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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9 화

강예지가 갑자기 그 얘기를 꺼내자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무슨 밥?”

그녀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여진구가 식당에서 밥 몇 번 사줬잖아. 잊었어?”

“...”

잊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여진구를 좋아하게 되었으니까.

부모를 일찍 여윈 나는 고모네 집으로 갔다. 고모는 나에게 잘해주고 싶었지만 고모부와 사촌 동생의 눈치를 봐야 했다.

중학교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대학교 때는 학비와 생활비를 내가 직접 벌었다. 가끔 갑자기 학교에 내야 할 돈이 생겨 다 내고 나면 생활비가 부족하기 일쑤였다.

그리고 영양실조로 학교에서 쓰러진 적이 있었는데 그때 여진구가 병원에 데려다줬었다.

눈을 떠보니 잘생긴 소년이 내 옆에 있었다. 햇살이 소년을 비추자 마치 자체발광하는 것 같았다. 그 소년을 보자마자 나는 멍해졌다.

소년은 나에게 이 말을 건넸다.

“깼어? 의사 선생님이 너 영양실조래. 평소 좀 잘 먹고 다녀.”

“고마워. 그런데 넌 누구야?”

“고마워할 필요 없어. 난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

무뚝뚝하고 차가운 말투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름없었다. 그 후 식당에 갈 때면 여진구와 여진구 친구들은 방금 담은 식판을 내 앞에 내려놓곤 했다. 이유는 간단했지만 내가 난감하거나 열등감이 들까 봐 아주 조심했다.

...

강예지가 불쑥 말했다.

“말해봐. 정말 그 밥 몇 끼 때문에 그런 거야? 아니면 잘생겨서?”

“둘 다겠지...”

나는 부정하지 않았다. 여진구를 좋아하게 된 건 밥 말고도 여진구라는 사람 자체가 좋아서였다.

늘 어둠 속에서만 살던 사람이 햇살을 보게 되면 동경하는 건 당연했다.

강예지는 나의 마음을 완전히 꿰뚫어 보았다.

“사실 난 네가 여진구랑 함께하는 걸 줄곧 반대했었어. 그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는 무뚝뚝하고 감정 기복이 없이 차분한 것 같지만 사실은 엄청 매정하고 변덕스러운 사람이야. 네가 쉽게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거든.”

이런 얘기를 나에게 처음 하는 건 아니었다. 예전에는 나와 여진구가 그래도 나름 잘살고 있어 강예지를 몇 번 반박하곤 했었다.

강예지는 말하다가 또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여진구처럼 똑똑한 사람이 단지 네 기분을 풀어주겠다고 회사 주식을 10%나 줬을까? 너한테 그 얘기를 듣고 나도 점점 여진구를 모르겠더라고. 혹시 3년 같이 살면서 너한테 정이 든 거 아니야?”

나도 그게 잘 이해가 되지 않았고 생각할수록 점점 복잡해지기만 했다.

얘기를 나누는 사이 차는 한 술집 문 앞에 멈춰 섰다. 나는 달리 방법이 없는 얼굴로 말했다.

“나 술 못 마셔.”

“왜? 뭔 약이라도 먹었어?”

나는 손가락으로 배를 가리켰다. 마음이 저도 모르게 약해졌다.

“예지야, 나 임신했어.”

“뭐? 그럼 나 이모 되는 거야?”

강예지는 놀랍고도 기쁜 나머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참 동안 안절부절못하다가 조심스럽게 내 배를 어루만졌다.

“언제 검사했어? 몇 주야? 몸은 안 불편해? 입덧은?”

그녀는 배를 만지면서 질문 폭격을 쏟아냈다. 나는 웃으면서 그녀의 질문에 일일이 대답했다.

임신해서부터 지금까지 나와 기쁨을 나눈 사람은 강예지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나 말고도 배 속의 작은 생명을 기대하는 사람이 또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휴대 전화가 울리고 나서야 강예지는 서서히 진정했다.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고 나를 끌고 차에서 내리더니 술집에서 달려 나오는 하성주에게 손을 흔들었다.

“뭐가 그리 급하다고. 전화에 문자에 정말 귀찮아 죽겠어.”

강예지는 얼굴도 예쁘고 성격도 좋아서 하성주네 무리와 잘 어울렸다.

“오랜만에 만나서 좋아서 그러지.”

하성주는 강예지와 자연스럽게 얘기를 나누다가 나를 보고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형수님? 오늘 저녁에 본가로 간다고 하지 않았어요? 진구 형은요?”

강예지는 남에게 화풀이를 잘했다.

“무슨 낯짝으로 물어? 남자들은 다 똑같아, 좋은 X끼가 없어. 경고하는데 여진구한테 지연이도 여기 왔다는 걸 말하지 마. 말했다간 가만 안 둬.”

“누가 그래? 내 새끼는 아주 멀쩡해.”

하성주가 한마디 툭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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