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아버지를 제외하고 또 다른 시선이 날 바라보고 있음을 느꼈다.난 그 질문에 대답하기가 어려웠다.할아버지를 속이고 싶지 않았지만, 솔직히 얘기한다면 할아버지는 절대 우리를 이혼시키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난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결국 대답하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알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그래, 알겠다. 할아버지 체면을 봐서라도 참아줄 수는 없겠니? 이 자식이 어렸을 때 엄마가 곁에 없어서 성질머리가 아주 고약해. 그러니까 네가 조금만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그러고는 여진구의 귀를 꼬집으며 말했다.“내가 너무 오래 살아
“이젠 중요하지 않아. 사인해.”여진구는 안색이 어두워진 채 불쾌한 표정으로 합의서를 훑어보면서 말했다.“그 집만 원하는 거야?”“그래.”그 집은 비록 여진구가 사준 거긴 하지만 인테리어에 나는 꽤 많은 신경을 썼었다.그것 외에 다른 건 바라지 않았다.집이 있으면 나와 아이 모두 살 곳이 생긴다. 난 비록 돈을 아주 많이 벌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꽤 풍족하게 살 정도는 벌 수 있었다.그렇게 되면 언젠가 여진구의 아이라는 게 밝혀진다고 해도 여씨 일가와 확실히 선을 그을 수 있었다.여씨 일가에서는 아이에게 돈을 한 푼도
시간을 보니 새벽 두 시가 넘는 시각이었다.여정은과 함께 퇴근했을 텐데 왜 하성주와 술을 마시고 있었던 걸까? 하성주의 말을 들어보면 여정은은 그 자리에 없는 것 같았다.다시 전화를 걸어보니 전화가 꺼져 있었다. 아마도 배터리가 없는 듯했다.난 어쩔 수 없이 옷을 갈아입고 나가서 택시를 타고 평소 그들이 자주 가던 바로 향했다.도착했을 때 사람은 몇 없었다.룸 안에는 하성주와 육형준, 그리고 고급 정장을 입고 긴 다리를 겹친 채로 소파에 편안하게 누워 있는 여진구 셋뿐이었다.날 본 하정수는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지연
십여 분 뒤 차가 마당에 도착했다.“집에 도착했어, 진구 씨.”난 차 문을 열면서 말했다.그런데 거나하게 취한 여진구는 내가 문을 열자마자 같이 쓰러져 나왔다.난 미간을 찌푸리면서 울며 겨자 먹기로 그를 부축했다.“힘이 전혀 안 들어가?”대답이 없었다.나는 어쩔 수 없이 단잠을 자던 유선희 아주머니에게 연락해서 그녀를 깨워야 했다. 나는 아주머니와 함께 여진구를 방까지 부축했다.“사모님, 제가 뭐라도 도와드릴까요?”아주머니가 물었다.“괜찮아요, 돌아가서 쉬세요.”아주머니에게 미안했다. 잠까지 깨웠는데 뭔가를 더
천을 한 겹 사이에 두고 있는데도 허리 쪽이 데일 듯 뜨겁게 느껴졌다.나는 빙의된 사람처럼 꼼짝하지 못했다. 그래도 다행히 정신은 멀쩡했다.“난 확실히 얘기했어. 내 결혼 생활에 다른 사람이 끼어드는 거 싫다고.”“미안해.”여진구는 내 등에 이마를 기대면서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했다.마음이 약해지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몇 년간의 감정을 단숨에 지워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겠다고 하고 싶었다.그러나 그동안 있었던 일들이 내 머릿속에 다시 떠올랐다.여진구를 선택해야 할까, 아니면 날 선택해
...그 집은 그가 내게 선물로 준 뒤 며칠 지나지 않아 바로 인테리어를 시작했다.난 인테리어 시공을 지켜보려고 매일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 늦게 돌아왔다.그는 단 한 번도 물은 적이 없었다.내가 아무리 늦게 돌아가도 그저 예의 있게 시간이 늦었다며, 또는 디자인팀이 많이 바쁘냐며 한 마디 건넬 뿐이었다. 내가 어딜 갔는지, 뭘 했는지는 그의 관심 밖이었다.어차피 이혼할 텐데 나는 더 참을 생각이 없었다.“당신이 정은 언니랑 같이 있을 때겠지.”역시나 그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나는 마음은 한결 편안해졌다.“요즘엔 정
...예전에는 그가 이렇게 작은 원한이라도 꼭 갚아야 하는 사람인 줄은 몰랐다.난 울며 겨자 먹기로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런데 내가 설명하기도 전에 할아버지가 미소 띤 얼굴로 자애롭게 입을 열었다.“도우미 말을 들어보니 지연이 너 밖에서 지내고 있다면서?”“네, 할아버지.”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가 화를 낸다면 최대한 달랠 생각이었다.그런데 할아버지는 화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씩씩거리면서 여진구를 노려봤다.“쓸모없는 놈, 자기 아내도 지키지 못하고 말이야.”“할아버지, 왜 그렇게 말씀하세요? 지연
“할아버지 걱정 마세요.”나는 할아버지에게 두부 한 덩이를 건네며 살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사람은 날 괴롭히지 못해요.”어차피 곧 이혼할 텐데.저녁 식사 후 여진구는 할아버지와 함께 뒷마당에서 바둑을 두었고 나는 옆에서 천천히 차를 끓였다.여진구의 바둑 실력이 워낙 출중하고 상대를 단칼에 무너뜨리는 스타일이었기에 또 한 방 먹은 할아버지가 화를 내며 노려보았다.“남도 아니고 할아버지한테 길도 안 내주는 거냐?”“알겠어요.”여진구가 피식 웃으며 느슨하게 바둑을 두자 할아버지는 환하게 웃으며 행복해하셨다.“자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