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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4 화

마침 부모님의 기일도 토요일이라 오전에 병원에 가서 재검사를 받은 후 부모님을 뵈러 갈 생각이었다. 시간은 아마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자꾸만 불안한 마음이 들어 확신에 찬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어제 여진구에게 내가 임신한 사실을 말할 수가 없었고 지금도 강예지에게 여진구도 함께 갈 것이라고 확실하게 대답하지 못했다. 혹시라도 또 다른 일이 터질까 봐.

여진구와 여정은의 관계는 나에게 있어서는 시한폭탄이었다.

강예지는 내가 기분이 우울해 보이자 여정은의 사무실을 힐끗거리면서 말했다.

“여정은 일 말이야. 여진구가 다 해결했어?”

“거의.”

그녀는 나와 수다를 더 떨고 나서야 시름 놓고 마케팅팀으로 돌아갔다.

...

여정은이 정신을 차렸는지 어쨌는지 며칠 동안은 아무 일 없이 무사히 지냈다.

새해 한정판 디자인이 혹시라도 퇴짜맞을까 걱정했었는데 그것도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 낙하산이랑 대표님 대체 무슨 관계일까?”

“그걸 누가 알겠어.”

“전설 속의 대표 사모님이 아닌가 생각했었는데 요 며칠 보니까 대표님이랑 별로 왕래가 없더라고.”

“일부러 그런 것일 수도 있지. 입사할 때 봐봐. 대표님이 직접 소개했잖아.”

“그래도 사모님이라고는 단정할 수 없어. 내연녀일 수도 있어.”

...

직원 탕비실에 물을 뜨러 갔다가 직원들이 뒤에서 여정은과 여진구의 관계에 대해 수군거리는 걸 듣게 되었다. 고개를 돌리자 여정은이 이상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난 또 네가 엄청 우쭐거릴 줄 알았어.”

나는 미처 반응하지 못해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되레 몰래 수군거리던 직원들이 혼비백산하여 부랴부랴 도망쳤다.

눈 깜짝할 사이에 탕비실은 나와 여정은만 남게 되었다.

그녀는 입술을 닦으며 컵을 커피 머신 밑에 내려놓았다.

“넌 왜 항상 그렇게 차분하고 느긋해? 져도 화내는 걸 본 적이 없고 이겨도 기뻐하는 걸 본 적이 없어.”

“...”

여정은과 말할 기분이 아니었던 나는 레몬수 한잔을 따른 후 그냥 돌아섰다.

그때 여정은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난 네 이런 모습이 싫어. 네가 이긴 줄 알아? 남지연, 인생은 길고도 길어.”

여정은은 그제야 본색을 드러냈다. 그녀의 모습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오늘 혹시 약 안 먹었어요?”

“뭐?”

“정신과라도 좀 가보세요. 돈 아끼지 말고. 비록 우리 아버님이 돈은 많지 않지만 의붓딸한테 약 사줄 돈은 있을 거예요.”

나는 이 한마디를 남기고 자리를 비웠다. 그런데 내가 나가자마자 탕비실에서 쨍그랑하고 뭔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부쉈어? 약 먹긴 해야겠네.’

어느덧 퇴근 시간이 되자 여진구는 지하주차장에서 나를 기다렸다. 요 며칠 그는 정말 인터넷에 떠도는 대로 아내 바보가 되었다.

함께 출퇴근하고 매일 오후에는 진우혁더러 마실 것을 가져다주라고 했을 뿐만 아니라 가끔 선물도 주곤 했다.

“저녁에는 뭐 먹을래?”

내가 차에 타자마자 여진구가 물었다. 나는 그를 보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당신이 또 직접 하려고?”

며칠 내내 항상 여진구가 저녁상을 차렸다.

유선희는 여진구를 두려움의 눈빛으로 쳐다보곤 했다. 혹시라도 잘릴까 봐.

여진구는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주차장을 나간 후 물었다.

“벌써 질렸어?”

“아니. 그냥 궁금해서. 당신 예전에는 집에서 밥 별로 안 했잖아.”

“앞으로 집에 있을 때면 내가 직접 할 거야.”

“그래.”

나는 당연히 거절할 리가 없었다. 그가 요리를 누구에게서 배웠는지 알긴 했지만 여진구가 여정은과 선만 잘 그으면 나에게는 딱히 영향이 없었다.

나 대신 잘 가르쳤으니 화가 나도 여정은이 화날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후 여진구는 잠옷으로 갈아입고 곧장 주방으로 들어가 저녁 준비를 했다.

주황색의 석양이 통유리를 통해 여진구의 훤칠한 모습을 비춰주었다. 석양이 그의 차가운 기운을 따뜻하게 해주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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