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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5 화

여진구가 날 기다리는 걸 뻔히 알면서도 차를 얻어탔다. 그것도 조수석에.

마음 같아서는 홱 돌아서고 싶었지만 이성의 끈을 붙잡고 여진구에게 손을 내밀었다.

“차 키.”

여진구는 아무 말 없이 차 키를 나에게 건넸다.

나는 곧장 운전석에 올라탄 후 여정은의 놀란 얼굴을 보며 히죽 웃었다.

“뭐라 하긴요. 언니도 진구 씨 누나인데 차를 얻어타는 게 이상할 건 없죠.”

그러고는 고개를 내밀어 밖에 있는 여진구를 쳐다보았다.

“빨리 타. 할아버지 기다리시겠다.”

본가로 가는 길 내내 차 안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여정은은 여진구와 얘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계속 고개를 돌리는 게 불편하여 그냥 포기했다.

내가 불편해하고 있다는 걸 느꼈는지 여진구는 갑자기 음료수 뚜껑을 따서 나에게 건넸다.

“망고 주스야. 당신이 좋아하는 거.”

나는 한 모금 마신 후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돌려주었다.

“너무 달아. 당신이 마셔.”

요즘은 신 음식이 자꾸 당겼다. 예전에는 입맛에 맞지 않는 거라도 아까워서 억지로 먹었었는데 지금은 한 입도 먹을 수가 없었다.

“알았어.”

여진구는 다른 말 없이 그냥 받았다.

“먹던 걸 진구한테 주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입안에 세균이 얼마나 많은데. 헬리코박터균 같은 건 쉽게 옮는다고.”

여정은이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녀의 말에 나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럼 우리 저녁에 한 이불 덮고 같이 자는데 그건 더 위험하겠네요?”

“...”

다들 성인인데 내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여정은은 모를 리가 없었다.

“결혼한 지 꽤 됐는데도 둘이 아주 깨가 쏟아지나 봐?”

“질투해?”

여진구는 차갑게 받아쳤다.

가끔 여진구의 태도를 보면 여정은을 싫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예를 들어 바로 지금.

두 사람은 이런 대화 방식에 적응한 듯했다. 여정은이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

“질투한다, 그래. 네가 뭔데 신경 써?”

“누가 신경 쓴대?”

“그래, 그래. 됐어”

여정은은 입을 삐죽거렸지만 눈은 웃고 있었다.

“신혼 첫날밤에 나한테 일이 생겼다니까 마누라도 내팽개치고 내 옆에 밤새 있어 준 사람이 누구더라?”

“여정은!”

여진구의 표정이 급변하더니 소리를 질렀다.

나는 깜짝 놀라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차는 횡단보도를 조금 지나 겨우 멈춰 섰다.

백미러를 통하여 놀란 얼굴로 여진구의 얼굴을 보았다. 가슴이 칼로 쿡쿡 찌르듯 아팠고 순간 울컥하여 눈시울이 붉어졌다.

여진구는 내 앞에서 긴장한 적이 거의 없었다.

“지연 씨...”

“그날 밤에 정은 언니한테 갔었어요?”

말하고 나서야 내 목소리에 씁쓸함이 담겨 있다는 걸 느꼈다. 울컥한 마음에 눈물이 앞을 가렸다.

지금 여진구와의 사이가 좋아지긴 했지만 첫날밤에 누군가에게서 걸려온 전화 때문에 나를 버리고 밤새 들어오지 않았던 일이 아직도 나에게는 가시로 남아있었다.

당시 우리 둘의 결혼은 여진구의 할아버지인 여승철이 정한 것이었다.

신혼 초기 나와 여진구는 거의 남처럼 지냈고 그날 밤 어디 갔었는지 물어볼 기회조차 없었다. 그렇게 이 일은 그냥 방치하게 되었다.

하지만 여정은은 아무런 조짐도 없이 내 마음속의 가시를 뽑았다가 더욱 깊게 찔러버렸다.

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나 자신이 우스갯거리가 된 것만 같았다.

여정은은 당황해하며 입을 막더니 여진구를 쳐다보았다.

“이 일 지연이한테 얘기 안 했어? 내가 괜한 소리를 했네.”

두 사람 사이가 별로 안 좋아서 이런 것까지 숨기나 하는 듯한 말투였다.

“여정은, 머리가 어떻게 됐어?”

여진구의 표정이 무서울 정도로 어두워졌다. 그는 진한 이목구비에 각진 턱을 갖고 있었다. 하여 표정이 싸늘해질 때면 등골이 오싹할 정도였다. 이 또한 그가 어린 나이에 재이 그룹을 이끌 수 있는 원인 중 하나였다.

“알았어, 알았어, 미안해. 네가 지연이한테 이것도 얘기 안 할 줄은 몰랐지.”

여정은이 다급하게 사과하긴 했지만 말투는 억울하기만 했다. 여진구가 절대 그녀에게 뭐라 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는 듯했다.

익숙한 휴대 전화 벨 소리가 갑자기 울렸다.

“이리 줘.”

나는 휴대 전화를 받고 발신자를 확인한 후 전화를 받았다.

“할아버지.”

“지연아, 거의 도착해?”

사실 나는 진작 차에서 내리고 싶었다. 그런데 여승철의 친절한 목소리를 듣고 나니 마음이 또 약해졌다.

“거의 도착해요. 할아버지, 오늘 바람이 세니까 마당에서 기다리지 마세요.”

남들은 여승철이 고지식하고 제멋대로라고 했다. 나의 할아버지가 살아있었더라면 여승철만큼 나한테 잘해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가을이 되니 낮이 짧아지고 밤이 길어졌다.

차가 여씨 본가에 도착했을 때 벌써 어둠이 내려앉았다. 본가에 들어가니 추석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나는 차를 세우고 가방을 챙긴 후 혼자 안으로 들어갔다. 전화로 할아버지에게 마당에서 기다리지 말라고 했지만 할아버지는 또 밖에 나와 있었다.

통화할 때는 그래도 나의 기분을 숨길 수 있었지만 여승철 앞에서는 단번에 들키고 말았다.

“저 녀석이 널 괴롭혔어?”

여승철은 나를 대신하여 여진구를 혼내기라도 할 기세였다.

“아니에요.”

할아버지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 할아버지의 팔짱을 끼고 들어갔다.

“바람이 세던데 머리 안 아프세요?”

여진구 대신 넘어가려 했지만 할아버지는 여진구와 여정은이 나란히 차에서 내리는 걸 본 순간 표정이 확 어두워졌다.

하지만 둘째 작은아버지네 가족도 옆에 있어 할아버지는 화를 내진 않았다. 할아버지와 달리 나의 시아버지 여범석은 여정은이 돌아온 걸 보고 무척이나 기뻐했다.

“진구야, 정은이가 회사에 출근한다며? 잘 챙겨줘. 그래야 미희 이모한테 미안하지 않지.”

“...”

식탁 앞이라 나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 열심히 밥만 먹었다. 여진구는 내 눈치를 살피면서 덤덤하게 말했다.

“네, 제가 알아서 할게요.”

“지연아, 너도 진구랑 같이 정은이 많이 챙겨줘.”

여범석은 또 콕 집어서 나에게 말했다. 여정은이 회사에서 혹시라도 괴롭힘을 당할까 걱정이 아주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는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는 덤덤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정은 언니 지금 제 상사라서 언니가 절 더 챙겨줘야 해요.”

나의 한마디에 식탁 앞에 앉은 사람들의 표정이 각기 달랐다.

“지연아, 내가 말했었잖아. 네가 싫다고 하면 본부장 자리 언제든지 양보할 수 있다고.”

여정은은 마음이 넓은 척, 철이 든 척했다. 그런 그녀와 비교하면 내가 막무가내인 사람 같았다.

할아버지는 쾅 하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화가 난 얼굴로 무섭게 말했다.

“양보? 그 자리 원래 지연이 거였어. 넌 네 주제도 모르니? 진구 저 녀석이 보답한답시고 그 자리를 줬는데 그걸 덥석 받아?”

“할아버지...”

“할아버지라 부르지 마. 나 감당 못 해.”

둘째 숙모에게서 들었는데 여승철은 단 한 번도 여정은을 손녀라 인정한 적이 없다고 했다.

당시 여정은의 어머니가 이 집안에 들어올 때도 엄청 심하게 반대했었지만 여범석은 기어코 그 여자와 결혼했다.

하여 여씨 가문의 재산은 늘 여범석과 아무 상관이 없었고 매년 그저 생활비로 10억만 받을 뿐 다른 건 아무것도 없었다.

여범석이 다급하게 말했다.

“아버지, 정은이 지금 의지할 데도 없는데 왜 이렇게까지...”

“그 입 다물어!”

할아버지가 큰소리로 호통쳤다.

예전부터 할아버지가 여정은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오늘처럼 면전에 대고 난처하게 한 건 처음이었다.

여정은의 표정이 백지장처럼 새하얘지더니 가방을 들고 당황해하며 일어섰다.

“오늘 전 여기 오지 말았어야 했네요. 괜히 와서 여러분 기분만 잡치게.”

그러고는 울면서 뛰쳐나갔다. 그때 여범석이 여진구에게 눈치를 주었다.

“가서 달래지 않고 뭐 해? 이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애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

나는 갑자기 여진구가 왜 여정은이 원하는 거면 뭐든지 다 해주는지 알 것 같았다.

한 사람이 맨날 미안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세뇌한다면 그 누가 버틸 수 있겠는가?

여승철은 말리고 싶었지만 여진구는 이미 뒤따라 나갔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소리 없는 한숨을 쉬었다.

한참이 지나도 두 사람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여진구의 아내인 나도 눈치 있게 일어날 때가 되었다.

“할아버지, 진구 씨한테 가볼게요.”

“그래.”

여승철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도우미에게 말했다.

“밤공기가 쌀쌀하니까 지연이한테 겉옷 좀 갖다 줘.”

밖으로 나가 보니 마당에 세웠던 마이바흐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어 마당 밖으로 가보려 했다. 그런데 나가자마자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뭐 하자는 거야? 아까 차에서 그런 소리는 왜 한 건데?”

여진구는 날카롭게 몰아붙였다. 그의 이런 모습을 일할 때만 본 적이 있었다. 여정은은 엉엉 울면서 여진구를 보며 소리를 질렀다.

“내 탓을 한다, 이거야? 질투 나는 거 어떡해? 질투 나서 도저히 못 참겠어.”

“여정은, 지연 씨는 내 와이프야. 네가 뭔데 질투를 해?”

여진구는 차갑게 웃었고 말투도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미안해...”

여정은은 어깨까지 부들부들 떨며 울었다.

“나 이혼했어. 진구야, 나 너 때문에 이혼한 거 너도 알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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