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그가 이렇게 작은 원한이라도 꼭 갚아야 하는 사람인 줄은 몰랐다.난 울며 겨자 먹기로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런데 내가 설명하기도 전에 할아버지가 미소 띤 얼굴로 자애롭게 입을 열었다.“도우미 말을 들어보니 지연이 너 밖에서 지내고 있다면서?”“네, 할아버지.”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가 화를 낸다면 최대한 달랠 생각이었다.그런데 할아버지는 화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씩씩거리면서 여진구를 노려봤다.“쓸모없는 놈, 자기 아내도 지키지 못하고 말이야.”“할아버지, 왜 그렇게 말씀하세요? 지연
“할아버지 걱정 마세요.”나는 할아버지에게 두부 한 덩이를 건네며 살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사람은 날 괴롭히지 못해요.”어차피 곧 이혼할 텐데.저녁 식사 후 여진구는 할아버지와 함께 뒷마당에서 바둑을 두었고 나는 옆에서 천천히 차를 끓였다.여진구의 바둑 실력이 워낙 출중하고 상대를 단칼에 무너뜨리는 스타일이었기에 또 한 방 먹은 할아버지가 화를 내며 노려보았다.“남도 아니고 할아버지한테 길도 안 내주는 거냐?”“알겠어요.”여진구가 피식 웃으며 느슨하게 바둑을 두자 할아버지는 환하게 웃으며 행복해하셨다.“자네,
무슨 뜻일까, 내가 이혼하기도 전에 바람을 피운다고 의심하는 건가?하긴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나는 굳이 설명하기 싫어 무심하게 답했다.“친한 친구.”“어떤 친구?”“여진구 씨.”나는 나지막이 웃으며 담담하게 말했다.“죽은 사람은 그렇게 캐묻지 않아.”그가 죽은 전 애인이 되기를 자처한다면 뜻대로 해줄 생각이다.여진구는 기가 막힌 듯 피식 웃더니 혀로 볼 안쪽을 굴리며 차갑게 말했다.“그래.”묘지에 도착해 차에서 내린 나는 곧장 계단을 걸어 산으로 올라갔다.그가 따라오지 않자 나는 뒤를 돌아서서 그를 기다려야
그렇지 않았다면 재이그룹도 바로 여진구에게 넘기지는 않았을 것이다.“그런 당신은, 잘 지냈어?” 나는 고개를 들어 그의 갸름한 턱선을 바라보며 무덤덤하게 물었다.“너와 결혼한 3년 동안.”그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가늘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어갔다.“잘 지냈어.”그 대답에 나는 더 울고 싶었다.아쉬움 때문이겠지.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우리는 백년해로했을지도 모르니까....돌아오는 길에 둘 중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말을 많이 해서 좋을 것도 없었다.그는 지금 상황을 바꿀 수 없고 나도 아무렇지 않은
육형준은 그 말뜻을 못 알아들은 건지, 굳이 상대할 마음이 없는 건지 그저 살며시 미소만 지었다.“별말씀을요. 다들 손 씻고 저녁 먹지.”육형준의 요리 솜씨는 매우 훌륭했고 한 상 가득 차려진 다양한 음식들이 사람들의 군침을 돌게 했다.하성주와 강예지는 칭찬하기 바빴고 나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선배가 한 요리 무척 맛있어 보이네요!” “얼른 먹어,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네.”육형준은 주방에서 마지막 두 가지 요리를 가져왔는데 그중 매운 새우를 내 앞에 놓으며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이거 너 좋아하잖아.”나는 다소
두 사람은 나를 위해 감동적인 선물도 따로 준비했다.육형준도 예쁜 선물 상자를 건네주었다.“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고마워요 선배.”나는 싱긋 웃으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고, 상자 안에 아주 정교하고 독특한 드레스가 들어 있는 것을 보고 다소 놀라며 그에게 물었다.“이거 직접 디자인한 거예요?”“응, 하나밖에 없어.”육형준이 웃으며 말했다.“역시 선배라니까!”그를 칭찬하던 강예지는 일부러 여진구를 난처하게 만들었다.“대표님, 집들이에 오셨으니 선물도 가져오셨겠죠?”내가 끼어들려는데 강예지가 막았다.나도 집에 들
다시 생각해 보니 우스꽝스러웠다.신혼 첫날 밤에 혼자 남겨진 것도, 몇 번의 생일에 남편이 없었던 것도, 원하던 선물을 빼앗긴 것도, 산부인과 검진 날마저 남편이 곁에 없었던 것도 나인데...그는 이혼할 지경에 이르러 친구들이 집들이를 해주는 것조차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가.나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시선을 내려 그를 바라보았다.“안 나가면 정은 언니한테 전화할 거야.”여정은이 와서 소란을 피우면 그는 당해내지 못한다.여진구는 내 허리를 단단히 감싼 채 내 가슴에 이마를 묻고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지연 씨, 난 이렇게 될
“정말 고마워?”차 쪽으로 걸어가던 육형준이 하성주를 뒷좌석에 밀어 넣고 차에 기댄 채 시선을 내리며 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그럼 앞으로는 나한테 계속 고맙다는 말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그 말이 조금 의미심장하게 들렸지만 내가 깊이 생각하기도 전에 그는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너무 안 친해 보이잖아.”나도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네, 알겠어요.”마침 운전기사가 도착하자 그는 차 열쇠를 건네며 고개를 돌려 따뜻하게 말했다.“난 갈게. 너도 빨리 올라가.”위층으로 올라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