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 분 뒤 차가 마당에 도착했다.“집에 도착했어, 진구 씨.”난 차 문을 열면서 말했다.그런데 거나하게 취한 여진구는 내가 문을 열자마자 같이 쓰러져 나왔다.난 미간을 찌푸리면서 울며 겨자 먹기로 그를 부축했다.“힘이 전혀 안 들어가?”대답이 없었다.나는 어쩔 수 없이 단잠을 자던 유선희 아주머니에게 연락해서 그녀를 깨워야 했다. 나는 아주머니와 함께 여진구를 방까지 부축했다.“사모님, 제가 뭐라도 도와드릴까요?”아주머니가 물었다.“괜찮아요, 돌아가서 쉬세요.”아주머니에게 미안했다. 잠까지 깨웠는데 뭔가를 더
천을 한 겹 사이에 두고 있는데도 허리 쪽이 데일 듯 뜨겁게 느껴졌다.나는 빙의된 사람처럼 꼼짝하지 못했다. 그래도 다행히 정신은 멀쩡했다.“난 확실히 얘기했어. 내 결혼 생활에 다른 사람이 끼어드는 거 싫다고.”“미안해.”여진구는 내 등에 이마를 기대면서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했다.마음이 약해지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몇 년간의 감정을 단숨에 지워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겠다고 하고 싶었다.그러나 그동안 있었던 일들이 내 머릿속에 다시 떠올랐다.여진구를 선택해야 할까, 아니면 날 선택해
...그 집은 그가 내게 선물로 준 뒤 며칠 지나지 않아 바로 인테리어를 시작했다.난 인테리어 시공을 지켜보려고 매일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 늦게 돌아왔다.그는 단 한 번도 물은 적이 없었다.내가 아무리 늦게 돌아가도 그저 예의 있게 시간이 늦었다며, 또는 디자인팀이 많이 바쁘냐며 한 마디 건넬 뿐이었다. 내가 어딜 갔는지, 뭘 했는지는 그의 관심 밖이었다.어차피 이혼할 텐데 나는 더 참을 생각이 없었다.“당신이 정은 언니랑 같이 있을 때겠지.”역시나 그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나는 마음은 한결 편안해졌다.“요즘엔 정
...예전에는 그가 이렇게 작은 원한이라도 꼭 갚아야 하는 사람인 줄은 몰랐다.난 울며 겨자 먹기로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런데 내가 설명하기도 전에 할아버지가 미소 띤 얼굴로 자애롭게 입을 열었다.“도우미 말을 들어보니 지연이 너 밖에서 지내고 있다면서?”“네, 할아버지.”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가 화를 낸다면 최대한 달랠 생각이었다.그런데 할아버지는 화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씩씩거리면서 여진구를 노려봤다.“쓸모없는 놈, 자기 아내도 지키지 못하고 말이야.”“할아버지, 왜 그렇게 말씀하세요? 지연
“할아버지 걱정 마세요.”나는 할아버지에게 두부 한 덩이를 건네며 살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사람은 날 괴롭히지 못해요.”어차피 곧 이혼할 텐데.저녁 식사 후 여진구는 할아버지와 함께 뒷마당에서 바둑을 두었고 나는 옆에서 천천히 차를 끓였다.여진구의 바둑 실력이 워낙 출중하고 상대를 단칼에 무너뜨리는 스타일이었기에 또 한 방 먹은 할아버지가 화를 내며 노려보았다.“남도 아니고 할아버지한테 길도 안 내주는 거냐?”“알겠어요.”여진구가 피식 웃으며 느슨하게 바둑을 두자 할아버지는 환하게 웃으며 행복해하셨다.“자네,
무슨 뜻일까, 내가 이혼하기도 전에 바람을 피운다고 의심하는 건가?하긴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나는 굳이 설명하기 싫어 무심하게 답했다.“친한 친구.”“어떤 친구?”“여진구 씨.”나는 나지막이 웃으며 담담하게 말했다.“죽은 사람은 그렇게 캐묻지 않아.”그가 죽은 전 애인이 되기를 자처한다면 뜻대로 해줄 생각이다.여진구는 기가 막힌 듯 피식 웃더니 혀로 볼 안쪽을 굴리며 차갑게 말했다.“그래.”묘지에 도착해 차에서 내린 나는 곧장 계단을 걸어 산으로 올라갔다.그가 따라오지 않자 나는 뒤를 돌아서서 그를 기다려야
그렇지 않았다면 재이그룹도 바로 여진구에게 넘기지는 않았을 것이다.“그런 당신은, 잘 지냈어?” 나는 고개를 들어 그의 갸름한 턱선을 바라보며 무덤덤하게 물었다.“너와 결혼한 3년 동안.”그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가늘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어갔다.“잘 지냈어.”그 대답에 나는 더 울고 싶었다.아쉬움 때문이겠지.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우리는 백년해로했을지도 모르니까....돌아오는 길에 둘 중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말을 많이 해서 좋을 것도 없었다.그는 지금 상황을 바꿀 수 없고 나도 아무렇지 않은
육형준은 그 말뜻을 못 알아들은 건지, 굳이 상대할 마음이 없는 건지 그저 살며시 미소만 지었다.“별말씀을요. 다들 손 씻고 저녁 먹지.”육형준의 요리 솜씨는 매우 훌륭했고 한 상 가득 차려진 다양한 음식들이 사람들의 군침을 돌게 했다.하성주와 강예지는 칭찬하기 바빴고 나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선배가 한 요리 무척 맛있어 보이네요!” “얼른 먹어,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네.”육형준은 주방에서 마지막 두 가지 요리를 가져왔는데 그중 매운 새우를 내 앞에 놓으며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이거 너 좋아하잖아.”나는 다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