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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나는 막장 드라마를 즐겨 보곤 했기 때문에 소위 첫사랑이 남자에게 가져다 주는 치명적인 매력을 잘 알고 있다.

그런 첫사랑이란 가지지 못해 더욱 갖고 싶은 거다.

그들은 세속적인 이유로 함께할 운명이 아니다. 곽씨 가문은 명망 높은 재벌가로 그들은 혈연이 아니더라도 만날 수 없다.

곽서준이 정말 신윤아를 좋아한다면 그녀에게서 구린내가 나도 향기롭다고 할 텐데 그걸 내가 어찌 이기나.

수술은 조용히 순조롭게 끝났고 밖으로 나온 난 2층에 앉아 약을 가지러 번호가 불릴 때까지 기다렸다.

병원 소독수 냄새를 맡으며 내 머리도 제대로 소독한 뒤 어느 때보다 멀쩡한 정신으로 곽서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와 신윤아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누구를 선택할래?]

그가 신윤아를 선택한다면 난 흔쾌히 손을 놓으며 두 사람의 행복을 빌 거다.

충동적으로 메시지를 보낸 건 알지만 이럴 때 충동적으로 결정하지 않으면 오랜 세월 사랑한 사람을 포기하고 다른 사람에게 넘겨줘야 한다고 나 자신을 어떻게 설득하나.

휴대전화를 들고 애타게 기다렸지만 메시지는 저 바다에 던진 돌멩이처럼 파문도 일지 않았다.

아무런 소리 없는 휴대폰을 보다가 나는 참지 못하고 신윤아 병실로 갔다.

병실에서 곽서준은 깎은 사과에 포크를 꽂아 신윤아에게 건넸고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따스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타이밍이 안 맞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바람 피웠단 증거를 잡았을 거고 나도 더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나는 곽서준을 불렀고 그는 나에게 적대적인 싸늘함을 보였다.

“굳이 병원에서 해야 할 얘기가 뭐야?”

“답장 기다리고 있어.”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곽서준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휴대폰을 꺼내더니 혀로 볼 안쪽을 밀어냈다.

“무슨 뜻이야?”

내가 찔러봐도 그는 전혀 당황하거나 화를 내지 않았고 태연한 그의 눈빛을 마주하며 마음이 불안하게 요동치는 건 오히려 나였다.

그는 나른한 어투로 말했다.

“내가 왜 선택해, 이게 무슨 짓인데?”

심지어 바지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갑을 꺼내 불을 붙이려 다가 병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내려놓기까지 했다.

무심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는 손목에 차고 있던 염주를 빼 만지작거리면서 내 대답을 기다렸다.

이 순간 병원의 불빛이 내 얼굴을 창백하게 만들었고 그의 동공 속에 갇힌 멍청한 내 표정이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그가 정신적인 바람을 피웠다는 확신마저 흐릿해 졌고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한 것은 아닌지 반성하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당당하지?

그는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2초간 바라보더니 우리 둘 사이에 내 손목을 들어 올렸다.

“일부러 손까지 망가뜨릴 필요 없어. 부모님이 주신 몸은 아껴야지. 애가 아파서 병원에 있어 주는데 그게 왜?”

뭐라고? 내가 일부러 손을 망가뜨렸다고 생각하는 건가?

나는 억울함에 눈물마저 흘러내렸고 이 순간 마취제도 소용이 없는 듯 열 손가락에 통증이 밀려와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는 나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고 한결 차가운 어투로 말했다.

“연기하지 마. 네가 막무가내로 억지 부리는 거 모를 줄 알아? 얜 그냥 내 동생이야, 괜한 생각 마!”

나는 그의 말에 말문이 막혔고 그는 여전히 멋진 모습 그대로였지만 불행히도 내 눈엔 모르는 사람 같았다.

그는 습관처럼 명령했다.

“가, 별일 없으면 병원에 오지 마.”

“그래, 갈게!”

나는 곽서준이 이미 선택했다고 생각해 뒤돌아 달려갔다.

“쟤 곁에 있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

곽서준은 나를 쫓아오지 않았고 병동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오빠, 두 사람 싸웠어요?”

...

집으로 돌아가 문을 열자마자 양씨 아주머니가 반갑게 맞아 주시며 슬리퍼를 건네 주고 내 손에 든 가방을 들어주었다.

거즈로 감싼 내 손을 보더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사모님, 어디 다치셨어요? 의사 불러드릴까요?”

얼떨결에 받은 관심에 나는 코끝이 시큰해 지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결혼한 지 4년이 된 남편이 한 달에 300만원을 주고 고용한 아줌마보다 못한 걸 보니 사랑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값싼 것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아주머니, 저 방금 병원 다녀왔어요. 오늘은 요리 안 해도 되니까 퇴근하세요.”

가정부 아주머니들은 집에 머물지 않고 출퇴근했다. 일상적인 청소와 요리를 제외하고 집에 사람이 너무 많은 게 싫었던 나는 지금 너무 피곤해서 혼자 있고 싶었다.

양씨 아주머니는 불안해했다.

“안 돼요. 그래도 청소는 하고 퇴근할게요. 안 그러면 너무 월급을 그냥 받는 것 같아요.”

사실 집에는 청소를 전문으로 하는 아주머니가 있었지만 평소 양씨 아주머니의 씩씩하고 의욕적인 모습을 생각하며 나도 그러라고 했다.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바삐 맴도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그녀 옆에 내 것이 아닌 물건들이 쌓여 있는 게 보였다.

작은 인형, 밝은색 헤어클립, 귀여운 피규어와 내가 알아보지 못하는 애니메이션까지.

4년 동안 살았던 집이 이처럼 거부감이 드는 건 처음이었다.

나는 따뜻한 색감과 깔끔함을 좋아하고 햇살이 구석구석 비치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데 이미 구석구석 신윤아의 흔적이 가득했다.

남이 내 사적인 공간을 침범하는 걸 싫어하는데 신윤아는 벌써 4년을 이 집에서 살았다.

“아주머니 그냥 두세요.”

“네?”

양씨 아주머니는 내 말에 당황한 듯 고개를 돌려 반짝이는 카드를 여전히 손에 쥔 채 나를 어리둥절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웃으며 설명했다.

“다용도실에 가서 제 캐리어 가져오시고 짐 좀 싸주세요.”

가야 할 사람은 신윤아가 아니라 난다.

그녀는 내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사모님, 대표님이랑 싸우셨어요? 평온하기만 한 인생이 어디 있어요. 싸웠다고 집을 나가요? 가도 대표님이 먼저 나가야죠.”

그녀의 말에 나는 웃음이 나왔다.

“내가 가면 그 사람이 월급 주는데 그렇게 얘기해도 돼요?”

“그럼 저도 데려가세요.”

양씨 아주머니는 내가 구인·구직 사이트에서 직접 뽑은 사람이고 나와 가까운 사이였기에 놀랍지 않았다.

“제가 정착하면 데리러 올게요. 아주머니가 해준 밥이 익숙해서 다른 사람이 한 건 저도 싫어요.”

결국 아주머니가 풍만한 엉덩이로 내 캐리어를 눌러서야 지퍼가 겨우 잠겼고 내가 가방을 챙겨 가려는 데 그녀는 은근슬쩍 힘을 주며 나와 힘겨루기를 했다.

“이거 놔요, 방금 곽서준한테 전화한 거 모를 줄 알아요?”

제일 큰 캐리어를 가져오라고 가서 말하려던 찰나 우연히 그 모습을 보게 되었다.

양씨 아주머니가 내가 밥을 거르고 짐까지 싸서 나가려 한다고 말했지만 3초도 안 돼서 전화를 끊었다.

아마 곽서준은 내버려두라고 했겠지.

아주머니가 손을 놓는 걸 보니 역시 내 짐작이 맞았다.

“아주머니는 계속 여기서 농땡이 부리세요. 밥도 하지 말고 곽서준 돈이나 벌어서 아주 거덜 내세요.”

나는 양씨 아주머니에게 일종의 작별 인사를 하듯 이렇게 말했고 그녀는 갑자기 나를 향해 눈을 깜박였다. 눈물이라도 짜내는 건가?

그럴 필요는 없는데.

손을 흔들고 뒤로 돌아 서둘러 가려는데 큰 벽에 가로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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