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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8 화

여진구는 잠깐 놀라는가 싶더니 뭐라 하진 않았다.

나는 입술을 적시고 말했다.

“그럼 신혼 첫날밤에는 무슨 이유로 만났어?”

그날 밤 베란다에서 밤새 기다렸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신혼 첫날밤에 결혼한 아내를 내팽개치고 집을 나간 여진구였다. 나는 큰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무척이나 걱정했었고 나한테 불만이 있는 건 아닌지 오만가지 생각을 하면서 그가 빨리 집에 들어오길 바랐었다.

그때 난 고작 23살이었고 어쩌다 보니 내가 오랫동안 짝사랑한 남자와 결혼하게 되었다.

그러니 결혼과 여진구에게 어찌 기대가 없겠는가?

그런데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다. 내가 그렇게 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남자가 다른 여자와 함께 있었다는 것을.

이 모든 건 정말 우스갯거리 같았다.

여진구는 더는 나에게 숨기지 않고 덤덤하게 말했다.

“그날 밤에 정은 누나가 차를 몰고 질주하다가 사고가 생겼거든. 경찰에서 데려가라고 전화 왔었어.”

‘어떻게 이런 우연이? 나랑 진구 씨가 결혼한 날에 사고가 났다고? 그것도 한밤중에?’

그런데 내 기억에 따르면 결혼 이틀 후에 가족 모임이 있어 한데 모였었는데 그때 여정은은 자리에 있었고 게다가 몸에 다친 상처도 없이 멀쩡했었다.

나는 유리창을 내리고 잠깐 침묵하다가 말했다.

“진구 씨, 혹시 당신 아직도 정은 언니를 좋아한다면 우리 그냥 좋게좋게 끝내.”

그 말에 여진구는 급브레이크를 밟아 길가에 차를 세우고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나에게 오랜만에 다른 생각이 들었는지 더는 차분하고 덤덤한 눈빛이 아니었다.

“난 그런 생각 한 적이 없어...”

웅웅.

문자 소리에 여진구는 하던 말을 멈췄다. 짜증 섞인 얼굴로 휴대 전화를 힐끗 보던 그때 표정이 갑자기 차가워지면서 망설임 없이 말했다.

“정은이한테 일이 생겼어. 아무래도 가봐야 할 것 같아.”

“...”

나는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자신의 감정을 애써 누르며 길가의 등에 비친 여진구를 쳐다보았다. 예전에는 그렇게 그리워하고 좋아했던 사람이지만 지금 이 순간 마음이 차갑게 식어버린 것 같았다.

“알았어.”

나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차에서 내렸다.

매번 화가 날 때마다 이혼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 오랫동안 좋아한 사람이라 쉽게 놓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 포기하기에는 아쉬울까 봐, 그리고 나중에 생각하면 후회할까 봐...

검은색 마이바흐가 멀리 떠난 후 나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복잡한 차들과 반짝이는 네온사인을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외로웠다.

“뭐 해?”

강예지가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발랄하고 힘이 넘쳤다.

초가을의 바람이 불어오니 저도 모르게 몸이 으스스했다. 나는 겉옷을 여미고 신호등을 지나갔다.

“길 중간에 있어.”

“여진구 그래도 기분이 좋은가 봐? 너랑 같이...”

“아니, 나 혼자야.”

나는 그녀의 말을 가차 없이 잘랐다.

“무슨 그런 개 같은 남자가 다 있어? 명절인데 네 옆에 없다고? 너 지금 어디야?”

강예지는 순간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내 일이라면 강예지는 상대가 누구든지 마구 욕했다. 강예지의 태도에 나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강운 뉴시티 쪽에 있어.”

“기다려. 지금 당장 데리러 갈게.”

강예지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20분도 채 지나지 않아 하얀색 아우디 Q3 한 대가 내 앞에 멈춰 섰다. 강예지가 유리창을 내리고 말했다.

“타.”

“말해봐. 무슨 일이야?”

차에 올라탄 후 강예지는 운전하면서 나를 계속 힐끗거렸다.

“혼자서 집까지 걸어갈 생각은 아니었지?”

강예지는 성격이 불같았지만 그 누구보다도 이성적이고 꼼꼼했다. 그녀에게 숨길 생각이 없었던 나는 일의 자초지종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내 얘기를 들은 강예지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그 여정은인지 뭔지 하는 여자가 여진구더러 이혼하라 했다고? 여진구는 와이프도 있으면서 왜 자꾸 다른 여자랑 연락한대? 지연이 넌 어쩔 생각이야?”

강예지가 물었다.

“아직 결정 못 했어.”

내가 고개를 내젓자 강예지는 손가락으로 내 머리를 쿡 찔렀다.

“너도 참. 평소에는 그렇게 똑똑하던 애가 왜 여진구 일이라면 이렇게 바보가 돼? 밥 몇 끼에 인생을 걸지 않나. 여진구는 진작 다 잊었는데 너만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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