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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3 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를 달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저녁에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마자 휴대 전화 알람이 울렸다. 나는 유산기 막는 약을 꺼내 입에 넣었다.

그때 여진구가 마침 따뜻한 우유를 가지고 들어왔다.

“왜 약 먹어?”

“그냥 영양제야.”

나는 그의 그윽한 두 눈을 보며 말했다.

“다음 주 토요일에 나랑 같이 병원 가자. 검사 좀 받아보려고. 그리고 당신이랑 가고 싶은데 있어.”

그때 병원 산부인과에 재검진받으러 가야 했다.

여정은과 연락을 끊은 걸 보면 선택을 한 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혹시 또 다른 일이 터질까 아직은 임신 사실을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만약 그전까지 아무 일이 없다면 검사 당일에 알게 될 것이다.

여진구는 직접 기계에서 초음파 검사결과를 뽑아 자신이 곧 아빠가 된다는 걸 보게 될 것이고 우리 사이에 아이가 생겼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그 생각에 나는 또 기대하기 시작했다.

“알았어. 배 아직도 아파? 다음 주 토요일까지 기다리지 말고 내일 바로 병원 가보자.”

“괜찮아. 큰 문제도 아닌데 그럴 필요까진 없어.”

약을 먹고 난 후로 배도 거의 아프지 않았고 하혈도 하지 않았다. 의사가 말한 시간에 재검진만 받으면 될 것 같았다.

그녀의 말에 여진구는 더는 뭐라 하지 않고 우유를 침대 머리맡에 내려놓은 후 나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요즘 많이 속상했지? 그만 화 풀어, 응?”

여진구는 마치 고양이를 쓰다듬듯 나를 쓰다듬었다. 그가 달래주자 마음속의 화도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화 풀 수는 있어. 하지만 이번만이야.”

다음에도 이런 일이 생긴다면 우린 완전히 끝일 것이다.

...

다음날 오후, 강예지는 농땡이 치러 내 사무실로 왔다.

“마케팅팀은 아주 한가한가 봐?”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강예지에게 말했다. 오늘 강예지는 브이넥 실크 셔츠에 베이지색 스커트를 입고 하이힐까지 신었다. 요염한 모습은 자연스레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왜? 직원은 쉬지도 말라는 거야? 사모님?”

강예지는 밀크티 두 잔을 들고 들어왔는데 한 잔을 내 앞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차를 안 섞었으니까 편하게 마셔. 의사 친구한테 물어봤는데 임산부는 차를 적게 마셔야 한다더라고. 다른 주의 사항이 너무 많아서 이따가 카톡으로 보내줄게. 임신은 큰일이야. 절대 대수롭지 않게 여겨선 안 돼. 알았어?”

“강예지.”

나는 그녀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그녀의 어리둥절한 눈빛 속에 웃으며 말했다.

“너 참 엄마 같아.”

부모님이 돌아간 이유는 이러했다. 집이 부도나면서 빚쟁이들이 나를 찾으러 학교 문 앞까지 와서는 돈을 갚으라고 아빠를 협박했다. 화들짝 놀란 엄마 아빠가 차를 타고 달려오다가 역주행하는 차와 부딪혀 심각한 교통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그해 나는 고작 8살이었다. 수년 동안 나는 죄책감과 자책 속에 살았다. 왜냐하면 부모님이 나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했으니까.

나중에 강예지는 부모님이 나를 사랑해서 그런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렇다. 이젠 희미해진 기억이지만 부모님은 나에게 많은 사랑을 줬었다.

아빠의 회사 규모가 크긴 해도 아무리 바빠도 주말마다 집으로 와서 엄마와 나의 옆에 있어 주었다.

고모부는 가업이 크기 때문에 아들을 낳아서 물려주라면서 둘째를 낳기를 바랐다.

그 소리에 엄마는 누가 반드시 아들에게 물려주라고 정했냐면서 버럭 화를 냈었다. 부모님은 나의 물건이든 사랑이든 재산이든 그 누구에게도 나눠주지 않았다.

만약 교통사고만 당하지 않았더라면 엄마는 나의 임신 소식을 듣고 아주 지극정성으로 챙겨줬을 것이다.

“부모님 보고 싶어?”

강예지는 잠깐 흠칫했다.

“두 분 기일이 곧 오지 않아?”

그러고는 휴대 전화를 꺼내 날짜를 확인했다.

“정말이네. 올해는 여진구랑 같이 부모님 뵈러 갈 거야?”

“응. 일단은 그러려고.”

결혼 3년 동안 아직 여진구와 함께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간 적이 없었다. 하나는 그가 바쁜 원인도 있었고 다른 하나는 왠지 모르게 뭔가가 부족한 것 같아 나도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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