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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7 화

여진구는 여정은을 내팽개치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조금 전의 날카롭고 차갑던 목소리와는 달리 한없이 다정했다.

“다 들었어?”

“응.”

나는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말했다. 여진구도 뭐라 하지 않고 도우미에게서 겉옷을 받아 나의 어깨에 걸쳐주고는 안으로 걸어가며 자연스럽게 말했다.

“바람이 차니까 들어가자.”

마치 내가 방금 들은 얘기들이 평범하기 그지없는 얘기인 듯 아무렇지 않은 모습이었다.

“진구야.”

여정은의 고집스러운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여진구!”

하지만 여진구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 후 여진구는 정신이 딴 데 팔린 사람처럼 계속 휴대 전화만 들여다보았다. 드디어 여승철의 취침 시간인 9시가 되었다.

“이젠 일과 가정 모두 있는 사람이니까 분수를 알아야 해.”

여승철은 우리를 마당까지 배웅하면서 여진구에게 진지하게 경고했다.

“지연이한테 잘해. 지연이 친정이 없다고 함부로 괴롭혀도 되는 사람이 아니야.”

나의 눈시울이 저도 모르게 붉어졌다. 여진구는 옅은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절대 괴롭히지 않을게요. 그리고 다른 사람도 괴롭히지 못하게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이 녀석아, 무슨 일 있으면 할아버지한테 말해. 할아버지가 도와줄게.”

여승철은 아주 다정하게 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네. 시간 나면 또 할아버지 뵈러 올게요. 얼른 들어가서 일찍 쉬세요.”

집으로 돌아가는 길, 조수석에 앉은 나는 몸이 나른해졌다. 임신해서 그런지 최근 들어 잠이 부쩍 많아졌다. 그런데 오늘따라 몸은 피곤한데 정신이 맑아서 잠이 전혀 오질 않았다.

원래는 집에 가서 해명을 들으려 했지만 너무도 괴로워 참다못해 최대한 이성적으로 물었다.

“당신이랑 정은 언니 대체 무슨 사이야?”

그냥 일반적인 첫사랑일까? 아니면 잊지 못하는 그런 첫사랑일까?

여진구는 차 속도를 줄이면서 여유롭게 말했다.

“사실 우리 만날 뻔했어.”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목구멍에 물을 잔뜩 흡수한 스펀지가 막힌 것처럼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목소리를 내었다.

“대학교 때야?”

잊었던 기억의 조각들이 다시 한꺼번에 떠올랐다.

여진구는 나의 대학교 선배였고 학교에서도 참 유명한 사람이었다.

조각 같이 잘생긴 얼굴에 재이 그룹 후계자일 뿐만 아니라 능력도 뛰어나고 귀티가 흘렀다. 정말 그를 좋아하지 않는 여학생이 없을 정도였다.

여진구의 가방 안에는 항상 여학생들이 준 연애편지가 있었다.

그런데 내가 고백하기도 전에 여진구에게 좋아하는 여학생이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 여학생이 바로 여정은이었다.

“당신 그거 어떻게 알아?”

여진구는 놀란 눈으로 나를 힐끗 보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의 옆모습을 보면서 씁쓸하게 말했다.

“설마 잊었어? 나도 경운 대학교 다녔어.”

“아, 맞다.”

여진구의 표정은 여전히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미안. 하도 오래전의 일이라.”

오래전의 일이라 잊은 걸까? 아니면 아예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일까?

내가 입을 열려던 그때 여진구의 휴대 전화가 진동했다. 그는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뚝 끊어버렸다.

그런데 그 후에도 여러 번이나 더 울렸다. 그가 전화 받을 때까지 걸 기세였다.

여진구는 다시 한번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러고는 차갑고도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설명했다.

“미희 이모랑 아버지가 너무 오냐오냐해서 이래.”

나는 웃으면서 휴대 전화를 들어 여정은의 번호를 삭제하고 차단한 후 다시 내려놓았다.

“인제 조용해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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