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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6 화

나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온몸에 흐르는 피가 굳어버리는 것 같았다. 심지어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닌지 의심마저 들었다.

가끔 두 사람 사이에 진짜 뭔가가 있는 건 아닌지 상상하긴 했었다. 하지만 매번 계속 부정했다. 비록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다고 해도 여씨 가문 도련님과 아가씨인 두 사람은 명의상으로는 그래도 남매였고 게다가 각자 결혼까지 한 상태였다.

여진구처럼 모든 걸 다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절대 이런 황당한 일을 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 멀지 않은 곳에서 여진구는 여정은을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조롱과 싸늘함이 섞인 목소리가 똑똑하게 들려왔다.

“날 위해서 이혼했다고? 그때 날 버리고 다른 남자랑 결혼한 건 너야. 그런데 인제 와서 무슨 자격으로 이런 요구를 해?”

“그건...”

연이어 쏟아진 질문에 여정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두 손으로 여진구의 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내가 잘못했어, 진구야. 한 번만 용서해 주면 안 돼? 딱 한 번만. 그리고 그때는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

“난 이미 결혼했어.”

“그럼 이혼하면 되잖아.”

고집스러운 여정은의 얼굴에 속상함이 가득했다. 여진구가 부정적인 대답을 한다면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았다. 나는 여정은이 이 말을 대놓고 할 줄은 몰랐다. 남의 가정에 뻔뻔하게 끼어들고서는 부끄러운 줄도 몰랐다.

여진구는 화난 나머지 웃음을 터트리다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너한테는 결혼이 애들 장난이겠지만 나한테는 아니야.”

그러고는 그냥 돌아서려 했다. 그런데 여정은은 그의 옷을 잡고 절대 놓지 않으려 했다.

사실 여진구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나는 알고 있었다. 정말 돌아설 생각이라면 뿌리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놀란 눈으로 그 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보았다. 그러면서 속으로 여진구가 정신을 차리기를, 이번에는 여정은과 선을 긋기를 바랐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결혼도 희망이 생기니까.

결국 여진구는 내가 바라는 대로 했다. 여진구가 냉랭하게 한마디를 던졌다.

“다들 성인인데 그런 어리석은 말은 그만해.”

일이 이 정도 되면 끝낼 때도 되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더 지켜볼 마음도 사라졌다.

“지연이를 사랑해? 진구야, 내 눈 보고 대답해. 사랑하냐고!”

여정은은 마치 사탕을 달라고 떼를 쓰는 세 살짜리 애처럼 목적에 달성하기 전까지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기세였다. 그녀는 여진구의 팔을 잡고 계속 매달렸다.

나는 돌아선 발걸음을 멈추었고 또다시 긴장하기 시작했다. 아직 돌아서기 전에 여진구의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랑 상관없어.”

“그럼 이젠 날 사랑하지 않는 거야? 이건 나랑 상관이 있겠지.”

여정은이 캐물었다. 이렇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여정은의 용기가 참 대단했다.

얼마 후 나는 알게 되었다. 이건 용기가 아니라 믿는 데가 있어 두려움이 없는 것이라는 것을.

그녀가 이렇게 당당할 수 있었던 건 편애 때문이었다. 그리고 난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었다.

훤칠한 키의 여진구는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렸고 표정은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그가 대답하지 않자 여정은도 놓아주지 않았다. 정말 비련의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이 따로 없었다.

여진구가 침묵하는 동안 나는 답답해서 미칠 것만 같았고 숨을 쉬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작은사모님, 봄에 입으셨던 겉옷 가져왔어요. 쌀쌀하니까 얼른 입어요. 이러다 감기 걸리겠어요.”

도우미가 겉옷을 들고 나왔다. 거리가 좀 멀어 목소리도 높았다.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여진구가 그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나는 남의 비밀을 엿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가 이내 다시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왜냐하면 설명해야 하는 사람은 여진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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