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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5 화

여진구는 길고 가느다란 손으로 아주 능숙하게 식자재를 다듬었다. 그 모습에 세월이 참 고즈넉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의 시선을 느꼈는지 여진구가 고개를 돌리고 가볍게 웃었다.

“왜 날 그렇게 멍하니 보고 있어?”

“그냥 보고 싶어서.”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자기 남편을 보는데 부끄러울 게 뭐가 있겠는가.

게다가 하늘이 심혈을 들여서 빚은 조각 같은 얼굴인데 실컷 봐야지.

그런데 그때 그의 바지 주머니에 넣었던 휴대 전화가 울렸다. 한창 물고기를 씻는 중이라 직접 받을 수가 없었다.

“여보, 전화 받아줘.”

“알았어.”

나는 그의 옆으로 다가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런데 그 순간 왠지 모르게 민망해졌다.

여진구와 나는 대부분 침대 위에서 스킨십을 했고 침대 밖에서는 예의를 지켰다.

내가 움직이지 않자 여진구는 고개를 돌려 물었다.

“오랫동안 부부로 살았는데 아직도 부끄러워? 휴대 전화를 쥐라고 했지 다른 걸 쥐라고는 안 했어.”

“아니야...”

나는 화끈 달아오른 얼굴로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휴대 전화를 꺼냈다. 혹시라도 터치해서는 안 되는 걸 터치할까 봐 아주 조심스럽게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조심했는데도 바지 안감을 사이에 두고 예민한 그곳을 건드리고 말았다.

...

나는 쑥스러워하며 휴대 전화를 꺼냈다. 고개를 들자 그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발신자가 진우혁인 걸 확인하고는 여진구의 귓가에 가져다 대려는데 여진구가 말했다.

“당신이 받아서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면 돼.”

“실장님, 진구 씨 지금 전화 받기 불편해서요. 무슨 일이에요?”

내가 물었다.

“작은사모님.”

진우혁은 나의 목소리를 듣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별일은 아니고 계약 조건을 대표님과 확인하고 싶어서요. 월요일에 확인해도 됩니다.”

나와 여진구 모두 이 작은 에피소드는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며칠 후, 나는 잠이 점점 많아졌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마당에서 소화하는 중에도 잠이 마구 쏟아졌다.

나는 위층으로 올라가 샤워를 마친 다음 그대로 침대에 누워 곯아떨어졌다.

한창 잘 자고 있었는데 하도 일찍 잔 탓에 화장실이 급해 깨고 말았다.

등을 켜보니 침대 한쪽이 텅 비어있었다. 여진구가 옆에 없었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베란다 쪽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여진구의 냉랭하고 낮게 깔린 목소리였다.

“죽고 싶다면 죽게 내버려 두고 119 불러야 하면 그냥 119 불러. 나한테 전화해서 무슨 소용이야? 내가 뭐 의사야? 경찰이야? 걔 절대 죽지 않아. 자살 시도가 벌써 몇 번째야. 언제 피 본 적이 있었어? 난 절대 이혼 안 한다고 전해. 그리고 포기하라고 해!”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이 한마디를 했다.

“그런데 진짜 사고가 나지 않게 사람 좀 더 붙여.”

마지막 한마디가 귀에 거슬리게 들렸다.

...

여진구는 나를 등진 채 한 손은 난간에 놓고 있었다. 뒷모습만 봤는데도 짜증과 화가 느껴졌다.

여정은의 끈질긴 집착 때문에 나도 이젠 달리 방법이 없었다. 다행히 여진구는 이번에도 여정은의 막무가내를 받아주지 않았다.

화장실에 다녀온 나는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잠시 후 여진구가 들어오더니 나를 끌어안았다. 초가을 저녁의 냉기가 전해져 시원했다. 그런데 내가 다시 깨어났을 때 옆자리는 또 비어있었다.

아래층으로 내려와 둘러보았지만 여진구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분명히 나랑 같이 병원에 가기로 했었는데.’

유선희가 말했다.

“작은사모님, 도련님 아침 일찍 나가셨어요. 급한 일이 있는 것 같더라고요.”

나는 순간 멈칫했다. 여진구에게 전화하려다가 휴대 전화가 위층에 있는 걸 알아채고 그냥 집 전화로 걸었다.

잠시 후 그의 피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여진구의 말투가 달라진 게 느껴졌다.

“무슨 일 있어?”

“지연아, 아주머니랑 병원에 가면 안 돼? 나 오늘 시간이 안 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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