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입력하던 소리가 멈추더니 이내 분노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문 열어.”안예린은 바닥에 엎드린 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동시에 원망이 가득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곽서준, 그만 돌아가.”그러나 이번에는 현관문 밖에서 신윤아의 경쾌한 목소리가 들렸다.“예린 언니, 저예요! 아주머니께서 언니가 걱정된다고 저희한테 와보라고 했어요!”그녀는 깨질 듯이 아픈 머리를 바닥에 살짝 부딪히면서 생각했다.‘곽서준은 내가 신윤아 때문에 화난 걸 알면서도 여기까지 데리고 온 이유가 뭐야! 그리고 집 비밀번호를 풀기가 그렇게 어려운가?’그녀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곽서준은 곧장 비서한테 연락해서 자물쇠 수리공을 불러라고 했다.결국 안예린은 현관문이 부서지는 걸 용납할 수 없어서 밖을 향해 소리쳤다.“아가씨, 당신 오빠랑 단둘이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그녀의 한마디에 신윤아는 억울한 듯 울먹거렸다.“예린 언니, 나 이제 미워요? 내가 부족한 점이 있다면 고칠게요, 네?”예전에 신윤아가 울먹이는 소리로 말했다면 발 벗고 나섰겠지만, 지금은 오히려 곽서준의 시선을 끌려고 일부러 그러는 것 같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안예린은 간신이 자리에서 일어나 도어 뷰어를 통해 곽서준이 몸을 굽혀 신윤아를 달래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았다.“윤아야, 먼저 차에 가서 오빠 기다려, 금방 내려갈게.”결국 그는 신윤아의 어깨를 잡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서 버튼을 눌렀다.안예린은 시야에서 사라진 두 사람을 보고 눈시울이 붉어졌고 바닥에 웅크리고 앉으며 추운지 몸을 꼭 끌어안았다.이때 문밖에서 곽서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네가 문을 열래, 아니면 비서한테 사람을 불러라고 할까?”안예린은 한숨을 내쉬며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비밀번호는 내 생일이야.”곧이어 비밀번호를 누르던 소리가 두 번 정도 들리더니 다시 조용해졌다.안예린은 자기의 생일도 기억 못 하는 그에게 실망했지만, 할 수 없이 문을 빼꼼히 열고 경계하는 눈빛으로 물었다.“무슨 일 있어
안예린이 숨을 크게 몰아쉬면서 고개를 들어보니 곽서준은 온몸이 젖은 채로 화보를 찍는 것처럼 욕조에 걸터앉아 있었다.그녀는 결국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그의 가슴팍을 때렸고, 곽서준은 그녀의 몸부림을 한 손으로 제지하면서 태연하게 옷을 벗기 시작했다.“우리가 같이 살 수 있는지 아닌지는 내가 정해. 그리고 내가 당신이랑 잠자리를 가지든 말든 당신이 조롱할 수 없어.”그는 곧장 한 손으로 안예린의 뒤통수를 잡고 입술을 탐했고, 거친 그의 행동은 마치 그녀의 노력과 반항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과 그녀가 자기를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계속되는 막무가내의 행동에 그녀의 입술 감각은 사라진 지 오래였고 그의 굳은 표정에 그녀는 아무런 반항도 못 하고 온몸을 떨면서 눈물만 흘렸다.그러나 곽서준은 그녀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고 이 상황이 짜릿한지 계속 몰아붙였고, 안예린은 결국 손을 들어 눈물을 닦으며 조용히 그를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내가 당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해서 날 막무가내로 괴롭히는 거지? 곽서준, 근데 어쩌나? 나 이제 너 안 좋아해!”“네 마음대로 생각해, 지금은 내 밑에서 최고의 호사를 누리면 되는 거 아니야?”...다음 날 점심, 안예린은 끊어질 듯 아픈 허리를 움켜쥐면서 잠에서 깼고 바닥 곳곳, 화장대와 창문에 선명한 물 자국이 남아있는 것을 보고 어젯밤 두 사람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그녀는 문득 어젯밤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한마디에 그가 복수심에 눈이 멀어 더욱 과격한 행동을 한 것이 떠올라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짜면서 절규했다.“곽서준!”때마침 침실 문이 열리더니 곽서준이 한 손에 그녀의 핑크색 머그잔을 들고 문에 기대면서 담담하게 말했다.“나 죽지 않았어.”안예린은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놀라서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물었다.“너 왜 아직도 여기 있어?”이때 그가 그녀의 몸을 위아래로 훑으면서 조롱하는 말투로 반문했다.“네가 날
하도현은 점잖고 예의 바른 유학파였고 정장에 넥타이를 맨 그의 모습은 성숙하고 유아하기 그지없었다.안예린은 정장을 입은 그의 모습이 곽서준과 매우 비슷하고 침착한 성격도 닮아서 자꾸만 머릿속에 그가 떠올라 미칠 지경이었다.그러나 모든 사람과 일을 꿰뚫어 보는 눈을 가진 곽서준과 달리 하도연의 눈매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이 편안해지게 만들었다.곧이어 면접이 시작되었고 안예린은 비소송 변호사가 되기를 원했고, 법률사무소에서는 오히려 그녀가 소송 업무를 맡기 원해서 초반에 충돌이 조금 생겼다.하도현은 담담한 태도로 안예린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예린 씨도 다은 씨처럼 법정에서 승소하는 쾌감을 맛보고 싶지 않나요?”“도현 씨의 말처럼 소송 변호사를 하면 독립적으로 사고하는 기회가 많아져서 빨리 성장할 거예요.”안예린도 소송 변호사를 하면 사건 단서를 찾는 것과 소송에 이기는 과정이 전적으로 자기에게 달려있지만, 비소송 변호사의 길을 택한다면 팀 내에서 역할 분담을 확실히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게다가 그녀는 하도현이 아직 자기에 대한 신뢰도가 많이 쌓이지 않은 상황에서 무턱대고 우기기보다 힘들게 주어진 기회에 감사하며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하도현은 이제야 환하게 웃으며 안예린에게 그녀의 이름이 적힌 명함을 건넸다.“4년 전에 예린 씨를 위해 프린트 해놨어요.”얼마 후, 안예린이 법률 사무소를 나왔고 때마침 고 비서가 그녀를 향해 뛰어오면서 간단하게 인사한 후 봉투 하나를 건넸다.“사모님, 대표님께서 전해주라고 하셨어요.”그녀는 고 비서의 뒤로 밴 한 대가 길가에 주차된 걸 발견했고 차 안에 곽서준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 한숨을 내쉬었으며 이내 눈살을 찌푸리면서 물었다.“이게 뭐죠?”고 비서는 싱긋 웃으면서 안예린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대표님께서 사모님한테 주는 답례품이라고 하셨어요. 분명히 좋아할 거라면서 자세히 살펴보길 바란다고 하시던데요.”안예린은 갑작스러운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렸다.‘답례품이라고?
곽서준이 건넨 청구서는 안예린에게 이혼하고 싶으면 돈부터 갚는 게 인지상정이라는 걸 보여줬다.안예린은 그제야 허민란이 왜 두 사람의 이혼을 극구 반대했는지를 깨달았고 지난 4년 동안 자기가 곽씨 가문에 팔려 간 셈이란 걸 뼈저리게 느꼈다.얼마 후 그녀가 어두운 표정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디면서 가성으로 돌아오자, 카운터 아가씨와 하도현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소송으로 돈을 버는 건 급전이 필요한 현시점에서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생각에 하도현을 향해 애써 웃으면서 말했다.“죄송하지만, 비소송 변호사의 자리를 다시 한번 쟁취해 보고 싶네요.”하도현은 어두워진 그녀의 안색에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무슨 일 있어요? 저도 예린 씨가 만약 졸업 예정자였다면 화려한 이력서에 혹해서 앞뒤 안 가리고 빼앗았을 거예요.”그는 곧이어 한 손으로 금테 안경을 살짝 올리면서 조심스레 말을 이어 나갔다.“하지만 4년의 긴 공백기가 있어서... 예린 씨도 알겠지만, 우리 업종이 경력을 제일 중요하게 여기잖아요. 아무리 전에 승소 확률이 높다고 해도 탁상공론하고 그 누구도 믿지 못할 거예요.”안예린은 하도현의 여태껏 사업하면서 이룬 성과들을 들으면서 그가 지금 필요로 하는 건 경력 단절인 그녀보다는 베테랑 변호사라는 걸 알았고 이대로는 어렵게 얻은 기회가 수포가 될 것 같은 위기감에 그가 얘기했던 인수합병 프로젝트를 받아치면서 자신만만하게 말했다.“엄청나게 잘됐네요. 전 제가 가진 우세로 우리 고객님들에게 완벽한 법률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어요.”그러면서 그녀는 그동안 곽서준의 아내로 지내면서 사업계와 정치계의 거물들을 접했다는 것과 자본 시장, 지분 투자, 자산 증권화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면서 가성처럼 큰 법률사무소에서 앞으로 이와 관련된 업무 비중이 늘어날 거라면서 아부를 떨었다.하도현이 그녀의 얘기에 흥미를 보이면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자, 그녀는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또다시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그러면 예린
검은 정장을 입고 나타난 심문혁은 안예린의 맞은편에 앉으면서 하도현과 오랫동안 알고 지낸 호형호제처럼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한참이 지나서야, 심문혁은 그녀에게 눈길을 주었고 얄밉게 팔짱을 끼면서 야유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어머, 예린이 아니야? 네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여기에 있어?”그녀가 심문혁을 마지막으로 본 건, 올해 초 그가 곽씨 가문에 세배하러 왔을 때였다.사실 곽씨 가문과 심씨 가문은 대대로 깊은 친분이 있었고, 안씨 가문과 심씨 가문 또한 친하게 지냈다.게다가 어른들이 어려서부터 두 사람을 엮으려고 했지만, 죽마고우임에도 서로에 대한 호감보다는 질투심에 불타 만나기만 하면 싸워댔다.바야흐로 두 사람이 초등학교 1학년이었을 때, 안예린이 시험에서 20점을 높게 맞았다는 이유로 심문혁은 부모님께 매를 맞게 되었고 다음 날 그가 복수심에 그녀의 머리를 심하게 쥐어뜯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장 집에 돌아가 일러바쳤고 결국 그는 또 그의 아버지의 가죽 채찍에 한바탕 얻어맞을 수밖에 없었다.그 이후로 두 사람 사이의 앙금은 점점 더 깊어졌고, 한번은 그가 생리대를 훔쳐 가는 바람에 그녀는 반 전체 남학생들 앞에서 망신을 당했었고, 그녀도 곧 질세가 그가 여학생한테 쓴 연애편지를 몰래 훔쳐서 그의 어머니한테 줘서 그가 가족 앞에서 편지를 낭독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었다.오랫동안 승패를 가리지 못했던 두 사람이었지만, 안예린은 심문혁의 등장에 승자가 그였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곧이어 그녀는 하도현이 4년 전 만들었다는 명함도 자기에 대한 중시가 아니라는 것과 4년 동안 하도현이 양다은을 설득해 직장에 다시 복귀하도록 한 것도 모두 심문혁의 계략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화가 나는 대신 오히려 감탄하면서 말했다.“정말 오랫동안 준비했나 보네.”“네 머리가 녹슬지 않았더라면, 더 빨리 걸려들었을 거야.”심문혁은 자기의 승리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듯 계속 투덜거렸다.그러나 안예린은 눈을 부릅뜨고 그를 보면서 몇 년 전, 그가 자기의 결혼
불같은 성격이었던 심문혁은 이제 죽마고우에 대한 복수심도 4년 뒤로 미룰 수 있을 정도로 속을 알 수 없게 변했다.안예린은 무의식적으로 옆에 앉아 있는 하도현을 힐끗 쳐다봤고, 그의 평온한 표정으로 보아 두 사람의 관계를 애초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심문혁은 곧이어 팔짱을 끼면서 입꼬리를 말아 올리면서 웃었다.“이제 나한테 복종할 수 있겠어? 굳이 패배를 인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대신 네 앞에 놓인 고량주 두 병을 마신 후, 큰 소리로 내가 네 오빠라고 말하면 돼. 그러면 내가 군소리 없이 널 보내줄게.”예전의 그녀였다면 모욕적인 말에 분을 이기지 못하고 그의 얼굴에 술을 뿌린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멋지게 자리를 떠났겠지만, 지금은 곽서준에게 174억 원이나 되는 빚을 갚아야 하는 신세였기에 쉽사리 제멋대로 행동할 수 없었다.안예린은 결국 애써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그래, 내가 졌어. 그러니까 네 말은 이 술만 다 마시면 하 변호사님의 팀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거지?”안예린은 53도가 넘는 고량주를 마시면 식도와 위가 타들어 갈 듯이 고통스럽다는 걸 알면서도 망설임 없이 술잔을 들었다.“알겠어, 마실게! 문혁 도련님, 잘 봐!”심문혁한테 패배를 인정하는 것보다 돈과 자유가 없는 것이 더 두려웠던 그녀는 냉큼 고개를 젖히면서 한 잔을 원샷했고, 예상대로 칼날 같은 술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면서 따가웠고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벌리면서 낮은 탄성을 냈다.하도현은 그녀를 말릴 생각도 없이 태연하게 팔짱을 끼고 상황을 지켜보았지만, 일부러 그녀를 괴롭히면서 난처하게 만들고 싶었던 심문혁은 갑작스러운 그녀의 수긍에 두 손을 탁자 위에 올리고 의자를 뒤로 젖히면서 다급하게 소리쳤다.“안예린, 너 정말! 그래, 네 말대로 이 두 병을 다 마시면 내가 널 그 팀에 들여보내 줄게. 게다가 네가 두 병 더 마신다고 하면 그의 자리를 내어줄 생각도 있어. 그 이후로 네가 수천억 규모의 소송 프로젝트를 망친다고 해도 아무 말도 안 할게.”그녀도 하도현이
사실 안예린이 술을 못 마시는 건 아니었지만, 오늘은 너무 급하게 마신 탓에 취기가 올라오면서 머리가 어지러워 났다.때마침 몸을 뒤로 젖히면서 양손을 주머니에 넣는 심문혁을 본 그녀는 순간 기억 속에 사라져가던 그의 소년미가 다시 살아나는 것 같은 느낌이었고 저도 모르게 갑자기 눈시울이 시큰거렸다.‘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곽서준이랑 결혼하지 않았다면 지금 이렇게 골치 아픈 일이 없었을까? 대체 누가 나한테 고백할 용기를 주었지?’그녀는 문득 심문혁과 싸우던 어렸을 때로 돌아가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곧이어 안예린은 다 마신 술병을 테이블 위에 거꾸로 세워놓고 손을 뻗어 다른 병을 집어 들려 했지만, 앞이 두 개로 보이는 데다가 힘이 풀려 병이 열리지도 않았다.손사래를 치는 심문혁과 달리 안도현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술병을 가져다가 열어준 뒤 다시 앞에 놓으면서 상냥하게 말했다.“예린 씨, 천천히 마셔요.”그녀가 망설임 없이 술병을 빼앗으려고 했지만, 그는 계속 놓아주지 않았다.“빨리 줘요, 지금 뭐 하는 거죠?””좀 쉬었다가 마셔도 괜찮아요.”그러나 심문혁은 그의 걱정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도현 씨, 내가 아는 당신은 좋다고 따라다니는 여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거절하는 사람인데, 예린이랑은 대체 무슨 사이죠?”하도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쓴웃음을 지었고 더 이상의 오해를 피하고자 자리에 다시 앉으면서 답했다.“모르는 사이에요.”안예린은 두 사람의 대화에 신경 쓰지 않고 병을 움켜쥐더니 다시 마시기 시작했다.하지만 잠깐 쉬고 나서 마신 탓인지 두 모금을 마시자, 속이 울렁거렸고 이내 허리를 굽혀 토를 했다.그녀는 심드렁한 표정의 심문혁을 보고는 얼른 손을 들어 바닥에 떨어진 내용물을 닦은 후, 그의 마음이 바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러 술병을 다시 들고 마셨다.이때, 심문혁이 참다못해 성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계속 마시려고?”“
나는 결혼식을 망쳤던 그를 볼 때마다 일부러 애정을 과시하곤 했다. 결국 그를 속이며 나 자신도 속였다.곽서준이 나를 위해 돈을 쓰지 않는 게 아니라, 오히려 너무 많이 써서 차마 갚을 수 없다고 알려주고 싶었다.비록 정신은 맑았지만 입이 떼어지지 않는 탓에 말을 하지 못하고 낮게 흐느꼈다. 몸은 마치 뼈가 없는 것처럼 바닥으로 축 늘어졌다.“젠장!”심문혁은 뒤로 나를 감싸안더니 거의 몸이 90도로 접히듯 두 손으로 위를 눌렀다. 하도현도 머리를 누르자 술이 코와 입으로 역류하는 느낌이었다.“나 너무 괴로워…” 나는 눈이 따가워 차마 뜰 수가 없었다. “이러지 마… 죽을 것 같아.”술기운이 심문혁의 목을 타고 귀끝까지 번져갔다. 그는 힘을 주어 나를 끌어안으며 내 위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자극하며 구토를 유도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부드러움이 묻어 있었다. “닥쳐, 이 망할… 입 좀 조심해…”“심문혁, 너 미워! 아빠한테 널 혼내라고 할 거야. 나 너무 괴로워…”고 비서는 문을 열더니 바삐 두 손가락으로 눈을 가렸다. 눈앞의 광경에 어찌할 바를 모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사모님… 사모님께서 문혁 씨 허벅지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 앞에는 또 다른 남자가 사모님의 머리를 누르고 있고…”그녀는 갑자기 외쳤다. “빨리, 그만 놓으세요! 곽 대표님께서 오셨어요!”곽 대표? 곽서준?나는 고개를 비스듬히 돌렸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곽서준이 차가운 기운을 풍기며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순간, 내 눈에서 눈물인지 술인지 모를 액체가 흐르기 시작했다.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곽서준의 잠잠한 눈동자는 유난히 차가워 보였다. 그는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냉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 하는 짓이야?”눈앞의 모습이 보기 좋지 않았을 것이다. 방 안의 조명은 정직한 행동에 약간의 야릇함을 더했다. 그러나 심문혁과 하도현은 여전히 손을 놓지 않았다.심문혁의 차가운 목소리가 내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당신 아내가 나한테 돈 구걸하러 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