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하고 현대적인 아파트 침실 안.이제 쾌락의 시간이 막 끝난 시점이었다. 방안엔 뜨거운 열기가 여전했고 진한 남자의 호르몬과 여자의 몸에서 은은하게 나는 향기가 남아있었다. 남자의 복근을 타고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 욕망이 숨겨져 있었는데 조금 전의 위로가 성에 차지 않은 듯 탐욕스러웠다. 그는 지쳐서 깊은 잠에 빠진 여자를 뚫어지라 지켜보다가 그녀를 안으며 말했다.“자는 척하지 말고 눈을 떠 나를 봐!”“이게 다 네가 원했던 거잖아.”윤성아는 뼛속까지 시큰해졌는데 마치 온몸의 힘이 순식간에 다 빨려 나간 것 같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없었다. 그녀의 젖은 머리칼이 가늘고 긴 목에 꼭 붙어 있었고 발그레한 얼굴은 웜톤 불빛에 물들어 더 유혹적으로 비쳤다. 남자는 그녀의 흐리멍덩한 눈빛을 보자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가서 씻자.”그가 그녀를 안아 들고 성큼성큼 욕실로 향했다. 샤워기를 틀자 안개가 자욱했고 남자는 그녀를 뜨거운 물이 가득 담긴 욕조에 던져넣었다...곧이어 건장한 몸을 가진 남자도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욕실에서 나왔을 땐 이미 두 시간이 흐른 뒤였고 그는 여전히 뜨거운 눈빛으로 품에 안긴 여자를 바라봤다. “정말 지쳤어?”“네.”윤성아가 대답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사람을 매혹하는 힘이 있었는데 새끼 고양이처럼 매력적이었다.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그냥 이대로 잠들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그녀는 힘겹게 눈을 떠서 남자를 바라봤다. 잘생긴 이목구비는 타고난 듯했지만 차가웠다. 온몸에서 고귀한 분위기가 뿜어져 나왔다.그와 그녀, 한 사람은 하늘에 있고 다른 한 사람은 늪에 빠져 있다. 그는 그녀의 ‘은혜로운 고객님’이자 그녀가 돈을 요구하는 ‘돈줄’이기도 했다.4년 동안 그에게 돈을 달라 요구한 적은 몇 번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을 만큼 많았다.하지만 매번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난처해할 때마다 어쩔 수 없이 눈을 질끈 감고 큰 액수를 요구해야
윤성아는 6천만 원을 더 달라고 말할 생각이었다.하지만 입을 열기도 전에, 강주환의 곁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주환 씨, 빨리 와요.”“응.”그가 부드럽게 대답했다. 그리고 윤성아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전화를 끊어버렸다.다음날.회사에 있을 때 사적인 얘기는 일절 하면 안 된다고 강주환이 얘기한 적이 있었기에 윤성아는 6천만 원에 관한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하지만 오후 네 시 쯤, 윤정월이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성아야, 돈은 구했어? 그놈들이 네 아빠를 감금하고 있어. 오늘 찾으러 갔는데 네 아빠를 때리고 밥도 안 주고 있었어...”윤성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최대한 빨리 돈을 구해서 돌아갈게요.”전화를 끊고 그녀는 잠시 망설였으나 결국 대표님 사무실의 문을 두드렸다.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대표님, 6천만 원 더 빌려줄 수 있나요?”강주환이 고개를 들어 서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빌려? 나한테서 네가 가져간 돈이 얼만데? 한 번이라도 갚은 적 있어? 그리고, 뭐로 갚을 생각인데? 응?”“...”고개를 숙인 윤성아는 대답할 수 없었다.“하.”강주환이 차갑게 웃었다. 그는 마치 윤성아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것 같은 눈빛으로 말했다.“너에게 관심이 있는 건 맞아. 하지만 윤성아, 너 그렇게까지 비싸지 않아.”그는 이미 경고했었다. “...”그녀는 여전히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 순간 완전히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비천한 모습으로 치욕의 벽에 못 박힌 것 같았다. 하지만 자처한 것이니 어쩔 수 없었다.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었고 양옆으로 늘어뜨린 주먹을 꽉 쥐었는데 서러운 와중에 강인함이 엿보였다.“젠장!”강주환이 낮게 읊조렸다. 그의 까만 눈동자가 윤성아를 흘긋 봤다.“금방 돈을 줬는데 모자라다?”“사고 싶은 가방이 있어요. 6천 만원이에요.”윤성아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내가 너와 함께한 뒤로 네가 가방을 몇 개나 샀어? 죄다 가
대표님의 수석 비서로서 윤성아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사모님, 오셨어요?”“그래.”고은희가 대답하며 여자의 손을 잡고 윤성아에게 소개했다. “이쪽은 재민 그룹의 큰 아가씨 송유미야. 주환이 약혼녀이기도 하지.”“유미는 이제 막 대학 졸업했어. 주환이 비서로 인턴 과정을 밟았으면 해. 마침 둘이 더 가까워질 수도 있잖아. 윤 비서, 주환이 수석 비서인데 앞으로 일에서나 생활에서나 주환이 돌보던 것처럼 유미도 잘 보살펴줘.”윤성아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사모님.”그녀는 항상 공손한 태도에 예의 바랐고 언제나 그랬듯이 약간 차가웠다.고은희는 뒤에 서 있는 여자를 향해 말했다.“유미야, 이분은 윤 비서야. 사 년 전에 주환이 비서로 일하기 시작했어. 주환이에 관해 아주 잘 알고 있을 거야. 앞으로 넌 윤 비서 잘 따라다녀.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 윤 비서한테 연락하고.”그러자 송유미가 단순하고 착한 얼굴로 활짝 웃었다. “네, 어머님 시름 놓으세요. 저 꼭 윤 비서님께 잘 배울게요.”하지만 고은희가 떠나자 송유미는 바로 표정을 싹 바꿨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치켜들고 있는 집안 아가씨의 기세를 잔뜩 뿜어냈다. 도도한 얼굴로 윤성아를 보며 그녀가 말했다.“앞으로 다른 곳을 찾아 앉아요. 오늘부턴 내가 당신 자리에 앉을 거니까!”“네.”윤성아가 답했다. 그녀는 송유미에게 자리를 내어주기 위해 자신의 물건을 챙겼다.“잠시만요.”수납함을 들고 떠나려는 윤성아를 불러세우며 송유미가 명령조로 말했다.“물건 다 챙기면 커피 좀 내려줘요. 핸드 드립 커피에 설탕은 넣지 말아 주세요.”“아, 그리고 베리 디저트 가게의 마카롱이 먹고 싶네요. 내려가서 사 오세요.”“네.”윤성아가 짧게 대답하곤 대표님 사무실에서 나와 자신의 물건을 비어있는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곧이어 대표님 사무실의 막내 비서가 쪼르르 달려와 말했다.“언니, 언니가 수석 비서인데 왜 자리를 내어줘야 해요? 그리고 왜 언니한테 이래라저래라하는 거죠?”“괜찮아.
강주환은 윤성아가 사직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 여자는 사직할 자격이 없었다!그가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너, 따라와.”“응.”송유미는 그와 함께 대표님 사무실에 들어갔고 방문이 닫혔다. 차가운 눈빛으로 송유미를 쏘아보며 강주환이 물었다.“윤 비서는 어떻게 된 거야? 왜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사직서를 썼어?”송유미가 멍한 얼굴로 눈을 깜빡거리며 말했다.“내가 수석 비서의 일을 할 수 있으니까. 이젠 그녀가 필요 없으니까! 그런데 왜 굳이 남겨둬야 하는데?”“게다가 나 연말 보너스랑 3배가 넘는 월급을 배상해줬어. 자그마치 4천만 원이야. 돈을 받고 그냥 떠나던데?”“...”“그 여자 얘기는 이제 그만하자.”송유미가 화제를 돌렸다. 그녀는 출장이 어땠냐고 물었다가 그의 팔에 안기며 애교를 부렸다.“며칠 동안 못 봐서 너무 보고 싶었어. 퇴근하고 같이 밥 먹자.”“그래.”그날 밤, 송유미와 함께 식사를 마치고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준 후, 강주환은 아파트로 찾아왔다. 방문을 여니 그곳은 어두컴컴했다! 그 여자는 이제 거기에 없었다. 그녀에게 전화를 걸자 연결음 한 번에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어디야?”차가운 목소리의 강주환.“집에 있어요.”“아파트로 와.”명령조 한마디를 끝으로 그는 전화를 끊어버렸고 이미 자려고 누웠던 윤성아는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다시 옷을 갈아입고 방문을 나서는데 물 마시러 나온 윤정월과 마주치게 되었다.“성아야, 이렇게 늦었는데 나가는 거야?”“네.”짤막하게 대답하고 그녀는 집을 나서 택시에 탔다. 10분 후, 아파트에 도착했다. 지문으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와 전등을 켜려는 순간, 강주환이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 자신의 품으로 와락 끌어안았다.익숙한 남자의 향기가 코끝에 풍겨왔다. 강주환은 그녀의 턱을 거칠게 잡고 마치 벌을 주듯이 키스를 퍼부었다. 그는 그녀를 벽으로 몰아붙였다...“싫어요!”그의 눈빛이 어둠이 깔린 밤에 사냥감을 노려보는 늑대처럼 번뜩였는데
따귀를 맞은 한쪽 얼굴이 얼얼했다.“아닙니다.”그녀는 강주환과의 관계를 부인했다. 뺨을 맞은 자그마한 얼굴은 차가웠고 그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윤성아는 담담하게 송유미를 바라보며 말했다.“유미 씨, 전 그저 호진 그룹의 일자리가 필요할 뿐이에요. 전 돈이 필요합니다. 대표님 수석 비서로 일하면 월급이 적지 않잖아요.”의심스로운 눈빛으로 윤성아를 훑어보며 송유미가 말했다.“괜찮은 일자리 찾고 싶으면 내가 재민 그룹에 소개시켜줄게. 오빠가 거기에 있는데 네가 비서로 일해도 돼.”하지만 이번에 윤성아는 허락하지 않았다. “유미 씨, 이미 아시겠지만 전 학력이 낮아요. 고등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했어요. 강대표님께서 일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대표님께서 필요하시다면 전 호진 그룹에 남을 겁니다.”송유미가 미간을 구기며 윤성아를 노려봤다.“그럼 왜 그때는 일 그만둔다고 한 거야? 왜 내가 준 돈을 덥석 받았냐고.”“유미 씨는 곧 대표님과 약혼할 사이니까 전 유미 씨 뜻이 곧 대표님 뜻인 줄 알았어요.”솔직한 윤성아의 대답.“그래서?”‘빌어먹을, 지금 일부러 나 약올리는 거야? 강주환의 약혼녀가, 미래의 와이프가 너 하나 내쫓을 능력이 없다는 거야?’윤성아가 송유미를 바라봤다.“유미 씨가 미리 준 연말 상금이랑 퇴직금은 전부 돌려드리겠습니다.”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송유미는 죽일 듯이 윤성아를 노려봤다.“너, 강주환이랑 아무 사이 아니길 바라. 뭔가 있다면, 내가 알게 된다면, 너 죽여버릴 테니까.”...퇴근 시간이 되자 윤성아는 일을 마치고 디자인 팀에서 나왔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여 문이 열렸고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대표님.”그녀는 공손하고도 거리가 느껴지는 어조로 그를 불렀으나 엘리베이터에 타려는 뜻은 없어보였다.강주환의 미간이 꿈틀거렸다.“안 들어오고 뭐해?”그러자 윤성아가 고개를 숙이고 그의 옆에 나란히 섰다.강주환은 차가운 눈빛으로 조각 같이 예쁜 성아의 얼굴을 흘긋 봤는데 선명한 손가락 마디
“...” 침묵하던 윤성아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했다. “돈을 원하는 게 아니에요.”“그래?”강주환은 약간 의외였다. 함께 한 4년 동안 매번 할 때마다 돈을 원했던 건 그녀였다.“대표님, 이제 약혼녀도 있는데 우리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녀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살짝 미간을 추켜세운 강주환이 입에서 하얀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왜, 질투하는 거야? 내가 약혼하지 말길 바라?”“아뇨.”윤성아가 대답했다. 그녀는 질투할 자격이 없었고 한 번도 이 남자에게 약혼녀가 없길 바란다고 생각해본 적 없었다. 다만...“계속 이럴 순 없어요.”예전엔 돈을 받고 그의 애인이 되어주는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이제 약혼녀가 생겨 모든 것이 너무 복잡해졌다.“대표님, 저도 자꾸 피곤해지기 싫어요. 만약 유미 씨가 우리 사이를 알게 되면 날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그녀는 사실을 얘기하고 있었다.“그래서?”강주환이 담배를 비벼끄며 한층 무거워진 눈빛으로 물었다.“무서워? 그래서 나랑 끝내려고? 앞으로 돈 필요 없는 거야?”“...”윤성아는 그에 대해 아주 잘 알았다. 싸늘해진 분위기와 무거운 눈빛, 그가 곧 화를 낼 거라는 직감이 왔다. 그녀는 화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 고개를 저었다.“아뇨.”“흥.”강주환이 차갑게 웃으며 윤성아의 턱을 들어 올렸다.“나를 떠나면 언제든지 네가 원하는 대로 돈을 줘서 만족시켜주는 ‘지갑’을 또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그러니까 윤성아,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마. 내가 끝났다고 하기 전엔 모든 게 그대로야.”“...”더는 할 말이 없어진 윤성아. 강주환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하얗고 예쁜 얼굴이 맞아서 부어올라 완벽한 아름다움에 금이 가버렸다.그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아파?”윤성아가 고개를 저었다. 다시 옷을 입고 떠나기 전, 강주환이 4천만 원짜리 수표를 던져주며 말했다. “이건 보상.”그녀가 맞아서 주는 보상인 걸까?“내일 너를 다시 데려올 거야.”한마디 보태고 강주
윤성아는 차갑고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않는 데다 고졸 학력이라는 이유로, 그런데도 뛰어난 업무 능력을 갖췄다거나 하는 이유로 사무실에서 꽤 많은 사람의 미움을 샀다. 하지만 그렇다고 누군가 그녀를 괴롭힌 적은 없었고 오히려 겉으로는 ‘성아 언니’라고 친근하게 부르곤하며 그녀가 맡기는 일도 척척 해나갔다. 그러나 지금은...“성아 언니, 대표님을 사로잡을 만큼 대단하신데 이 정도 일은 알아서 해결하세요. 우리 같은 사람이 왜 필요해요?”윤성아가 미간을 구겼다.“어머, 제가 말실수를 했네요. 미안해요, 언니.”상대는 아무런 성의도 없는 사과를 하곤 비웃듯이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10시에 미팅 있다고 얘기할 거니까 대표님한테 일러바치면 절대 안 돼요!”윤성아는 그곳을 떠났다. 그러자 상대 비서가 문서를 거칠게 책상에 던지며 말했다.“잘난척하긴. 얻어맞아서 머리에 피까지 흘린 주제에!”대표님 사무실 직원들의 따가운 눈빛은 전과 확연히 달랐다. 그들은 윤성아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마음껏 비웃었다! 심지어 업무상으로도 들은 체만치 하거나 그녀의 말에 따르지 않았다.이런 따가운 시선 속에서도 윤성아는 허리를 곧게 폈다. 그녀는 사람들이 의논하는 것들을 듣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들어야 했고 난감하기 그지없었다.“똑똑.”대표님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간 윤성아가 문서를 내려놨다.“미팅 알림은 전했어요. 그리고 이건 확인이 필요한 문서입니다.”“응.”강주환이 한마디 답하곤 고개를 들었다. 윤성아의 이마에 붙여진 일회용 밴드와 화장으로 가렸지만 여전히 보이는 손가락 자국이 눈에 띄었다.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이내 다시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일에 집중했다.저녁 무렵, 퇴근한 윤성아가 회사 빌딩 밖으로 나왔을 때, 검은색 정장을 입은 남자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윤 비서님, 사모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차 안에 강주환의 엄마 고은희가 앉아있었다. 그녀는 차가운 얼굴로 다가가 예를 갖추며 인사했다. “사모님
송유미가 손에 들린 찻잔을 바닥으로 힘껏 내던졌다. “쨍그랑!”찻잔이 순식간에 산산이 조각났다.“무릎 꿇고 이거 다 정리해.”송유미의 괴롭힘은 점점 도가 지나쳤다. 그녀의 명령에 윤성아가 미간을 구겼다.반항 한 번 않던 그녀가 송유미를 바라보며 무덤덤하게 말했다.“유미 씨, 당신은 대표님 약혼자로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고 저는 당신의 어시로서 어떤 명령이든 따라야 해요. 제가 잘못하여 화를 내시면 참아야 하는 게 당연하지만 저도 인권이 있습니다.”그러자 송유미가 가소로운 듯이 웃었다.“하, 지금 인권 얘기하는 거야? 윤성아, 네가 못 견디고 여기서 떠나지 않는 이상 넌 내 어시고 내 명령에 따라야 해. 지금 무릎 꿇고 여기 깨끗하게 정리하라고.”가만히 서서 움직이지 않는 윤성아를 향해 송유미가 저벅저벅 다가와 그녀의 다리를 걷어찼다. “내 말 안 들려?”하이힐의 뾰족한 앞굽으로 힘껏 아랫배를 걷어차이니 눈물이 찔끔 나올만큼 아파서 저도모르게 허리를 굽혔다. “유미 씨, 빗자루 가지러 갈게요.”그녀는 비참한 몰골로 뒤돌아서 그곳을 떠났다.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챙겨와 말없이 그곳의 찻물과 유리 조각을 치우기 시작했다.하지만 송유미가 가로막으며 윤성아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녀는 눈을 부릅뜨고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처럼 말했다.“내 말이 이해가 안 돼? 무릎을 꿇으라고! 꿇은 채로 청소하라고!”윤성아는 묵묵부답이었다.자그마한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은 도도했다. 보고 있으면 누구든 마음이 아릴 얼굴이었다. 그런 얼굴이 송유미의 화를 더 부추겼다.송유미가 손을 뻗어 또다시 윤성아의 뺨을 때리려고 했으나 뜻밖에도 윤성아가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유미 씨, 전 그저 당신의 어시로 일했을 뿐이에요. 전에 저를 괴롭히고 화를 내도 다 참았죠. 유미 씨가 절 싫어한다는 거 저도 잘 압니다.”윤성아가 차가운 눈동자로 송유미를 응시했다.“제가 이 회사에 있는 것이 싫으시면 당신은 대표님 약혼녀의 자격으로 저를 회사에서 내보낼 수 있습니다.”
남서훈은 싱긋 웃었다.아직 임신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맥으로 정확히 짚어 낼 순 없었지만 느낌은...“아마 남동생일 거야.”“아... 남동생...”양나나는 눈을 굴리더니 남서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남동생도 좋은 것 같아요. 동생 태어나면 저랑 엄마가 동생한테 의술도 가르쳐주고 아빠랑 사업하는 것도 배우고요. 그리고 남자애는 너무 응석 받아줄 필요도 없고 내가 맘껏 부려 먹을 수 있잖아요.”자기 뒤꽁무니를 쫄랑쫄랑 따라다니며 누나, 누나 하고 부르는 장면을 상상하니 양나나는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어떻게 생긴 남동생이 엄마 배 속에서 태어날까, 양나나도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그러나 남서훈이 임신 다섯 달째로 접어드는 어느 날, 양나나는 실종됐다.양준회와 남서훈은 매일 안절부절못하여 속이 타들어 갔다.둘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세력을 동원해 전 세계 각 곳을 샅샅이 뒤졌지만 여전히 양나나의 행방을 찾지 못했다.양나나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그때 양나나는 이미 8살이었다.남서훈은 딸을 찾지 못해 날마다 눈물로 얼굴을 적셨다. 그녀는 점점 야위어갔다.그걸 보는 양준회는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는 아내를 꼭 끌어안고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나나는 똑똑한 아이야. 당신이 의술과 독 쓰는 법도 잘 가르쳐줬으니까 별일 없을 거야. 나나는 너와 내가 낳은 딸이야. 전에 풍운파에 혼자 몰래 들어가서도 그 안을 마구 헤집고 다녔잖아.”아무튼 그는 양나나가 어디에 가서 어떠한 상황에 부딪히던 자신을 잘 보호할 거라고, 아무 일 없이 잘 살아 있을 거라고 남서훈을 위로했다.남서훈도 굳게 믿고 있었다. 양나나의 시체를 보게 되지 않는 한 그들의 딸은 세상 어딘가에 꼭 살아있을 거라고.그 후 넉 달이 지났다. 9달이 된 배는 불룩하게 튀어나왔다.양나나는 아직도 찾지 못했고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그러다 남서훈은 아들을 낳았다. 강보에 싸여 품에 안겨있는 아들을 보며 남서훈은 양나나를 그리워했다.“나나야, 대체 어디 있는 거야... 네 뒤꽁무
그리고 바로 그날 오후.양준회와 남서훈, 그리고 백나연과 성진훤, 이렇게 네 사람은 백무산을 찾아갔다.그를 만나자마자 양준회와 성진훤은 백무산한테 사과부터 했다.어리둥절한 백무산은 그들이 왜 갑자기 찾아와서 사과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 후 양준회는 남서훈의 어깨를 와락 감싸안았고 성진훤도 보란 듯이 백나연의 손을 꼭 잡았다. 성진훤은 원래 양준회처럼 백나연을 확 끌어안고 싶었지만 미래 장인어른이 될 사람 앞이라 행동을 조심스럽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하여 손만 잡았다.백무산은 더 혼란스럽고 얼떨떨해졌다.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그는 눈알이 튀어져 나올 듯하게 그들 넷을 번갈아 쳐다봤다.그때 양준회가 입을 열었다.“어르신, 우리 서훈이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입니다. 남씨 집안의 특수한 사정으로 어릴 때부터 남장을 했던 것이고, 백나연 씨와의 혼약도 그저 소동극이었습니다. 이 일은 서훈이한테 책임 묻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노여움이 있으시면 저한테 푸세요.”그 말에 백무산은 눈살을 찌푸렸다.남서훈이 여자라니... 어떻게 그런 일이?여자가 그의 딸과 약혼했다니,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었다.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란 말인가.백무산은 불같이 화를 냈다.그러자 백나연이 나섰다.“아빠, 이 일은 서훈이 탓이 아니에요, 제가, 제가 꼭 도와달라고 했어요.”“뭐야? 널 도와줘?”“네.”백나연이 설명했다,“아빠랑 오빠가 자꾸 소개팅 주선하는 바람에 제가 너무 골치 아파서 서훈이한테 도와달라고 부탁한 거예요, 나랑 약혼하자고. 그럼 아빠랑 오빠가 나한테 선 자리를 더는 강요 안 할 거 아니에요. 서훈이는 싫다고 했는데 내가 억지 써서 해주기로 한 거예요.”백나연은 자기 잘못이라고 매우 강조했다.그녀의 눈빛에 아픔이 언뜻 스쳐 지나갔다.“전 그때 결혼할 생각이 없었어요... 그리고 저랑 서훈이는 서로 약속했어요. 누가 먼저 운명의 상대를 만나게 되든, 그때 되면 파혼하기로요. 절대 서로의 앞날을 방해하지 않기로 했어요. 이제
그 순간 용준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한 번 떨어지기 시작한 눈물은 그칠 줄을 모르고 펑펑 쏟아졌다.이게 얼마 만인가.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고 싶은 생각을 항상 했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그는 오늘 끝내 그녀를 안을 수 있었다. 팔을 뻗어 그녀를 껴안고 얼굴을 그녀의 어깨에 파묻은 채 용준은 또 한참을 울었다.예서는 그가 평생 사랑한 유일한 여자였다.그는 품속에 있는 그녀를 부드럽고 진실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난 네가 고마워. 넌 너무 용감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용감해. 옛날 일은 이미 다 지나갔어. 넌 이것만 기억해. 난 널 사랑하고, 네가 있어야만 내가 살 수 있어. 네가 있으니까 내가 괴물로 변하지 않은 거야. 아니면 난 모든 걸 다 망가뜨렸을 거야. 스스로도 혐오하는 그런 나쁜 인간으로 돼버렸을 거야.”예서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도 알고 있었다. 남자가 하려는 말이 뭔지 그녀는 모두 알고 있었다.이날, 둘은 아주 오랫동안 얘기를 나눴다.예서는 더는 용준을 불편해하지 않았다. 용준이 있으므로 하여 그녀는 더 빨리 회복될 것이었다.그렇게 예서가 하루하루 나아지고 있을 때. 남서훈과 양나나는 한 번 나가 돌아다니기로 했다.한 거리의 상가 앞을 지나가고 있는데, 남자애 몇 명이 갑자기 튀어나와 양나나를 에워쌌다.그들은 매우 들뜬 소리로 말했다.“대장! 살아 있었어요?”“너무 잘 됐어요!”“대장, 대장을 그 사람들이 데려간 후로 우린 계속 대장의 소식을 기다렸어요. 대장도 그 애들처럼 상처투성이가 돼서 돌아오지 않을까 하고 걱정했다고요.”“지금은 어떤 상황이에요? 대장이 후계자가 된 거예요?”양나나는 고개를 저으며 아니, 라고 대답했다.그리고 주변을 둘러싼 남자애들한테 말했다.“난 후계자 되는 것에 관심 없어. 풍운파에 지금 남아있는 건 의술을 배우기 위해서야.”양나나는 시선을 남서훈한테 향하며 그들한테 남서훈을 소개했다.“이분이 내 스승님이야, 우리 스승님 엄청 대단해!”그날, 양나나는 그
지난 날에 발생한 그 끔찍한 과거를 스스로 입에 올리는 용준은 피가 흘러나올 듯이 눈이 시뻘겋게 물들었고 감정이 폭발할 한계치까지 다다랐다.그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애써 가라앉혔다.몇 분 후에야 그는 비로소 다시 입을 열었다.“그놈들은 죄다 죽여버려야 할 놈들이에요. 예서가 이쁘니까, 내 앞에서 예서를... 그때 예서는 이미 내 아이를 임신했는데...”용준의 온몸에서 난폭한 기운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돌아서서 주먹으로 나무를 세게 한 방 내리쳤다. 그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며 낙엽이 우수수 떨어졌다.그 큰 나무가 흔들릴 정도면 얼마나 센 펀치를 날렸는지 알 수 있었다.그의 손마디도 살이 찢겨나가 새빨간 피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는 감각을 느낄 수 없는 사람처럼 상처에 무덤덤했다. 아마도 손보다 마음이 더 아팠을 터였다.용준은 그때 일만 생각하면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심장이 뜯겨나가는 것처럼 아팠다. 예서가 피투성이가 된 채 텅 빈 눈으로 누더기 인형처럼 맥없이 쓰러져서 누워있던 참혹한 장면만 머릿속에 떠올리면 그놈들을 무참하게 도륙을 내고 싶었다.그리고 그는 그렇게 하였다.풍운파의 보스가 된 후 첫 번째로 한 일이 바로 예서의 복수를 하는 것이었다.그놈들의 범죄증거를 전부 찾아내 한 명도 빠짐없이 직접 처단했다.그때 그들은 무릎을 꿇고 울며불며 용서를 빌었다. 막다른 길에 몰려 살려고 해도 안 되고 죽으려고 해도 죽지 못할 때, 그들은 찌질이같이 눈물 콧물을 쥐어짜며 애원했다. 제발 살려달라고, 잘못했다고.정작 그들은 용준이나 예서한테 그런 자비를 베푼 적이 없는데 말이다.용준의 목소리는 점점 차가워졌다.“그것들이 나와 예서의 모든 것을 망치고 날 시궁창에 몰아넣었죠. 여전히 난 이렇게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생지옥에서 살고 있어요. 그것들은 백번 죽어도 마땅해요!”그러나 그놈들이 죽는다고 해서 상처가 아무는 것은 아니었다.용준은 피로 물든 주먹을 으스러지게 잡으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그들은 예서가 그들이 한
용준은 원래 정직한 사람이었고, 금호의 일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그는 어둠이 없는 밝은 햇빛 아래에서 사는 반듯한 사람이었다.그러나 일부 국제조직에서는 용준을 불안하게 여겼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고, 심지어 그가 의심되어 오랫동안 그에게 전자발찌를 채웠다.아무 일도 저지르지 않았지만 그는 범죄자 취급을 당했고, 그리하여 생활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더더욱 생각지도 못한 건, 그 당시 그와 깊은 사랑에 빠져있었던 여자친구마저 누구한테 몹쓸 짓을 당하게 된 것이다.그러므로 용준이 점점 나쁘게 변하여 나중에 어떤 일을 저지르게 되었던, 모두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요 몇 년 동안 풍운파는 용준의 관리하에 동남아에서 제일 큰 폭력조직으로 성장하였고, 닥치는 대로 무슨 일이나 다 저지르는 편이었지만 딱 한 가지 철칙이 있었다. 그건 바로 노약자와 여자, 아이들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거였다.의리도 지켰다.하지만...“그건 중요하지 않아요.”남서훈이 말했다.“이 세상은 원래 흑과 백으로 나뉘는 게 아니니깐요. 동남아는 원래 상황이 어수선하잖아요. 무장세력과 폭력조직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일시적으로 바꿀 수도 없어요. 오히려 풍운파와 같은 조직이 있다는 게 더 도움이 될지도 몰라요.”양준회가 그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어떤 측면으로 보면 용준은 꽤 마음에 드는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둘은 원수지간이다. 양준회가 그의 아버지를 죽였다. 비록 지금까지는 아무 짓을 안 했어도, 또 그가 원래 정직한 사람이었다고 해도, 풍운파를 이렇게 여러 해 동안 다스린 용준이 지금은 어떤 사람인지 누구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그리하여 양준회는 안심할 수 없었다. 여전히 남서훈과 같이 풍운파를 즉시 떠나려고 했다.“하지만 나나도 여기 있어요.”남서훈이 예상치도 못한 폭탄을 터트렸다. 양준회는 깜짝 놀랐다.양나나가 여기에 있다는 건 상상도 못 했다.하지만 놀란 것도 잠시, 그는 바로 말했다.“그럼 나나도 같이 떠나면 돼.”갇힌 두 달
강하영이 부케를 내던지는 일순간 우양주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 부케를 향해 몸을 날렸다. 공중에서 부케를 잽싸게 낚아채는 그의 모습이 정지화면인 양 사람들의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부케를 손에 쥔 그다음 순간, 그는 부케와 함께 바다에 떨어졌다.모두가 경악했다.강하영은 크루즈 난간 쪽으로 달려가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남자를 보며 입을 떡 벌리고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선원들이 즉시 튜브를 던졌고, 또 어떤 사람들은 즉시 뛰어내려 구조하려 했지만 강주환이 그들을 말렸다.왜 구하지 말라는 건지 이해 안 된다는 듯한 눈빛으로 윤성아는 강주환을 쳐다봤다.그러다 팔로 물살을 가르며 바다에 둥둥 떠 있는 우양주가 크루즈 위에 있는 강하영을 향해 큰 소리로 외치는 걸 듣고 왜 그러는지 알 것만 같았다.“여보, 어쨌든 내가 부케 받았으니까 당신 나랑 결혼식 치러야 돼요! 안 그러면...”그 뒤엔 위협적인 말이 따라야 하는데 우양주도 무엇으로 강하영을 협박할 수 있을지 몰랐다. 남은 건 자신의 이 몸뚱이 하나뿐인데...“안 그러면 나 안 올라갈 거야. 여기 바다에 계속 있을 거야, 결혼식도 못 하는데 그냥 빠져 죽지 뭐.”강하영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바다에 빠진 남자를 까만 눈동자로 차분하게 내려다보며 끝내 입을 열었다.“빠져 죽고 싶으면 그렇게 해요. 안 말려요.”“...”우양주는 서럽게 그녀를 쳐다봤다.역시나 아내는 매정했고 자신에 대해 애정이 없었다.그러나 그때 윤성아 곁에 서있는 강주환이 무덤덤하게 한마디 했다.“내 기억이 맞다면, 이 바다에 상어가 출몰한다고 했어요. 식인 상어.”강주환은 고개를 돌려 강하영한테 말했다. “지금 아직 상어가 오지 않아서 그렇지, 나타나기만 하면 한꺼번에 열 몇 마리씩 무리 지어서 나올 거예요. 그게 게네들 습성이라. 이야... 쟨 아마 그러면 뼛조각도 남지 않겠네.”“...”그 말에 강하영이 급해 났다. 말투도 전처럼 차분하고 담담하지 않았다.난간에 기대어 우양주를 향해 내리 소리 질렀다.“뭐
미리 준비한 축사를 울먹이며 끝까지 다 읽고는 원이림을 향해 볼멘소리를 했다.“너 이 놈 자식, 내가 죽을 때까지 네가 결혼하는 걸 못 보는 줄 알았다. 아이고... 드디어 결혼하는구나. 너도 이제 가정이 생겼어.”“너 똑바로 들어. 은진이한테 평생 잘 해줘야 돼, 아내한테 잘 하는 건 우리 집안 내력이야. 나도 네 엄마 말을 엄청 잘 들었어. 너도 똑같아, 알겠니? 오늘부터는 은진이한테 더 잘해야 돼, 말도 잘 듣고, 은진이부터 생각하고 배려해 주고. 은진이가 조금이라도 맘고생을 하게 되는 날엔 내가 너 가만 두지 않을 거야, 알겠어?!”원이림은 새카만 눈동자로 여은진을 깊게, 애틋하게 들여다보며 그녀와 깍지를 낀 두 손에 힘을 더 주었다.“걱정 마세요. 난 평생 우리 여보 맘고생 안 시킬 거예요.”여보라는 호칭이 지금 이 시각부터 명실상부하게 되었다.원이림은 그녀의 손을 잡고 크루즈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그리고 미리 준비된 데이지 꽃을 바다로 뿌렸다. 하얀 꽃잎들이 파도에 실려 멀리 떠내려갔다.둘은 거기에 선 채 눈물을 머금고 울먹이며 말했다.“어머니, 아버지. 저 너무 행복해요. 우리 너무 행복해요.”결혼식의 마지막을 장식할 부케 토스하는 시간이 다가왔다.강주환과 윤성아, 그리고 나엽과 안효연은 모두 기혼자로서 나가지 않고 구경만 했다. 하객 중에 미혼인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었다.우양주도 강하영의 손을 잡고 그리로 향했다.강하영은 몸을 뒤로 빼면서 말했다.“우린 결혼했는데 왜 부케를 받으러 가요? 다른 사람한테 갈 좋은 축복을 왜 우리끼리 받겠다고 달려들어요, 쓸데없이. 그렇게 할 일 없고 힘이 남아돌면 내가 다른 일 하게 해 줄게요.”“무슨 일?”강하영은 푸른 바다를 향해 눈을 힐끔 하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당신 수영 좋아하잖아요. 내가 엉덩이 확 걷어찰 테니까 바다로 들어가서 수영이나 할래요?”“...”저번에 강하영과 같이 수영하면서 그녀가 자신한테 새빨간 수영팬티를 사줘 창피를 당하고 나서부터 우양주는 수영하는
여은진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예쁘게 미소 지었다.“나 다 알아요.”지난 1년 동안 그가 어떻게 해왔는지 잘 아는 그녀는 더 이상의 맹세와 언약 같은 건 필요 없었다.“응!”여은진을 안은 채로 원이림은 그녀의 여린 입술에 쪽쪽거리며 뽀뽀를 했다.장내의 플래시 세례가 정신없이 터지는 가운데 그는 돌아서서 무대 아래에 앉아있는 모든 사람한테 당찬 목소리로 선포했다.“오늘 저의 이 행복한 순간을 지켜본 여기 계신 모든 증인 분들한테 제가 선물을 준비할 생각입니다. 나중에 저희 베린 그룹에 가셔서 선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번 달 20일에 저와 은진이의 결혼식이 있을 예정이니 여러분들께서 모두 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여은진을 안고 시상대를 내려가려 했다.여은진이 내려달라고 했지만 그는 내려놓지 않았다. 그렇게 안은 채로 시상식장을 걸어 나와 차에 올라탔다.럭셔리한 롤스로이스가 천천히 내달리고 있었다.여은진은 아직도 그의 품에 안긴 채로 있었다.“이번 달 20일에 결혼한다고요? 그럼 열흘밖에 안 남았는데, 너무 촉박하지 않아요?”그녀가 눈을 들어 바라보며 물었다.“아니, 전혀.”그녀의 얼굴에 시선을 떨구며 원이림이 말했다.“시간이 모자라지만 않았으면 내일에라도 당장 결혼식 치르고 싶어.”반년이 넘는 동안, 그는 매일 결혼식에 관한 모든 것을 준비하고 있었다.결혼반지, 웨딩드레스, 그리고 결혼에 필요한 모든 물품과 디테일한 사항들을 전부 준비하고 체크했다. 그녀가 결혼을 동의하는 그 순간만 기다리고 있었다.그리고 그 순간이 끝내 다가왔다.웨딩사진을 찍는 것 외에는 크게 시간을 들일 일도 없었다.다만 여은진이 임신했기 때문에 너무 빠듯하게 스케줄을 잡지 않고 싶었을 뿐이다.결혼식에 참석할 하객을 초대하는 일도 있긴 하지만 10일이면 충분했다.촉박하지 않을뿐더러 시간적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여보, 우리 지금 바로 혼인신고 하러 가.”원이림은 한시라도 더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기사한테 얘기하여 구청으로 가자
원이림은 금방 샤워를 마친 여은진한테로 다가가 그녀의 팔을 끌어당겨 품에 꼭 끌어안았다. 그다음에는 당연히 침대로 향했다.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수순을 밟아갔다.한창 격렬해지려던 찰나, 원이림은 짧게 비명을 질렀다. 크게 지르진 않았다. 본능적으로 소리를 내질렀지만 그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여은진이 알아차리지도 못한 새에 살에 푹 찔린 그 가는 물건을 빼내야겠다고 머릿속으로 빨리 반응했다.하지만 역시 늦었다.여은진이 몸을 일으켜 스탠드를 켰고, 어두웠던 방안은 환한 빛으로 채워졌다.이어 급히 그를 살피던 여은진은 원이림의 엉덩이에 바늘이 하나 꽂혀있는 걸 발견했다.짧고 가는 옷을 꿰맬 때 쓰는 그런 바늘이었다.여은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얼굴로 남자를 보며 물었다.“어떻게 바늘에 찔릴 수 있어요? 침대에 왜 바늘이...”“...”꽂힌 바늘을 빼며 원이림은 이야기를 얼버무렸다.“괜찮아, 그냥 바늘인데 뭐. 별로 아프지도 않아.”그러고는 또 다짜고짜 몸을 뒤집으며 여은진을 몸 아래로 깔았다.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손을 뻗어 스탠드를 끄고 그녀의 입술을 거칠게 탐했다. 잠깐 벌어진 에피소드를 그녀의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진행 중이었던 일을 마무리하려는 의지였다.하지만 여은진은 그의 키스를 받아내면서도 오후 그의 당황스러운 표정과 난데없이 침대에 나타난 바늘을 함께 떠올렸다. 정신을 쏙 빼놓으려는 지금의 행동도 분명 그것과 연관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잠깐만.”여은진은 원이림을 밀어내고 다시 한번 스탠드를 켰다.의심이 부풀어 오른 눈으로 빤히 그를 노려봤다. “똑바로 말해요. 아까 그 바늘로 수작 부린 거 맞죠? 말해요, 몇 개나 찔렀어요?”“...”끝내는 발각되었다. 원이림은 이실직고했다. 강주환이 원흉이라고, 그가 시켜서 했다고 불었다.“여보, 나 며칠 전에 운봉 비즈니스 회담에 참석했는데 거기서 강주환을 만났어. 그 자식이 날 비웃는 거야. 그리고 이렇게 하라고 아이디어를 내줬어. 바늘로 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