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를 달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저녁에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마자 휴대 전화 알람이 울렸다. 나는 유산기 막는 약을 꺼내 입에 넣었다.그때 여진구가 마침 따뜻한 우유를 가지고 들어왔다.“왜 약 먹어?”“그냥 영양제야.”나는 그의 그윽한 두 눈을 보며 말했다.“다음 주 토요일에 나랑 같이 병원 가자. 검사 좀 받아보려고. 그리고 당신이랑 가고 싶은데 있어.”그때 병원 산부인과에 재검진받으러 가야 했다.여정은과 연락을 끊은 걸 보면 선택을 한 거나 다름없었다.하지만 그래도 나는 마음이 놓이질 않았
마침 부모님의 기일도 토요일이라 오전에 병원에 가서 재검사를 받은 후 부모님을 뵈러 갈 생각이었다. 시간은 아마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자꾸만 불안한 마음이 들어 확신에 찬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그뿐만이 아니라 어제 여진구에게 내가 임신한 사실을 말할 수가 없었고 지금도 강예지에게 여진구도 함께 갈 것이라고 확실하게 대답하지 못했다. 혹시라도 또 다른 일이 터질까 봐.여진구와 여정은의 관계는 나에게 있어서는 시한폭탄이었다.강예지는 내가 기분이 우울해 보이자 여정은의 사무실을 힐끗거리면서 말했
여진구는 길고 가느다란 손으로 아주 능숙하게 식자재를 다듬었다. 그 모습에 세월이 참 고즈넉하다는 기분이 들었다.나의 시선을 느꼈는지 여진구가 고개를 돌리고 가볍게 웃었다.“왜 날 그렇게 멍하니 보고 있어?”“그냥 보고 싶어서.”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자기 남편을 보는데 부끄러울 게 뭐가 있겠는가.게다가 하늘이 심혈을 들여서 빚은 조각 같은 얼굴인데 실컷 봐야지.그런데 그때 그의 바지 주머니에 넣었던 휴대 전화가 울렸다. 한창 물고기를 씻는 중이라 직접 받을 수가 없었다.“여보, 전화 받아줘.”“알았어.”나는 그의
모든 기대가 물거품처럼 사라졌고,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몸이 서늘했다.깊은 절망에 빠진 기분이 들었다.난 전화를 들고 오랫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뭔가 묻고 싶었지만 어차피 아무 의미 없을 것 같았다.그가 어디로 갔는지는 뻔했다.그에게 두 번은 없다고 명확히 얘기했었는데 말이다.그러니까 그는 선택을 했다.어떤 것을 취하고 어떤 것을 버려야 할지, 어떤 것이 더 이득이 될지 가늠할 줄 모르는 성인은 없었다.그는 여러 번의 고민 끝에 날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난 본능적으로 배를 어루만지며 이 아이를 낳아야 할지 고민했다
그런데 난 이 아이를 낳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했다.강예지는 내 눈물을 닦아준 뒤 날 안아줬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다정한 모습이었다.“왜 울고 그래? 아이는 멀쩡해. 지금도 네 배 속에 있어. 정말 착하고 강한 아이야.”“진짜?”“그럼, 당연하지. 믿기지 않으면 간호사님에게 물어보든가.”강예지가 말했다.조금 전 강예지는 간호사와 함께 들어왔다. 간호사는 못 말린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아이만 걱정하지 말고 본인도 걱정하셔야죠. 환자분은 머리를 다쳤어요. 이마의 긁힌 상처는 조금 전에
이번이 세 번째였다.난 세 번이나 그에게 임신 사실을 알려주려고 했지만 전부 그에게 거절당했다.‘아마 인연이 아니어서 그런 거겠지.’난 오히려 그에게 알리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혼하면 훨씬 깔끔할 테니 말이다.경운은 넓었기에 이혼한다면 그와 우연히 마주치는 건 아주 어려울 것이다.어쩌면 여진구는 평생 우리 사이에 아이가 있다는 걸 모를지도 몰랐다.강예지는 내 말에 동의했다.“아이도 그런 쓰레기 같은 아빠가 있는 걸 바라지 않을 거야. 여진구에게 알리지 않은 건 정확한 선택이야.”수액을 다 맞고
여진구가 나랑 싸울 리가.내겐 그럴 자격이 없었다.그 말을 들은 아주머니는 날 설득하고 싶어서 안달 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녀는 나와 여진구의 결혼 생활을 3년간 지켜보았기에 나와 여진구가 서로를 얼마나 깍듯이 대했는지 알고 있었다.난 여진구가 원래 그런 성격이라고 스스로를 속여왔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여진구와 여정은이 한때 그런 관계였으니 말이다.그래서 아주머니는 날 차마 설득하지 못했다.내가 마지막 캐리어를 닫았을 때, 마당에서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여진구가 돌아온 것이다.아주머니가
“뭐?”난 당황스러웠다.여진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육형준 말이야. 그날 밤 당신을 바래다줬었잖아? 육형준이 귀국하자마자 당신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만나러 갔었지.”조롱하는 것 같기도, 자조하는 것 같기도 한 말투였다.난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 난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내가 형준 선배를 좋아한다는 거야?”“아냐?”그는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내가 보기에 그것은 조롱이었다.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엄청난 분노가 나를 집어삼켰다. 나는 손을 들어 그의 뺨을 힘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