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석진은 원이림에 대한 여은진의 짝사랑을 다시 한번 언급했다. 그는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원이림은 듣고 나서 미간을 찌푸렸다. 자기를 향한 여은진의 사랑이 이렇게 깊은 줄을 전혀 몰랐다.19살 때부터 나를 좋아하고 나를 위해 그렇게 많은 노력을 했다고? 줄곧 남몰래 짝사랑하고 있었다고?하지만 그러면 뭘 해? 나에 대한 사랑이 깊다고 나를 모함해도 되는 건 아니다.이때 여석진이 차분한 눈으로 원이림을 보며 갑자기 질문했다.“우리 양부모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아요?”“...”그가 입을 열기 전에 여석진이 말을 이었다.“부모님은 누나에게 마음속에 담고 있는 남자가 있다는 걸 진작 알고 있었어요.”“그리고 그 남자가 당신이고 당신은 누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고. 게다가 좋아하지 않으면 그만이지 왜 상처는 줬어?”“좋아하지 않는데 왜 관계는 가져서 누나의 순결을 빼앗았어요?”“부모님이 모든 걸 알게 되고 당신을 찾아가 결판을 내려 했어요. 남의 귀한 따님을 어떻게 할 건지 따지려 한 거지.”“하지만...”여은진의 부모는 결판을 내려고 원이림을 찾아가는 길에 차 사고가 났다.부모님은 눈을 감을 때까지 그녀가 괴롭힘을 당하지 않을까, 불행하지 않을까, 오로지 딸 걱정뿐이었다. 그래서 죽기 전에 여신그룹과 여씨 가문의 모든 것, 그리고 소중한 딸까지 여석진에게 부탁했다.“누나는 아직 이 사실을 몰라. 알게 되면 받아들일 수 없을 거야.”“부모님이 자기와 당신 사이 일을 알고 당신을 찾아가 따지려다가 사고가 났다는 사실을 알면, 자기 자신과 당신을 죽도록 미워하게 될 거야. 심지어 평생 자신의 불효를 용서하지 못하겠지.”생각 밖의 진실에 원이림은 충격을 받았다.여석진은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며 그런 그를 차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원이림, 당신이 누나에게 준 것은 고통과 재난과 상처뿐이야.”“끝나게 돼서 다행이고, 오늘부터 당신은 우리 누나와 아무 관계도 없어.”여석진은 사직서를 꺼내 원이림에게 넘겨주었다.“사
고은희와 송아름은 강주혜를 픽업하러 공항에 왔다.잠시 후 강주혜는 한 남자와 팔짱을 낀 채 승객무리를 따라 출구에서 천천히 나왔다.이기적이고 거침없는 강주혜가 이 순간만큼은 여린 여자애로 보였다.고은희를 발견한 강주혜는 그 남자의 팔을 뿌리치면서 말했다.“엄마가 온 것 같은데!”강주혜는 고은희를 향해 달려갔다.강주혜는 생기발랄한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고 말했다.“엄마!”“그래그래. 얼른 와.”고은희는 강주혜에게 한 여자애를 소개해 줬다.“얘가 바로 내가 저번에 너랑 통화하면서 말했던 오윤미 딸 송아름이야.”강주혜는 시무룩하게 대답하고는 송아름에게 인사도 건네지 않았다.“아~ 네.”그리고 돌아서서 옆에 있던 남자의 팔짱을 다시 끼더니 고은희에게 그 남자를 소개해 줬다.“엄마, 우리 선배야. 예전에도 본 적이 있을 텐데.”“근데 지금은 선배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건 바로 내 남자 친구야.”강주혜가 팔짱을 끼고 있던 그 남자의 이름은 남궁성우였다.180센티미터를 넘는 훤칠한 키에 안경을 낀 뽀얀 얼굴 그리고 깔끔한 옷차림을 한 남궁성우에게서는 지적인 분위기가 풍겼다.햇빛에 반사되는 렌즈의 무지개색 빛이 남궁성우의 맑고 이해심 깊은 눈동자를 희미하게 가렸다.“어머님, 안녕하세요.”“그래. 안녕!”남궁 가문은 M국 의학계 명문가이다.남궁성우는 남궁 가문의 계승자로서 어릴 적부터 뛰어난 의학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수년간의 부지런한 노력을 끝에 지금의 남궁성우는 존경받는 의사일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젊은 의학계에 유망주로 불린다.고은희는 남궁성우가 맘에 들었다.이런 사윗감이 어디 있나 싶을 정도로 자랑스럽고 기뻤다.“그래그래.”“서 있지만 말고 우리어서 집으로 가자.”고은희의 말에 경호원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남궁성우의 트렁크는 경호원에게 넘겨지고 고은희는 강주혜와 남궁성우를 데리고 집으로 향했다.집에 도착한 후 고은희는 송아름더러 강주혜와 남궁성우랑 얘기를 나누게 하고 반대쪽으로 걸어가 강주환에게 전화를 걸었다.
‘남궁성우는 심리학을 공부한 적이 있을까? 최면에 대해서는 얼마나 아는 걸까?’송아름은 무척 궁금했다.남궁성우는 무심한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어릴 때부터 의학에 관련된 거라면 모두 흥미로워 보였고 배워보고 싶었어요.”“물론 심리학도 포함이고요.”송아름은 환한 미소를 짓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계속 물었다.“그러면 F 국 페르만타운에 엄청 유명한 심리치료사가 있는데 혹시 그분이랑도 친분이 있나요?”남궁성우는 대답했다.“그럼요. 알죠.”남궁성우는 그 심리치료사 어머니의 학생이기도 했고 예전에 함께 최면을 배웠던 경험도 있었다.하지만 그 후 어떤 일로 인해......이 또한 남궁성우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였다.지금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고 그 어떤 일로도 남궁성우는 그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남궁성우가 떠나고 난 몇 년 뒤에 그 심리치료사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한 여자애를 제자로 삼았다.남궁성우는 그 제자가 바로 송아름이란걸 몰랐다.송아름은 선생님으로 삼은 그 심리치료사로부터 남궁성우의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선생님 곁을 떠난 지 꽤 오래됐는지라 사진 속 주인공에 대한 기억이 선명하지 않았다.송아름이 보았던 사진 속 남자아이는 열일곱 열여덟 살쯤 되어 보였고 그는 지금 눈앞에 있는 스물여섯 살의 남궁성우와는 매우 달랐다.그래서 남궁성우가 구면인 것 같았지만 정확히 어디서 봤던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송아름은 계속 대화하고 싶었지만 강주혜는 남궁성우를 소파에서 끌고 일어나면서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가자. 내 방 구경 시켜줄게.”방금 통화를 마친 고은희는 거실에 덩그러니 혼자 앉아있는 송아름을 보고 물었다.“왜 혼자야? 주혜랑 성우는?”송아름은 대답했다.“주혜가 남궁성우 씨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어요.”송아름은 멈칫했으나 결국에는 고은희한테 솔직하게 말했다.“은희 아줌마, 주혜가 저를 싫어해요.”고은희는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그럴 리가! 너랑 주혜는 친......”아차 싶었던 고은
그 날밤 가족 모임은 그렇게 서로 상처만 남긴 채 끝났다. 강주혜는 돌아온 첫날부터 화가 치밀어 남궁성우를 데리고 강 씨네 본가에서 나와 호텔로 갔다. 남궁성우가 옆에서 달래줘서야 강주혜는 화가 가라앉았다. “성우 오빠, 미안해. 오늘은 오빠를 우리 가족들에게 소개하는 자리였는데, 이렇게 됐네.”“괜찮아.”미안해하며 사과하는 강주혜에게 남궁성우는 웃으면서 괜찮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손을 들어 강주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그렇지만 너도 너희 어머니한테 그렇게 화내는 거 아니야. 너희 오빠 일은 오빠가 알아서 잘 해결할 거야.”“오빠를 보면 마음이 아파서 그래.”강주혜는 이렇게 말하며 남궁성우의 품에 안겨서 손으로 그의 셔츠 단추를 끼웠다 풀었다 또다시 끼웠다 하며 반복했다. 단추를 만지며 자신이 알고 있는 강주환과 윤성아의 이야기를 했다. “언니가 다시 돌아와서 오빠랑 있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나는 정말 엄마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 왜 성아 언니는 그렇게 싫어하면서 송아름은 그렇게 좋아하는 것인지.”대화를 이어가는 동안 강주혜의 손은 멈추지 않았고 남궁성우의 눈동자는 잔잔한 욕망으로 파도쳤다. 그는 강주혜의 작은 손을 덥석 잡았고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동자는 지그시 강주혜를 쳐다보며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계속 이러면 내가 참기 힘들 것 같은데.”강주혜는 멀뚱히 남궁성우를 쳐다보다가 말뜻을 알아채고는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졌지만 속으로는 ‘내가 언제 하지 말라고 했나?’라고 생각했다. 사실 강주혜도 기대하고 있었다. 남궁성우는 그 모습을 보고 웃다가 몸을 기울여 자신의 입술을 강주혜의 도톰한 입술에 가져다 댔다. 두 사람은 폐 속의 공기마저 빨아들일 듯이 깊게 키스했다. 두 사람의 호흡이 가빠졌다. 애초에 그들은 연인이었고 지금은 호텔 방 소파에 있었으며 이렇게 사랑스러운 분위기에서는 마땅히 다음 순서로 무슨 일이 일어나야 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남궁성우는 자신의 욕망을 자제하고 강주혜를 바라보며
강주혜는 남궁성우를 보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뭐가 문젠지 보아냈어?”남궁성우는 머리를 끄덕이며 강주혜를 데리고 나가 말했다.“아마도 최면에 걸린 것 같아.”“뭐?”놀란 토끼 눈이 된 강주혜는 불현듯 뭔가 생각나서 화를 내며 말했다.“설마 송아름이 한 짓이야?”“아마도. 설사 송아름 씨가 아니라고 해도 다른 사람을 시켜서 하성이에게 최면을 걸었을 거야. 하지만 아름 씨는 하성이를 좋아해. 그러니까 처음부터 지금까지 하성이를 다치게는 하지 않았어. 사용한 최면도 약한 거고.”“그게 무슨 말이야. 최면이 아무리 약하다 해도 하성이를 최면한 사실은 변함이 없어. 자기를 좋아하게 하고 성아 언니를 싫어하게 만들었잖아. 이런 방법은 너무 비겁해.”직설적인 성격의 강주혜는 지금 당장 가서 송아름의 실체를 폭로하려 했다. 남궁성우도 딱히 말리지는 않았다. 그는 방임적인 태도로 강주혜를 따라 강 씨네 집 거실로 돌아왔다. 강주혜는 화가 나서 얼굴이 터질듯했다. “송아름, 어디서 순진한 척이야. 어떻게 이렇게 낯짝에 철판을 깔고 있을 수 있어?”그 소리를 들은 남궁성우는 눈가가 미세하게 구겨지며 나긋한 목소리로 강주혜에게 말했다. “주혜야, 여자애가 나쁜 말 하는 거 아니야.”“알았어.”강주혜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지만 남궁성우의 말에 순순히 동의했다. 그리고는 쑥스러워하며 혀를 살짝 내밀었다 들여보냈다. “저 간사한 여자 때문에 너무 화가 나.”강주혜는 송아름을 간사한 여자라고 욕했다. 그 말에 고은희는 눈살이 찌푸려지며 강주혜에게 한소리 했다.“얘가 정말, 우리 강씨 집안 아가씨 같은 기품은 하나도 없어. 그리고 내가 너한테 계속 말했지. 너는 아름 언니랑 친해져야 한다고.”“엄마, 그 여자가 엄마한테 무슨 주술이라도 걸었어? 설마 엄마도 그 여자한테 최면 당한 거야?”그 소리를 들은 송아름은 순간 얼어버렸고 얼굴색이 어두워졌다. 그리고는 강주혜 뒤에 서 있는 남궁성우에게 눈길을 보냈다. 그때 강주혜는 송아름을 쳐다보며 말했다.“이
윤성아는 냉소를 지으며 송아름을 보고 말했다.“감히 내 아들한테 최면을 걸어? 그렇다는 건 내 분노를 감당할 준비가 되었다는 거겠지?”말을 마친 윤성아는 또다시 손을 들어 송아름의 뺨을 내려쳤다.쫙,쫙,쫙 연이어 세 번의 마찰음이 들리고 송아름의 뺨을 빨갛게 부어올랐고 입술에서는 피가 났다. 송아름은 피하고 싶었고 지어는 자신을 때리는 윤성아의 손목을 잡아채고 싶었다. 그러나 때리는 거에 소질이 있는지 윤성아의 손은 빠르고 정확했고 매서웠다. 송아름은 도무지 피할 길이 없었다. 고은희는 조악해진 눈빛으로 째려보며 소리쳤다. “이 년이, 누가 너더러 감히 내 딸을 때리라고 했어?”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이 얼어버렸고 강주혜만이 말을 꺼냈다.“엄마, 그게 무슨 말이야? 송아름이 어떻게 엄마 딸이야?”할 말이 없어진 고은희는 사람들을 쳐다보며 말했다.“아름이는 내가 선택한 미래의 며느리야. 내 마음속에는 내 딸이나 마찬가지야.”모든 사람이 놀랐고 강주혜가 말했다.“엄마, 송아름이 하성이에게 최면을 걸었어. 엄마는 저 여자 인성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이런 여자를 어떻게 엄마 며느리로 받아들일 수 있어?”고은희가 말을 꺼내려 할 때 얼굴이 퍼렇게 멍이 든 송아름이 말했다.“난 아니야. 당신들이 믿든 말든 하성이 일은 나도 모르는 일이야. 무슨 최면? 난 아무것도 몰라.”송아름은 인정하지 않았고 고은희도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다들 들었지? 아름이는 아무것도 몰라.”고은희는 송아름을 편들며 두 눈을 부릅뜨고 윤성아에게 말했다.“너 또 아름이한테 손대기만 해봐.”윤성아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송아름 씨, 정말 몰라요? 내 아들이 갑자기 나한테는 차갑게 대하고 당신한테는 살갑게 대하며 종일 당신한테 가고 싶어 했어요. 이건 어떻게 설명할건데요?’송아름은 물러서지 않고 말했다.“하성이는 원래부터 저를 좋아했어요.”옆에서 고은희도 맞장구를 쳤다.“그래, 하성이는 원래부터 아름이를 좋아했어. 어쨌거나 아름이는 하성이를 구해준 사람
강주환이 떠나고 송아름은 얼굴이 빨갛게 부어오르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고은희를 바라보며 말했다.“은희 이모, 미안해요. 이모 며느리 되기는 글렀나 봐요. 주환 씨와 주혜는 저를 좋아하지 않네요. 다들 제가 하성이에게 최면을 걸었다고 생각하지만 제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하겠어요. 하지만 주환 씨는 이렇게 쉽게 그 말을 믿어버리네요.’고은희는 마음이 아팠지만 당장은 도와줄 방법이 없었다. “아름아, 먼저 다른 데로 가서 나를 믿고 기다려줘. 내가 반드시 방법을 생각해낼게. 너와 주환이가 결혼에 성공해서 너를 꼭 내 며느리로 만들 거야.”결국 송아름은 그 집에서 나와 영주시에 있는 고은희 명의로 된 다른 집으로 옮겨갔다. 물론 옮긴 집도 화려했지만 강씨 집안 본가에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여기는 낮에 청소해주는 도우미만 왔다 갈 뿐이지만 강씨 집안 본가에 있을 때는 항상 돌봐주는 사람이 있었고 입을 옷이 필요하면 가져다주고 배가 고프면 식사를 대령해주었다. 그때 생활에 비하면 지금은 스산하기 그지없었다. 맞아서 부어오른 자기 얼굴을 거울에 비춰볼 때면 송아름의 순진하게 빛났던 눈동자가 음산하게 변했다. “젠장, 윤성아, 반드시 너도 똑같이 당하게 해줄 거야.”송아름은 모든 면에서 훌륭한 강주환을 좋아했고 그 남자가 가진 권력과 여러 가지가 송아름이 그 남자의 옆에 서 있는 사람이 자신이기를 갈망하게 했다. 강주환의 계속되는 냉대는 송아름의 소유욕을 더욱 불타오르게 했다. 그동안 집에서 오냐오냐 자란 송아름은 자신이 갖고 싶은 걸 못 가진 적이 없었다. 그런 자신을 때린 윤성아로 인해 윤성아를 이기고 싶은 승부욕은 더욱 거세졌다. 반드시 윤성아의 손아귀에서 강주환을 빼앗아 그 여자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할 것이라 다짐했다.한편, 강주환은 윤성아가 있는 오피스텔에 도착했다. 몸이 회복되자 또 윤성아에게 붙어있는 하성이와 그런 하성이를 보고 웃는 윤성아를 보자 강주환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었다. 그 모습을 보고 윤성아가 물었다.“왜 웃어요?”
이세훈은 내색하지 않고 얼굴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윤성아 씨, 우리의 원만한 계약을 위하여!”윤성아는 이세훈의 행동을 지켜보고 차가운 눈으로 앞에 있는 술잔을 들여다보았다. 윤성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술잔을 받아들고 자연스럽게 그대로 입에 넣었다. 하지만 윤성아는 술을 삼키지 않고 입안에 담고 있다가 이세훈이 보지 않는 틈을 타 조용히 뱉어 버렸다. 술도 마셨겠다 이세훈은 계속하여 다른 얘기를 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윤성아는 일어나서 나가려고 하다가 이마를 잡고 온몸에 힘이 풀려 주저앉는 척 의자 위로 넘어졌다. 윤성아는 마치 당황한 것처럼 이세훈을 바라보았다.“이 대표님... 저한테 뭘 먹이신 거예요?”이세훈은 웃으며 걸어와서 한 손으로 윤성아를 일으켜 세웠다. “윤성아 씨, 그러고 보니 윤성아 씨 정말 이쁘게 생기셨어요. 그렇게 많은 여자를 만나봤지만 당신만큼 아름다운 사람은 처음 봤어요.”이세훈은 윤성아를 데리고 룸을 나섰다. 목적이 명확한 이세훈은 윤성아를 데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자신의 호텔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는 동안 윤성아는 계속하여 이세훈에게 맞춰 연기했다. 호텔 방 문이 닫히고 이세훈은 윤성아를 침대로 던져버렸다. 그는 음침하게 웃으며 자신의 가방에서 물건들을 꺼내기 시작했다.“성아 씨, 오늘 밤 우린 반드시 즐거울 거예요.”그 말을 들은 윤성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세훈의 개인적인 추문에 대해 윤성아도 못 들어본 건 아니지만 이세훈이 일에서만큼은 원칙적으로 하는 사람이란 걸 알고 있었다. 칠흑 같은 눈동자가 차갑게 식은 윤성아는 몸을 일으키며 이세훈이 자신의 가방에서 꺼내는 물건들을 쳐다보았다. 밧줄, 수갑, 채찍 등등 이세훈의 취향이 드러나는 물건들이었다. “이 대표님, 저는 XC 그룹의 대표예요. 이 사장은 친구와 파트너에게 항상 의리를 지키고 선을 넘지 않는 분이라고 알고 있어요. 만약 오늘 저를 건드리시면 XC 그룹과 한섬 컴퍼니의 계약은 여기서 끝나요. 당신의 명성에도 영향을 끼
남서훈은 싱긋 웃었다.아직 임신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맥으로 정확히 짚어 낼 순 없었지만 느낌은...“아마 남동생일 거야.”“아... 남동생...”양나나는 눈을 굴리더니 남서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남동생도 좋은 것 같아요. 동생 태어나면 저랑 엄마가 동생한테 의술도 가르쳐주고 아빠랑 사업하는 것도 배우고요. 그리고 남자애는 너무 응석 받아줄 필요도 없고 내가 맘껏 부려 먹을 수 있잖아요.”자기 뒤꽁무니를 쫄랑쫄랑 따라다니며 누나, 누나 하고 부르는 장면을 상상하니 양나나는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어떻게 생긴 남동생이 엄마 배 속에서 태어날까, 양나나도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그러나 남서훈이 임신 다섯 달째로 접어드는 어느 날, 양나나는 실종됐다.양준회와 남서훈은 매일 안절부절못하여 속이 타들어 갔다.둘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세력을 동원해 전 세계 각 곳을 샅샅이 뒤졌지만 여전히 양나나의 행방을 찾지 못했다.양나나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그때 양나나는 이미 8살이었다.남서훈은 딸을 찾지 못해 날마다 눈물로 얼굴을 적셨다. 그녀는 점점 야위어갔다.그걸 보는 양준회는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는 아내를 꼭 끌어안고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나나는 똑똑한 아이야. 당신이 의술과 독 쓰는 법도 잘 가르쳐줬으니까 별일 없을 거야. 나나는 너와 내가 낳은 딸이야. 전에 풍운파에 혼자 몰래 들어가서도 그 안을 마구 헤집고 다녔잖아.”아무튼 그는 양나나가 어디에 가서 어떠한 상황에 부딪히던 자신을 잘 보호할 거라고, 아무 일 없이 잘 살아 있을 거라고 남서훈을 위로했다.남서훈도 굳게 믿고 있었다. 양나나의 시체를 보게 되지 않는 한 그들의 딸은 세상 어딘가에 꼭 살아있을 거라고.그 후 넉 달이 지났다. 9달이 된 배는 불룩하게 튀어나왔다.양나나는 아직도 찾지 못했고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그러다 남서훈은 아들을 낳았다. 강보에 싸여 품에 안겨있는 아들을 보며 남서훈은 양나나를 그리워했다.“나나야, 대체 어디 있는 거야... 네 뒤꽁무
그리고 바로 그날 오후.양준회와 남서훈, 그리고 백나연과 성진훤, 이렇게 네 사람은 백무산을 찾아갔다.그를 만나자마자 양준회와 성진훤은 백무산한테 사과부터 했다.어리둥절한 백무산은 그들이 왜 갑자기 찾아와서 사과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 후 양준회는 남서훈의 어깨를 와락 감싸안았고 성진훤도 보란 듯이 백나연의 손을 꼭 잡았다. 성진훤은 원래 양준회처럼 백나연을 확 끌어안고 싶었지만 미래 장인어른이 될 사람 앞이라 행동을 조심스럽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하여 손만 잡았다.백무산은 더 혼란스럽고 얼떨떨해졌다.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그는 눈알이 튀어져 나올 듯하게 그들 넷을 번갈아 쳐다봤다.그때 양준회가 입을 열었다.“어르신, 우리 서훈이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입니다. 남씨 집안의 특수한 사정으로 어릴 때부터 남장을 했던 것이고, 백나연 씨와의 혼약도 그저 소동극이었습니다. 이 일은 서훈이한테 책임 묻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노여움이 있으시면 저한테 푸세요.”그 말에 백무산은 눈살을 찌푸렸다.남서훈이 여자라니... 어떻게 그런 일이?여자가 그의 딸과 약혼했다니,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었다.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란 말인가.백무산은 불같이 화를 냈다.그러자 백나연이 나섰다.“아빠, 이 일은 서훈이 탓이 아니에요, 제가, 제가 꼭 도와달라고 했어요.”“뭐야? 널 도와줘?”“네.”백나연이 설명했다,“아빠랑 오빠가 자꾸 소개팅 주선하는 바람에 제가 너무 골치 아파서 서훈이한테 도와달라고 부탁한 거예요, 나랑 약혼하자고. 그럼 아빠랑 오빠가 나한테 선 자리를 더는 강요 안 할 거 아니에요. 서훈이는 싫다고 했는데 내가 억지 써서 해주기로 한 거예요.”백나연은 자기 잘못이라고 매우 강조했다.그녀의 눈빛에 아픔이 언뜻 스쳐 지나갔다.“전 그때 결혼할 생각이 없었어요... 그리고 저랑 서훈이는 서로 약속했어요. 누가 먼저 운명의 상대를 만나게 되든, 그때 되면 파혼하기로요. 절대 서로의 앞날을 방해하지 않기로 했어요. 이제
그 순간 용준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한 번 떨어지기 시작한 눈물은 그칠 줄을 모르고 펑펑 쏟아졌다.이게 얼마 만인가.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고 싶은 생각을 항상 했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그는 오늘 끝내 그녀를 안을 수 있었다. 팔을 뻗어 그녀를 껴안고 얼굴을 그녀의 어깨에 파묻은 채 용준은 또 한참을 울었다.예서는 그가 평생 사랑한 유일한 여자였다.그는 품속에 있는 그녀를 부드럽고 진실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난 네가 고마워. 넌 너무 용감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용감해. 옛날 일은 이미 다 지나갔어. 넌 이것만 기억해. 난 널 사랑하고, 네가 있어야만 내가 살 수 있어. 네가 있으니까 내가 괴물로 변하지 않은 거야. 아니면 난 모든 걸 다 망가뜨렸을 거야. 스스로도 혐오하는 그런 나쁜 인간으로 돼버렸을 거야.”예서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도 알고 있었다. 남자가 하려는 말이 뭔지 그녀는 모두 알고 있었다.이날, 둘은 아주 오랫동안 얘기를 나눴다.예서는 더는 용준을 불편해하지 않았다. 용준이 있으므로 하여 그녀는 더 빨리 회복될 것이었다.그렇게 예서가 하루하루 나아지고 있을 때. 남서훈과 양나나는 한 번 나가 돌아다니기로 했다.한 거리의 상가 앞을 지나가고 있는데, 남자애 몇 명이 갑자기 튀어나와 양나나를 에워쌌다.그들은 매우 들뜬 소리로 말했다.“대장! 살아 있었어요?”“너무 잘 됐어요!”“대장, 대장을 그 사람들이 데려간 후로 우린 계속 대장의 소식을 기다렸어요. 대장도 그 애들처럼 상처투성이가 돼서 돌아오지 않을까 하고 걱정했다고요.”“지금은 어떤 상황이에요? 대장이 후계자가 된 거예요?”양나나는 고개를 저으며 아니, 라고 대답했다.그리고 주변을 둘러싼 남자애들한테 말했다.“난 후계자 되는 것에 관심 없어. 풍운파에 지금 남아있는 건 의술을 배우기 위해서야.”양나나는 시선을 남서훈한테 향하며 그들한테 남서훈을 소개했다.“이분이 내 스승님이야, 우리 스승님 엄청 대단해!”그날, 양나나는 그
지난 날에 발생한 그 끔찍한 과거를 스스로 입에 올리는 용준은 피가 흘러나올 듯이 눈이 시뻘겋게 물들었고 감정이 폭발할 한계치까지 다다랐다.그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애써 가라앉혔다.몇 분 후에야 그는 비로소 다시 입을 열었다.“그놈들은 죄다 죽여버려야 할 놈들이에요. 예서가 이쁘니까, 내 앞에서 예서를... 그때 예서는 이미 내 아이를 임신했는데...”용준의 온몸에서 난폭한 기운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돌아서서 주먹으로 나무를 세게 한 방 내리쳤다. 그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며 낙엽이 우수수 떨어졌다.그 큰 나무가 흔들릴 정도면 얼마나 센 펀치를 날렸는지 알 수 있었다.그의 손마디도 살이 찢겨나가 새빨간 피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는 감각을 느낄 수 없는 사람처럼 상처에 무덤덤했다. 아마도 손보다 마음이 더 아팠을 터였다.용준은 그때 일만 생각하면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심장이 뜯겨나가는 것처럼 아팠다. 예서가 피투성이가 된 채 텅 빈 눈으로 누더기 인형처럼 맥없이 쓰러져서 누워있던 참혹한 장면만 머릿속에 떠올리면 그놈들을 무참하게 도륙을 내고 싶었다.그리고 그는 그렇게 하였다.풍운파의 보스가 된 후 첫 번째로 한 일이 바로 예서의 복수를 하는 것이었다.그놈들의 범죄증거를 전부 찾아내 한 명도 빠짐없이 직접 처단했다.그때 그들은 무릎을 꿇고 울며불며 용서를 빌었다. 막다른 길에 몰려 살려고 해도 안 되고 죽으려고 해도 죽지 못할 때, 그들은 찌질이같이 눈물 콧물을 쥐어짜며 애원했다. 제발 살려달라고, 잘못했다고.정작 그들은 용준이나 예서한테 그런 자비를 베푼 적이 없는데 말이다.용준의 목소리는 점점 차가워졌다.“그것들이 나와 예서의 모든 것을 망치고 날 시궁창에 몰아넣었죠. 여전히 난 이렇게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생지옥에서 살고 있어요. 그것들은 백번 죽어도 마땅해요!”그러나 그놈들이 죽는다고 해서 상처가 아무는 것은 아니었다.용준은 피로 물든 주먹을 으스러지게 잡으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그들은 예서가 그들이 한
용준은 원래 정직한 사람이었고, 금호의 일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그는 어둠이 없는 밝은 햇빛 아래에서 사는 반듯한 사람이었다.그러나 일부 국제조직에서는 용준을 불안하게 여겼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고, 심지어 그가 의심되어 오랫동안 그에게 전자발찌를 채웠다.아무 일도 저지르지 않았지만 그는 범죄자 취급을 당했고, 그리하여 생활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더더욱 생각지도 못한 건, 그 당시 그와 깊은 사랑에 빠져있었던 여자친구마저 누구한테 몹쓸 짓을 당하게 된 것이다.그러므로 용준이 점점 나쁘게 변하여 나중에 어떤 일을 저지르게 되었던, 모두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요 몇 년 동안 풍운파는 용준의 관리하에 동남아에서 제일 큰 폭력조직으로 성장하였고, 닥치는 대로 무슨 일이나 다 저지르는 편이었지만 딱 한 가지 철칙이 있었다. 그건 바로 노약자와 여자, 아이들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거였다.의리도 지켰다.하지만...“그건 중요하지 않아요.”남서훈이 말했다.“이 세상은 원래 흑과 백으로 나뉘는 게 아니니깐요. 동남아는 원래 상황이 어수선하잖아요. 무장세력과 폭력조직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일시적으로 바꿀 수도 없어요. 오히려 풍운파와 같은 조직이 있다는 게 더 도움이 될지도 몰라요.”양준회가 그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어떤 측면으로 보면 용준은 꽤 마음에 드는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둘은 원수지간이다. 양준회가 그의 아버지를 죽였다. 비록 지금까지는 아무 짓을 안 했어도, 또 그가 원래 정직한 사람이었다고 해도, 풍운파를 이렇게 여러 해 동안 다스린 용준이 지금은 어떤 사람인지 누구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그리하여 양준회는 안심할 수 없었다. 여전히 남서훈과 같이 풍운파를 즉시 떠나려고 했다.“하지만 나나도 여기 있어요.”남서훈이 예상치도 못한 폭탄을 터트렸다. 양준회는 깜짝 놀랐다.양나나가 여기에 있다는 건 상상도 못 했다.하지만 놀란 것도 잠시, 그는 바로 말했다.“그럼 나나도 같이 떠나면 돼.”갇힌 두 달
강하영이 부케를 내던지는 일순간 우양주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 부케를 향해 몸을 날렸다. 공중에서 부케를 잽싸게 낚아채는 그의 모습이 정지화면인 양 사람들의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부케를 손에 쥔 그다음 순간, 그는 부케와 함께 바다에 떨어졌다.모두가 경악했다.강하영은 크루즈 난간 쪽으로 달려가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남자를 보며 입을 떡 벌리고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선원들이 즉시 튜브를 던졌고, 또 어떤 사람들은 즉시 뛰어내려 구조하려 했지만 강주환이 그들을 말렸다.왜 구하지 말라는 건지 이해 안 된다는 듯한 눈빛으로 윤성아는 강주환을 쳐다봤다.그러다 팔로 물살을 가르며 바다에 둥둥 떠 있는 우양주가 크루즈 위에 있는 강하영을 향해 큰 소리로 외치는 걸 듣고 왜 그러는지 알 것만 같았다.“여보, 어쨌든 내가 부케 받았으니까 당신 나랑 결혼식 치러야 돼요! 안 그러면...”그 뒤엔 위협적인 말이 따라야 하는데 우양주도 무엇으로 강하영을 협박할 수 있을지 몰랐다. 남은 건 자신의 이 몸뚱이 하나뿐인데...“안 그러면 나 안 올라갈 거야. 여기 바다에 계속 있을 거야, 결혼식도 못 하는데 그냥 빠져 죽지 뭐.”강하영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바다에 빠진 남자를 까만 눈동자로 차분하게 내려다보며 끝내 입을 열었다.“빠져 죽고 싶으면 그렇게 해요. 안 말려요.”“...”우양주는 서럽게 그녀를 쳐다봤다.역시나 아내는 매정했고 자신에 대해 애정이 없었다.그러나 그때 윤성아 곁에 서있는 강주환이 무덤덤하게 한마디 했다.“내 기억이 맞다면, 이 바다에 상어가 출몰한다고 했어요. 식인 상어.”강주환은 고개를 돌려 강하영한테 말했다. “지금 아직 상어가 오지 않아서 그렇지, 나타나기만 하면 한꺼번에 열 몇 마리씩 무리 지어서 나올 거예요. 그게 게네들 습성이라. 이야... 쟨 아마 그러면 뼛조각도 남지 않겠네.”“...”그 말에 강하영이 급해 났다. 말투도 전처럼 차분하고 담담하지 않았다.난간에 기대어 우양주를 향해 내리 소리 질렀다.“뭐
미리 준비한 축사를 울먹이며 끝까지 다 읽고는 원이림을 향해 볼멘소리를 했다.“너 이 놈 자식, 내가 죽을 때까지 네가 결혼하는 걸 못 보는 줄 알았다. 아이고... 드디어 결혼하는구나. 너도 이제 가정이 생겼어.”“너 똑바로 들어. 은진이한테 평생 잘 해줘야 돼, 아내한테 잘 하는 건 우리 집안 내력이야. 나도 네 엄마 말을 엄청 잘 들었어. 너도 똑같아, 알겠니? 오늘부터는 은진이한테 더 잘해야 돼, 말도 잘 듣고, 은진이부터 생각하고 배려해 주고. 은진이가 조금이라도 맘고생을 하게 되는 날엔 내가 너 가만 두지 않을 거야, 알겠어?!”원이림은 새카만 눈동자로 여은진을 깊게, 애틋하게 들여다보며 그녀와 깍지를 낀 두 손에 힘을 더 주었다.“걱정 마세요. 난 평생 우리 여보 맘고생 안 시킬 거예요.”여보라는 호칭이 지금 이 시각부터 명실상부하게 되었다.원이림은 그녀의 손을 잡고 크루즈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그리고 미리 준비된 데이지 꽃을 바다로 뿌렸다. 하얀 꽃잎들이 파도에 실려 멀리 떠내려갔다.둘은 거기에 선 채 눈물을 머금고 울먹이며 말했다.“어머니, 아버지. 저 너무 행복해요. 우리 너무 행복해요.”결혼식의 마지막을 장식할 부케 토스하는 시간이 다가왔다.강주환과 윤성아, 그리고 나엽과 안효연은 모두 기혼자로서 나가지 않고 구경만 했다. 하객 중에 미혼인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었다.우양주도 강하영의 손을 잡고 그리로 향했다.강하영은 몸을 뒤로 빼면서 말했다.“우린 결혼했는데 왜 부케를 받으러 가요? 다른 사람한테 갈 좋은 축복을 왜 우리끼리 받겠다고 달려들어요, 쓸데없이. 그렇게 할 일 없고 힘이 남아돌면 내가 다른 일 하게 해 줄게요.”“무슨 일?”강하영은 푸른 바다를 향해 눈을 힐끔 하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당신 수영 좋아하잖아요. 내가 엉덩이 확 걷어찰 테니까 바다로 들어가서 수영이나 할래요?”“...”저번에 강하영과 같이 수영하면서 그녀가 자신한테 새빨간 수영팬티를 사줘 창피를 당하고 나서부터 우양주는 수영하는
여은진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예쁘게 미소 지었다.“나 다 알아요.”지난 1년 동안 그가 어떻게 해왔는지 잘 아는 그녀는 더 이상의 맹세와 언약 같은 건 필요 없었다.“응!”여은진을 안은 채로 원이림은 그녀의 여린 입술에 쪽쪽거리며 뽀뽀를 했다.장내의 플래시 세례가 정신없이 터지는 가운데 그는 돌아서서 무대 아래에 앉아있는 모든 사람한테 당찬 목소리로 선포했다.“오늘 저의 이 행복한 순간을 지켜본 여기 계신 모든 증인 분들한테 제가 선물을 준비할 생각입니다. 나중에 저희 베린 그룹에 가셔서 선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번 달 20일에 저와 은진이의 결혼식이 있을 예정이니 여러분들께서 모두 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여은진을 안고 시상대를 내려가려 했다.여은진이 내려달라고 했지만 그는 내려놓지 않았다. 그렇게 안은 채로 시상식장을 걸어 나와 차에 올라탔다.럭셔리한 롤스로이스가 천천히 내달리고 있었다.여은진은 아직도 그의 품에 안긴 채로 있었다.“이번 달 20일에 결혼한다고요? 그럼 열흘밖에 안 남았는데, 너무 촉박하지 않아요?”그녀가 눈을 들어 바라보며 물었다.“아니, 전혀.”그녀의 얼굴에 시선을 떨구며 원이림이 말했다.“시간이 모자라지만 않았으면 내일에라도 당장 결혼식 치르고 싶어.”반년이 넘는 동안, 그는 매일 결혼식에 관한 모든 것을 준비하고 있었다.결혼반지, 웨딩드레스, 그리고 결혼에 필요한 모든 물품과 디테일한 사항들을 전부 준비하고 체크했다. 그녀가 결혼을 동의하는 그 순간만 기다리고 있었다.그리고 그 순간이 끝내 다가왔다.웨딩사진을 찍는 것 외에는 크게 시간을 들일 일도 없었다.다만 여은진이 임신했기 때문에 너무 빠듯하게 스케줄을 잡지 않고 싶었을 뿐이다.결혼식에 참석할 하객을 초대하는 일도 있긴 하지만 10일이면 충분했다.촉박하지 않을뿐더러 시간적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여보, 우리 지금 바로 혼인신고 하러 가.”원이림은 한시라도 더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기사한테 얘기하여 구청으로 가자
원이림은 금방 샤워를 마친 여은진한테로 다가가 그녀의 팔을 끌어당겨 품에 꼭 끌어안았다. 그다음에는 당연히 침대로 향했다.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수순을 밟아갔다.한창 격렬해지려던 찰나, 원이림은 짧게 비명을 질렀다. 크게 지르진 않았다. 본능적으로 소리를 내질렀지만 그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여은진이 알아차리지도 못한 새에 살에 푹 찔린 그 가는 물건을 빼내야겠다고 머릿속으로 빨리 반응했다.하지만 역시 늦었다.여은진이 몸을 일으켜 스탠드를 켰고, 어두웠던 방안은 환한 빛으로 채워졌다.이어 급히 그를 살피던 여은진은 원이림의 엉덩이에 바늘이 하나 꽂혀있는 걸 발견했다.짧고 가는 옷을 꿰맬 때 쓰는 그런 바늘이었다.여은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얼굴로 남자를 보며 물었다.“어떻게 바늘에 찔릴 수 있어요? 침대에 왜 바늘이...”“...”꽂힌 바늘을 빼며 원이림은 이야기를 얼버무렸다.“괜찮아, 그냥 바늘인데 뭐. 별로 아프지도 않아.”그러고는 또 다짜고짜 몸을 뒤집으며 여은진을 몸 아래로 깔았다.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손을 뻗어 스탠드를 끄고 그녀의 입술을 거칠게 탐했다. 잠깐 벌어진 에피소드를 그녀의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진행 중이었던 일을 마무리하려는 의지였다.하지만 여은진은 그의 키스를 받아내면서도 오후 그의 당황스러운 표정과 난데없이 침대에 나타난 바늘을 함께 떠올렸다. 정신을 쏙 빼놓으려는 지금의 행동도 분명 그것과 연관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잠깐만.”여은진은 원이림을 밀어내고 다시 한번 스탠드를 켰다.의심이 부풀어 오른 눈으로 빤히 그를 노려봤다. “똑바로 말해요. 아까 그 바늘로 수작 부린 거 맞죠? 말해요, 몇 개나 찔렀어요?”“...”끝내는 발각되었다. 원이림은 이실직고했다. 강주환이 원흉이라고, 그가 시켜서 했다고 불었다.“여보, 나 며칠 전에 운봉 비즈니스 회담에 참석했는데 거기서 강주환을 만났어. 그 자식이 날 비웃는 거야. 그리고 이렇게 하라고 아이디어를 내줬어. 바늘로 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