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진짜 이혼한 것도 아닌데 여정은은 마음이 급했다.주식은 가치가 너무 높고 처리하기 어려워서 사실 갖고 있을 생각도 없었다.하지만 너무 빨리 여정은이 원하는 대로 되게 해주고 싶지는 않았다.나는 미간을 살짝 구겼다.“무슨 신분으로 저한테 그런 말을 하는 거죠?”여정은은 피식 웃더니 의기양양하게 말했다.“설마 주식을 독식할 생각은 아니지? 그건 진구가 자기 아내에게 주려던 거야. 그러니까 둘이 이혼하면 그 주식은 네 것이 아니지!”“언니 병원 안 가봤어요?”나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치료는 일찍 받는 게 좋아요.
그리고 주식도 여진구가 원해서 준 것이 아니었다.‘남지연, 넌 여진구에게 아무것도 아니야.’“할아버지!”사무실 안에서 갑자기 여진구의 한 옥타브 높아진 목소리가 들려왔다.정신을 차린 나는 다른 건 신경쓸 새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할아버지는 가슴을 움켜쥐고 숨쉬기 힘들어하고 있었다.또 병이 발작한 것이다.“할아버지를 부축해서 자리에 앉혀야 해.”난 빠르게 걸어가서 여진구와 함께 할아버지를 부축하여 자리에 앉혔다. 그러고는 익숙하게 할아버지의 겉옷 안주머니에서 약을 꺼냈다.“따뜻한 물이 필요해.”난 여진구에게 얘
난 할아버지를 제외하고 또 다른 시선이 날 바라보고 있음을 느꼈다.난 그 질문에 대답하기가 어려웠다.할아버지를 속이고 싶지 않았지만, 솔직히 얘기한다면 할아버지는 절대 우리를 이혼시키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난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결국 대답하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알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그래, 알겠다. 할아버지 체면을 봐서라도 참아줄 수는 없겠니? 이 자식이 어렸을 때 엄마가 곁에 없어서 성질머리가 아주 고약해. 그러니까 네가 조금만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그러고는 여진구의 귀를 꼬집으며 말했다.“내가 너무 오래 살아
“이젠 중요하지 않아. 사인해.”여진구는 안색이 어두워진 채 불쾌한 표정으로 합의서를 훑어보면서 말했다.“그 집만 원하는 거야?”“그래.”그 집은 비록 여진구가 사준 거긴 하지만 인테리어에 나는 꽤 많은 신경을 썼었다.그것 외에 다른 건 바라지 않았다.집이 있으면 나와 아이 모두 살 곳이 생긴다. 난 비록 돈을 아주 많이 벌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꽤 풍족하게 살 정도는 벌 수 있었다.그렇게 되면 언젠가 여진구의 아이라는 게 밝혀진다고 해도 여씨 일가와 확실히 선을 그을 수 있었다.여씨 일가에서는 아이에게 돈을 한 푼도
시간을 보니 새벽 두 시가 넘는 시각이었다.여정은과 함께 퇴근했을 텐데 왜 하성주와 술을 마시고 있었던 걸까? 하성주의 말을 들어보면 여정은은 그 자리에 없는 것 같았다.다시 전화를 걸어보니 전화가 꺼져 있었다. 아마도 배터리가 없는 듯했다.난 어쩔 수 없이 옷을 갈아입고 나가서 택시를 타고 평소 그들이 자주 가던 바로 향했다.도착했을 때 사람은 몇 없었다.룸 안에는 하성주와 육형준, 그리고 고급 정장을 입고 긴 다리를 겹친 채로 소파에 편안하게 누워 있는 여진구 셋뿐이었다.날 본 하정수는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지연
십여 분 뒤 차가 마당에 도착했다.“집에 도착했어, 진구 씨.”난 차 문을 열면서 말했다.그런데 거나하게 취한 여진구는 내가 문을 열자마자 같이 쓰러져 나왔다.난 미간을 찌푸리면서 울며 겨자 먹기로 그를 부축했다.“힘이 전혀 안 들어가?”대답이 없었다.나는 어쩔 수 없이 단잠을 자던 유선희 아주머니에게 연락해서 그녀를 깨워야 했다. 나는 아주머니와 함께 여진구를 방까지 부축했다.“사모님, 제가 뭐라도 도와드릴까요?”아주머니가 물었다.“괜찮아요, 돌아가서 쉬세요.”아주머니에게 미안했다. 잠까지 깨웠는데 뭔가를 더
천을 한 겹 사이에 두고 있는데도 허리 쪽이 데일 듯 뜨겁게 느껴졌다.나는 빙의된 사람처럼 꼼짝하지 못했다. 그래도 다행히 정신은 멀쩡했다.“난 확실히 얘기했어. 내 결혼 생활에 다른 사람이 끼어드는 거 싫다고.”“미안해.”여진구는 내 등에 이마를 기대면서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했다.마음이 약해지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몇 년간의 감정을 단숨에 지워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겠다고 하고 싶었다.그러나 그동안 있었던 일들이 내 머릿속에 다시 떠올랐다.여진구를 선택해야 할까, 아니면 날 선택해
...그 집은 그가 내게 선물로 준 뒤 며칠 지나지 않아 바로 인테리어를 시작했다.난 인테리어 시공을 지켜보려고 매일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 늦게 돌아왔다.그는 단 한 번도 물은 적이 없었다.내가 아무리 늦게 돌아가도 그저 예의 있게 시간이 늦었다며, 또는 디자인팀이 많이 바쁘냐며 한 마디 건넬 뿐이었다. 내가 어딜 갔는지, 뭘 했는지는 그의 관심 밖이었다.어차피 이혼할 텐데 나는 더 참을 생각이 없었다.“당신이 정은 언니랑 같이 있을 때겠지.”역시나 그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나는 마음은 한결 편안해졌다.“요즘엔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