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같은 성격이었던 심문혁은 이제 죽마고우에 대한 복수심도 4년 뒤로 미룰 수 있을 정도로 속을 알 수 없게 변했다.안예린은 무의식적으로 옆에 앉아 있는 하도현을 힐끗 쳐다봤고, 그의 평온한 표정으로 보아 두 사람의 관계를 애초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심문혁은 곧이어 팔짱을 끼면서 입꼬리를 말아 올리면서 웃었다.“이제 나한테 복종할 수 있겠어? 굳이 패배를 인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대신 네 앞에 놓인 고량주 두 병을 마신 후, 큰 소리로 내가 네 오빠라고 말하면 돼. 그러면 내가 군소리 없이 널 보내줄게.”예전의 그녀였다면 모욕적인 말에 분을 이기지 못하고 그의 얼굴에 술을 뿌린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멋지게 자리를 떠났겠지만, 지금은 곽서준에게 174억 원이나 되는 빚을 갚아야 하는 신세였기에 쉽사리 제멋대로 행동할 수 없었다.안예린은 결국 애써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그래, 내가 졌어. 그러니까 네 말은 이 술만 다 마시면 하 변호사님의 팀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거지?”안예린은 53도가 넘는 고량주를 마시면 식도와 위가 타들어 갈 듯이 고통스럽다는 걸 알면서도 망설임 없이 술잔을 들었다.“알겠어, 마실게! 문혁 도련님, 잘 봐!”심문혁한테 패배를 인정하는 것보다 돈과 자유가 없는 것이 더 두려웠던 그녀는 냉큼 고개를 젖히면서 한 잔을 원샷했고, 예상대로 칼날 같은 술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면서 따가웠고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벌리면서 낮은 탄성을 냈다.하도현은 그녀를 말릴 생각도 없이 태연하게 팔짱을 끼고 상황을 지켜보았지만, 일부러 그녀를 괴롭히면서 난처하게 만들고 싶었던 심문혁은 갑작스러운 그녀의 수긍에 두 손을 탁자 위에 올리고 의자를 뒤로 젖히면서 다급하게 소리쳤다.“안예린, 너 정말! 그래, 네 말대로 이 두 병을 다 마시면 내가 널 그 팀에 들여보내 줄게. 게다가 네가 두 병 더 마신다고 하면 그의 자리를 내어줄 생각도 있어. 그 이후로 네가 수천억 규모의 소송 프로젝트를 망친다고 해도 아무 말도 안 할게.”그녀도 하도현이
사실 안예린이 술을 못 마시는 건 아니었지만, 오늘은 너무 급하게 마신 탓에 취기가 올라오면서 머리가 어지러워 났다.때마침 몸을 뒤로 젖히면서 양손을 주머니에 넣는 심문혁을 본 그녀는 순간 기억 속에 사라져가던 그의 소년미가 다시 살아나는 것 같은 느낌이었고 저도 모르게 갑자기 눈시울이 시큰거렸다.‘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곽서준이랑 결혼하지 않았다면 지금 이렇게 골치 아픈 일이 없었을까? 대체 누가 나한테 고백할 용기를 주었지?’그녀는 문득 심문혁과 싸우던 어렸을 때로 돌아가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곧이어 안예린은 다 마신 술병을 테이블 위에 거꾸로 세워놓고 손을 뻗어 다른 병을 집어 들려 했지만, 앞이 두 개로 보이는 데다가 힘이 풀려 병이 열리지도 않았다.손사래를 치는 심문혁과 달리 안도현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술병을 가져다가 열어준 뒤 다시 앞에 놓으면서 상냥하게 말했다.“예린 씨, 천천히 마셔요.”그녀가 망설임 없이 술병을 빼앗으려고 했지만, 그는 계속 놓아주지 않았다.“빨리 줘요, 지금 뭐 하는 거죠?””좀 쉬었다가 마셔도 괜찮아요.”그러나 심문혁은 그의 걱정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도현 씨, 내가 아는 당신은 좋다고 따라다니는 여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거절하는 사람인데, 예린이랑은 대체 무슨 사이죠?”하도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쓴웃음을 지었고 더 이상의 오해를 피하고자 자리에 다시 앉으면서 답했다.“모르는 사이에요.”안예린은 두 사람의 대화에 신경 쓰지 않고 병을 움켜쥐더니 다시 마시기 시작했다.하지만 잠깐 쉬고 나서 마신 탓인지 두 모금을 마시자, 속이 울렁거렸고 이내 허리를 굽혀 토를 했다.그녀는 심드렁한 표정의 심문혁을 보고는 얼른 손을 들어 바닥에 떨어진 내용물을 닦은 후, 그의 마음이 바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러 술병을 다시 들고 마셨다.이때, 심문혁이 참다못해 성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계속 마시려고?”“
나는 결혼식을 망쳤던 그를 볼 때마다 일부러 애정을 과시하곤 했다. 결국 그를 속이며 나 자신도 속였다.곽서준이 나를 위해 돈을 쓰지 않는 게 아니라, 오히려 너무 많이 써서 차마 갚을 수 없다고 알려주고 싶었다.비록 정신은 맑았지만 입이 떼어지지 않는 탓에 말을 하지 못하고 낮게 흐느꼈다. 몸은 마치 뼈가 없는 것처럼 바닥으로 축 늘어졌다.“젠장!”심문혁은 뒤로 나를 감싸안더니 거의 몸이 90도로 접히듯 두 손으로 위를 눌렀다. 하도현도 머리를 누르자 술이 코와 입으로 역류하는 느낌이었다.“나 너무 괴로워…” 나는 눈이 따가워 차마 뜰 수가 없었다. “이러지 마… 죽을 것 같아.”술기운이 심문혁의 목을 타고 귀끝까지 번져갔다. 그는 힘을 주어 나를 끌어안으며 내 위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자극하며 구토를 유도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부드러움이 묻어 있었다. “닥쳐, 이 망할… 입 좀 조심해…”“심문혁, 너 미워! 아빠한테 널 혼내라고 할 거야. 나 너무 괴로워…”고 비서는 문을 열더니 바삐 두 손가락으로 눈을 가렸다. 눈앞의 광경에 어찌할 바를 모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사모님… 사모님께서 문혁 씨 허벅지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 앞에는 또 다른 남자가 사모님의 머리를 누르고 있고…”그녀는 갑자기 외쳤다. “빨리, 그만 놓으세요! 곽 대표님께서 오셨어요!”곽 대표? 곽서준?나는 고개를 비스듬히 돌렸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곽서준이 차가운 기운을 풍기며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순간, 내 눈에서 눈물인지 술인지 모를 액체가 흐르기 시작했다.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곽서준의 잠잠한 눈동자는 유난히 차가워 보였다. 그는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냉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 하는 짓이야?”눈앞의 모습이 보기 좋지 않았을 것이다. 방 안의 조명은 정직한 행동에 약간의 야릇함을 더했다. 그러나 심문혁과 하도현은 여전히 손을 놓지 않았다.심문혁의 차가운 목소리가 내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당신 아내가 나한테 돈 구걸하러 왔
나는 마치 구름 위를 떠다니는 것 같았다. 바람조차도 부드러워진 것 같았고 호흡도 방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편해졌다. 갑자기 머리가 무언가에 부딪히며 잠에서 깼다. 별로 아프다는 느낌은 없었지만 충격에 정신이 들었다. 하지만 잠깐일 뿐 곧 다시 눈을 감자 누군가 내 뺨을 꼬집었다. 나는 다리 옆으로 축 늘어진 손을 휘저으며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심문혁… 문혁아… 제발… 출근해야 해.” 갑자기 얼굴에 고통이 느껴지더니 주변 온도가 급격히 떨어지며 추워서 몸이 떨려왔다. “안예린, 눈 똑바로 뜨고 누군지 똑똑히 봐!” 눈을 떴더니 어느새 내 앞에는 곽서준이 서 있었다. 그는 새까만 눈동자로 깊게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꿈속처럼 고요한 분위기 속에 뜨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여보?” 나는 그의 목에 팔을 감싸안으며 반복해서 여러 번 불렀다. “여보, 여보, 심문혁 너무 나빴어. 혼내줘!” 나는 그의 목에 얼굴을 파묻은 채 당장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처럼 다급했다. “왜 대답 안 해?” 그는 새까만 눈동자로 날카롭게 나를 응시하며 차 창문 쪽으로 밀어붙였다. “예린아, 내 말 듣고 있어? 내가 너 하나 책임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 그래서 굳이 나가서 일하겠다고 한 거야? 그것도 심문혁 밑에서?” 그의 목소리는 차가웠고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일하는 게 뭐가 좋은데? 힘들고 돈도 못 벌잖아.” “네가 입고 있는 것, 손에 끼고 있는 것, 어느 하나 빠뜨린 적 있어? 네 한 달 월급으로 이거 하나 살 수 있겠어?” 곽서준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울려 퍼졌다. “안예린, 너 지금 나 제대로 건드렸어!” 그는 솟구치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내 턱을 잡은 손에 힘을 꽉 줬다. 당장이라도 턱이 부서질 것같이 아팠다. 나는 가늘게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칼날처럼 날카로워 곧 나를 베어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그저 입 모양만 보일 뿐 표정은 무서웠다.
나는 사랑에 대한 환상이 있지만 권문세가의 혼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다. 우리 같은 계층에서 사랑을 찾아보기 어렵다.그가 차라리 대놓고 신윤아를 껴안고 내 앞에서 키스하며 나한테 애정이 없다고 말해준다면 지난 4년간의 일방적인 사랑을 솔직하게 마주할 수 있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처럼 애매모호한 태도, 양다리를 걸치고도 인정하지 않는 상황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예전에 내가 눈이 멀지 않고서야 신윤아의 눈에 넘쳐흐르는 소유욕을 보지 못했을 리 없다.그녀는 여전히 순진한 모습으로 곽서준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오빠, 어제 왜 안 돌아왔어? 계속 예린 언니랑 함께 있었어?”곽서준은 고개를 돌려 힐끗 쳐다보았다. 우리의 시선은 허공에서 마주쳤다.그의 몸에 매달려 있던 신윤아도 기쁜 표정을 지으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신윤아는 곽서준의 어깨를 힘껏 두드리며 신나게 말했다.“오빠, 가자! 예린 언니한테 가자!”“함부로 굴면 안 돼.”곽서준은 무심하게 한 마디 내뱉고 여전히 신윤아를 안은 채 집 쪽으로 걸어갔다.나는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단 한 번의 눈빛 교환으로 어젯밤 잃어버렸던 기억의 조각들이 서서히 돌아왔다.전동 의자가 뒤로 젖혀지며 나는 그의 다리 위로 끌려갔다.천과 천이 스치는 소리는 야릇하고도 위험하게 들려왔다. 사부작거리는 소리는 그가 무얼 하고 있는지를 짐작 가능하게 했다.그는 내 허리에 손을 둘러 내 상반신은 어렵게 핸들에 기대어 있었다.얇은 천 한 겹은 그의 뜨거운 몸을 가리지 못했다. 허리와 복부의 움직임에 나는 그가 애써 참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곽서준!”나는 본능적으로 말했다. “나 불편해.”애타는 목소리는 애써 참았던 그를 더 힘들게 만들었다.그는 손을 뻗어 차 안의 백미러 각도를 조정했다. 순간 내 몸이 부끄러운 각도로 벌어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그의 것이 나를 불편하게 찔렀다. 그는 여유롭게 물었다.“남자가 돈 벌
됐어, 그냥 미친개한테 물렸다고 생각하자. 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오직 하도현 팀에 들어가는 생각뿐이었다. 심문혁이 괜히 술 먹게 했을 리 없겠지.심문혁에게 전화 걸기 여전히 쑥스러웠다. 나는 카톡을 열어 그의 계정을 차단 목록에서 해제하고 메시지를 보낼까 말까 고민하다 결국 보내지 않기로 했다. 결국 하도현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항상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예린 씨, 로펌으로 와서 얘기하시죠.” 일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갔다. 나는 거울 앞으로 비틀거리며 다가갔고 마치 곽서준에게 양기를 빨린 귀신처럼 보였다. 게다가 마침 흰색 잠옷까지 입고 있어서 깜짝 놀랐다. 쓸데없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서둘러 옷방으로 가서 단정한 옷으로 갈아 입었다. 검은색 V넥 셔츠에 검은색 와이드 팬츠를 입고 창백한 안색을 가리기 위해 화장도 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서려는 참에 신윤아가 내 방문을 두드릴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녀는 내 침실 문 앞에 서서 조심스럽게 들여다봤다. “예린 언니.” 그녀가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언니, 오빠랑 싸웠어요? 너무 보고 싶었어요.” 그녀는 목소리를 짜내며 울먹였다. 그녀는 키가 150cm에 플랫 슈즈를 신고 있었고 나는 168cm에 8cm 하이힐을 신었으니 마치 내가 그녀를 괴롭히는 상황처럼 보였다. “잘 지내고 있어요.” 나는 어리석은 사람과 논쟁하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게다가 시간이 촉박했다. 그녀는 품에 안기며 괴로운 듯 나를 끌어안았다. “언니, 근데 어젯밤에 오빠가 서재에 있는 웨딩 사진을 깨버렸어요.” “그래? 내버려둬요.” 나는 무심하게 말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쓸쓸함을 느꼈다. 그의 서재에 걸려 있는 사진은 내가 가장 좋아했던 사진이었다. 웨딩 사진을 찍을 때도 그는 웃지 않았다. 포토 그래퍼가 아무리 분위기를 띄워도 늘 서늘한 표정으로 원래 잘 웃지 않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어디 가고 싶든 아가씨 자유죠. 게다가 저도 여기서 살지 않아요. 어제 돌아온 것도 우연이었어요.” 사실 신윤아는 다루기 쉬운 편이었다. 귀여운 척하고 이해심이 많은 척하는 게 그녀의 설정값이다. 적어도 드라마에서처럼 악행을 일삼는 악녀는 아니라 말다툼을 조심하거나 신체적인 해를 끼칠 일도 없었다. 조금만 맞춰주면서 어르고 달래주면 귀찮은 상황을 피할 수 있다. 입을 조금 움직이는 것만으로 상대하기에 어렵지 않았다. 나는 곽서준이 집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방금 신윤아가 내 방을 힐끗거리는 행동에서 알아차렸다. 내가 씻고 있을 때 이미 나갔을 가능성이 크다.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서재로 갔다. 아니나 다를까, 서재 중앙의 벽은 텅 비어 있었다. 신윤아는 거짓말하지 않았다. 약간 화가 났다. 커다란 사진은 이미 유리 파편들로 울퉁불퉁 찍힌 채 구석에 버려져 있었다. 어젯밤, 나한테 그렇게 대해놓고도 무엇 때문에 이렇게 분노를 쏟아낸 건지 알 수 없었다.나는 손에 끼고 있던 결혼반지를 내려다보고는 반지를 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웨딩 사진을 들고 나와서 길가의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그가 원하지 않는 걸 나도 원하지 않는다. ...원래 새 동료들에게 커피 한 잔이라도 대접하려고 했지만 막상 도착하고 보니 다들 업무를 나가거나 사건을 찾으러 가서 로펌에는 아무도 없었다. 양다은도 없었다. 하도현에게 인사하러 갔더니 뜻밖에 심문혁도 함께 있었다.나를 로펌으로 오라고 한 것도 이 때문이었구나, 역시 심문혁의 아이디어였다. 심문혁과 나는 서로 밀어내면서 못마땅하게 여겼다. 하도현이 눈치 보며 말을 꺼냈다. “마침 점심시간인데 가볍게 식사하면서 얘기하죠.” 이렇게 큰 체인 로펌도 심문혁이 원수를 상대하는 도구에 불과했다는 것을 하도현은 잘 알고 있었다. 그게 상대하는 건지 보살피는 건지는 말하기 어렵지만.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오늘은 차를 운전하고 오지 않았다. 심문혁은
오른쪽 눈꺼풀도 덩달아 떨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나는 즉시 반박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일단 가봐. 윤아가 조금이라도 다치기만 해봐, 가만히 안 있을 거야.”하도현의 차가운 목소리가 내 고막을 뚫고 지나갔다. 통화가 끊긴 뒤의 삐 소리보다 더 나를 짜증 나게 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맞은편에 앉은 두 남자를 바라봤다.“저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데 심문혁은 이미 테이블 위의 차 키를 집어 들고 일어섰다. “내 여동생 문제니 당연히 내가 가서 확인해야지.”심씨 가문과 곽씨 가문의 사이로 따지면 심문혁이 신윤아를 여동생이라 부르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세상 모두가 신윤아의 오빠가 되어 주는 것 같은 상황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만약 그녀가 정말 학교에서 무슨 일을 당했다면 둘이 함께 나를 비난하지는 않을까? 하도현은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친절하게 말했다. “예린 씨, 마침 잘됐네요. 문혁 씨 차를 타고 가면 되겠어요.” 상황이 급해서 나는 거절하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도현 씨, 다음에 다시 식사 대접할게요.”“야, 지금 널 학교에 데려다줄 사람은 나야!”심문혁이 불쾌해하며 말했다. 나는 그를 무시한 채 신윤아의 학교 주소를 불렀다. 심문혁은 핸들 위에 손을 올려두고는 신중하게 말을 꺼냈다. “그 신윤아 말이야, 도대체 왜 네 집에서 계속 지내고 있는 거야?”심문혁이 이런 일에 관심을 보이다니 정말 의외였지만 가정사를 외부 사람에게 알리기 적절하지 않았다. “네 여동생 문제를 나한테 묻는 거야?”나는 그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고량주 두 병이나 마시게 한 일을 까먹을 리 없었다.“쳇!”심문혁이 헛웃음을 치며 말했다. “너 진짜 나랑 한판 붙어볼래? 지금 당장이라도 널 여기 버릴 수 있어, 학교까지 뛰어가고 싶어?” “차 세워.”나는 즉시 말했다. “안예린, 너 진짜 내가 못 멈출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차 세워, 너랑 싸울 기분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