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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6 화

모든 기대가 물거품처럼 사라졌고,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몸이 서늘했다.

깊은 절망에 빠진 기분이 들었다.

난 전화를 들고 오랫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뭔가 묻고 싶었지만 어차피 아무 의미 없을 것 같았다.

그가 어디로 갔는지는 뻔했다.

그에게 두 번은 없다고 명확히 얘기했었는데 말이다.

그러니까 그는 선택을 했다.

어떤 것을 취하고 어떤 것을 버려야 할지, 어떤 것이 더 이득이 될지 가늠할 줄 모르는 성인은 없었다.

그는 여러 번의 고민 끝에 날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난 본능적으로 배를 어루만지며 이 아이를 낳아야 할지 고민했다.

이 아이를 낳으려고 한다면, 나와 그 사람 사이는 끊고 싶어도 완전히 끊기 어려울 것이다.

아이의 양육권은 아주 큰 문제였다.

수화기 너머에서 그가 나를 불렀다.

“지연 씨?”

“응.”

난 말을 아꼈다. 지금 이 순간, 난 그와 단 한 마디도 나누고 싶지 않았다.

아침을 먹은 뒤 나는 직접 운전해서 병원으로 갔다.

그와 같이 병원에 가려고 했던 이유는 그를 놀라게 해 주고 싶어서였다.

굳이 유선희 아주머니와 같이 갈 이유가 없었다. 배가 너무 불러서 거동이 불편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생각이 너무 많았던 탓인지 한 차가 아무 징조 없이 내 앞에 끼어들었을 때, 난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쾅 소리와 함께 차가 부딪쳤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머리가 너무 어지러웠다. 난 그저 본능에 따라 얼마 남지 않은 힘으로 여진구에게 연락했다.

그와 결혼한 뒤 내가 제일 먼저 했던 일은 여진구의 번호를 긴급연락처로 저장하는 것이었다.

여진구는 내 남편이었으니 말이다.

난 그 일로 아주 오랫동안 행복했다. 난 그와 나의 관계를 자랑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는 상태였지만, 오랜 고민 끝에 한 일은 겨우 그의 번호를 긴급연락처로 정해놓는 것뿐이었다.

게다가 여진구는 그 사실을 몰랐다.

그저 나 혼자만 기뻐했을 분이다.

통화연결음은 아주 오랫동안 이어졌지만 전화를 받는 사람은 없었다.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아이를 떠올린 나는 극심한 공포를 느꼈다.

‘진구 씨, 얼른 전화 받아!’

드디어 그가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들리는 건 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여정은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연아, 무슨 일이야? 진구가 얘기했을 텐데. 오늘 너랑 같이 있을 시간 없다고.”

여정은의 목소리는 날카로운 칼이 되어 빠르고 정확하게 내 마음에 꽂혔다.

순간 숨이 쉬어지지 않았고 눈물이 왈칵 흘렀다. 심지어 손도 떨렸다.

난 오랜 내 짝사랑이 어느 순간 증오로 물들 줄은 몰랐다.

증오 때문에 힘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난 순간 눈앞이 깜깜해지면서 깊은 수렁에 빠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 제일 먼저 본 건 흰 천장이었다.

수액이 링거관을 따라 체내로 흘러들어왔다. 손이 차가웠다.

정신을 잃기 전 기억이 떠오른 나는 본능적으로 배를 어루만졌다. 여전히 배가 은근히 아팠다.

‘내 아이...’

그 생각이 들자 매 순간이 괴로웠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뒤 의사 선생님을 찾으려고 했다.

“지연아!”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 날 본 강예지는 곧바로 달려와서 날 도로 침대 위에 앉히며 초조한 얼굴로 말했다.

“움직이지 마. 너 수액 맞고 있잖아. 그러다가 손 다쳐.”

난 눈물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를 떠올린 나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고개를 든 나는 걱정 가득한 강예지의 두 눈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예지야, 내, 내 아이는...”

난 후회했다.

외출하기 직전까지 이 아이를 지워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는 사실이 미안하게 느껴졌다.

‘내 아인데.’

이 아이는 하늘에서 오랫동안 고르다가 날 엄마로 선택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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