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마치 구름 위를 떠다니는 것 같았다. 바람조차도 부드러워진 것 같았고 호흡도 방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편해졌다. 갑자기 머리가 무언가에 부딪히며 잠에서 깼다. 별로 아프다는 느낌은 없었지만 충격에 정신이 들었다. 하지만 잠깐일 뿐 곧 다시 눈을 감자 누군가 내 뺨을 꼬집었다. 나는 다리 옆으로 축 늘어진 손을 휘저으며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심문혁… 문혁아… 제발… 출근해야 해.” 갑자기 얼굴에 고통이 느껴지더니 주변 온도가 급격히 떨어지며 추워서 몸이 떨려왔다. “안예린, 눈 똑바로 뜨고 누군지 똑똑히 봐!” 눈을 떴더니 어느새 내 앞에는 곽서준이 서 있었다. 그는 새까만 눈동자로 깊게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꿈속처럼 고요한 분위기 속에 뜨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여보?” 나는 그의 목에 팔을 감싸안으며 반복해서 여러 번 불렀다. “여보, 여보, 심문혁 너무 나빴어. 혼내줘!” 나는 그의 목에 얼굴을 파묻은 채 당장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처럼 다급했다. “왜 대답 안 해?” 그는 새까만 눈동자로 날카롭게 나를 응시하며 차 창문 쪽으로 밀어붙였다. “예린아, 내 말 듣고 있어? 내가 너 하나 책임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 그래서 굳이 나가서 일하겠다고 한 거야? 그것도 심문혁 밑에서?” 그의 목소리는 차가웠고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일하는 게 뭐가 좋은데? 힘들고 돈도 못 벌잖아.” “네가 입고 있는 것, 손에 끼고 있는 것, 어느 하나 빠뜨린 적 있어? 네 한 달 월급으로 이거 하나 살 수 있겠어?” 곽서준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울려 퍼졌다. “안예린, 너 지금 나 제대로 건드렸어!” 그는 솟구치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내 턱을 잡은 손에 힘을 꽉 줬다. 당장이라도 턱이 부서질 것같이 아팠다. 나는 가늘게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칼날처럼 날카로워 곧 나를 베어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그저 입 모양만 보일 뿐 표정은 무서웠다.
나는 사랑에 대한 환상이 있지만 권문세가의 혼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다. 우리 같은 계층에서 사랑을 찾아보기 어렵다.그가 차라리 대놓고 신윤아를 껴안고 내 앞에서 키스하며 나한테 애정이 없다고 말해준다면 지난 4년간의 일방적인 사랑을 솔직하게 마주할 수 있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처럼 애매모호한 태도, 양다리를 걸치고도 인정하지 않는 상황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예전에 내가 눈이 멀지 않고서야 신윤아의 눈에 넘쳐흐르는 소유욕을 보지 못했을 리 없다.그녀는 여전히 순진한 모습으로 곽서준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오빠, 어제 왜 안 돌아왔어? 계속 예린 언니랑 함께 있었어?”곽서준은 고개를 돌려 힐끗 쳐다보았다. 우리의 시선은 허공에서 마주쳤다.그의 몸에 매달려 있던 신윤아도 기쁜 표정을 지으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신윤아는 곽서준의 어깨를 힘껏 두드리며 신나게 말했다.“오빠, 가자! 예린 언니한테 가자!”“함부로 굴면 안 돼.”곽서준은 무심하게 한 마디 내뱉고 여전히 신윤아를 안은 채 집 쪽으로 걸어갔다.나는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단 한 번의 눈빛 교환으로 어젯밤 잃어버렸던 기억의 조각들이 서서히 돌아왔다.전동 의자가 뒤로 젖혀지며 나는 그의 다리 위로 끌려갔다.천과 천이 스치는 소리는 야릇하고도 위험하게 들려왔다. 사부작거리는 소리는 그가 무얼 하고 있는지를 짐작 가능하게 했다.그는 내 허리에 손을 둘러 내 상반신은 어렵게 핸들에 기대어 있었다.얇은 천 한 겹은 그의 뜨거운 몸을 가리지 못했다. 허리와 복부의 움직임에 나는 그가 애써 참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곽서준!”나는 본능적으로 말했다. “나 불편해.”애타는 목소리는 애써 참았던 그를 더 힘들게 만들었다.그는 손을 뻗어 차 안의 백미러 각도를 조정했다. 순간 내 몸이 부끄러운 각도로 벌어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그의 것이 나를 불편하게 찔렀다. 그는 여유롭게 물었다.“남자가 돈 벌
됐어, 그냥 미친개한테 물렸다고 생각하자. 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오직 하도현 팀에 들어가는 생각뿐이었다. 심문혁이 괜히 술 먹게 했을 리 없겠지.심문혁에게 전화 걸기 여전히 쑥스러웠다. 나는 카톡을 열어 그의 계정을 차단 목록에서 해제하고 메시지를 보낼까 말까 고민하다 결국 보내지 않기로 했다. 결국 하도현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항상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예린 씨, 로펌으로 와서 얘기하시죠.” 일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갔다. 나는 거울 앞으로 비틀거리며 다가갔고 마치 곽서준에게 양기를 빨린 귀신처럼 보였다. 게다가 마침 흰색 잠옷까지 입고 있어서 깜짝 놀랐다. 쓸데없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서둘러 옷방으로 가서 단정한 옷으로 갈아 입었다. 검은색 V넥 셔츠에 검은색 와이드 팬츠를 입고 창백한 안색을 가리기 위해 화장도 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서려는 참에 신윤아가 내 방문을 두드릴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녀는 내 침실 문 앞에 서서 조심스럽게 들여다봤다. “예린 언니.” 그녀가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언니, 오빠랑 싸웠어요? 너무 보고 싶었어요.” 그녀는 목소리를 짜내며 울먹였다. 그녀는 키가 150cm에 플랫 슈즈를 신고 있었고 나는 168cm에 8cm 하이힐을 신었으니 마치 내가 그녀를 괴롭히는 상황처럼 보였다. “잘 지내고 있어요.” 나는 어리석은 사람과 논쟁하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게다가 시간이 촉박했다. 그녀는 품에 안기며 괴로운 듯 나를 끌어안았다. “언니, 근데 어젯밤에 오빠가 서재에 있는 웨딩 사진을 깨버렸어요.” “그래? 내버려둬요.” 나는 무심하게 말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쓸쓸함을 느꼈다. 그의 서재에 걸려 있는 사진은 내가 가장 좋아했던 사진이었다. 웨딩 사진을 찍을 때도 그는 웃지 않았다. 포토 그래퍼가 아무리 분위기를 띄워도 늘 서늘한 표정으로 원래 잘 웃지 않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어디 가고 싶든 아가씨 자유죠. 게다가 저도 여기서 살지 않아요. 어제 돌아온 것도 우연이었어요.” 사실 신윤아는 다루기 쉬운 편이었다. 귀여운 척하고 이해심이 많은 척하는 게 그녀의 설정값이다. 적어도 드라마에서처럼 악행을 일삼는 악녀는 아니라 말다툼을 조심하거나 신체적인 해를 끼칠 일도 없었다. 조금만 맞춰주면서 어르고 달래주면 귀찮은 상황을 피할 수 있다. 입을 조금 움직이는 것만으로 상대하기에 어렵지 않았다. 나는 곽서준이 집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방금 신윤아가 내 방을 힐끗거리는 행동에서 알아차렸다. 내가 씻고 있을 때 이미 나갔을 가능성이 크다.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서재로 갔다. 아니나 다를까, 서재 중앙의 벽은 텅 비어 있었다. 신윤아는 거짓말하지 않았다. 약간 화가 났다. 커다란 사진은 이미 유리 파편들로 울퉁불퉁 찍힌 채 구석에 버려져 있었다. 어젯밤, 나한테 그렇게 대해놓고도 무엇 때문에 이렇게 분노를 쏟아낸 건지 알 수 없었다.나는 손에 끼고 있던 결혼반지를 내려다보고는 반지를 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웨딩 사진을 들고 나와서 길가의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그가 원하지 않는 걸 나도 원하지 않는다. ...원래 새 동료들에게 커피 한 잔이라도 대접하려고 했지만 막상 도착하고 보니 다들 업무를 나가거나 사건을 찾으러 가서 로펌에는 아무도 없었다. 양다은도 없었다. 하도현에게 인사하러 갔더니 뜻밖에 심문혁도 함께 있었다.나를 로펌으로 오라고 한 것도 이 때문이었구나, 역시 심문혁의 아이디어였다. 심문혁과 나는 서로 밀어내면서 못마땅하게 여겼다. 하도현이 눈치 보며 말을 꺼냈다. “마침 점심시간인데 가볍게 식사하면서 얘기하죠.” 이렇게 큰 체인 로펌도 심문혁이 원수를 상대하는 도구에 불과했다는 것을 하도현은 잘 알고 있었다. 그게 상대하는 건지 보살피는 건지는 말하기 어렵지만.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오늘은 차를 운전하고 오지 않았다. 심문혁은
오른쪽 눈꺼풀도 덩달아 떨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나는 즉시 반박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일단 가봐. 윤아가 조금이라도 다치기만 해봐, 가만히 안 있을 거야.”하도현의 차가운 목소리가 내 고막을 뚫고 지나갔다. 통화가 끊긴 뒤의 삐 소리보다 더 나를 짜증 나게 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맞은편에 앉은 두 남자를 바라봤다.“저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데 심문혁은 이미 테이블 위의 차 키를 집어 들고 일어섰다. “내 여동생 문제니 당연히 내가 가서 확인해야지.”심씨 가문과 곽씨 가문의 사이로 따지면 심문혁이 신윤아를 여동생이라 부르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세상 모두가 신윤아의 오빠가 되어 주는 것 같은 상황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만약 그녀가 정말 학교에서 무슨 일을 당했다면 둘이 함께 나를 비난하지는 않을까? 하도현은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친절하게 말했다. “예린 씨, 마침 잘됐네요. 문혁 씨 차를 타고 가면 되겠어요.” 상황이 급해서 나는 거절하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도현 씨, 다음에 다시 식사 대접할게요.”“야, 지금 널 학교에 데려다줄 사람은 나야!”심문혁이 불쾌해하며 말했다. 나는 그를 무시한 채 신윤아의 학교 주소를 불렀다. 심문혁은 핸들 위에 손을 올려두고는 신중하게 말을 꺼냈다. “그 신윤아 말이야, 도대체 왜 네 집에서 계속 지내고 있는 거야?”심문혁이 이런 일에 관심을 보이다니 정말 의외였지만 가정사를 외부 사람에게 알리기 적절하지 않았다. “네 여동생 문제를 나한테 묻는 거야?”나는 그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고량주 두 병이나 마시게 한 일을 까먹을 리 없었다.“쳇!”심문혁이 헛웃음을 치며 말했다. “너 진짜 나랑 한판 붙어볼래? 지금 당장이라도 널 여기 버릴 수 있어, 학교까지 뛰어가고 싶어?” “차 세워.”나는 즉시 말했다. “안예린, 너 진짜 내가 못 멈출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차 세워, 너랑 싸울 기분 없어
“딱히 이유는 없어요. 걔는 맞아야 정신 차려요.”신윤아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녀는 병상에 누워 있는 여학생을 가리키며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을 지었다. “다음에도 내 눈에 띄면 또 때릴 거야.” 그야말로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 곽서준은이 들어오며 내 뒤에 있던 신윤아를 끌어당겼다. 순간 누군가 내 등을 밀었는지 그 여자의 뺨을 맞았다. 머릿속이 잠시 새하얘지며 오른쪽 귀에서는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른쪽 뺨은 빠르게 부어올랐다. 곽서준이 신윤아가 다칠까 봐 그녀를 품 안에 끌어안는 모습을 보며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심장이 조여왔다. 신윤아는 곽서준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슬프게 울고 있었다. “오빠, 저 여학생이 내 침대를 차지했어. 기숙사로 돌아가서 살겠다고 했는데 비켜 주지도 않았어.” 신윤아는 울먹이며 말했다. “오빠,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기숙사에서도 날 받아주지 않네. 나 이제 갈 곳 없어요.”곽서준이 데려온 사람들이 곧 상황을 정리했다. 여학생을 병원으로 보냈고 부모와 배상 문제를 논의했다. “네가 때리고 싶으면 때려. 돈 물어주면 되는 거잖아.” 그의 세계에서는 옳고 그름이 없었고 오직 등가 교환만 존재했다. 그리고 신윤아를 위해서라면 가족을 다 잃어도 괜찮다는 듯이 단호했다. 순간, 나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곽서준과 어깨를 스치며 지나가며 마침내 나를 보았는지 어두운 눈빛으로 쳐다보며 이번 사건의 책임을 전적으로 내게 돌리는 듯했다. “나중에 따로 얘기하자.” “오빠, 언니도 집에 데려가면 안 돼요? 같이 살고 싶어요.” 신윤아가 내게 손을 뻗었지만 곽서준은 이내 그녀의 손을 감싸며 차갑게 나를 훑어보고는 말했다. “신경 쓰지 마, 오빠가 데려다줄게.” 나는 목구멍에서 차오르는 냉소를 참을 수 없었다. 서둘러 왔더니 뺨 맞은 것도 모자라 마음마저 다 헤집힌 상태였다. 가족? 그들이야말로 진짜 가족이었다! 곽서준은 정말로
나는 심문혁이 나의 처참한 모습에 박수라도 치며 좋아할 줄 알았다. 아니면 비꼬는 소리를 할 거라고 생각했다. 이게 그가 20년 넘게 가장 해온 일이니까. 그런데 그런 그가 나를 조금이라도 신경 써 주다니 뜻밖이었다. 하지만 지금 아무것도 필요 없이 그냥 혼자 조용히 있고 싶었다. “필요 없어.” 나는 여전히 거절했다. 지나쳐 가려는 순간 그는 내 손목을 낚아챘다. 오늘 몇 번이나 사람들에게 시비 당한 탓에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심문혁, 놀 사람 찾으려면 때를 좀 가려. 나 지금 네 장난감 해 줄 기분 아니야!” 심문혁의 눈빛이 어두워지며 이해할 수 없는 깊이가 담겨 있었다. 그는 진지하게 말했다. “널 장난감으로 생각한 적 없어.” 그는 내게 거절의 기회를 주지 않은 채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넘겨줬다.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자 상쾌한 애프터셰이브 향을 맡을 수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피하려고 했지만 그는 되레 강하게 내 손을 잡아당겼다. “일단 병원부터 가서 약이라도 바르자.” 나는 눈이 휘둥그레진 채 순간 곽서준에게 당했던 서러움이 조금씩 사라졌다. 나는 손등으로 그의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너 누구야? 심문혁한테서 당장 나와!” 그가 내 손을 쳐내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주위에 이렇게 못생긴 게 있어 보긴 처음이라 거슬리는 것뿐이야.” 그가 입꼬리를 씰룩거리는 모습에 나도 비웃으며 몇 마디 비꼬는 소리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입꼬리를 움직이자 볼이 아팠다. 그에게 웃어 보이는 것도 서툴러서 더 이상 애쓰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흔들지도 않고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그저 거절했다. “신경 쓸 필요 없어.” “조심해!” 그는 갑자기 내게 몸을 던지며 나를 몇 걸음 뒤로 밀어냈다. 검은색 승용차 한 태가 거의 등에 닿을 뻔하며 지나갔다. 갑작스런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리며 오른쪽 뺨에 고통을 가했다. 곽서준의 차였다. “
“쳇, 그까짓 한 끼에 고마워할 사람으로 보여? 나한테 밥 사겠다고 하는 여자들이 널리고 널렸어.” ...그는 함께 병원에 가서 처치하는 것도 기다려주고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며칠 쉬다가 출근해. 우리 로펌은 못생긴 사람 받지 않으니까.” “알겠어, 알겠어.” 그가 병원까지 동행해 준 것을 봐서 나는 딱히 말대꾸하지 않았다. 그를 보내고 나서 나는 엘리베이터에 탔다. 나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순간, 원래 남북으로 탁 트인 복도의 창문 중 하나가 꽉 막혀 있었다. 커다란 실루엣이 복도 끝 창가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한낱 그늘막처럼 나의 마음을 깡그리 가리고 있었다. 우리 집은 37층이라 분명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의 침착한 뒷모습은 모든 걸 알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심문혁이 나와 학교에 갔던 것도 나를 병원에 데리고 갔던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 엘리베이터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나는 당장이라도 다시 엘리베이터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내가 멍하니 있는 사이 엘리베이터는 이미 내려가 버렸다. 곽서준이 돌아서는 순간 마치 거친 바다를 누군가의 손으로 쓸어내리듯 내 심장은 한순간에 굳어버렸다. 곽서준은 언제나 내 감정을 휘둘렀다. 나는 그 앞에서 실수하고 싶지 않아 애써 침착하며 눈을 맞추고 있었다. 그가 두 발짝 다가오며 우리 집 문 앞을 가로막았다. 마치 문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새까만 눈동자로 차갑게 응시하고 있었다. “심 도련님을 초대하지 그랬어?” 나는 잠시 멍해 있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곽서준은 정말 바쁜 모양이었다. 신윤아를 돌보는 동시에 나를 감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래? 지금 당장 모셔 올게.” 나는 몸을 돌려 빠르게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이곳을 도망치고 싶은 마음만큼이나 빨랐다. 순간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곽서준에 대한 불만을 전부 그 조그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