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예지가 갑자기 그 얘기를 꺼내자 나는 어리둥절해졌다.“무슨 밥?”그녀가 눈썹을 치켜올렸다.“여진구가 식당에서 밥 몇 번 사줬잖아. 잊었어?”“...”잊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여진구를 좋아하게 되었으니까.부모를 일찍 여윈 나는 고모네 집으로 갔다. 고모는 나에게 잘해주고 싶었지만 고모부와 사촌 동생의 눈치를 봐야 했다.중학교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대학교 때는 학비와 생활비를 내가 직접 벌었다. 가끔 갑자기 학교에 내야 할 돈이 생겨 다 내고 나면 생활비가 부족하기 일쑤였다.그리고 영양실조로 학교에서 쓰러진 적이
...난 알고 싶지 않았지만 바로 그 뜻을 알아들었다.강예지는 코웃음을 치며 평가했다.“그냥 그래.”“...”나는 놀란 토끼 눈으로 강예지를 쳐다보았다.“한 번 잔 적이 있는데 느낌이 좋지 않았어.”강예지는 하성주가 옆에 있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그녀의 말에 하성주가 펄쩍 뛰었다.“그건 내 처음이었단 말이야. 네가 뭘 안다고 그래?”“스톱, 스톱. 난 책임 못 져. 너 같은 바람둥이가 처음이라는 게 말이 돼? 그리고 네 처음은 얘나 얘한테 줬겠지.”강예지는 하성주의 양손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육형준은 뼛속까지 다정한 사람이었고 여진구는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었다. 지금 이 상황을 봐도 알 수 있었다. 육형준은 남의 사생활이라고 캐묻지 않았지만 여진구는 아예 관심이 없어서 묻지 않을 것이다. 여진구는 마음이라곤 없었다.술자리는 새벽까지 계속되었고 하성주는 자리를 옮겨 더 마시자고 아우성쳤다.강예지는 내가 임산부라 밤을 새워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집에 데려다주려 했다. 그러자 하성주가 말했다.“형준이더러 데려다주라고 하면 돼. 쟤도 밤새는 거 싫어해.”강예지는 흔쾌히 동의했다. 하지만 나는 강예지가 걱정되어 거절하려
동작 하나하나 내 뺨을 때리는 듯했고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이런 모습을 나는 여러 번 상상했었다. 분명 따뜻한 집 안이었지만 온몸이 차가워져 오싹할 정도였다.“지연이 일어났어?”여정은은 나를 보자마자 웃으며 인사했다.“와서 진구 솜씨 좀 맛봐. 무조건 맛있을 거야.”그러고는 안주인처럼 식탁 위에 요리를 내려놓았다.나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그녀를 지나쳐 여진구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정은 언니가 왜 우리 집에 있어?”여진구는 마지막 요리를 그릇에 담고 앞치마를 벗으면서 싸늘하게 말했다.“밥만 먹고 꺼질 거야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를 달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저녁에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마자 휴대 전화 알람이 울렸다. 나는 유산기 막는 약을 꺼내 입에 넣었다.그때 여진구가 마침 따뜻한 우유를 가지고 들어왔다.“왜 약 먹어?”“그냥 영양제야.”나는 그의 그윽한 두 눈을 보며 말했다.“다음 주 토요일에 나랑 같이 병원 가자. 검사 좀 받아보려고. 그리고 당신이랑 가고 싶은데 있어.”그때 병원 산부인과에 재검진받으러 가야 했다.여정은과 연락을 끊은 걸 보면 선택을 한 거나 다름없었다.하지만 그래도 나는 마음이 놓이질 않았
마침 부모님의 기일도 토요일이라 오전에 병원에 가서 재검사를 받은 후 부모님을 뵈러 갈 생각이었다. 시간은 아마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자꾸만 불안한 마음이 들어 확신에 찬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그뿐만이 아니라 어제 여진구에게 내가 임신한 사실을 말할 수가 없었고 지금도 강예지에게 여진구도 함께 갈 것이라고 확실하게 대답하지 못했다. 혹시라도 또 다른 일이 터질까 봐.여진구와 여정은의 관계는 나에게 있어서는 시한폭탄이었다.강예지는 내가 기분이 우울해 보이자 여정은의 사무실을 힐끗거리면서 말했
여진구는 길고 가느다란 손으로 아주 능숙하게 식자재를 다듬었다. 그 모습에 세월이 참 고즈넉하다는 기분이 들었다.나의 시선을 느꼈는지 여진구가 고개를 돌리고 가볍게 웃었다.“왜 날 그렇게 멍하니 보고 있어?”“그냥 보고 싶어서.”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자기 남편을 보는데 부끄러울 게 뭐가 있겠는가.게다가 하늘이 심혈을 들여서 빚은 조각 같은 얼굴인데 실컷 봐야지.그런데 그때 그의 바지 주머니에 넣었던 휴대 전화가 울렸다. 한창 물고기를 씻는 중이라 직접 받을 수가 없었다.“여보, 전화 받아줘.”“알았어.”나는 그의
모든 기대가 물거품처럼 사라졌고,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몸이 서늘했다.깊은 절망에 빠진 기분이 들었다.난 전화를 들고 오랫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뭔가 묻고 싶었지만 어차피 아무 의미 없을 것 같았다.그가 어디로 갔는지는 뻔했다.그에게 두 번은 없다고 명확히 얘기했었는데 말이다.그러니까 그는 선택을 했다.어떤 것을 취하고 어떤 것을 버려야 할지, 어떤 것이 더 이득이 될지 가늠할 줄 모르는 성인은 없었다.그는 여러 번의 고민 끝에 날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난 본능적으로 배를 어루만지며 이 아이를 낳아야 할지 고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