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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4 화

여진구는 한 치의 망설임과 고민도 없이 흔쾌히 동의했다.

나는 그의 목을 잡고 입가에 미소를 띤 채 그윽하게 쳐다보았다.

“정말 10%나 주려고? 아깝지 않아?”

그의 두 눈은 한없이 맑고 투명했다.

“남도 아니고 당신 주는 건데, 뭐.”

그 순간 돈은 정말 충성을 표하는 좋은 물건이라는 걸 깨달았다. 온 점심 우울했던 기분이 순식간에 풀리는 것 같았다.

나는 뭔가를 떠보듯 웃으며 물었다.

“그럼 정은 언니는? 언니한테는 줄 거야?”

여진구는 잠깐 침묵하다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정말?”

“응. 내가 누나한테 줄 수 있는 건 그 본부장 자리뿐이야.”

여진구는 나를 품에 끌어안았다. 차가우면서도 확고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주식 양도 계약서는 오후에 우혁이더러 가져다주라고 할게. 이젠 당신도 재이 그룹 주주야. 다른 사람들은 다 당신을 위해 일하는 거고.”

“그럼 당신은?”

기분이 좋아져 웃는 얼굴로 계속 물었다. 그는 이해하지 못한 듯 눈썹을 치켜세웠다.

“뭐?”

“당신도 날 위해 일하는 거야?”

“그럼.”

여진구는 웃으면서 내 머리를 어루만지다가 귓가에 대고 낯 뜨거운 한마디를 했다.

“침대 위에서든 침대 밖에서든 항상 당신을 위해 일하지.”

...

나는 화끈 달아오른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여진구는 늘 이랬다. 겉으로 보기에는 진지하고 도도했지만 가끔 사람을 부끄럽게 하는 말을 툭툭 내뱉곤 했다.

내 기분이 풀린 것 같자 여진구는 시간을 확인했다.

“회의하러 가야겠네. 오늘 추석이라 저녁에 본가에 가서 할아버지랑 같이 밥 먹자. 주차장에서 기다릴게.”

“알았어.”

나는 당연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고 이젠 결정을 내릴 때도 되었다.

“여보, 저녁에 서프라이즈 해줄게.”

며칠 전 목걸이 사건 때문에 임신한 사실을 알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었다. 여진구가 여정은에게 다른 마음이 없으니 더는 숨길 필요가 없었다.

“무슨 서프라이즈?”

호기심이 많은 여진구는 지금 꼭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기세였다.

“퇴근하고 알려줄게. 기다려.”

나는 발끝을 들어 그의 입술에 뽀뽀한 후 더는 쳐다보지 않았다.

여진구가 사무실을 나선 다음 나는 설계도에만 몰두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노크 소리에 나도 고개를 들었다.

“들어오세요.”

“지연아, 내가 방해한 건 아니지?”

여정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방해되긴 했어요.”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설계도에 집중할 때 누가 방해하는 걸 가장 싫어했다.

여정은은 잠깐 멋쩍어하다가 염치 불고하고 말했다.

“미안,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그냥 디자인팀 본부장 자리가 원래는 네 거였는데 내가 나도 모르게 네 자리를 빼앗았다는 소리를 듣고 사과하려고 왔어.”

“괜찮아요.”

여진구가 이미 보상을 줘서 괜찮았다.

주식 10%라면 디자인팀 본부장 자리에서 평생 일해도 그렇게 많은 돈을 벌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무 개의치 않아 했는지 오히려 여정은이 놀란 눈치였다.

“정말 괜찮아? 안 괜찮으면 말해도 돼. 난 다른 팀에 가도 되니까. 이것 때문에 네가 기분이 나쁘지 않았으면 좋겠어.”

여정은은 자연스럽게 소파에 가서 앉았다.

“정은 언니, 저 진짜 기분 나쁘지 않아요. 계속 디자인팀에 있어요.”

‘그냥 사고만 치지 말고 가만히 있어. 주식을 받자마자 얼마 지나지 않아 언니 때문에 회사가 망하는 일 없게.’

적어도 여정은이 디자인팀에 있으면 사고 치는 건 막을 수 있었다.

“그럼 다행이고. 우리 다 가족인데 불만 있으면 나한테 말해.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여정은은 마음을 잘 헤아리는 언니처럼 말했다. 그러고는 긴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면서 말을 이었다.

“아무튼 진구는 회사에서 아무 자리나 고르라고 했어. 사실 오랫동안 일을 안 해서 어느 팀에 가든 다 똑같거든.”

내가 너무 예민한 건지 아니면 뭔지, 그 한마디가 내 귀에 들리는 순간 마음이 찝찝했다. 마치 여진구와 가장 친한 사람은 그녀이고 재이 그룹의 사모님도 그녀라는 것처럼 들렸다.

“남 차장님.”

진우혁은 문이 열려있는 걸 보고 예의상 노크한 후 다가와 계약서를 건넸다.

“총 두 부인데 확인해 보세요. 대표님은 이미 사인하셨고 차장님이 사인하고 한 부 남기시면 됩니다.”

여진구는 정말 한다면 하는 성격이었다.

“알았어요.”

나는 계약서를 간단히 훑어보고는 사인한 후 진우혁에게 건네고 예의 바르게 웃었다.

“수고해 주세요.”

“그거 혹시 주식 양도 계약서예요?”

여정은은 계약서 첫 장을 힐끗거렸다. 조금 전까지 고상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남들에게 들키지 않게 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

진우혁은 그제야 여정은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랐다.

“본부장님도 여기 계셨어요? 그럼 계속 얘기들 나누세요. 전 대표님께 올라가 보겠습니다.”

여정은의 질문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부랴부랴 도망쳤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물었다.

“진구가 주식을 줬어?”

“줬든 안 줬든 이런 일은 본부장님께 보고할 이유가 없지 않나요?”

목걸이 사건 이후로 여정은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사뭇 달라졌다. 아무튼 예전처럼 거리낌 없이 대하지 못했다.

“지연아, 혹시 나한테 불만 있어?”

여정은은 달리 방법이 없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걸이 때문인 건지 아니면 본부장 자리 때문에 나한테 반감이 생긴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것만은 믿어줘. 난 너한테서 뭔가를 빼앗은 적이 없어.”

그녀의 당당한 태도에 난 오히려 마음이 복잡했다.

...

초저녁, 나는 이틀 전에 케이크에 넣었던 임신 검사서를 꺼내서 가방에 넣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면 여진구에게 알려줄 생각이었다.

당신 곧 아빠가 된다고, 당신과 나 사이에 아이가 생겼다고...

여진구의 반응과 배 속에서 자라고 있는 작은 생명 생각에 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한시라도 빨리 그와 이 기쁨을 나누고 싶었다.

엘리베이터는 곧장 지하주차장으로 향했다. 검은색 마이바흐를 한눈에 바로 찾아냈다.

훤칠한 키의 여진구가 차에 기댄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 쿨톤의 향수 냄새가 나의 코를 스쳤다.

“여보, 오래 기다렸어?”

“아니.”

하지만 그는 예전처럼 날 안지 않았고 되레 밀어내는 것 같았다.

“일단 차에 타.”

“잠깐. 서프라이즈가 뭔지부터 얘기해줄게.”

나는 여진구를 잡았다.

“뭔데?”

왠지 사무실에 있을 때처럼 그렇게 기대하는 것 같지 않았고 기분도 어딘가 우울해 보였다. 그 모습에 나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지만 깊게 생각하진 않고 그의 검은 두 눈을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진구 씨 곧...”

“진구야, 왜 아직도 안 타?”

조수석의 유리창이 갑자기 내려가더니 누군가의 다그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돌린 순간 차 안에 앉아있는 여정은과 딱 마주쳤다.

나는 경악한 얼굴로 여진구를 보며 해명을 바랐다.

그런데 여정은이 먼저 말했다.

“지연아, 내 차 정비 맡겼거든. 어차피 다 본가로 가는데 염치 무릅쓰고 진구 차 얻어탔어. 이런 작은 일로 뭐라 할 건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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