설득하며 타협했다.“가서 아무거나 골라줘.”“지금 나한테 명령하는 거야?”그가 비아냥거리는 어투로 되물었고 나는 덤덤하게 받아 쳤다.“나한테 옷도 못 골라줘?”그가 나를 챙겨준 적은 없었다. 결혼한 후에도 내가 그를 보살폈다. 이제 갈라서는 마당에 그럴듯한 보상을 받아야 할 것 같다.어느새 흰색 드레스가 내 머리를 덮었고 매정한 그의 말은 무시했다.“다음부턴 없어. 다른 사모님은 이런 대우 못 받아.”다른 아내들은 그런 대접을 받지 못하지만 신윤아는 받는다.의붓동생을 살피는 건 극진하면서 나에겐 커다란 자비를 베푸는 게 된다.다른 집 남편들은 아내 발까지 씻겨주는데 옷 하나 골라주는 게 뭐 대수라고.나는 머리 위에 덮인 드레스를 끌어내린 뒤 안방으로 갔고 곽서준은 따라오지 않았다. 드레스 룸이 아주 좋은 모양이다.실크 천으로 된 드레스엔 달과 꽃이 그려져 있었고 몸에 걸치니 꽃밭을 누비는 듯 가볍게 하늘거렸다.나는 거울 앞에 서서 내 몸의 곡선을 감탄했다. 마르고 애 같은 신
신경숙은 가족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에 기뻐하며 저녁 식사 중에 방으로 가서 한 쌍의 에메랄드 귀걸이를 가져와 내게 줬다.나는 얌전히 예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신윤아의 표정이 굳어질 때쯤 그녀 앞에 내려놓았다.다들 내 행동에 신윤아의 은근슬쩍 질투 어린 얼굴을 돌아보았다.“어머님, 윤아 씨한테 줘요. 윤아 씨가 좋아하는 것 같은데 나중에 저한테 달라고 하겠어요.”신경숙은 신윤아의 어깨를 토닥이며 다시 귀걸이를 가져와 내 손에 쥐어주었다.“아니야, 얜 어려서 이런 거 못 껴.”신윤아는 입을 삐죽거리더니 밤새 참았던 눈물을 떨구었다.나는 생각만큼 모든 걸 털어버리지 못했다.난 곽서준을 사랑하고 이혼한다고 당장 그 사랑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사랑 때문에 처음으로 신윤아가 질투 났다.신윤아가 울자 내가 이겼다고 생각한 찰나 그녀에겐 든든한 지원군이 있었다.곽서준은 보석이 담긴 상자를 가볍게 쥐고 신윤아 앞에 던졌다.“어머니, 어머니 건 뒀다가 딸에게 줘요. 예린이한텐 내가 주면 돼요.”곽서준이 얼굴을 찡그렸지만 신경숙은 그가 화난 줄도 모르고 여전히 눈치 없게 말했다.“이 자식, 예린이도 내 딸인데 소유욕이 대단하네.”그가 나에 대해 무슨 소유욕이 있겠나, 내가 여동생 물건을 뺏는 게 싫을 뿐이겠지.신윤아의 얼굴에 묻는 눈물은 아직 마르지 않았고 그녀는 눈물을 닦지도 않은 채 내 앞으로 와 내 손을 잡았다.“예린 언니, 이건 언니가 가져요. 난 가질 생각 없었어요.”나는 휴지를 꺼내 그녀의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주며 진지하게 말했다.“오빠가 주는 건 받아요. 윤아 씨만 원하면 온 세상도 가져다줄 사람인데 이게 뭐라고 그래요.”오빠도 가졌으면서 못 가질 게 뭐가 있다고.나는 곁눈질로 곽서준을 바라보았고 그는 역시나 내 행동에 만족스러워했다.그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나보다 신윤아가 더 중요하겠지.여자의 싫다는 말은 갖겠다는 말인걸 신윤아가 제대로 보여준다.곧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애처럼 감정이 빠르게 바뀌더니 빙 돌아 곽서준 품
한약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곽서준은 오늘 밤 유난히 성급하게 굴었고 나는 온 힘을 다해 반격하며 결국 그의 턱에 주먹을 꽂았다.곽서준은 턱을 움켜쥐고 화가 나서 입까지 비틀어졌다.“일부러 그런 거야?”맹세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지만 이미 때린 걸 다시 되돌려주기라도 하겠나.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괜스레 화를 냈다.“앞으로 내가 널 건드릴 일 없어.”똑똑똑-한창 대치하고 있을 때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방안의 어색함을 깨고 신윤아의 달콤하고 애교 섞인 목소리가 문 너머로 울려 퍼졌다.“오빠.”나는 몸에 걸친 잠옷을 추스르고 무심한 척 일어나 앉아서 물었다.“안 나가면 안 돼?”그의 갸름한 턱이 굳게 맞물리며 눈에 담겼던 감정이 사라졌다.“대체 뭐가 문제야!”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계속되고 신윤아는 새끼 고양이처럼 울먹였다.“오빠, 자? 오빠?”곽서준은 나를 힐끗 보고 습관적으로 명령했다.“내가 올 때까지 자지 마.”그가 가고 침대에서 내려온 나는 방문을 걸어 잠갔다. 다시는 그를 기다리지 않는다.밤이 깊어지고 혼자서는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던 나는 졸음을 찾아줄 책을 찾으러 곽서준의 책장으로 걸어갔다가 책 틈새에 누렇게 변한 노트가 단단히 꽂혀 있는 걸 발견했다.저택에 올 때마다 내 눈은 거의 항상 곽서준에게 고정되어 있었기에 다른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일기라고 하기보다는 그림책에 가까웠다.글 대신 그날의 기분을 나타내는 간단한 도안이 그려져 있었다.우는 얼굴-야구.웃는 얼굴-피아노.피아노 앞에 앉아 열심히 연습하는 작은 곽서준의 모습이 일기장을 통해 보이는 것 같았다.페이지를 넘기다 보니 곽서준의 아버지가 곽서준을 키우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 같은 가정에서는 어린 시절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온갖 과외 수업으로 시간을 채우는데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그의 생활은 규칙적이었고 감정 변화도 크게 없었다. 다만 일관되게 야구를 싫어했다.더 이상 놀랄 일
나는 곽서준에게 꽃을 받아본 적이 없다. 엄마한테도, 여동생한테도 사주면서 유독 나한테는 한 번도 없었다. 꽃을 안은 내 두 손이 떨렸다.그렇게 로맨틱한 사람이 아니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는데 분명 사줄 수 있으면서! 나는 그의 뒤통수에 꽃을 던져버리며 이미 늦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두 팔에 힘이 없었고 차마 그럴 수도 없었다.차에서 내릴 때까지 나는 꽃다발을 껴안고 놓지 않았다.너무 좋았다, 정말 너무 좋았다.하지만 꽃다발 하나로 그를 용서한 건 아니었다.곽서준은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나를 잡아당겼다.“안예린, 우리 얘기 좀 해.”꽃을 품에 안고 그와 마주 섰을 때 우리 둘 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을 모르는 듯 말 없는 석고상 같았다. 그는 내 인내심을 모두 소진하고 나서야 말을 꺼냈다.“윤아가 우리 사이가 좋지 않은 걸 눈치챘어. 개인적인 일로 나와 걔 사이 망치지 마. 걔가 어떻게 생각하겠어?”나는 오히려 묻고 싶었다. 내 생각은 신경 쓰이기나 해?하지만 그가 차갑게 비난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데 내가 그와 논쟁을 벌일 필요가 있을까? 나는 그에게 정중하게 웃으며 말했다.“꽃은 고마워. 이 문제는 우리가 헤어지는 게 최선의 해결책이라고 생각해. 내 친구한테 이혼 합의서 당신 회사로 보내라고 할게. 비서한테 확인하라고 해.”농담이 아니었다. 나는 진지하게 이혼할 생각이었다.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놀랍게도 신윤아가 거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윤아는 내가 들어오는 걸 보자마자 강아지처럼 반가워하며 곧장 달려 나와 내게 슬리퍼를 건네주었고 그 움직임이 너무 커서 상처를 건드렸는지 제대로 서 있지 못하고 내 앞에 털썩 쓰러졌다.그녀는 엉덩이를 어루만지며 고통에 눈을 찌푸리더니 마침 따라 들어온 곽서준을 향해 혀를 홀랑 내밀었다.“두 사람 보고 너무 들떠서 그만 중심을 못 잡았네.”곽서준이 손을 내밀자 신윤아는 감전된 듯 몸을 피하며 회피하는 눈길로 그를 바라봤다.“괜찮아요 오빠, 나 안 아파요.”신윤아는 스스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곽서준, 내 기억이 맞다면 난 이미 당신과 이혼하겠다고 했고 당신은 더는 나한테 간섭할 자격 없어.”입을 여는 그의 목소리는 뼈가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자격이 없다고? 지금 이 시점에 이혼을 언급하는 건 우리 아버지가 빨리 죽길 바라는 거야?”그가 조롱하듯 말했다.“곽씨 가문 사모님 자리가 원하면 갖고 싫으면 버릴 수 있는 건 줄 알아?”나는 주체할 수 없는 슬픔에 애써 입꼬리를 잡아당기며 이렇게 말했다.“지금 와서 신분 운운하는 것도 웃기네. 말 안 했으면 난 이 집에 안주인이 둘인 줄 알았어.”그의 표정은 언짢은 기색이 역력했다가 다시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바뀌었다.“안예린, 비아냥거리는 거 잘하네? 갠 내 동생이야. 내가 그런 무식한 짓을 하겠어? 상상력 발휘하지 마.”“당신이 선을 넘었는지 아닌지는 몰라, 나한텐 증거가 없으니까. 하지만 걔가 선 넘게 놔뒀잖아. 곽서준, 이 가정을 조금이라도 신경 썼으면 적당히 선 그을 줄도 알아야지.”그 한마디에 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저 그를 화나게 하고 싶었는데 내 감정이 먼저 동요했다.그가 무심하게 말했다.“그동안 이렇게 지내면서도 넌 아무 말 안 했잖아.”난 당당하게 인정했다.“그래, 그래서 이젠 지쳤다고.”그는 차가운 기세를 내뿜으며 손에 든 염주를 빠르게 굴렸다.“허, 참 변덕스럽다.”난 조롱하듯 그의 손에 들린 물건을 바라봤다. 보아하니 오늘 특별히 저택에 다녀온 듯했다. 저 팔찌가 없으면 신윤아 앞에서 하루도 못 참을 테니.문밖에서 신윤아가 소리쳤다.“오빠, 나와서 약 좀 발라줄래요?”약을 발라? 저 여자가 다친 건 뒷구멍인데?잠을 제대로 못 잤기 때문인지 너무 화가 나서인지 곽서준이 나간 후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사다리에서 바로 머리부터 떨어져 기절해 버렸다.깨어나 보니 안방 침대에 누워 있었고 양씨 아주머니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내가 깨어나자마자 후다닥 밖으로 달려가더니 초록색 줄무늬 잠옷을 입은 곽서준이 느긋
“너도 즐기고 있잖아. 밖에 담벼락 밑에 있는 발정 난 암고양이가 너보다 얌전하겠어.”비아냥거리는 남자의 얼굴엔 의기양양한 기색이 역력했다.“내가 그런 게 아니야. 내 물건이 그런 거지.”그는 내 뺨을 손으로 감싸며 고개를 숙여 보게 했다.“날 사랑하는 거야 내 물건을 사랑하는 거야?”나는 참지 못하고 복수심에 그의 입술을 깨물었고 그의 몸은 순식간에 굳어졌다. 나는 힘없이 웃으며 물었다.“여보, 그럼 나 사랑해?”멈칫한 곽서준의 시선이 탁한 공기를 뚫고 내 얼굴로 향했다. 나는 그가 물러서려는 것을 알고 무의식적으로 그를 더 꽉 껴안았다. 그의 목울대가 일렁거리며 필사적으로 쾌락을 참으려는 고통스러운 표정이 그를 딜레마에 빠뜨렸다. 난 이렇게 행복한 순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여자로서 이도 저도 아닌 상태가 제일 불쾌한지라 얼른 손을 뻗어 그의 입술을 막았다.그는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고개를 돌려 내 손가락을 깨물었고 곧 거센 폭풍우처럼 세차게 몰아치며 갈구했다.그가 세게 빨고 있어 빼낼 수 없었던 나는 다른 손으로 내 입을 막고 수치스러운 신음을 속으로 삭혔다.모든 걸 끝마치고 난 그의 손에 이끌려 욕조에 들어가고 그는 옆에 서서 샤워했다. 욕조에 엎드린 채 손을 뻗어 그의 남성적인 다리털을 뽑으려다 문득 어딘가를 보고 흠칫 몸을 떨며 고개를 돌렸다.그는 툭 삐져나온 내 손을 발로 차고 물소리와 섞여 제대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안예린, 애들 사랑은 집어치워. 사모님 자리로 부족해? 오늘 아주 즐거웠어. 앞으로 관계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윤아 없을 때마다 너랑 할게.”그가 오늘 만족스러워하는 게 느껴졌고 말끝에 웃음기가 담겨 있는 부드러운 말투는 내게 자비를 베풀어주는 것 같았다.하지만 난 무척 거슬렸다.욕조 가장자리를 잡고 있던 손이 그리 크지 않은 그의 목소리에 움찔했다.사실 그는 나한테 잘해주는 편이다. 우리 집안 회사를 도와주는 데는 주저하지 않았고 통이 컸다.좋은 남편은 아니었지만 매우 매너 있고 나
“엄마!”그녀는 참지 못하고 덩달아 울음을 터뜨렸다. 며칠간의 서러움이 북받쳐 그대로 쏟아버렸다.“더 의미가 없다면요? 엄마, 그 사람 마음엔 내가 없어요!”허민란은 한숨을 내쉬었다.“딸아, 남자의 마음이 너한테 없다면 그건 네 문제야. 더 늦기 전에 아이를 낳아야 네 입지가 안정될 거야.”나는 힘없이 웃었다.내가 문제라고?결국 남자가 돈을 못 벌면 여자 복이 없는 거고 남자가 집에 돌아오지 않으면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한 여자 탓이다.어느 쪽이든 여자의 문제였다!곽서준이 나를 함부로 대해도 참을 수 있었지만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핏줄인 엄마가 더 실망스럽게 했다.“엄마, 내 행복은 ...”내가 울먹이는데 그녀가 말을 끊었다.“안예린! 너 때문에 엄마가 무릎 꿇게 할 거야?”...엄마는 나한테 무릎을 꿇고 그것도 안 되면 머리를 조아리겠다고 했다.말하고 싶었다.왜 내가 곽서준과 싸우고 나니 회사에 문제가 생겼을까.나조차도 알아낼 수 있는 것을 그녀는 알아내지 못할까?열 손가락을 머리카락에 파묻고 고통스럽게 긁어봐도 나는 선택지가 없었다.나는 휴대폰을 들고 곽서준에게 전화를 몇 번이나 걸어도 전화를 받는 사람이 없었다.나는 휴대폰을 조수석에 내려놓고 가속페달을 밟아 그의 사무실로 향했다.아래층에 있던 안내원은 친절하게 맞아주었지만 위층으로 올라가자 그의 비서가 문 앞에서 나를 막았다.“사모님, 여기서 잠시 기다리세요. 사장님께 여쭤볼게요.”고 비서는 나와 자주 마주치며 줄곧 예의 바르게 대했고 말할 때 상대방의 눈을 쳐다보는 습관이 있는데 지금은 내 눈을 피했다.“곽서준이 나 안 만난다고 했어요?”“아, 그건 아니고요.” 그녀는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면서도 이따금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순간 불길한 예감이 밀려오며 그녀를 밀쳤다.“언제부터 내가 내 남편을 만나는 데 허락이 필요했나요?”“사모님!” 그녀는 유난히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내 뒤를 바짝 따라오더니 이렇게 말했다.“사모님, 저희 난처하게
허민란의 앞에서 큰소리치던 몇몇 남자들은 껄껄 웃으면서도 위압감이 넘치는 부남철의 모습에, 겁에 질린 표정으로 자리에 앉지도 못했다.“특수한 상황에 부닥쳤으면 그에 맞는 특별한 대책 마련 방안을 찾아야지.”부남철은 웃으면서 옆에 있는 남자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카리스마 넘치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내가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쳐줘야 하나?”“아... 아니에요, 제가 양아빠한테 한 잔 따라 드릴게요. 오늘 오실 줄 알았다면 차에서 내리실 때부터 무릎을 꿇고 기다려야 했는데 말이죠.”안예린은 허민란의 몸이 떨리는 것을 보고 얼른 손을 잡아 부축했고, 허민란은 과음해서인지 계속 부남철을 뚫어져라 쳐다봤다.순간 체면을 지켜줘야 앞으로도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곽서준의 말이 떠오른 안예린은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사람들의 화가 자기들 쪽으로 쏠려 허민란의 사업이 더욱 어려워질까 봐 걱정되었다.그녀는 결국 허민란의 술잔을 빼앗아 들더니 나머지 사람들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연신 술을 들이켰다.얼마 지나지 않아, 술이 바닥이 났고 사람들의 화도 점차 수그러들었다.그녀는 그제야 부남철한테 무릎까지 꿇은 게 헛되지 않았다는 것과 곽서준의 도움 없이도 허민란을 지켜냈다는 뿌듯함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다.‘내가 3일 이내에 굽히고 들어갈 거라고? 어림도 없지, 이혼 합의서에 도장을 찍을 준비나 하라고 해!’부남철은 안예린이 고마움에 눈물을 흘리는 걸로 착각하고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예린아, 바래다줄 필요 없어. 다음에 네 남편이랑 같이 차 한잔해.”곧이어 그는 끝까지 자기를 차 앞까지 바래다주는 그녀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리면서 말했다.“우리 예린이 이제 다 컸네, 다 컸어!”부남철은 거친 손으로 눈가를 닦으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이제 혼자서도 척척 모든 일을 해내는 널 네 아빠가 하늘에서 보면 얼마나 흐뭇해하고 마음이 놓일 거야!”안예린은 술을 마신 데다가 아빠의 얘기가 나오자, 갑자기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그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